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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문제1 - 피부의 상태로 진단
레 13:1-17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9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10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11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12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13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14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15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16 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17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레 13:1-17 / [피부병이 생겼을 경우]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어루러기가 생겼으면 혹시 문둥병일지도 모르니 제사장 아론이나 제사장인 그의 자손 가운데 한사람에게 데리고 가거라. 3) 그러면 제사장은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라. 환부에 난 털이 희게 변해 있고, 주변의 살갗보다 그 환부가 더 우묵하게 패여 있으면 문둥병 때문에 생긴 환부임에 틀림없다. 제사장은 그 사람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 본 뒤에 그 사람이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4) 그렇지만 그 사람의 환부가 곪아 희게 보이기는 하여도 그 부위가 우묵하게 패이지도 않았고 그 부위에 난 털도 하얗게 변하지도 않았으면 그 사람을 이레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 5) 그런 다음 이레 뒤에 그 사람의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고서 환부가 더 이상 번지지 않았거든 그 사람을 다시 이레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 6) 이렇게 두 이레가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의 환부를 다시 살펴본 다음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고 아물 기세가 보이거든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깨끗하다고 선언하여라. 그것은 단순한 부스럼이다. 그 사람은 입고 있던 옷을 빨아 입어라. 그러면 깨끗해질 것이다. 7) 하지만 제사장이 환부를 살펴보고 나서 깨끗하다고 판결을 내렸는데도 환부가 낫지 않고 더 퍼졌으면 그 사람을 다시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서 피부병인지 아닌지를 판결받아야 한다. 8) 제사장은 그 사람을 다시 살펴보아 환부가 번졌으면 부정하다고 판결을 내려라. 그 사람의 살갗에 번진 병은 문둥병이다. 9) [심한 문둥병] 어떤 사람이든 문둥병에 걸리면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거라. 10) 제사장은 그 사람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라. 그의 살갗이 희끗희끗하게 부르트고 환부의 털이 희게 변해 있을 뿐만 아니라 부르튼 곳에 불그스레하게 생살이 돋아있으면 11) 그것은 살갗에 이미 오랫동안 퍼져 있는 심한 문둥병이다. 제사장은 그를 부정한 자라고 선언해야 한다. 제사장이 그 사람을 부정하다고 선언하였으므로 격리시킬 필요는 없다. 12) 제사장이 여기저기 살펴보아 문둥병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번졌으면 13) 다시 말해서 문둥병이 온몸을 뒤덮었으면 제사장은 그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여라. 그의 온몸이 희게 되었으니 그는 이미 나은 깨끗한 사람이다. 14) 하지만 언제라도 다시 몸에 종기가 생기면 그 사람은 부정하다. 15) 제사장이 그의 몸을 잘 살펴보아 살갗에 종기가 생겼으면 그를 부정하다고 선언하여라. 이 종기는 그 사람의 몸에 문둥병이 번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16) 그러다가 그 사람의 몸에 생긴 종기가 희게 변할 때에 그는 제사장에게 가야 한다. 17) 제사장이 보고 그 사람의 몸에 생긴 종기가 희게 변해 있으면 그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여라. 희게 변해 있는 그 종기는 더 이상 번져 나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이미 나은 깨끗한 사람이다.
나병이라고 하는 악성전염병이 공동체 안에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제사장은 환자를 진찰하고 정함과 부정함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레 동안 관찰하다(1-8) 모세를 중심으로 출애굽한 공동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전염병이었습니다. 특히 제사장의 큰 책임 중 하나는 영육간 공동체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사람의 피부에 생기는 나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본문에는 '나병'이라고 했습니다만 각주에 보면 '악성피부병'이라고 했습니다. 악성피부병은 전염되기 때문에 자칫 공동체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런 증상이 있는 사람은 제사장에게로 데려가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 제사장은 종교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의료적인 영역까지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종교와 의료 부분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면 공동체 전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기에 신중하게 판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피부에 문제가 생겼지만 나병일 수도 있고 단순한 피부병일수도 있습니다.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이레 동안 관찰하는 겁니다. 신중한 관찰을 요했습니다.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됩니다.(참고 롬 5:12)
정함과 부정함(9-17) 9-13절까지는 부정하지 않은 경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나병으로 의심되는 피부병이 생겼지만 그 병이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피부병(마른버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단지 피부가 하얗게 탈색되었을 뿐 전염성이 있는 악성피부병은 아닌 겁니다. 이 때 제사장은 부정하지 않다고 선언함으로써 다른 이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반면 14-17절까지는 부정한 경우를 말합니다. 위에 기록한 대로 신중하게 진찰했음에도 환부의 생살이 올라오면 부정합니다. 그런데 다시 관찰하여 생살이 희어지면 제사장은 이전과 달리 정하다 판단해야 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환부의 크기에 따라서 정함과 부정함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작더라도 심각하고 위험하면 격리해야 합니다. 작은 죄라서 위험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반면 '다시'라는 말이 주는 의미처럼 부정했다가 다시 정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고 환자가 치유되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사모해야 합니다.(참고 마 8:3)
적용: 악성피부병이라고 선언하기 전에 세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나 누군가를 문제있는 사람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았습니까? 섣부른 판단의 위험성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어느 유명한 이종격투기 선수 한 명이 방송에 출연하여 말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명이 달려들어도 나를 바닥에 쓰러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의 대결을 해보았습니다. 그에게 10명의 일반인이 우르르 달려들었고 그는 사람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맹자는 '득도다조'(得道多助)라는 말을 했는데 '도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심(人心)을 얻어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 설 교 >
문둥병 교만병
레 13:1-8 / 배영진 목사
오늘은 문둥병, 교만병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요즘 레위기를 묵상하는 중인데 오늘 이 말씀은 해석이 많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악성 피부병이라고 말했는데, 개역성경은 이걸 나병이라고 합니다. 나병이 문둥병이거든요. 그런데 학자들에 따르면 오늘 레위기에 나온 병은 오늘날 한센병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그냥 이건 피부병의 일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악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요? 악성피부병이라고 한 이유는 이 병이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이 악성피부병의 특성은 두가지, 부패성과 전염성! 이게 새하얀 곰팡이균입니다. 이게 번식력이 강해요. 염증이 있어서 감염성이 강해요. 그래서 악성 피부병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13장 14장, 두장에 걸쳐 이스라엘에게 문둥병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십니다. 발병할 때의 증상, 문둥병의 처리, 문둥병의 치유, 이 모든 과정을 매우 자세하게 알려주십니다. 너희 몸, 너희 옷, 너희 건물벽에 이 문둥이 곰팡이가 생길 수가 있다. 이걸 살펴보라. 이걸 그냥 방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부패성과 전염성 때문입니다. 이게 증상이 시작되면 그 사람 몸으로 염증이 들어가 온몸이 썩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또 그냥 내버려두고 방치하면 한 사람의 문둥병이 공동체 전체에 감염을 시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대부분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을 교만병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읽을 때, 구약도 그렇고, 신약 복음서도 그렇습니다만 그가 문둥병에 걸렸더라, 또는 어떤 나병환자가 있었더라, 이런 기록이 나오면, 아~ 이 사람이 하나님앞에 마음을 높이는 교만병 증상이 시작된 것이구나 생각하면 맞습니다. 그래서, 이게 단순한 몸의 병 차원을 넘어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대한 지침을 보시면 어떠한 경우에도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한 진단을 받습니다. 문둥병 증상인가 아닌가 제사장이 진단하라고 되어있습니다. 포인트가 뭡니까? 영적인 질병이니까 그냥 방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드러내고 밝혀내라. 그리고 격리시키라. 그래서 회복과 완치의 과정을 밟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뭘까요? 너희는 내 거룩한 백성이다. 너희 거룩함이 오염되지 않게, 너희 영혼이 혹 부패되고 있지 않은지, 정신을 차리고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그 사람 전체가 썩어버리고, 그대로 놔두면, 그로 인해 공동체가 치명적으로 영향받는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신앙생활에 혹 이러한 교만병이 발병하지 않는지 늘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로 인하여 공동체에 퍼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서 막으라는 것입니다.
첫째, 문둥병 교만병; 내 속에 교만의 증상이 있는가.
1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 누구든지, 피부에 부스럼 뾰루지가 얼룩이 생기면, 이러면 다 문둥병이다 그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살갗이 악성피부병이 시작되면, 이것입니다. 이것을 뭐라고 했나요? 감염된 것 같이 보이면! 사람들은 그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라. 이것은 제사장에게 데려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라는 뜻입니다. 3절 제사장이 그를 살펴보아서 하얗게 되거나 우묵하게 들어갔으면 문둥병이다! 문둥병이라고 판단할만한 증상이 뭔가요? 환부에 털이 눈같이 하얗게 변합니다. 문둥병은 이미 부패가 진행되는데, 하얗게 증상이 보이면서 우묵하게 파입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이 여기저기 우묵하게 패이는 것입니다. 몇년 전에 MBC 아나운서들이 밥공기를 놓고 실험을 했어요. 밥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살피는데, 놀랍게도 한쪽에는 하얀 곰팡이, 다른 쪽에는 검은 곰팡이가 피고 그랬습니다. 오늘 문둥병 곰팡이는 하얀 곰팡이입니다. 문둥병은 눈같이 하얗게 퍼져갑니다. 그리고 사람 눈이나 코나 곰팡이가 핀 부분은 우묵하게, 움푹 들어가 패입니다.
중요한 것은 피부에 무슨 반점이 생기거나 패인 증상이 보이면 이것이 문둥병 증상인지 제사장에게 데려가라,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살펴보는 것입니다. 문둥병이면, 부정하다! unclean! 선언합니다. 부정하다 판정한다는 것은, 깨끗하지 않다! 뭐가 불결해요? 하나님 보실 때 영혼이 불결합니다. 왜 제사장한테 이 사람이 가야되는가? 문둥병이 몸에 발하면 그 영혼에 교만한 상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니까, 그것을 제사장의 안목으로 판별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몸이 썩어들어갑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그 영혼에 부패가 진행됩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을 때, 당시 이스라엘 유다의 영적 상태가 그랬어요.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너희는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온 몸에 성한 곳이 없구나.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가 이미 영적으로 문둥병이 발하여 성한 데가 없었어요.
1절을 다시 보세요. 처음에 몸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요? 피부에 부스럼나듯이, 뾰루지 나듯이, 얼룩상태로, 이렇게 증상이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게 문둥병인지 아닌지 처음에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이 맞다면 어떤 증상이 나와요? 그 부위가 눈같이 하얀 곰팡이가 진행되고, 그 부위가 우묵하게 파이는 겁니다. 이것은 몸이 그 속에서부터 부패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게 문둥병입니다. 4절부터 6절까지, 그를 격리시키고 2주간 격리상태로 제사장이 계속 살핍니다. 그 피부에 얼룩이 햐얗기는 하지만 혹 우묵하게 들어가지 않았는가 이걸 봅니다. 그 환부에 털까지 하얗게 진행되지 않았는지를 봅니다. 제사장이 살피는 겁니다.
제사장이 살피는 것은 그 증상이 살갗에 점점 퍼지는지 이것입니다 이 염증의 감염상태가 몸에 퍼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2주간 격리 후, 정하다! 선언합니다. 문둥병이 아니라 단순피부병이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7절 8절, 제사장이 정하다! 단순피부병이다! 선언한 이후에도, 다시 살갗에 퍼지는 일이 진행되면, 그는 다시 제사장에게 갑니다. 8절 제사장이 몸을 다시 살펴보고 퍼지는 증상이 진행되면, 제사장은 다시 그에게, 부정하다! 선언합니다. 그는 문둥병이 맞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내 영혼에 교만한 상태가 시작되면, 본인이 그걸 잘 몰라요. 내 영혼에 뾰루지나 얼룩같은 것이 생기는데 우리가 스스로 앗 이거 교만이구나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문제가 있는데? 이 사람 왜 이러지? 이걸 누가 알아요? 주변이 알아요? 본인은 몰라도 그 주변이 압니다.
2절 보면 내가 문둥병인가 아닌가, 사람들이 그를 제사장에게 데려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문둥병인가 아닌가를 누가 판단해요? 제사장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제사장 앞으로 가라. 판단을 받으라고 했어요. 제사장이 그 상태를 적어도 두주 이상 그것을 살피라. 2주간동안 살펴보는 기준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얀 곰팡이 증상이 있는가? 환부가 우묵해지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교만이라는 질병이 어느 정도 내 영혼을 부패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외식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시는 죄예요. 교만하면 반드시 그는 외식합니다. 그가 마음을 높이면, 내가 무슨 문제가 있나? 외식을 합니다. 일시적으로 문둥병에 걸리는 경우. 민수기 12장에 모세 누이 미리암이 교만해져 모세의 권위에 대들다가, 눈같이 하얗게 문둥병에 걸립니다. 한주간 진영 밖으로 격리됩니다. 역대하 26장에는 유다왕 웃시야가 교만해져서 문둥병에 걸립니다. 웃시야가 제사장만 하게되어있는 분향을 자기가 하려다가 문둥병이 발병합니다. 이마부터 하얗게 곰팡이가 피어요! 그가 곧바로 왕위에서 쫒겨나서 격리됩니다.
그런데 이 문둥병이 무서운 게, 자신이 몰라요. 이 병은 통증의 자각이 없습니다. 아픈 느낌을 못느껴요. 분명 아픈데 통증자각이 안되는 병이 바로 문둥병이예요. 이것이 교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앞에 교만해지면, 서서히 영혼이 부패합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는 외식을 해요.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지, 자기가 얼른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상태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신선하고 새로운지, 아니면 이미 곰팡이가 피는 상태인지, 그것을 매일 점검해야 합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이 가장 교만했을 때 문둥병이 걸렸죠. 그런데 요단강물에 들어가 일곱번 씻고 나아요. 그리고 문둥병이 치유됩니다. 뭘 말합니까? 교만으로 문둥병이 온몸에 퍼졌는데 그 마음에 교만을 꺾고 겸손해졌을 때, 썩어가던 살이 어린아이 살결같이 부드러워집니다.
둘째, 문둥병 교만병: 내 교만이 공동체에 영향을 주지 않게 하라.
문둥병 진단받은 사람이 바로 할 일이 13장에 나옵니다. 13장 45절로 가봅니다. 증상이 좀 이상하면 사람들이 제사장에게 데려갑니다. 제사장이 자세히 살펴보고 이거 악성이다. 악성피부병! 문둥병이다 진단내리면, 그 사람이 할 일이 뭐죠? 자기 옷을 찢어야 합니다. 자기 머리를 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망을 말합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 행위는 내가 거룩함을 상실했다, 그래서 뭐가 절망이죠? 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길이 막힌 사람, 동시에 자기 입으로 뭐라고 외칩니까? 부정하다! 부정하다! 이것은 뭘까요? 난 하나님앞에 죄인입니다. 난 죄에 감염이 됐어요. 그러니 나를 격리해주십시오. 아무도 죄인인 나를 접촉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게 스스로를 격리시킵니다. 그리고 46절에 그 사람은 즉시 격리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역대하 26장 보시면, 유다왕도 문둥병 진단받으면 즉시 공동체에서 쫒겨납니다. 웃시야가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자 제사장들이 그를 격리시킵니다. 왜 문둥병이 시작된다구요? 교만해졌을 때입니다. 역대하 26장을 읽어보면 그때 웃시야왕의 힘이 강성해집니다. 일이 잘돼요. 나라가 힘이 세지고 그의 마음이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악한 일을 저질렀다 그랬어요. 무슨 악한 일을 저질렀어요? 성전안으로 들어가 오직 제사장만이 허락된 성전분향을 웃시야가 자기가 하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웃시야왕을 말립니다. 경고합니다. 왕이시여, 하나님이 금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고유의 일입니다. 왕이 이러면 하나님이 왕을 낮추실 것입니다. 이때 웃시야가 화를 냅니다. 웃시야가 분향을 강행하려다가 제지를 당하자 화를 내요. 그때 문둥병이 시작됩니다. 그가 화를 낼 때 이마가 하얗게 시작됩니다. 제사장들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증상이 발한 것을 보고 곧 왕궁에서 쫒아냅니다. 주님께서 웃시야를 치십니다. 웃시야는 죽을 때까지 문둥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왕이지만 여호와 성전출입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냥 격리된 채 삶을 마칩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왜 격리를 해요? 왜 즉시 이스라엘 진영 밖으로 격리시키는가? 확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가지예요. 문둥병은 전염병입니다. 그냥 가만 놔두면 두가지 문제가 벌어집니다. 자기 몸도 썩어들어가고 남에게도 감염을 시킵니다. 이것이 영혼의 문둥병, 교만병의 증상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 교만한 질병을 회개하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두고 방치하는 일을 하지말라는 뜻입니다. 옛습관중에 교만병이 최악입니다. 이걸 방치하면 자신과 주변사람을 다 감염시킵니다. 한 사람이 교만의 죄에 빠지면 공동체 전체가 힘들어집니다. 여러분, 출애굽한 광야 이스라엘을 생각해보세요. 왜 그렇게도 광야에서 하나님께 대들었을까요? 왜 그렇게도 모세에게 반항했나요? 왜 그렇게도 불평을 하면서 원망했을까요? 그들은 끊임없이 원망하고 대들었습니다. 모세를 거스르고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왜요? 레위지파 중에 고라자손이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문둥병과 똑같습니다.
자 성경에 나온 두 사람이 아주 대조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린 사람, 교만한 마음을 고수한 사람, 나아만과 웃시야를 보세요. 둘다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시리아 장군 나아만과 유다왕 웃시야, 왜 똑같이 문둥병이 걸렸는데, 나아만은 나았고, 웃시야는 죽을 때까지 낫지 않았는가? 다음 수요일 본문 14장을 보면, 문둥병에서 회복되는 경우, 완치 판정을 어떻게 하는가 지침이 나옵니다. 문둥병 완치가 됩니다. 나아만은 문둥병이 완치됐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서에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기록도 많이 나옵니다. 완치되는 사람은 무엇을 할까요?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앞에 겸손해진 것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씻으라 그 얘기 들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엘리사가 일부러 나와보지도 않아요. 나아만의 교만을 하나님이 꺾으시려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교만을 꺾고 순종을 합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겸손히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고쳐주십니다.
그러면 웃시야가 죽을 때까지 별궁에 격리된 채 문둥병이 낫지 않은 채 죽었다, 이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웃시야는 죽을 때까지 교만을 버리지 않았어요. 오늘 하나님이 문둥병을 왜 이렇게 엄중히, 자세히 취급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마귀가 하와의 마음에 하나님같이 되려는 교만을 집어넣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져서 에덴에서 쫒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동산으로부터 쫒겨났다. 이것이 바로 격리입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이 거룩한 땅 가나안에서 쫒겨납니다. 바벨폰 포로 70년 이것이 뭘까요? 교만한 이스라엘을 70년간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교만은 영혼의 문둥병, 내 마음의 곰팡이입니다. 내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또한 공동체를 감염시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나는 어떨까? 내 마음속에는 혹 교만의 곰팡이가 시작된 것은 아닐까? 혹 무슨 증상이 없나? 살펴야 합니다. 이걸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오늘 내 영혼의 깊은 곳은 신선한가? 혹 신선도가 사라졌나? 혹 부패한가? 우리가 음식이나 물건을 신선한 상태로 보관하려면 그냥 함부로 아무데나 놔두지 않습니다. 신선한 냉장상태를 유지하고 지켜줍니다. 어떤 장치도 안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누구라도 영혼에는 곰팡이가 슬어요. 오늘 하나님은 이걸 살피라는 것입니다. 이미 영혼 깊은 곳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면 방치하면 안됩니다. 그냥 버려두면 내 옆사람, 내 뒷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교만과 냉소주의와 게으름 짜증이 감염됩니다. 그러면 공동체가 나로 인해 악성곰팡이로 몸살을 앓아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영혼속으로 죄가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관찰하고 살폈습니다. 로마서 7장 23절입니다.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노라. 그 다른 법이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도다.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교만과 외식은 누구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라도 방심하면 곧 바로 들어옵니다. 오늘 이시간 영적으로 눈을 떠서, 한번 자기 상태를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면 내 영혼, 속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어떤가? 지금 신선한가? 혹 부패가 진행중인가? 나는 교만병이 얼마나 진행중인가? 내 영혼이 어떻게 죄악에 포로로 사로잡혔는지 그 장면을 모두 볼 수 있다면 아마 처참할 것입니다. 지금 내 영혼의 상태를 보시기 바랍니다. 혹 악성 피부병, 교만의 곰팡이균으로 썩어 들어가는 상태는 아닐까? 혹 나는 내 속이 여기저기 움푹 움푹 들어간 상태는 아닌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하얗게 문둥병이 발한 상태를 눈으로 보면 정말 괴로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눈을 떠서 내면을 보라고 하십니다. 너희에게 문둥병의 증상이 보이면 지체없이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 영혼이 신선하지 않은 상태라면 부패증상이 진행중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교만증상이 공동체에 전염되고 있는지,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난 언제가 가장 교만했는가? 몇 년 전인가? 어릴 때인가? 혹 나도 웃시야처럼 잘 나갈 때인가? 그렇다면 그 교만 언제 꺾었는가? 혹 나아만처럼 겸손해진 일이 있는가? 요단강물에 일곱 번 씻은 일이 있었는가?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 그분앞으로 내 영혼을 데려가 봅니다. 대제사장인 주님이 내 영혼을 보시고, 정하다! 아니면 부정하다! 어떻게 말씀하실까? 이시간 1분간 조용히 내 마음을 진단해봅니다. 그리고 다같이 일어나 찬송가 272장을 부르면서 나아가겠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갑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나병같은 것이 생기거든
레 13:1-8 / 전희성 목사
무서운 나병
나병은 고대사회와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질병이다. 나병은 자신이 모르고 3년, 자신이 알고 3년, 남들이 알고 3년이란 말이 있듯이 긴 잠복기간 후에 표면에 드러나게 되고 제3기가 되면 눈썹이나 머리털이 다 빠지고 눈과 코와 성대와 수족이 파괴되어 면모가 추악하게 되며 몸에서 악취가 나게 되어 혐오의대상이 되었다. 나병을 히브리어로 짜라아트라고 하는데 때려 눕히다 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나병은 하나님이 때리시는 병으로 생각했다.
제사장이 판단
나병의 진단을 제사장이 하게 한 것은 이것은 의학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종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나병이 나았을 때 고침받았다고 하지 않고 깨끗해졌다고 한 것도 신앙적 의식의 견지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나병은 죄와 연관하여 생각했는데 작은 죄가 온 몸과 영혼을 멸망케 하는 것과 나병이 오랜 잠복기간이 있는 것처럼 죄는 아무도 모르게 잠복하여 있다가 나타나는 것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병을 제사장이 진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인간의 죄를 판단하고 해결하시는 것이다.
격리되는 나병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진단해야 하는데 나병인가, 단순한 피부병인가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나병으로 판단되면 진밖에서 격리되는데 병나을 때까지 격리된다. 나병은 부정한 병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어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과 격리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나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로 쳤으며 건강한 사람이 모르고 나환자 쪽으로 오면 입을 손으로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고 외치며 격리된 장소로 달아나야 한다. 이같이 죄는 우리를 정상적인 삶에서 떠나게 하며 축복에서 격리시킨다.
레위기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은 성결치 못한 부정한 병으로서의 나병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13장은 나병의 진단에 대해서, 14장은 나병에 대한 결례법을 말씀합니다.
13장과 14장에 나병이란 말이 60번이나 나옵니다. 나병을 지금까지 우리 성경에는 문둥병이라고 했으며, 특히 우리 경상도 사람은 문디 또는 문둥이라고 멸시하는 욕설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개역개정판에서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말들과 듣기에 거북한 말들을 많이 바꾸었는데, 그러한 말 중의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에 관련된 말입니다. 예컨대 벙어리를 말 못하는 사람으로 고쳤고, 귀머거리를 말 못듣는 사람으로, 소경을 맹인으로, 곱사를 등굽은 사람으로, 앉은뱅이를 못걷는 사람으로, 난쟁이를 키 못자란 사람으로, 병신을 몸불편한 사람으로, 불구자를 장애인으로, 문둥이를 나병 환자로 고쳤습니다.
우리 교단에서 개역개정판을 공식적으로 쓰도록 결의하지는 않았지만 곧 결정하게 될 것으로 보며, 여러 성도님들은 가정마다 한권씩 구입하여 읽으시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지금 이 세대에 가장 무서운 질병은 AIDS입니다만 몇 십년 전만 해도 가장 무서운 병은 나병이었습니다. 연세드신 분들은 나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이며 고독하고, 절망적인 병인지 보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첫째로, 나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은 고대사회, 특히 더운 지방에서는 흔한 병이었습니다. 문헌에 따르면 주전 4천년 경에 아시아에는 나환자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자주 나오는 병이며 특히 위대한 모세나 미리암, 웃시야왕, 게하시나 나아만 장군 같은 사람들도 나병에 걸렸다 나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명의 나환자를 깨끗케 고쳐주신 일도 있으며,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나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마리아로부터 향유를 부음받은 일이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벤허라는 영화에서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나병에 결려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나병에서 깨끗이 낫게 되는 퍽 인상적인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나병을 흔히 한센씨(Hansen)병이라고 합니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학자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 작은 박테리아 나병 세균에서 감염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의 연구에 따라 치료하므로 나병은 서서히 감퇴하기 시작하여 현재 전 세계적으로 1천100만명 정도이고 우리나라에는 약 2만 2천명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병이 박멸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나병은 자신이 모르고 3년, 자신이 알고 3년, 남들이 알고 3년이란 말처럼 긴 잠복기간 후에 표면에 나타나게 되고 제3기가 되면 눈썹과 모발이 빠지고, 눈과 코와 성대와 수족이 파괴되어 면모가 추악하게 되며 몸에서 악취가 나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병은 감각과 피부가 마비되고 육체의 기능이 마비된다고 합니다.
나병 치료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폴 브랜드 박사는 나병은 아픈 것을 모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전혀 모르고 있어서 치료가 더디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브랜드 박사는 심하게 아픔을 느낀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나병을 히브리어로 짜라아트라고 하는데 때려 눕히다 라는 뜻으로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나병은 하나님이 때리시는 심판의 병으로 생각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흑인인 구스 여자를 취하였는데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 비방을 들은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고 했는데 비방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안했던 것 같습니다.
이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회막으로 부르시고 아론과 미리암에게 모세를 비방한 것을 크게 진노하시며 책망하시고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뒤 미리암을 보니 나병에 걸려 온 몸이 눈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미리암은 진 밖에서 7일간 격리되었는데 모세가 하나님께 간곡히 부르짖어 미리암이 다시 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나병은 무서운 병입니다. 그 진행이나 나타나는 현상이 무서운 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내리시는 병이기에 더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 고통스럽지 않은 병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나병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고통을 더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 병에 대하여 성경 곳곳에서 심각하게 다루고 말씀하는 것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나병은 제사장이 판단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부분의 병은 의사가 진단을 하고 판단을 하지만 나병은 제사장이 진단을 하고 판단을 합니다. 나병의 진단을 제사장이 하게 되는 이유는 나병을 의학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종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나병의 치유에 대해서는 치료해 주었다거나 고침받았다고 하지 않고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 깨끗하게 되었으니,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병은 신체적 질병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신앙적 견지에서 보아야 하는 병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죄와 연관하여 생각하고 나병과 죄는 그 특성이 유사하기 때문에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나병과 죄의 유사한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병은 오랜 잠복기간이 있는 것처럼 죄는 아무도 모르게 오랜 기간 비밀히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병의 시작은 아주 작은 것입니다. 작은 반점, 뾰로지 같은 작은 종기, 피부의 사소한 발진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나병의 첫 신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난 불행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 정도야 뭐 하면서 시작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파멸로 이끕니다.
또 나병은 감각기관이 마비되는 것처럼 죄는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판단을 마비시킵니다. 죄에 대한 부끄러움, 죄에 대한 고민, 죄에 대한 가책이 점점 마비되어 영과 육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죄를 나병처럼 무섭게 생각해야 합니다. 죄는 에이즈(AIDS)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내 속에 품은 악한 생각, 아무런 생각없이 남을 정죄하는 말,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다는 판단력 없는 결단, 이런 것들이 점점 자신의 믿음과 영혼을 파괴시키고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나병이 전염병이듯이 죄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죄가 하와에서 시작하여 아담에게, 또 가인에게 퍼졌고,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홍수 심판을 가져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거역한 죄를 범했습니다. 이러한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진노하였습니다. 나병의 진단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제사장이 했습니다. 제사장의 진단은 죄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신령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판단하시고 사유하시며 해결하십니다. 우리 속에 도사린 크고 작은 죄를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불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형제를 헐뜯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노한 죄를 주님께 내놓고 사유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나병으로 상징하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시51:7)라고 호소했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믿음을 썩게 하는 죄를 그대로 안고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깨끗이 씻김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씻음 받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 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의 집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계집종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땅에 사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이 말을 마음에 두고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당도하였으나 엘리사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자를 시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노하여 생각하기를 엘리사가 뛰어 나와 상처 위에 손을 얹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나병을 고쳐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 한다고 불쾌하여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강보다 낫지 않느냐, 그런데 요단강에서 몸을 씻겠느냐 하면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종들이 나와서 선지자가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라 해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렸습니다. 이때 나아만이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씻고 깨끗이 나았습니다. 씻으라 하면 씻어야 합니다. 불순종했더라면 깨끗이 고침받을 수 없었습니다. 화를 내고 돌아섰더라면 일생 나병 환자로 고통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순종과 씻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보혈이 흐르는 이 성전에 나왔으면 말씀에 순종하고 주의 보혈로 씻김받아야 합니다. 은혜의 방해요소 가운데 가장 큰 방해요소는 자존심과 불순종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아무 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주의 종들의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건강한 몸과 건강한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순종하여 씻김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나병은 격리되는 병입니다.
제사장은 환처가 단순한 피부병인지, 나병인지를 신중히 보아야 하는데 그 진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나병으로 판명되면 진 밖으로 쫓겨나 격리되는데 병이 나을 때까지 격리됩니다. 만약 병이 낫지 않으면 평생 진 밖에서 격리된채 비참하게 지내다가 죽습니다.
나병은 부정한 병으로 가족과도 격리되며, 친구들과도 격리되며, 모든 소유와도 격리됩니다. 유대인들은 나환자가 가까이 오면 돌로 칠 수도 있는데 6m 이내에 접근하면 돌로 쳐 죽여도 됩니다. 그러므로 나환자가 있는데 나환자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지나게 되었을 때 가까이 오면 나환자는 입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하고 나환자 자신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나병과 죄악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나병은 철저히 격리하듯이 죄는 정상적인 생활에서 떠나게 합니다. 죄를 지으면 가족과의 친근함과 화평의 관계도 깨지고 맙니다. 부부 사이에 죄를 범하면 서로 마음이 멀어지고 정이 멀어지고 사랑이 멀어집니다. 그래서 끝내 죄는 두사람의 관계를 갈라 놓아 격리시킵니다. 죄가 없으면 함께 살고 즐겁게 살고 행복하게 함께 지냅니다. 그러나 죄는 마음과 마음을 갈라놓고,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고, 형제와 형제를 갈라놓고, 남편과 아내를 갈라 놓습니다. 죄는 부정하기에 모든 것을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갈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지금 밖으로 나타나지 않고 잠복하여 있어도 언젠가는 나타납니다. 죄를 심으면 죄를 거둡니다. 육의 것을 심으면 육신에게서 사망을 거둡니다. 그러나 선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거두고, 성령으로 심으면 성령의 열매를 거둡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죄와 싸우고 경건하게 살며, 믿음으로 살아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합니다. 나병과 같은 무서운 죄악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허물과 죄악을 주님 앞에 내놓고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받은 성결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문둥병의 진단과 정결의식
레 13:9-17 / 피영민 목사
서 론
레위기 13~14장에는 문둥병 규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읽기에도 복잡하고, 설교하기도 어려운 본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레위기 13~14장에 기록된 내용도 신앙생활에 매우 유익한 말씀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율법의 규례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복음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규례에 나타난 예표와 실체를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문둥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짜라아트’는 오늘날의 한센씨병과는 전혀 다른 병입니다. 한센씨병은 현대 의학으로 치료될 수 있는 질병가운데 하나이지만, ‘짜라아트’는 치료 방법이 없는 특별한 질병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문둥병은 인간의 의술로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가리킵니다. NIV(새국제역)성경을 봐도 ‘Infectious skin disease’(전염성이 있는 피부질환)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대게 ‘Leprosy’(한센씨병)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전염성이 있는 피부질환’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성경의 문둥병은 사람의 피부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의복과 주택에도 발병했습니다. 오늘날 사람의 피부에만 발병하는 한센씨병과는 종류도 다르고, 발병하는 곳도 다르고, 치료방법도 다릅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에 이를 ‘문둥병’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저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을 보면 문둥병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데 13장에는 사람의 인체와 의복에 발병된 문둥병 진단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14장에는 회복된 문둥병자의 정결의식과 가옥에 발병된 문둥병의 정결예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3장은 문둥병 진단에 관한 말씀이고, 14장은 정결의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문둥병이 의복이나 가옥에도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도 얼마든지 죄로 오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레위기를 강해할 때 가옥의 문둥병에 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정결해야 한다는 요지의 설교였습니다. 오늘은 인체에 발병한 문둥병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문둥병은 영적인 부정을 가리키는 ‘죄’를 상징한다.
문둥병은 단순한 피부질병을 넘어 영적인 부정과 죄를 상징합니다. 영적인 질병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죄의 상징이라는 것은 세 가지 증거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에 보면 문둥병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즉각적인 발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구스 여인과 결혼한 모세의 지도력에 대항하며 비판하다가 문둥병에 걸리게 된 미리암이 그 예입니다. 또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가 거짓과 탐욕으로 나아만 장군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직접 하나님께 분향하려던 남 유다 웃시야 왕도 이마에 즉각적으로 문둥병이 발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질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문둥병이 단순히 육체적 질병이었다면 의사들이 관리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13~14장의 기록에 따르면 문둥병은 철저히 제사장의 관리 아래 있었습니다. 문둥병을 진단하고 확정해 선포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이었고 병이 나은 이후,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도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진단하고 깨끗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문둥병은 단순히 육체적 질병이 아니라 영적인 죄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문둥병에는 특별한 치료법이 없습니다. 어떤 약을 써도 문둥병을 깨끗케 할 수 없고, 노력한다고 해서 낫는 병도 아닙니다. 문둥병이 깨끗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영어로 ‘Defilement’(부정)입니다.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정결하지 못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문둥병에는 ‘치료하다’(Cure)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깨끗하게 하다’(Cleans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네가 깨끗함을 입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문둥병이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씻어 주실 수 있는 영적인 부정을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Ⅱ. 문둥병에 대한 진단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상징한다.
요한복음 16장 7~8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혜사’는 제삼위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Holy Spirit)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야단을 치거나 혼을 낸다’는 의미보다 ‘마음 깊이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인입니다. 의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문제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올 결과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믿으라고 해도 믿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해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주일에도 놀러다니고 교회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롯의 사위처럼 복음을 농담으로 여기며 웃고 떠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가볍게 생각할 주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 문제가 가벼운 주제였다면 어떤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죄인인데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 하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게 되고 “이대로 죽었다가는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겠구나!”하는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자에게 문둥병이 있다고 진단해 주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 각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13장은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제사장이 환자를 문둥병자로 선언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조건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겼을 때, 그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해야 합니다. 13장 3절에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둥병자로 확진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은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묵하지 않으면 문둥병이 아닙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이 사람 영혼의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피상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감옥에 가보면 죄수들이 대부분 자신들이 행한 범죄를 뉘우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뉘우침이요, 후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후회는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역사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가룟 유다도 죄수들처럼 예수님을 은 30개 받고 팔아넘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준 제사장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으나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다시 예수님의 제자도 되지도 못하고, 제사장 편에도 서지 못하는, 오갈 데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 왕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고, 그 몸이 갈대밭에 떨어져 창자가 흘러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회는 했으나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피상적인 후회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영혼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회개’(Saving Repentance)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피부에 흰점이 돋고 털이 희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털은 머리카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백발은 노인의 면류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몸 여기저기 자라는 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얀 색 반점이 생기고 흰 털이 나오는 것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피부의 뿌리까지 부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피부 속까지 썩었기 때문에 건강한 털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한두 가지 자범죄를 떠올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근원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천국에 들어갈 의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자신이 50%, 하나님이 50%를 공헌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극락에 가는 법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론은 이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천국 들어가는 데 공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0.0001%도 공헌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문둥병으로 진단하라고 하셨습니다. 8절에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부에 퍼지면 문둥병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죄인들의 지정의(知情意) 전 영역이 모두 부패했음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만 부패했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of Man)은 건강한 진리가 나오는 제일 뿌리의 교리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하는 모든 신학은 거짓된 것입니다.
넷째, 피부에 난육이 발생하면 문둥병으로 진단하라고 하셨습니다. 14절에 “아무 때든지 그에게 난육이 발생하면 그는 부정한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육’은 ‘생살’(Raw Flesh)이라는 뜻입니다. 환부에 종기가 터지고 안에서 생살이 부풀어나면서 진물이 나는 것을 ‘난육’이라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곪은 상처가 터진 것처럼 사람의 양심에 심한 가책이 와서 상한 심령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왜 인생을 이렇게 살았을까? 내게는 천국에 갈 의가 전혀 없구나!”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처든지 그것이 문둥병으로 진단받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피부보다 우묵해야 하고, 둘째는 흰 털이 나와야 하고, 셋째는 피부에도 온통 다 퍼져야 하고, 넷째는 난육이 발생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조건이 모두 있어야 문둥병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을 그림처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참된 회개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냥 교인입니다. 그러나 피상적인 후회 정도의 뉘우침으로는 참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참된 회개를 하시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3장에는 문둥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취해야 할 조치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45~46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으로 진단받은 사람은 먼저 옷을 찢어야 합니다. 옷을 찢는 것은 “나에게 천국에 들어갈 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참된 회개는 하나같이 모두 옷을 찢고 기도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풉니다. 묶었던 머리를 푸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름에 태양 볕이 내리 쬐이고, 겨울에 아무리 추워도 모자와 같은 것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다”(I am under the wrath of God)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윗입술을 가리고 다녀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고 다녀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서 진 밖으로 홀로 나가야 합니다. 홀로 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림처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반드시 혼자 나가야 합니다. 구원은 누가 대신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이 저절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각자가, 일대일로 영문 밖에서 수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 분을 만나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영문밖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Ⅲ. 정결의식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를 적용해 주시는 과정’을 설명한다.
문둥병에 대한 정결의식은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과정을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죄인들에게 적용해 주시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의학기술로 고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가 사람의 죄를 근본적으로 용서해 주고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교육, 어떤 선행, 어떤 훈련으로 가능합니까? 어떤 약도 문둥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진단하고 깨끗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과정이 바로 레위기 14장의 정결의식에 그림처럼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정결의식은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다섯 가지 단계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문둥병자가 진 밖에 있기 때문에 제사장이 문둥병자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치료해주셨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이 먼저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야 가능해 집니다. 결코 자유의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면 구원받고, 원치 않으면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8년 된 병자 한 사람에게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왜 그에게 다가가셨을까요? 그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2단계는 제사장이 산새 두 마리를 취하여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고, 다른 한 마리는 날려 보냅니다.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속죄하심으로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단계는 제사장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묶어서 붓을 만든 후, 산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피뿌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죄인들의 영혼에 뿌리셔서 죄 사함과 자유를 얻게 하고, 평안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영혼의 평안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
4단계는 영문 밖에서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맑은 물에 몸을 씻은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고, 7일을 거한 후 다시 한 번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물로 씻은 후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로 격리되어 있다가 드디어 그리운 가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웠던 가족들을 오래간만에 재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 받은 후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속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가 됩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형제자매입니다.
5단계는 하나님 앞에서 피와 기름을 일곱 번 뿌리고 기름을 세 곳에 바릅니다. 오른쪽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손가락, 오른쪽 발가락에 바릅니다. 기름을 발랐다는 것은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가 되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화된 삶,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듣고 보고 행하는 모든 것에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죗값을 갚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사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게 하셔서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문둥병의 정결예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림입니다.
결 론
문둥병자에 대한 진단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라는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미 죄인 된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 상태에서 자신이 저주 받은 문둥병자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성령의 역사로 주시는 깨달음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이렇게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참된 성도가 된 사람은 놀라운 복을 받은 것입니다. 교인이라고 다 똑같은 교인은 아닙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상한 심령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 피로 씻음 받고,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성령 체험입니다. 요즘은 이상한 종교행위를 통해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방언, 예언, 통변과 같은 은사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런 현상들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천주교에도 있고, 힌두교,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같은 단체에서도 나타납니다. 몰몬교 교리에도 “우리는 방언과 통변을 믿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비로운 체험이 진정한 성령 체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체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어, 자신의 전 삶을 예수님께 드려 정결케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성령의 참된 역사를 체험하여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기 13:1-17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 유정재 목사
오늘 본문은 한센병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ṣāraʿaṯ 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사실 한센병만을 지칭하는 단어라기보다 살이 벗겨지는 악성 피부병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나병’으로 번역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ṣāraʿaṯ이라는 단어를 lepra 라는 헬라어 단어로 번역했고, 이는 한센병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leprosy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1-2)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피부에 한센병 증상이 나타나면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 정한지 부정한지를 결정합니다.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갔다는 것은 처음부터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레위기에서 한센병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어디에도 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본문은 한센병 환자의 병을 낫게 하는 것과 그 병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초반에 나와있는 사람을 정하게 만드는 제사들이나14장에 나오는 예식 등도 한센병 환자의 증상이 사라졌을 때 드리는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부병 증상이 나타나면 한센병이 아니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한센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기에 자신의 죄나 조상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통해 한센병을 정하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센병의 원인이 죄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신약의 시각장애인 이야기인데, 제자들이 시각장애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한센병의 목적도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도 내가 저주받은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나만 겪는 것 같은 불행과 고난 때문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었을까 고민하신 적이 다들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나로 상정하여 내 죄에 대한 대가를 내가 치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나라는 착각에서 온 허상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대가를 우리에게 직접 짊어지게 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즉시 전부다 지옥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죄의 대가가 아닌,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돈이 선입니까? 명예, 건강이 선입니까? 심지어 가족 사랑도 절대적 선은 아닙니다. 절대적 선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고 심지어 나의 실수나 죄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도의 삶에서는 모든 것들은 결국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고난과 역경이 있을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영적 한센병자임이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나의 가능성은 점점 삭제되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희망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멋들어지게 행함으로서 십자가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날 때 주님께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피부병(3-8)
(3-8)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본문을 보면 먼저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짓습니다. 피부에 생긴 증상에 털이 하얘지고 상처 부위가 파여있으면 나병일 수 있지만 증상 주위 털이 희어지지 않고 상처 부위가 파여 있지 않으면 7일동안 격리한 후에 다시 경과를 보며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피부보다 우묵하다’는 원어로 보면 피부보다 더 깊게, 영어로는 ‘deeper than the skin’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증상이 단순히 피부 위에만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피부 안으로 침투되어 있는 상태인지를 분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센병(9-17)
(9-17)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1절부터 8절까지는 단순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지었다면 이제 9절부터 17절까지는 한센병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생살이 생겼으면 오래동안 병을 앓았던 것임으로 부정은 하지만 격리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고, 12절에서는 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즉, 환자의 몸이 다 희어졌으면 정하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병이 펴져 있으면 한센병이 가장 심한 상태인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센병의 유무로 정하고 부정하고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세세하고 특이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본문에 나열된 기준은 사실 한센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에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본문을 읽은 시카고 대학 저널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본문은 한센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을 수 없으며 이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정함과 부정함의 기준, 즉 신학적 관점으로만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리하면, 오늘 본문은 한센병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센병을 통해 성도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로 움직이고 계신 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본문은 먼저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짓습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가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눈길이 정한 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자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부정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제사장에게 유심히 관찰하게 하십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를 나누고 그 경계에서 부정한 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부정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 부정함 속에서 다시 정함을 찾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입니다. 정한 자들은 진 안, 즉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남을 수 있고, 부정한 자들은 진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성도가 돼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하면 왜 내가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인지는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 들어갔는데, 이미 나의 현실이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었는데 과거가 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 없는 곳에 복 없고, 부정함을 경유해야만 정해집니다. 제사장이 한센병 자들의 부정함을 자세히 관찰하듯이 우리 또한 왜 내가 부정한 자임을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정하게 만든 은혜의 십자가이기 전에 내가 부정한 자, 하나님 살해범이라고 증거하는 심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한센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피부가 벗겨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살이 벗겨지고 속이 드러나는, 즉 겉을 썩게 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이 썩어가는 것은 보기에 혐오스럽습니다. 세상은 모두 외모가 번지르하고 눈에 보기 좋은 사람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외모란 단순 생김새가 아닌,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임받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신앙생활에 전념하란 이야기구나 하고 혹시 생각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열심히 종교생활 하면 우리를 혐오합니까? 말씀대로 살면 미워하나요?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지키면서도 우리는 외모를 위해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훨씬 더 교묘하고 깊게 우리 안에 침투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우리 외모를 위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모를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센병자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센병자가 되는 것이 외모가, 즉 겉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려는 사람이 없듯이 인간은 절대 스스로 자신의 외모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열심히 나의 외모를, 나의 겉사람을 죽이겠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겉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재해석 하시며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만하던 유대인들에게 형제를 노하게만 해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모두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인간은 절대 지킬 수 없는 수준의 율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웠을 만큼, 안식일을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하나님 말씀을 열심으로 지켰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은 더 높은 수준의 율법을 요구하신다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마태복음 7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인간들에게 제시 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신 일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율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 즉 저주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접촉만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됐고 그들은 진 밖에 살면서 자신은 절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을 입에 달고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숨 바쳐 하나님 말씀 지키던 바리새인들에겐 오히려 율법의 정죄함이 더해지고, 율법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던 한센병자에게는 거저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 뜻은 구원이란 “나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율법 지켰어요” 라는 고백이 아니라 “난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자입니다”라는 고백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항상 저주 속에, 정함은 항상 부정함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오늘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며 살고 계십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했습니다’ 입니까 아니면 ‘나는 주님 앞에 설 수도 없는 부정한 자입니다’ 입니까? 이 아침에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를 고민하시기 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실 어떠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 깊게 알고, 주님과 교제를 위한 기도를 하시는 교우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가 영적 한센병자임이 드러나기 원합니다. 나는 부정한 자라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며 거저 주시는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희망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한센병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나의 고난을 통해 십자가가 증거되는 경험을 해보셨나요? 그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주님의 은혜를 묵상해 봅시다.
3. 왜 정함은 부정함을 경유해야만 할까요?
4. 왜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지킨 바리새인이 아닌 한센병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일까요?
나병과 죄
레위기 13:1~17
1~8절, 나병은 육신이 썩어들어 가는 병입니다. 영적으로 죄를 상징합니다. 나병은 죄악의 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흰 반점이 미미하게 보이나 몸 전체에 퍼지게 되면 아주 흉합니다. 작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 죄가 우리를 장악한다면 무서운 진노를 초래하게 됨과 같습니다. 나병은 온몸으로 퍼지는 데 죄악도 빨리 방지하지 않으면 치명적입니다.
나병에 대한 판단은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린 것 같으면 제사장의 진찰을 받은 후에 제사장이 가부를 선언합니다. 나병은 일반적인 질병과는 달리 죄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의 징벌이요, 종교 의식상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제사장만이 결정합니다.
오진을 막기 위해 7일간의 기간을 두고 두 번 신중히 시험하는데, 이는 영적인 의미로는 죄는 신중히 취급하여 방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죄악을 상징하는 나병은 오직 제사장의 권한이요, 부정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인간을 바로 진단하시고 치료 방법이 되어 주신다는 교훈입니다.
9~17절, 생살의 나병은 나병으로 인해 생살이 밖으로 터져 나온 상태를 말합니다. 나병은 그 자체가 매우 흉측하고 피해가 큰 질병이며 몸속 깊이 침투하여 내부를 부패시키는 병입니다. 이와 흡사하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죄는 그 기능의 쇠퇴를 가져오며, 자기를 파괴하고 부패하게 하는 병인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다는 것을 의미하며. 오랫동안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추태가 외모에까지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죄악 속에 살면서도 무감각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계속 죄를 자행하는 인간은 사탄의 종으로 부정하고 가증스러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조그만 죄라도 절대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 심각성을 깨달아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자신을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 회개해야 하며 옷을 찢음과 같이 회개해야 합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혐오함을 보여주며 죄를 뉘우치며 마음을 찢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병은 바로 내가 범한 죄의 비참한 결과와 같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나는 더는 영적인 문둥병에 걸리지 않도록 원합니다. 혹 내가 그 병에 걸렸다고 자각이 될 때는 반드시, 그리고 긴급히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 병의 치료를 위해 진지한 참회와 간곡한 기도를 드리길 원합니다. 더불어 나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날마다 죄에 대하여 승리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자신의 죄를 우슬초로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한 다윗처럼 죄악은 그리스도의 피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해서 정죄하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어떤 엄격한 기준과 조심스러운 자세로 살아가길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나는 문둥이였다
레 13:1-17 / 홍 순관
문둥이의 세 가지 의미
다른 지방에서 오신 분들이 처음 들으면 거부반응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경상도 사람들끼리는 거부감이 전혀 없는 표현 중의 하나가 ‘문디이’라는 말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만나면 이름도 없고 전부 동일하게 ‘문디이’입니다. 경상도 사람들끼리는 상당히 친근감이 있는 말입니다. 원래 문둥병 환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문동(文童), 학문하는 아이라는 뜻에서 썼던 말이 그렇게 와전된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문둥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를 띠고 있기도 하지만 저희들 어릴 때 이 말은 상당히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 겁줄 때 하던 말이 ‘문둥이에게 잡혀간다’는 말이었습니다. 본 적도 없지만 또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데도 어른들이 아이들 겁줄 때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문둥이가 아이들을 잡아가서 간 빼 먹는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어린 소견에도 “병을 고칠 수 없으니까 간을 약으로 쓴다고 그러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좌우간 말 안 듣고 집에 잘 안 들어 오고 혼자 숲에 늦게까지 놀면 ‘문둥이가 잡아간다’고 그랬는데 굉장히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문둥이라면 무서워했죠.
또 한편으로는 이 말이 비참함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슬픈 이야기마다 주인공이 문둥병이 들어서 소록도에 들어가는 겁니다. 어릴 때 읽었던 이야기에는 그런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소록도로 가는 배를 타는 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는데, 가족들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배를 타기 위해서 항구까지 가서 마지막 순간에 배를 안 타려고 부둣가를 방황하며 돌아다니는 장면을 묘사했던 소설들이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경우의 문둥이는 비참함과 서글픔의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서웠던 병을 오늘날 우리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무서운 병조차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죠. 나환자촌에서 나온 고기나 계란을 아무 거리낌없이 잘 먹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도 있지만 우리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거기서 사는 아이들도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걱정을 않지만 2-30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정말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천형이었죠. 하늘이 준 천벌이라는 의미에서 천형이라고 불렀던 병입니다. 하물며 이 병이 성경이 기록되던 2000년 3000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3장은 상당히 긴 본문인데, 문둥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을 ‘나병’이라고 했다가 지금은 ‘한센씨병’이라고 부릅니다. 성경 본문도 언젠가는 그렇게 바뀌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만 본문에 문둥병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용어가 적절치 않습니다마는 그냥 쓰기로 하겠습니다.
레위기 자체가 좀 재미없죠? 문자 그대로 읽으면 재미없습니다. 그러나 레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잘 살펴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책입니다. 함께 레위기를 공부했던 분들의 공통된 의견이 “레위기도 이렇게 재미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알면 재미있고 모르면 재미없는 법입니다. 기회가 되거든 공부하는데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전체도 언뜻 보면 재미없는데 특별히 레위기 13장 문둥병에 관한 이 얘기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재미도 없고 상관도 없는 먼 옛날의 이야기입니까? 재미없고 의미가 없는가 싶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 보약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주셨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살펴 보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의해서 폐지되었습니다. 폐지된 것임에도 우리가 제사제도를 공부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걸 잘 공부하면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던 이유를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은혜가 됩니다. 또 레위기의 많이 부분이 정결에 관한 문제인데 이 문제도 오늘 우리와 관계없는 듯 합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우리 삶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구속받은 성도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문둥병의 판정
오늘 이 본문에 기록된 문둥병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이 본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문둥병은 이제 정복이 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문둥병에 걸리는 것은 현재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영혼에 드는 문둥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이 본문을 읽고 공부할 이유가 있습니다.
2절에,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같이 되거든 제사장에게로 데려가라고 합니다. 왜 제사장에게 데려갈까요? 치료를 위해서 데려가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제사장이 문둥병이냐 아니냐를 판정하기 위해서 입니다. 3절에는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제사장이 문둥병으로 판정을 합니다.
그런데 4절에 보시면 애매한 경우가 나옵니다.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칠일 동안 금고하라고 합니다. 금고란 격리 수용하라는 뜻이죠. 7일 후에 다시 살펴보아서 문둥병이 들었느냐 안 들었느냐 확인합니다. 칠일간 금고했음에도 잘 모를 경우에는 다시 또 칠일을 금고했다가 살펴보라고 합니다. 10절에, 피부에 흰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난육이 생겼으면, 난육이라는 것은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면 문둥병이라고 합니다. 11절에, ‘제사장이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여졌으니 금고하지는 않을 것이며...’ 부정한 것이 확실하므로 격리 수용해 둘 필요 없이 바로 문둥병 환자로 취급하라는 말입니다.
번역의 어려움
13장 전체 본문이 너무 길고 내용도 많아서 주의사항 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둥병은 오늘날 의학에서 말하는 문둥병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47절 이하에, 옷이나 가죽에 나타나는 증상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문둥병이라기보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성 곰팡이 종류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일반적인 악성 피부병이나 곰팡이류까지도 본문에서 말하는 문둥병이라는 표현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조금 이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특히 어머니들이 가장 많이 앓았던 병이 무슨 병이죠? 속병입니다. 속병이라는 것이 현대 용어로 하면 무슨 병일까요? 어쩌면 홧병일 수도 있고 암일 수도 있습니다. 골병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심장병일 수도 있지만 전부 도매금으로 속병이라고 했습니다. 병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2000년 3000년 전에 레위기가 기록이 될 시절에 병을 분류하는 방식이 오늘날처럼 세밀하고 전문적이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성경이 좀 폭 넓게 이런 병들을 전부 문둥병이라고 규정을 하고 설명을 한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어교사로 있을 때 경주로 발령이 나서 가다보니까 출근길이 참 아름답더라구요. 수업하기 전에 한 5분 정도 그 소감을 영어로 이야기하니까 도움도 되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꽃 이름을 잘 모르겠어요. 개량된 무궁화도 많이 피고 벚꽃도, 개나리도 많이 핍니다. 이런 꽃들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찾아보니까 이름도 괴상망측하고 길어서 설명이 잘 안돼요.
그래서 나중에 미국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어서 “이걸 영어로 뭐라고 하면 좋으냐?”고 했더니 자기도 잘 모른데요. “당신은 미국 사람 아니냐? 미국 사람이 영어로 이걸 모르면 어떡해?” 그래도 잘 모르겠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린들 주변에 꽃들이 많이 피면 우리말로 다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마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리고 그 분 얘기가 지금 자기가 한국에서 보고 있는 꽃들이 미국에서 보던 꽃과 다르답니다.
우리나라의 멸치, 꽁치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단어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같은 고기는 아닙니다. 비슷한 고기와 연결시켜 놓았을 뿐이지 정확한 표현은 아니랍니다. 옛날에 히브리말로 기록된 것을 시간도, 공간도 엄청나게 다른, 오늘 우리말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또 병에 대한 분류 방법도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게 일치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이해하면 현대의 악성 피부병에 해당되는 곰팡이 종류를 문둥병이라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한가지는 30절부터 보시면 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일종의 기생충입니다. 옴 종류도 문둥병이라고 해 놓았거든요. 이것은 번역상 어느 정도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는 것도 과거를 되짚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국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옮길 때 얼마나 힘들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어서 성경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엘로힘’입니다. 이걸 우리말로 옮길 때 뭐라고 옮길 것인가 고민을 엄청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멋지게 발견해낸 말이 ‘하나님’입니다. 원래부터 있던 말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없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발견해낸 것은 성경을 번역해낼 때 발견해낸 멋진 말입니다. 그렇다고 매사가 이렇게 뜻대로 쉽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옛날 성경을 구경하다가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안식일이라는 말이 원래 우리말에 개념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안식일이란 걸 어떻게 번역했는지 아세요? 저도 상상도 못했지요. 안식일을 ‘사밧닐(日)’이라고 해놓았더라구요. 이게 뭐냐 싶어서 가만히 보니까 히브리말로 안식일은 ‘사바쓰’인데 영어로 ‘사밧day’라고 하니까 우리말로 ‘사밧닐(日)’이라고 한 겁니다. 성경 본문에는 ‘사밧닐’이라고 해 놓고 그 밑에다가 설명을 길게 달아놓은 거죠.
이런 어려움을 감안해 보면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 수고한 분들의 안타까운 마음들이 보이는 듯 싶어요. 그렇게 성경을 오래도록 쓰다가 누군가가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내었겠지요.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안식일이란 용어를 씁니다만 성경을 번역하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분들이 병에 대해서 다 안다는 것도 어려운 겁니다. 그 모든 걸 감안해서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겠지만 초창기에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번역해 준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특히 한국이 선교역사에서 특이한 것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보니까 성경이 먼저 들어와 있더라는 거죠. 정말 특이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에서 유명한 목사님 중의 한 분이 존 로스라는 분인데 이 분은 원래 스코틀랜드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던 목사님입니다. 어떤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한국사람들에게 한글을 배워가며 성경을 번역하려고 시도했는데 하도 어려워서 지원을 요청했더니 언어 번역에 재능이 있는 분을 물색해서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 목사님을 파송한 겁니다.
이 분은 도대체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고 이 머나먼 곳에 와서 한국말을 배워가며 성경을 번역해낸 겁니다. 번역을 완료한 후에도 그걸 한국에 전달하기까지 얼마나 고충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번역된 성경이라는 걸 우리가 알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않고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탓하기 전에 이 일에 먼저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더 좋은 번역들이 나오겠지만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렇게 수고한 분들을 잊지 맙시다.
지금도 성경번역을 위해서 선교사들이 많이 나가 있습니다. 그 분들은 선교하는 방법이 독특하죠. 그냥 사는 겁니다. 살면서 그 사람들의 문화와 언어를 다 배웁니다. 배워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그 때부터 번역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렇게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선교사는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몇 개 국어에 능통해야 합니다. 그 정도 재능과 능력이면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포기하고 찾아가서 살고 있는 곳이 후진국이고 어려운 곳입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위험한 곳에 살면서 오직 성경을 번역하는 것만을 사명으로 여기고 사역을 합니다.
네팔에 성경번역 선교사로 가 있던 선교사 한 분이 안식년을 맞아서 귀국했다가 공부를 하느라고 신대원을 같이 다녔습니다. 이 분은 샤워를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해요. “왜 그러냐?”고 하니까 밀린 것 한꺼번에 다 한데요. 네팔에는 샤워시설이 없답니다. 목욕탕도 없고요. 그냥 계곡 물에 풍덩풍덩 하다가 행궈서 나오면 끝인데 때를 민다는 개념은 아예 없답니다. 그렇게 6년이나 있었으니까 여기 와서 앞으로 못할 것까지 감안해서 부지런히 하고 갈 거랍니다. 하루에 한 두 번은 꼭 샤워장에 가서 아예 독판치다시피 그렇게 있어요. 다시 네팔로 돌아가셨으니 또 몇 년간 때를 묻혀서 오겠죠. 성경을 번역하기 위해서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사역하고 있는 분들이 지금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조금 말이 어렵고 옛날 표현도 많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정말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잔소리가 고마울 때
어떻게 보면 별로 은혜스럽지도 않고 덕될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러분, 제사장이 “이 사람의 병이 문둥병이다, 아니다.”라고 하는 이 말 한마디는 이 사람의 생애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옵니다. 문둥병이라고 판정이 나면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마을을 떠나야 합니다. 이런 말 한마디 하려면 아주 세밀하게 살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간단하게 함부로 문둥병이라고 판정하면 되겠어요? 진단하기 위해서 아주 세밀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 사람의 생애가 걸린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세밀하게 규정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하고 관계가 없다고 해서 “재미도 없는 얘기를 뭐 길게 하고 있느냐?” 그래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남의 일이면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정짓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버릇입니다. 적어도 이 병이 문둥병이냐 아니냐를 판정 받아야 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생사 문제가 걸린 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런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렇게 꼼꼼하게 기록한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겁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이야기를 꼼꼼하게 설명을 해 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학교 선생님들이 대체로 잘아요. 그래서 “선생님이 좀 대범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실 때도 있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잘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아이들을 선생님이 대범하게, “그래 아이들은 그럴 수 있지.”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둬보세요. 사고가 터져도 얼마나 터지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을 붙들고 잔소리를 많이 하는 선생님이 잘 하는 선생님입니다. 너무 심해도 안되겠지만 아이들을 붙들고 일일이 잔소리를 많이 하는 자잘한 선생님이 잘 하는 거지 사고를 치든 말든 숙제를 하든 말든 대범하게 입 꾹 물고 “그래 마 잘 한다.”고 내버려두면 결코 잘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문둥병을 판정하는 방법에 대해서 세밀하게 기술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만약 이 입장이라면 이 기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영적인 문둥이
제사제도나 다른 정결제도에 있어서도 영적인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문둥병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영적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가장 뚜렷한 것이 이 문둥병의 모습이 죄가 지니고 있는 속성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첫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문둥병은 당시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별 걱정을 하지 않지만 2-30년 전만 해도 이것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고 천형, 하늘이 내린 병이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 문둥병을 고친 기록은 몇 군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특별히 몇 군데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고치신 경우만 몇 번 언급될 뿐이지 문둥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나는 문둥이였다’ 과거형으로 된 것은 지금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린 지금 죄인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병이 다 나은 문둥병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죄에서 놓여나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죄라는 것은 치료할 수 없는 병이었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으로만 치료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바 없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 단 하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하나님 외에 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없었다는 말이죠. 문둥병이 고칠 수 있는 병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못된 짓 하는 것보다 교회 안 다니면서 선하게 사는 우리가 훨씬 낫지 않느냐?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가장 소중하고 이것 이상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끼리 선하다, 비교적 착하다 말할 수 있죠. 그러나 우리끼리 선하다 착하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무슨 선한 일이 되겠으며 무슨 착한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우리가 선하고 충성스럽다는 것이 하나님에게 오히려 더 큰 죄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지난 5공 시절에 권세를 누렸던 사람들 중에는 정말 의리와 충성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자기 보스에게 충성하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네 입장에서 본다면 엄청난 충성이죠.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오히려 백성들에게 희생과 고통을 안겨 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우리끼리 선하고 착하게 그래서 열심히 노력한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는 오히려 더 악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과정으로도 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병이라고 의심이 되어도 제사장에게 데려갔고 병이 나았다 싶어도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치료하러 간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문둥병은 제사장이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치료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었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 문둥병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의 형태를 무너뜨려 버립니다. 마디마디가 떨어져 나갑니다. 사람 몸의 튀어나온 부분이 점점 뭉개져 버립니다. 마디가 떨어져 나가고 튀어나온 부분이 뭉개지니까 문둥병 환자는 형상이 아주 험악해집니다. 우리 몸의 튀어나온 부분, 귀, 코, 이런 부분들이 자꾸 뭉개져 사라집니다. 죄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해 놓으셨던 우리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인 우리의 모습을 점점 무너뜨려 버립니다. 결과적으로 문둥병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죄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를 끊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병이 들면 가족을 다 버려두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환자촌으로 갑니다.
옛날에는 나환자는 전부 소록도로 가는 걸로 알았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나환자촌이 지방마다 군데군데 있더라구요. 그 때 들은 이야기 중에 하나는 남편이 병이 들어서 가게 되면 따라간 부인들이 더러 있답니다.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을까요? 그러나 반대로 부인이 병들어서 떠나야 할 때 따라간 남편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그 말을 들을 그 때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그래요. 남자들이 반성을 하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마는 요즘 같으면 조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남자들도 개과천선해서 많이 변했습니다.
어쨌든 이 병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온전한 사람으로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우리의 형상이 깨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살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 속의 죄악된 모습들이 더 많이 드러나는 걸 보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완치된 문둥병자지만 과거에 병들었던 흔적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지요.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기 전에 완치되었으면 손가락이 붙어 있겠지만 손가락이 떨어져나간 후에 완치되었으면 완치되었지만 그래도 손가락은 없습니다.
이 죄가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많이 끼쳤고 우린 지금도 그런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치되었지만 아직도 이 죄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모습을 흉칙하게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찔러서 아픈 것도 행복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문둥병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감각이 없어지는 겁니다. 옛날 우리가 교육 받을 때 문둥병의 증세 중의 하나가 살이 우묵하게 들어가고 거기 흰털이 나고 바늘로 찔러보아서 아프지 않으면 문둥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난삼아서 옆에 있는 아이를 콕 찔러보고 “아야!” 하잖아요? “니 문둥이 아니네.” 그러면 찔린 놈도 웃고 말죠.
여러분, 문둥병은 찔러도 감각이 없습니다. 나환자들을 치료하던 의사 한분이 아주 피곤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신발을 벗는데 뒷꿈치에 감각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차 싶어서 바늘로 찔러보았더니 아프지 않은 겁니다. 그 순간에 이 분이, 나환자를 전문으로 치료하던 외과의사였는데 ‘내가 나환자를 돕자고 나병이라는 것이 전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안심하고 해야 된다고 여태껏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했는데 내가 나환자가 되었다면 앞으로 어떻게 일할 것인가 그리고 나환자 입장에서 어떻게 외과수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혼자 밤을 새우며 고민을 했답니다. ‘이제까지 내가 해 오던 모든 일을 손을 놓아야 하고 나도 나 혼자서 떠나야 하고 여태까지 내가 나환자를 도와야 한다고 그렇게 많은 일을 벌였던 것이 이젠 오히려 내가 그렇게 되어야 될 입장이 아니냐?’ 밤새도록 고민을 했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이튿날 아침에 또 찔러본 거죠. 찔러보니까 아프더래요. 여러분, 찔러서 아플 때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요? 세상 천지에 바늘로 찔러서 아픈 기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 분이 글을 썼더라구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너무 피로하고 조이는 신발을 신고 너무 많은 여행을 한 끝에 잠시 신경이 마비가 되어있었던 걸 의사 자신도 모르고 나병 걸렸다고 밤새도록 오만 가지 그림을 다 그렸더라는 겁니다.
무감각하기 때문에 신발에 있는 못이 올라와서 발바닥을 찌릅니다. 그걸 모르니까 그 부분이 상처가 나고 썩어 들어가는 거죠. 찔러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이 문둥병의 특징 중의 한가지입니다. 여러분, 혹시 옆에 있는 성도들과 싸움을 하거나 안 좋은 소리하고 난 다음 돌아가서 ‘그래도 내가 이게 무슨 짓이냐?’ 차마 내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못하면서 속으로 가슴이 아프고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습니까? 아직은 문둥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감각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교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걱정이 되고 염려스럽습니까? 감각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옆의 성도들과 싸우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못된 소리 해 놓고도 집에 가서 편안하게 잠 잘 주무십니까? 감각이 죽었다는 뜻이고 문둥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찌르면 찔리는 아픔이 있기를 바랍니다. 찔려서 아픈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아십니까? 누구에게 쓴소리 한마디 내던지고 나니까 ‘그 성도가 나로 인해서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싶고, 아니면 남이 전혀 알지 못하는 죄를 짓고 나면 ‘나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며 힘들어 하실까?’를 생각하고 가슴 아픈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찔렀을 때에 아픔이 살아있는 성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둥병자예요. 죽을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문둥병의 특징은 언제 걸렸는지, 자신이 걸려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병입니다. 병이 걸려 있으면서도 이게 어떤 병인지, 내가 걸렸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가령 건강이 악화되었다거나 화상을 입었다거나 종기가 났다거나 하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 속으로 한발 한발 내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죄짓는다고 생각하고 죄를 짓거나, 처음부터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려고 나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발 한발 죄 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터져 나오는 거죠. 일단 터져 나오게 되면 감당을 못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건강하지 못한 삶이 이런 경우인데, 예를 들어서 건강하고 튼튼한 가정이나 회사라면 IMF가 터져도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가정이나 회사는 IMF 이후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젠가 ‘빚지지 맙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린 것이 생각납니다. 빚 안 지고 어떻게 삽니까? 그러나 우리 소득이 얼마고 지출이 얼마인지 감안해서 수준에 잘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공짜같은 기분으로 능력 이상의 카드를 긋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 우리 스스로 감당 못하게 되고 맙니다.
‘복권사지 마십시다’ 하고 말씀드렸는데 그 다음 수요일날 우리 백 강도사님이 ‘샀는 복권 갔다 버리십시오’라고 설교하더군요. 아니 그거 하나 사면 어떻고 또 이왕지사 사 놓은 것이 혹시 당첨되었을지도 모르는데 한 번쯤 보는 게 뭐 어때요? 또 어느 분이 질문해서 답변을 잘 못했는데요, “강도사님! 메가마켓에서 사은권을 주는데 당첨되면 어떻게 합니까?” 건강한 삶이 되려고 한다면 분명한 주관을 하나 가집시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공짜를 바라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면 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기꾼에게 잘 당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도 약간의 문제는 있습니다. 사기꾼이 어떤 사람을 노립니까? 공짜 좋아하는 사람을 노립니다. 공짜를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은 사기꾼에게 잘 걸려들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건전한 삶이란 작건 크건 공짜를 바라지 않으며 불로소득이나 한꺼번에 큰 횡재가 떨어지는 요행수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공짜나 불로소득이라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되면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꼭 죄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이게 무슨 죄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싶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금살금 잠식해 들어와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건강한 삶이 되도록 긴장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와 말씀이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공짜 좋아하고 횡재를 바라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새벽기도를 나오는 사람들은 텔레비젼을 많이 볼 수도 없습니다. 텔레비젼을 너무 즐기지는 마십시오. 요즘도 있는가 모르겠지만 토요일에 토요명화까지 다 보면서 어떻게 주일을 잘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일찍 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닥쳐 올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가 나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것을 막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니 기도와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지키는 보초로서 이 기도와 말씀은 좋은 보초병이 될 수 있습니다.
완치된 문둥이
45절과 46절이 문둥병자가 해야 할 행동들에 관한 것입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내가 막아야 됩니다. ‘나와 접촉해서는 안됩니다’라는 표시를 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을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곳에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작년에 애양원 다녀와서 말씀드린 적이 있죠? 애양원이 나환자를 수용해서 치료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이 발전하게 된 초창기의 얘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나환자가 발생하면 마을에서 쫓아냅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광주로 가다보니까 길가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한 명 발견한 거죠. 고치겠다고 자기 말에 태워서 데려갔는데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자갈과 모래를 던지더랍니다. 선교사가 서툰 한국말로 “외국인인 나도 이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데 당신들은 동족 아닙니까? 동족을 어떻게 이렇게 대접할 수 있습니까?” 데려가서 치료하려고 애쓰다가 그 여인은 죽었습니다. 그걸 가슴 아프게 여기고 나환자 치료를 시작한 거죠. 천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을 찾아와서 치료해주었던 그분들이 천사 아닙니까?
반대로 이 병이 들었다면 사람 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병이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죄인이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도저히 살 수 없는 문둥이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놓여났고, 그 죄에서 깨끗이 용서함을 받은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잊지 마십시오.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음식이든지 잘 먹습니다. 음식마다 다 감사합니다.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매사에 불평이 많죠. 잘 먹고 잘 살 때에도 과거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먹니 못 먹니 하지만 옛날 임금님도 이만큼 못 먹었을 거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러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쫓겨나서 어떻게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레위기 13장을 읽으십시오. 13장의 이 문둥병자가 바로 과거의 내 모습이고 내가 죄인되어서 이런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이 모습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오늘 이 모습으로 아니 앞으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성도들 때문에 가끔 괴롭습니까? 성질 같으면 욕이라도 해주고 싶지만 믿는 내가, 내가 조금 더 안다는 것 때문에 참느라고 괴롭습니까? 다른 성도들이 하는 말 한마디 듣고 나니까 가슴 아프고 성질이 나고 짜증이 납니까? 교회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까? 여러분이 문둥이 시절에는 옆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들어도 감각이 없었습니다.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성질대로 싸우는 것은 감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아픔을 느끼느냐는 말입니다. 다른 성도들 하는 짓 때문에 내가 가슴이 아프고 짜증이 나고 힘들다고요? 그래도 감사하십시오. 감각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마귀 손에 넘어가서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나만 잘 살면 되고, 우리 가정이 신앙적이든 아니든 내 신앙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면 이 모든 일에 무감각한 나는 문둥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감사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가슴이 아프고 힘든 일이 참 많더라. 이것이 정상적인 우리의 삶입니다. 이 병을 고쳐서 감각이 살아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레위기 13장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우리가 오늘 이런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다 문둥이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모양에 이상이 있다 해도 ‘완치된 문둥이’ 입니다. 우리에게 떨어져 나간 지체가 있어서 온전하지 못하다면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날 깨끗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의 모습을 결코 잊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