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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워레의 막장소설
글쓴이 : 유워레
수인은 감자 하나를 반으로 쪼갰다. 그 중 하나는 다시 반으로 나누어 잡고 나박썰기를 해서 물이 반쯤 찬 뚝배기에 넣었다. 나머지 하나는 얇게 썰어 눕히고 다시 채썰기를 한다. 기름이 둘러진 후라이팬에 채썰기된 감자가 투신을 하자 ‘치이익’하면서 볶아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준성아! 준성아! 멀었어?”
“다 됐어!”
“빨리 나와서 밥 먹어.”
“양말 어딨어?”
“거기 옷장에 두 번째 서랍... 어떻게 넌 번번히 양말 하나 못 찾니?”
호박 반쪽을 다시 짚어들고 이번에도 반으로 나눈다. 그 중 하나는 반으로 잘라 나박썰기를 해서 다시 뚝배기 안으로 던져졌다. 나머지 반은 다시 채썰기 되어서 방금 감자를 볶아낸 후라이팬에 던져진다. 이번엔 감자를 볶을 때완 다르게 소금 외에 마늘도 좀 다져서 넣는다. 남은 마늘은 다시 뚝배기 행이다.
수인은 급하게 생각난 듯 냉장고에서 두부 1/4 조각을 꺼내어 다시 반으로 갈랐다. 반은 뚝배기 행이고 나머지 반은 호박을 볶아낸 후라이팬을 키친타월로 닦아내고 노릇노릇 구웠다.
“넥타이...”
“메는거 배우라니까...”
“해주는게 더 좋아.”
“알았어.”
뚝배기에 불을 끄고 돌아선 수인이가 준성의 넥타이를 메어 준다. 이 분주한 아침은 여느 맞벌이 부부의 가정집의 모습과 똑같다. 이미 출근 준비를 끝낸 수인은 앞치마를 벗어서 단정한 정장의 모습이 되었고 식탁 위에 뚝배기를 옮기고 담아놓은 감자볶음, 호박볶음, 두부구이를 놓는다. 냉장고를 열어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을 꺼내는 준성이도 분주하다.
수인이가 밥을 푸고 돌아서자 준성이는 수인이의 전용컵에 물을 따르고 있다. 수인이가 씽긋 웃으면서 준성이의 컵에 우유를 부어준다.
“엄마, 오늘 올거야?”
“그럼, 가야지... 우리 아들 공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엄마가 가서 지켜볼거야.”
“보라이모도 왔으면 좋겠다.”
“보라이모는 안돼. 이모는 회사에 있을 시간이잖아.”
“엄마도 회사에 있을 시간이잖아.”
“엄만 학교 참관 수업 때문에 반차를 냈으니까...”
“보라이모는 애인 참관 수업 때문에 반차 내면 되잖아!”
콕
이제 11살인 준성이가 얼마 전 홍콩 지사에서 근무를 끝내고 돌아온 자신의 친구 보라를 좋아하는게 조금 당황스러운 수인이다. 요즘 아이들은 사춘기도 빨리 온다는데 정말 보라를 좋아하는 거면 어떻하나 싶기도 하다. 다행히 보라는 이런 준성이를 그냥 귀엽게 넘겨주고 있다.
고향이 부산인 수인은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에 왔었고 아버지는 지금도 고향에 있다. 내성적이고 친구가 별로 없던 수인이에게 대학 동창들 보다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서 만난 보라가 더 좋은 친구였다. 보라가 없었다면 그 힘겹던 시절을 어떻게 견디어 냈을지 모르겠다. 3년 전 수인과 준성을 놓고 홍콩행 비행기로 오르던 보라는 마치 엄마가 자식을 놓고 가는 것처럼 수인이를 걱정해 주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낸 20년을 놀리듯 20살 이후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수인이를 12년간을 지켜봐 준 고마운 친구이다. 보라는 본사가 미국인 글로벌 그룹의 회계팀에 있었고 지난 3년간 홍콩지사에서 근무를 하고 돌아왔다. 평소엔 따뜻하고 자상한 보라가 칼 같은 직장 상사라는 말을 대학 후배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늦겠다. 빨리 먹어.”
“엄마가 딴 생각 했으면서!”
“그래... 미안해! 얼른 먹고 가자. 버스 놓치겠다.”
수인은 준성이 스쿨버스에 오르는걸 지켜보고 자리에 앉은 준성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허름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지하철 입구로 향했다.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으로 자리가 하나 보인다. 바로 앞은 아니지만 아무도 앉지 않으니 저길 가서 앉을 요량으로 다가가는데 신문을 든 젊은 남자가 앉는다.
‘뭐야...’
차가운 이상의 고급자켓을 입은 그는 노트북을 다리 사이에 놓고 서류가방은 무릎 위에 올린 채 신문을 정말 열심히 읽고 있다. 삼성역이란 안내방송이 나오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뛰어나간다. 바로 앞 수인이가 앉으려니 노트북이 있다.
“저기!”
문은 이미 닫히고 있었고 수인이는 그 노트북을 무릎 위에 놓고 앉았다. 준성을 배웅하느라 출근시간이 빠듯하니 이따 퇴근 길에 유실물센터에 신고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뒤 강남역이란 안내에 수인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우르르 지하철을 내렸다. 무거운 노트북으로 조금 짜증이 났다.
수인이 다니는 회사는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숙녀복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회계팀장으로 일하는 중학교 동창 찬혁이의 도움으로 10년간을 홍보팀에서 근무했다. 찬혁이를 부산이 아닌 서울에서 다시 만났을 때 수인이는 막 출산을 하고 막막한 현실에 죽고 싶었다. 같은 병실을 사용하던 산모의 남편이 찬혁이었고 수인의 딱한 처지를 병문안을 온 보라에게 듣고는 이런 좋은 직장을 구해주었다.
중학교 때 잠시 찬혁이를 좋아한 적도 있었던 수인이는 망가진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보여주는게 죽을 만큼 싫었지만 젖먹이 준성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보라의 집에서 3년 정도 지내면서 보라어머니의 도움으로 준성이도 잘 건사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수인이는 지금도 보라와 찬혁이 그리고 보라어머니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수인은 오전근무를 마치고 나와 지금은 준성이의 참관 수업을 위해 초성초등학교로 터벅 터벅 걸어올라가고 있다. 고급승용차들이 줄지어 올라가고 있는 그 언덕 위에 광성초등학교는 정말 교문으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었다. 아직 더운 날씨는 아닌데 수인은 등에 땀이 나서 결국 얇은 자켓을 벗었고 수인의 옆으로 고급 승용차가 섰다. 유리문이 내려가고 동현이 보인다.
“타지?”
“됐어.”
“그럼...”
그대로 멀어져가는 그 고급차를 바라보면서 손에든 자켓을 다른 손으로 옮기며 수인은 그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했던 그 불같았던 시간들을 다시 후회했다. 보통 아무리 끔찍했던 기억도 세월이 흐르면 아름답진 못해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데10년이란 세월은 생각보다 길지 못한가 보다. 준성이가 초등학교 1학년 한학기를 끝냈을 때 초성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겠다며 8년 만에 수인이 앞에 나타났을 때 당연히 거절을 했었다.
그래도 한 때 부부라는 이름으로 지냈는데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며 생활비와 양육비를 보태겠다는 동현에게 다신 그 낯짝을 보여주지 않는게 도와주는 거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가 준성이의 아빠로 준성이를 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게할 권리는 자신에게도 있다고 말했을 때 아무 말도 못했다. 수인이가 준성이를 위해 좋은 학교나 유학을 보내 줄 수 있냐는 말은 수인이에게 상처이기도 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래서 생활비는 거절하고 앞으로 들어갈 학비에 대해서는 동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초성초등학교로 전학을 시킨 후로 동현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행사나 부모가 와야하는 행사에는 빠짐없이 참석을 했다. 그 모든 행사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는지 모르겠지만 바쁜 엄마에게 미안해서 알리지 않은 행사에 뒤늦게 준성의 친구 엄마와 통화로 알고 찾아가보니 동현이가 준성이와 환하게 웃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날 준성이를 낳고 처음으로 멍이 들도록 회초리를 들었었다. 밤새 그 멍든 다리를 보며 얼마나 울고 울었는지 모른다.
준성이가 발표를 하는 모습을 이렇게 나란히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처음 서울로 올라와 수인이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11시까지 편의점에 있었다. 처음 2달 정도를 보라와 함께 일했었는데 보라는 재미삼아 해본 아르바이트가 힘들고 자신의 용돈에 턱없이 부족한 봉투를 받아보곤 그래도 수인이가 있다는 이유로 한 달을 더 버티다가 그만 두었다.
수인이가 다니던 대학교와 인접한 대학교가 2개나 더 있던 그 삼거리 편의점은 손님이 많았다. 그 중에도 거의 매일같이 찾아오는 잘생긴 동현은 붙임성이 좋은 보라와 금방 농담을 따먹고 반말까지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보라와 그가 잡은 약속으로 가끔 밥도 함께 먹었고 술도 마셨다. 보라가 편의점을 그만두고 꽤 많은 남학생들이 뜸해지자 동현도 같은 이유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보이지 않던 동현이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편의점에 들어섰을 때 수인은 너무나 반가웠다. 병원에 있어서 오지 못했는데 혹시 보고 싶었냐는 그의 말에 수줍게 웃어보였다. 그날 이후로 동현은 수인의 남자친구가 되어서 수인이가 일이 끝나는 11시면 어김없이 찾아와 자취를 하던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언제나 키스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 수인이에게 투정을 부리며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 날들은 참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그해 늦가을 밤 얼굴이 많이 상한 동현이가 막무가내로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수인이 집앞에서 한 시간을 넘게 버티었고 처음으로 수인이의 자췻방에 동현이를 들였었다. 차 한잔만 하고 돌아간다던 그 약속은 연인들의 흔한 거짓말이기에 좀더 친밀한 밤이 되었다.
부모님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수인은 모른다. 동현이가 입고 드는 브랜드를 알아보지는 못해도 그저 그렇게 가난한 집안은 아닐거란 건 알고 있었다. 동현과 석달을 함께 지내고 있었을 때 자췻집 앞에 고급 승용차가 서있고 수인의 뺨을 때리는 밍크로 휘감은 이 고상하게 생긴 여자가 동현이의 엄마라는 말에 수인은 동현과 자신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동현의 엄마와 함께 온 수행원들에게 잡혀서 동현이가 돌아가고 모든 것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수인이는 슬프다고 일을 거르거나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슬픔에 잠겨 있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장학금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점점 더 까칠해져가는 얼굴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는 말과 희미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새로 봄이 찾아 왔을 때 편의점은 다시 학생들로 붐볐다.
그리고 떨어진 컵라면을 채우기 위해 진열대 위 상자를 힘겹게 내리는 수인이의 손에서 상자가 사라졌고 놀라 돌아보니 비쩍 마른 동현이 보였다. 동현을 보자 수인은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새로 들어온 새내기 알바생이 입이 떡 벌어져서 바라보는 앞에서 뜨겁게 키스를 했고 양해를 구하고 대학교 연못 앞에 나란히 섰었다.
“새학기가 시작 되어서 금족령이라도 풀린 거야? 많이 아팠어? 얼굴이 안 좋아...”
“수인아, 우리 결혼하자.”
“뭐?”
“우리 결혼하자고... 부모님이 허락했어.”
수인이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식 준비를 위해 장래 시어머니의 개인 비서에게 무시를 당하며 여기 저기 끌려다니던 끔찍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수인 주변의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결혼식이었다. 보라가 신부대기실에서 부럽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보라도 보지 못한 이 성대한 결혼식은 수인의 인생에 최고로 행복한 날이었고 또 가장 큰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수인이는 자신이 결혼한 동현의 거대한 성같은 집에서 하루 하루 죽어갔다. 시어머니는 끝임없는 경멸을 보내왔고 시아버지는 눈도 맞춰주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도 수인이를 투명인간 취급 했다. 함께 살고 있는 한 살 아래 시누이인 하나는 수인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가져오라고 하거나 사다달라는 심부름을 시켰고 그게 도대체 뭔지를 물어오는 수인이를 신기한 외계인이라도 되는 듯 말하며 놀렸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 시켜대는 일들이라는 걸 알고 수인은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보라에게 전화를 걸어 그게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했다.
그래도 처음 몇 달은 사랑하는 동현의 아내로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또 학교에서 보라를 만나서 수다를 떨다보면 그 지옥같은 시간도 견디어 낼 만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고 보라가 끔찍한 사실을 알기 전까지의 일이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지난 번 미국으로 들어가야 하는 교수의 사정으로 미리 종강을 해버린 과목이 있어서 수인은 평소보다 3시간 정도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그 집안 며느리라면 당연히 초인종을 울리고 일하는 이에게 공손히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받으며 들어설지 모르지만 수인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수인이 초인종을 눌렀다가 무시를 했다가 마침 도착한 동현에게 크게 일하는 분이 혼난 이후로는 차라리 수인은 열쇠로 열고 들어왔었다. 진짜 투명인간이라면 열쇠 따위는 필요가 없을 테지만 수인은 존재하고 누구에게나 보이는 사람이었다.
수인이 2층의 자신의 신혼방을 향해 다가갔을 때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라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씨 아줌마(주방담당) 오실 시간 다 되어가요...”
“조금만 더 있자...”
“안되는데...”
“니네 엄마는 언제 오냐?”
“모레요...”
“수인이 방학만 아니면 내일도 시간 있네.”
“아이... 몰라요.”
“우리 내일 같이 춘천갈까? 같이 바람 좀 쐬고 놀다오자.”
이 목소리는 동현과 뒷채에서 기거하는 상주도우미 김씨의 딸 지현의 목소리다. 수인이가 정원을 지나다가 가끔 마주쳤는데 그럴 때마다 인사도 없이 휑하니 무시하고 지나가던 아이였다.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수인이는 그게 못내 아쉬웠었다.
수인은 문을 벌컥 열었다. 홀딱 벗은 동현의 아래 깔린 그 아이의 모습을 확인하자 수인은 기가 막혔다. 동현은 수인의 귀에 들리지 않는 변명을 했고 지현이라는 그 아이는 황급히 자신의 옷을 대충 챙겨입고 뛰어나갔다.
“옷 입어...”
“뭐?”
“더럽고 징그러우니까 얼른 가리라고!”
그리고 화장대에 앉아서 수인이가 화장품을 들어 동현에게 집어 던졌다. 그렇게 던져 부셔버리면서 화장품이 많지 않음이 억울했다. 동현은 더 이상 날릴 화장품이 보이지 않자 안절부절하며 말도 안되는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수인은 화장대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고 급하게 옷을 다 챙겨 입은 동현은 아내가 던질 다른 물건을 찾기 전에 황급히 뛰어 나갔다. 그날 수인은 문 밖의 동현에게 접근금지를 선언하고 혼자 남편이 지저분한 행동을 한 침대의 침대보와 이불을 싹 벗겨서 아무렇게나 떨어뜨리고 새로 깐 침대보 위에 새 이불을 머리까지 뒤짚어 쓰고 울었다.
“야! 내가 말한거 사다 놓지 않고 너 여기서 뭐해!”
시누이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지른다. 수인은 대답도 하지 않고 머리까지 이불을 뒤짚어 쓴 채 반응이 없다. 침대 밑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시트와 이불을 보고 하나는 넘겨 짚듯 말한다.
“그러니까 엄마한테 지현이 빨리 내보내라고 했는데... 너 좀 아프겠다. 이번엔 봐줄게.”
문 닫히는 소리에 수인은 이불을 확 걷어낸다.
‘뭐? 그럼 지현이와 동현이가 그런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단 소리야?’
따져 물을 생각에 일어나 시누이 방으로 향했다. 시누이 방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녀가 없다. 수인은 창밖을 내다보았고 창 아래 소정원에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시누이를 보았다. 건물에 기대어 있는 동현이는 보지 못하고 혼자 있는 하나에게 물어보기 위해 방을 벗어났다.
“오빤 취향도 이상하고...”
“너까지 왜 그래?”
“아니... 도대체 지현이가 뭐 볼거 있다고... 술집 애들은 그렇다고 쳐... 오빤 취향도...”
“뭐가?”
“마누라라고 데리고 온 것도 그렇고...”
“수인이가 어때서?”
“하긴... 갠 좀 낫지... 어떻게 아빠랑 그렇고 그런 강마담이랑... 아유... 진짜 챙피해서...”
“... ...”
“엄마가 강마담하고 정리한다고 했으니까 이 결혼 허락했지...”
“... ...”
“어떻게 아빠가 데리고 살다시피 한 여자랑 그러냐? 그것도 엄마뻘하고...”
“... ....”
“아버지가 오빠 내쫓고 얼마나 우셨는 줄 알아? 은근 순정파시더라고...”
강아지에게서 손을 떼고 오빠를 보기 위해 돌아선 하나의 눈에는 분노에 찬 수인이 있었다. 그렇게 수인은 1년도 못되는 결혼기간을 끝내고 그 집을 나왔다. 니가 끝내는 결혼이니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시어머니에게 한 푼도 받을 생각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었다. 부산에 계신 아버지는 수인의 이혼 소식에 아무 말 없으셨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 전화를 하셔서는 처음부터 너무 맞지 않는 결혼이었으니 이쯤에서 끝난게 낫겠다고 액땜 했다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결혼을 허락한 후 구두수선을 하는 아버지에게 신사복 매장을 내어준다고 했을 때 거절을 하기 잘했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그걸 받지 않아 내심 서운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진짜 아버지가 잘 하셨던 거란 생각을 수인이도 했다.
동현과의 결혼을 허락한 이유는 아버지의 내연녀이던 40대 룸싸롱 여사장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댓가였다.
수인이 다니는 회사는 전남편 동욱이 자식이 없는지라 준성이를 빼앗기 위해 수인을 실직자로 만들어 버린다.
준성을 빼앗기고 힘들어하던 수인은 민욱과 사랑에 빠진다. 찬혁이는 수인을 좋아하지만 민욱을 좋아하는 수인으로 힘들다.
갑자기 준성이 학교에 입학하던 해부터 사립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킨 이유는 준성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생활비 등을 거절했으나 아이 아버지로 권리가 있다는 동현의 주장에 교육비는 거절을 못했었다.
“함께 식사라도 하고 가지?”
“됐어.”
“준성이 아빠가 뭐 사줄까?”
엄마 눈치를 보던 준성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을 한다.
“전 엄마랑 보라이모 보러 갈거예요.”
“알았다... 데려다 준다고 해도 거절할거지?”
준성의 머리를 쓰다듬고 고개를 끄덕인 수인을 잠시 바라본 동현은 자신의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간다. 아빠를 계속 쳐다보는 준성이의 손을 잡고 수인은 언덕을 내려갔다.
휴대폰이 울린다. 수인이 휴대폰을 받자 보라다.
-수인아! 우리 준성이 어딨어?-
“옆에...”
-바꿔봐!-
“준성아, 보라이모....”
휴대폰을 건네자 준성이 환한 얼굴로 소리를 지른다.
“보라씨!”
-아유, 귀야... 우리 준성씨 발표 잘했어요?-
“당연하죠! 보라씨가 와서 보셨어야 하는데...”
-그러게 아쉬워서 어쩌죠! 우리 준성씨 빨리 와요. 보라 이모가 맛난거 사줄게요!-
“네... 기다리세요!”
띠리리
둘이 주고 받는 대화에 웃음이 난다. 정말 준성이 때문에 웃는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준성이는 수인의 유일한 빛이며 희망이다. 자신의 얼그러진 삶 속에 유일하게 밝고 온전한 선물인 준성이가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보라와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보라가 홍콩에서 보낸 3년을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자 준성도 수인도 나중에 꼭 홍콩엘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푸욱 빠져들었다. 그때 건너편 테이블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잠시 시누이였던 하나다.
“보라야, 우리 그만 나가자.”
“왜? 여기서 후식도 먹고 가자.”
“이미 꽤 나왔어. 후식은 내가 살게. 가자.”
수인의 재촉에 뭔가 이유가 있을거란 생각에 보라도 주섬 주섬 옷을 챙기고 있다. 준성의 자켓을 입혀주고 있는 수인의 손길이 분주하다.
“어머... 이게 누구야... 잘 지냈어요? 너가 준성이니?”
수인에게는 궁금하지도 않을거면서 안부를 준성이에게는 준성이인지를 확인하는 질문을 던진 하나가 테이블 옆에 서 있다. 수인은 이 반갑지 않은 만남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며 대답을 한다. 이제 30대인 수인도 그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어머... 이하나씨 아니세요?”
“이하나씨? 흥”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약혼자랑 데이트 중이요.”
수인은 하나가 온 테이블을 쓱 봤다. 등이 보이게 앉아 있던 젊은 남자는 하나가 이동해온 이쪽이 궁금했는지 돌아보고 있었다. 가만보니 낯이 좀 익다. 뭐 그래봐야 이하나와 얽힌 인물이라면 관심없다.
“그럼, 데이트 하세요. 보라야, 우리 가자.”
“그래...”
“준성아, 얼른 일어나. 우린 막 나가려던 참이라 그럼 데이트 잘 하세요.”
준성이의 손을 잡고 걸어나가는 수인과 그 뒤를 따라가는 보라의 뒷모습을 보며 하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자신의 테이블로 향한다. 자리에 앉자 남의 일에 도통 관심이 없는 민욱이 질문을 다 해온다.
“누구예요?”
너무나 얌전하고 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하나가 대답을 한다.
“저희 조카랑 그아이 엄마요.”
“그아이 엄마? 올케라고 해야하는거 아니예요?”
“일년도 못 살고 나가서... 이젠 남인걸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저번에 뵌 형님의?”
“네. 저 오빠 한 명이예요.”
“네.”
하나는 얌전히 자신의 키위 주스에 입술을 댄다. 조금이라도 어려보이려는 하나의 복장이 어색하다. 하나는 민욱이가 너무 좋다. 민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회사의 모든 광고를 민기획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현재 회장직에 있는 어머니는 민기획의 프레젠테이션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을 하셨지만 민욱은 하나의 도움으로 그 모든 계약이 성사된 줄 알고 있다. 그녀가 회사에서 아무런 입김도 없다는 것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다. 그녀가 두 번이나 이혼을 했다는 것도...
이제 29살인 민욱과 그래봐야 2살 더 많을 뿐인데 하나가 저렇게 어려보이려고 노력하는게 조금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민욱의 눈에 사실 하나가 나이가 좀 들어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방금 나간 아이 엄마라는 분도 하나보다는 어려보인다. 그러고보니 그 여자 어디서 본거 같다. 어쨌든 민욱은 그저 조건이 맞는 결혼상대자로 하나보다 좋은 여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을 했다. 굳이 결혼을 한다면 이렇게 능력있는 여자도 좋지 않겠는가...
계단을 내려와 보라의 차를 찾아 탔다. 차에 오르자 보라는 궁금함을 참느라 힘들었는지 한번에 질문을 쏟아 놓는다.
“그 여자 누구야? 그여자가 준성이 어떻게 알아? 그리고 너 그여자 싫어 하는거 같던데? 그 여자 옷차림 보니까 이상하더라. 우리 또래인거 같은데 어떻게 옷을... 푸하하하. 그여자 뭐야?”
그 긴 질문에 수인은 단 한마디 대답을 했고 그 간결한 대답은 보라가 더 이상 궁금함을 품지 못할 만큼 명료한 대답이었다.
“그자식 동생”
허름한 수인의 아파트 입구에 보라가 차를 세우고 수인이 내렸다. 곤하게 잠든 준성이를 힘겹게 안고 보라에게 잘 가란 인사를 하고 아파트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이 5층짜리 아파트를 11살 준성을 안고 올라가려니 힘이 부치다. 벌써 11살이 된 아들이 신기하고 벌써 33살이나 된 자신의 나이가 실감나지 않는다. 3층에 자신의 아파트 현관에 힘겹게 열쇠를 꽂아 돌리고 아들을 침대에 눕혔다. 평소같으면 깨워서 올라왔겠지만 세상에 엄마밖에 없는 외로운 아이를 만든 죄책감이 들었던 수인은 그렇게 준성이를 안아서 침대에 누였다.
그 집을 나와서 두달 후 몸이 너무 아파 병원엘 갔었다. 그게 임신이란 걸 알고 그녀는 정말 많이 울었다. 그리고 이동현 그 작자의 아이를 낳을 건인지에 대한 고민과 생명을 내 맘대로 없애도 되는 건지 사이에서 갈등을 했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받게 될 혼란이나 상처는 그때 생각해보지 못했다. 보라 말처럼 그냥 없애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더라면 오늘 이렇게 곤하게 자는 준성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은 준성이가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한 삶을 살고 있지만 준성이도 과연 자신이 제공하는 이 삶이 가장 행복한지 자신이 없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오랜만에 함께 밥을 먹자는 찬혁이 찾아와 막 건물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여자가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녀가 걸어온 곳을 바라보니 검은색 고급차가 있다. 뒷유리가 천천히 내려가고 예전에 ‘어머님’이라고 불렀던 여자가 앉아 있다. 여전히 고상해보이는 외모에 검게 염색한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10년이란 세월 앞에 주름이 많이 보였다.
“잠시 보시자고 하십니다.”
“네...”
수인은 돌아서서 찬혁에게 양해를 구했다.
“찬혁아... 우리 점심 다음에 하자...”
“그래...”
그렇게 찬혁을 남겨두고 뒷유리가 올라가고 있는 그 차에 올랐다.
“안녕하셨어요?”
“잘 지냈다.”
“너도 잘 지냈니?”
“네...”
“이제 서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볼 일이 있더구나.”
“... ...”
“준성이를 데려가야겠다.”
“무슨 소리세요? 준성이를 데려가다니요?”
“우리 아이가 애를 낳을 수 없다는 구나. 준성이 머리카락으로 친자확인을 했더니 동현이 아이가 맞더구나. 신기하게 너랑은 생산한 아이를 왜 못 낳는다는 건지...”
“말도 안되는 소리 마세요.”
문을 열려는 수인에게 단호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시어머니가 말한다.
“이미 법적 준비는 되었다. 그냥 보내준다면 충분한 보상도 할거다.”
“지우라면서요! 지우라고 했잖아요! 지우지 않을건면 다신 눈 앞에 나타나지 말고 손주라며 내밀지도 말라면서요?”
그랬었다. 시어머니는 어떻게 알았는지 6개월이 넘어서 꿈틀거리는 준성이를 지우라며 보라네 집에 머물고 있던 수인을 찾아 왓었다. 시커먼 남자들을 동원해서 수인을 끌고 병원까지 갔었는데 보라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서 저지를 당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보라아버지가 경찰대학에도 출강하는 법학과 교수라는 사실을 모르고 함부로 수인이를 대하다가 톡톡하게 혼쭐이 났었고 대단한 집안과의 싸움으로 보라아버지가 피해를 볼까 수인이가 울며 불며 말리지 않았더라면 시어머니는 법정에 섰어야 했다.
그 사실을 기억해 냈는지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현의 모친은 말을 이었다.
“너보다 훨씬 잘 키울거다. 우리 집안의 후계자로 크는 거다. 아무렴, 이런 거지 같은 집에서 자라는 것보단 낫지 않겠니?”
“그럴 수 없어요. 아무리 유능한 변호사를 동원하셔도 못 데려 가실 겁니다.”
“그건 보면 알 일이지...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연락하거라.”
수인은 차에서 내렸고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와 동현 모친의 수행비서가 차에 올라탔다.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면서도 수인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걱정보다 훨씬 큰 일이었다.
입맛이 없어져 자리로 돌아온 수인은 무심코 책상 아래 수납장을 열었다가 노트북을 보았다. 아차... 이 노트북을 유실물 센터에 맡긴다는게 그만 잊고 있었다. 차라리 놓고 내렸더라면 누군가 가져갔을진 몰라도 이미 유실물 센터에 맡겨졌을거고 주인 손에 있을 수도 있었을텐데... 수인은 그 노트북 가방을 열었다. 거기엔 노트북과 함께 A4용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용지를 들여다보니 무슨 제안서이다. 거기에 적힌 작성자의 이름과 연락처가 눈에 들어왔다. 수인은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최민욱입니다.-
“안녕하세요. 전 노트북...”
-제 노트북을 갖고 계십니까?-
“네, 유실물 센터에 맡긴다는게....”
-거기 어딥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시면...”
당장 오겠다는 그에게 회사 옆 커피숖을 알려줬다. 12분 안에 도착하겠다는 걸 보면 이 근처에서 오나보다 생각하고 그 제안서를 도로 밀어넣고 노트북 가방의 지퍼를 올려 닫고 걸어 나갔다. 10분이면 10분, 15분이면 15분이지 12분은 또 뭔가...
커피숖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12분이라고 말한 상대방으로 인해 정말 12분 안에 올까 싶어서 체크했던 시간에서 벌써 11분이 지났다. 그 사람 말대로라면 12시 47분에 도착을 해야한다. 아마 지금은 약속한 12분에서 11분 30초 쯤 지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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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뭐야...
눈 앞에 어떤 남자가 헉헉 거리면서 섰다. 휴대폰 시계가 12:47로 변했다. 수인은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보았다. 이 남자는... 하나가 약혼자라고 말했던 그 사람이다. 수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는다. 전에 보았던 단정하고 차갑던 인상의 그는 지금 헐떡거리고 눈은 풀려 있는 채로 넥타이를 당겨 내리고 있었다.
“노... 노트북요... 제 노트북...”
“여기요.”
“연락처 주세요. 제가 답례...”
“됐어요.”
“그래도...”
“그럼 이거 계산 해주세요.”
계산서를 들려다가 내려놓고 수인은 그 커피숖을 빠져나왔다. 하필 이동현의 동생 약혼자를 만나다니... 이동현과 관련된 모든 것은 재수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회사로 향했다.
자리로 돌아오니 찬혁이 서있다. 아까 그녀가 그렇게 그 차에 타서 내심 걱정이 되었나 보다. 걱정하는 찬혁을 안심시키기 위해 수인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찬혁아, 밥 먹었어?”
“응... 아까 누구야?”
“그냥 아는 사람...”
“수인아, 할 말 있는데 너 저녁에 시간 있니?”
“저녁식사 하자고?”
“응”
사실 오전에 여름방학인 준성이는 시집을 가지 않고 속을 썩이는 외동딸 보라로 아직 손주가 없는 보라어머니에겐 손주 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2~3일 데리고 있겠다며 보라에게 데려오라고 했다며 보라가 오늘 학원에서 바로 준성이를 찾아서 가겠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그러지 뭐...”
“그럼, 퇴근하고 기다려. 내가 데리러 올게.”
“응...”
무슨 할말이 있길래 회사에서 하지 않고 식사까지 하면서 하려나 싶으면서 수인은 어깨를 으쓱하고 회사 신제품에 대한 홍보자료를 손보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찬혁이 하는 말을 듣자 오늘 왜 이러나 싶었다. 그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던 찬혁이가 자신에게 중학교부터 좋아했다며 사랑 고백이라니 너무 난처하다. 그리고 친구라면서 한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찬혁이가 이혼한지 벌써 1년째란 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미안했다. 이제 서로 편한 싱글인데 합칠 상대로 자신이 어떤지를 물었다.
“찬혁아, 미안... 난...”
“됐어. 거절이라는거지?”
“미안...”
“미안은 무슨... 그냥 못 들은 것으로 해줘. 우리 앞으로도 편하게 보자.”
역시 멋진 놈이다. 찬혁이는 깔끔하게 수인이가 어떻게 말해야 될지 난처한 그 상황을 수긍하고 앞으로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했고 이어진 식사와 가벼운 한 잔을 이어나가면서 친구로서의 모습만 보여줬다. 기분이 좋아 술을 조금 과하게 마셨다.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찬혁에게 그건 애인에게나 해주라고 하면서 등을 툭툭 쳐주자 찬혁은 쿨하게 택시를 타고 떠났다.
시계를 보니 지하철은 끊겼지만 아직 버스는 끊길 시간이 아닌데 이놈의 버스는 왜 오지 않는 걸까? 수인은 더운 여름의 끈적임이 싫어서 짜증이 좀 났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열도 오르고 이 버스정류장 가로등 아래 벤치는 날벌레와 모기가 너무 많다. 택시를 탈까 싶지만 친구에게 밥을 얻어 먹었으니 술은 자신이 산다고 큰소리 치며 현금을 썼다. 평소 신용카드는 딱 한 장만 갖고 있고 왠만하면 소비를 줄이기 위해 카드를 쓰지 않는 수인이였다. 돈은 손에서 나갈 때 확실히 인지가 되지만 카드는 긁으면 끝이고 외상이라 돈을 모으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었다. 생각보다 많이 나온 술값에 살짝 당황도 했었다.
지갑을 살짝 열어보니 4천원 뿐이다. 집까지 택시비는 만원이 넘을텐데 걱정이다. 그래도 요즘은 카드 택시도 있다던데 이젠 버스는 포기하고 지나가는 택시가 카드택시라고 써있는지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택시가 섰다. 카드택시가 아니다. 그 택시를 타야할 거 같은 남자가 타지 않고 수인을 보고 있다.
“안 타요? 먼저 오셨는데?”
“네... 전 다른거 기다려요.”
“아저씨, 죄송한데 그냥 가세요.”
기다리는 택시기사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가오는 남자가 야심한 시간이라 조금 무섭다. 가로등이 있는 수인의 앞에 그 남자가 서자 하나의 약혼자다.
“어...”
“네, 노트북이예요.”
손에 든 노트북 가방을 툭툭 쳐보이고 수인이 앉은 벤치 옆에 앉는다. 보아하니 이 친구도 술은 좀 마신듯 보인다. 기분도 좋아보이는데 아까 낮에 보았던 거보다 훨씬 풀어져보인다.
“기분 좋게 한 잔 하셨나보네요.”
“네. 덕분에...”
“노트북요? 그거 도움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근데 이시간에 버스 없을텐데 택시 왜 안타요?”
“그게... 카드 택시 기다리고 있어요.”
“카드택시?”
“현금이 없어서...”
“아... 그럼 제가 내어드릴게요.”
“됐어요.”
“노트북도 고맙고...”
“됐다니까요. 모르는 사람한테...”
“그럼, 저 기분 너무 좋은데 술이 조금 부족하거든요. 저랑 한잔만 더 해주실래요? 그럼 제가 가는 길에 버리고 가 드릴게요.”
“버려요?”
“네, 조금 돌아서... 그럼 대신 택시비 내는거 아니고 저랑 술동무 해주셨으니까 모르는 사람한테 신세지는 것도 아니죠.”
오랜만에 꽁지빠지게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저녁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버스 정류장에서 한 시간 가까이 보냈더니 술도 거의 다 깨고 수인도 뭔가 좀 아쉬웠다. 둘은 근처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언더락스 잔에 위스키와 과일안주만 홀짝일거 같이 생긴 이 남자는 소주에 홍합국물 그리고 꼼장어를 먹으며 노트북 덕분에 성사된 계약으로 기분이 좋아 자신의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광고회사에서 일하는거 같은데 그의 이야기들은 꽤나 즐거웠다.
그의 말대로 조금 돌아서인지 많이 돌아서인지는 모르지만 수인이는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 버려졌고 수인은 즐거운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수인은 몰랐지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출근한 수인은 어이가 없다. 사표를 쓰란다. 무슨 소리냐며 팀장에게 따지자 지난 번 수인이 배포한 홍보자료가 잘못 되었단다. 자료를 받아서 보자 수인이 보낸 자료와 다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기 저기 전화를 돌려보아도 모른다는 답변 뿐이다. 무슨 보도자료 한번 잘못 나갔다고 사표냐고 따지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수인은 사무실을 빠져 나와 건물 밖 공원으로 향했다.
-이동현입니다.-
“이동현, 이 나쁜 놈... 니 놈 짓이야, 니 엄마 짓이야? 하긴 니 머리에서 나왔겠니? 니엄마지?”
-뭐가?-
“날 실직시켜서 우리 준성이 데리고 가려는거지?”
-우리... 너랑 나의 준성이 맞지... 10년 데리고 있었으면 된거잖아.-
“왜이래... 너 나한테 도대체 왜이래?”
-뭐 정 준성이만 보내기 그러면 너도 와. 지금 사는 여자 정리하고 받아줄게-
“미친놈... 그깟 일로 정말 내가 짤릴거 같아?”
-어, 당장은 아니어도 3개월 안에 너 그 회사에서 나오게 할 수 있어. 그건 회사 내규를 적용했을 때 일이고 왕따나 괴롭힘을 동원하면 니가 얼마나 버틸까?-
“넌 돌았어!”
띠리리
전화를 끊어버리고 수인은 다시 회사로 돌아간다.
정말 지독한 한 달 이었다. 그녀는 여기저기 탄원도 해보고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의 자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각종 루머로 그녀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사내 기밀 유출 건으로 고소를 당했고 지저분한 스캔들부터 철저하게 그녀는 망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직장이 없으면 소송에서 불리하단 말에 악착같이 버티려고 했다. 그녀가 악착같이 버티자 수인의 친구인 찬혁이가 공격받기 시작했다. 수인은 결국 두손을 들었고 짐을 챙겨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지금 이 박스를 든채 지하철을 타기 위해 타박거리고 있다.
빵빵
돌아보니 하나의 약혼자다.
그냥 앞을 보고 가는 수인이를 향해 유리창을 내린 민욱이 타라고 말한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수인이를 보고 차를 세워 내린 후 잡아 세우고 짐을 빼앗아 트렁크에 넣고 보조석에 앉힌다. 안전벨트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그녀의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전에 가본 적 있는 그녀의 허름한 아파트를 향해 운전을 한다.
흐흑...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가리고 운다. 소리는 점점 커지고 가슴을 쥐어 짜들어가는 그 소리로 민욱은 견딜 수 없이 힘들다. 이 여자가 우는데 왜 자기 가슴이 터질것처럼 아픈지 모르겠다. 민욱은 차를 인도에 바짝 붙여 세우고 비상등을 켠다. 그리고 안전벨트 두 개를 풀어버리고 수인을 가슴에 안고 등을 쓸어준다.
“무슨 일 이예요?”
“회사를... 회사를....”
“퇴사했어요?”
“... ...”
말없이 끄덕이는 수인을 느끼며 하나가 오빠가 자신의 아이를 찾기 위해 전부인을 괴롭히고 있단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더올랐다. 현재 법적으로 그녀가 좀더 유리하지만 만약 그녀의 직업이 없어지면 오빠가 훨씬 유리하단 거였다. 그래서 거래처인 그 회사에 압력을 행사중이란 얘기였다.
“이름이 뭐예요?”
“네?”
“그쪽 이름이 뭐냐구요.”
“차... 수... 인... 차수인요.”
“수인씨 내일부터 여기로 출근하세요.”
가슴의 명함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수인에게 건넨다. 그리고 다시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자신의 안전벨트를 한 후 그는 수인의 아파트를 향해 마저 나아갔다.
받는 명함을 살펴보니 거기엔 ‘민기획’ ‘대표이사 최민욱’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욱은 자신이 그렇게 좋은 사람인줄 스스로도 몰랐던 터라 자신의 행동에 놀랐다. 왜 저사람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되는지 모르겠다.
수인이 출근을 한 회사는 규모는 작아도 굵직굵직한 유명광고를 히트시킨 곳이었다. 그리고 수인에게 주어진 일은 카피 라이터라는 직책 이었다. 한 주를 지내고 보니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를 민욱이 내어준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저 좀 보세요.”
“무슨 일이죠?”
민욱은 자신의 자리 앞에 선 수인을 보며 물었다. 사실 그녀가 이 사무실로 출근을 한 이후로 그녀에게 자꾸 눈길이 가서 업무에 지장이 많다. 자신보다 4살이 많은 그녀를 보면서 설레이는 자신이 웃겼다. 민욱은 결혼에 관심도 없고 여자들과 있는 시간이 즐겁지도 않았다. 늘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했고 함께 쇼핑을 하거나 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게 귀찮았다. 지인의 소개로 하나와 만나고 있었지만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모른 척 했을 뿐이지 그녀가 소소그룹의 각종 광고를 자신이 맡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도 싫지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결혼을 한다면 소소그룹의 딸인 하나가 나쁠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그에게 지금 이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두번 봤을 뿐이지만 볼 때마다 설레이게하고 한 공간에서 일을 하다보니 정말 사랑스럽다. 자신의 이런 낯선 감정으로 그는 갈등에 휩싸였다. 과연 이 여자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하나와 아무렇지 않게 결혼을 할 날이 올까...
“저기... 고맙긴 하지만 제 자리가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거 같아서요.”
“맞아요. 급하게 만든 자리...”
“그러시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빨리 다른...”
“우리 회사가 이번에 코코커피 광고를 맡았어요.”
“네?”
“아시아 전역에서 방송될 광고가 되게 해달라고 해서 고민 중이예요.”
“네...”
“한류스타 중에 하나를 모델로 해서 괜찮은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카피가...”
“네...”
“그래서 그 카피 문구 만들라고 모셨어요.”
“정말요?”
“네, 그러니까 고민 좀 하세요.”
거짓말이다. 이미 그 광고의 카피는 내부적으로 결정이 되어 있었다. 다음주 월요일 결정된 최종안 3개를 가지고 클라이언트의 최종 의사결정이 있으면 촬영에 들어갈 것이다. 뭐 그녀가 저렇게 기쁜 얼굴을 해준다면 그 정도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수인은 법적인 절차를 밟아 나가기 위해 변호사와 정기적으로 만났다. 변호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확률이 반반이란 말을 듣고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보라에게 전화를 넣었다.
-수인이네. 어디야?-
“보라야, 잘 될까?”
-그럼... 준성이도 원하고 너도 원하는 일인데...-
준성이? 준성이가 원하는 일... 그러고 보니 수인이는 이번 일에 대해 준성이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그냥 자신이 엄마이고 준성이는 자신의 아이니까 당연히 자신과 있기를 원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준성이가 아빠에게 가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준성이는 학교에서 아빠와 있을 때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수인이 혼자서는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었나보다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수인은 책상에서 학원숙제를 하고 있는 준성이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쓰다듬고 준성이의 침대에 걸터 앉아 공부하는 준성이를 바라보았다.
“이것만 다 풀고 놀아줄게.”
“응...”
“다했다! 뭐 하고 놀아줄까?”
“준성아, 준성이가 이제 커서 아빠랑 살고 싶은지 엄마랑 살고 싶은지 결정해야 한다네...”
“... ...”
“엄마랑 아빠는 서로에게 실망을 해서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준성이한테는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는거잖아.”
“엄마랑만 살았으니까 아주 잠깐만 아빠랑 살면 안될까?”
“... ...”
“엄마 화났어?”
“아니, 왜 화나... 엄마 보러 자주 오지 않으면 화날거야.”
“자주 올거야!”
“그래... 숙제 다하고 양치하고 자.”
수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오래 오래 울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었다.
“이비서님, 어머님 주무시지 않으면 좀 바꿔주세요.”
수인이와 시어머니 그리고 동현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일주일에 2번 수인이는 준성이를 보거나 데리고 잘 수 있고 만약 준성이가 시어머니 계획대로 중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을 가게 되면 방학기간은 엄마인 수인이와 함께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언제라도 준성이가 원하면 수인이를 볼 수 있다고 명시 되어 있다. 이 내용은 모두 준성이에게 변호사가 보여줬고 준성이의 동의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합의를 하고 시어머니가 동현이와 변호사에게 수인이와 얘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죽고 그룹이 붕괴될거란 경제 전문가들의 말과는 달리 그 큰 그룹을 통솔해서 이끌고 있는 그녀는 작은 체구에도 보는 사람들 눈에는 거인처럼 보였고 단단하기 그지 없었다. 그 둘이 나가자 시어머니는 전에 없이 따뜻한 얼굴로 수인이의 손을 꼭 잡았다.
“준성이가 잘 컸더구나. 널 처음 보던 날 동현이가 처음으로 괜찮은 여자를 만난다고 생각했었다. 네가 들어와서 동현이가 사람이 될거란 기대가 컸단다. 니가 그렇게 나간다고 했을 때 화가 많이 났었지.”
“그러셨나요?”
“그래... 내가 이 회사를 누구에게 물려줄거 같니? 난 준성이를 내 후계자로 키울거다. 동현이는 내가 키우질 못했단다. 난 너처럼 보통사람이었어. 이회장님이 일본 유학시절 나를 만났고 우린 그곳에서 결혼도 했었어. 그런데 한국에 들어와보니 부인도 이미 있더구나. 핏덩이인 동현이를 빼앗기고 복수를 다짐했었지. 그리고 지금 이 그룹은 내 손 안에 있다.”
“네? 그럼 아가씨는?”
“내가 내 딸이 두 번이나 이혼하고 저렇게 늙어가는 것을 지켜볼거 같으니? 그 버릇없는 아이는 내 딸이 아니다. 그 여잔 자기 자식도 망쳐놨더구나. 엉망으로 큰 동현이로 마음 아팠지만 하나를 보니 덜하진 않더구나.”
“... ...”
“내자식이지만 지 아비를 꼭 닮은 동현이는 나도 싫다. 준성이는 성품이 너를 꼭 닮았더구나.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다. 절대 동현이처럼 되지 않게 내가 잘 키울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믿겠습니다.”
수인이가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자 어떻게 알았는지 민욱이 차를 대기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고 수인이 울음을 꾹 참고 앉아 있자 민욱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참지말고 그냥 울어요. 준성이 오늘 학교 끝나면 아빠한테로 가는 건가요?”
끄덕 끄덕
여느 날처럼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햄을 반으로 나눠 부대찌개에 넣고 나머지는 나박썰어 후라이팬에 굽고 있다. 그 햄을 뒤집다가 수인은 멈춘다. 이제 준성이가 없다. 준성이가 없다는 걸 잊고 이렇게 준성이 반찬을 준비하고 있는 자신이 웃기다. 그 웃음은 곧 울음으로 바뀌었다.
식탁을 차리고 준성이 자리에 밥도 퍼놓고 햄도 놓고 수인은 찌개로 토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있다.
딩동
수인이 인터폰을 보자 민욱이다. 수인은 문을 열고 무슨 일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서있다.
“밥 좀 주세요.”
그대로 쑥 들어온 민욱은 차려진 식탁에 앉는다. 그리도 준성의 몫인 밥을 먹는다.
“저 올줄 알았죠? 근데 밥이 너무 적다.”
월요일이 되어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일어선 민욱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오늘 회의는 없고 광고 의뢰는 무기한 연장이란 통보였다. 그리고 줄줄이 계약 해지를 알리는 연락이 왔다. 민기획은 오전에 폭탄을 맞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민욱은 일요일 저녁 하나를 불러내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게 누군지 따져 묻는 하나에게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그러자 하나는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는 곳이 있다며 가만두지 않겠다며 복수 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이게 아마 그 복수의 모습인가 보다. 그리고 이 복수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해도 수인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이번 일을 통해 자신에게 수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비록 만난 기간을 짧아도 그녀를 보지 않고 하루를 견디어 낼 자신이 없다.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그녀를 불러내지 않는가...
자신의 잠시나마 품었던 야망의 댓가라면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야망으로 직원들이나 협력업체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정리할 생각이다. 그리고 만약 아무것도 없이 빈손인 자신을 수인만 좋다고 한다면 이 모든 걸 끝낸 후 청혼을 할 생각이다.
민욱과 직원들은 사태를 수습하러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수인은 텅빈 사무실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그때 하나가 들어왔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하나가 지금 말하고 있는게 민욱이 수인을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얘기해주기 전까지 그냥 친절한 젊은 사장님으로 생각했던 민욱이 그러고 보니 항상 수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곁에 있으면 편안하고 당연하게 받기만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자신이 민욱을 바라보고 좋아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도 그렇다는 말에 수인은 크게 놀랐다. 하나가 수인에게 떠나지 않으면 이 회사를 완전히 망하게 할거라며 망가진 그를 갖고 싶은 거라면 그러라면서 나갔다. 나가는 하나를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서 잡아 수인은 말했다.
민욱이 망가지는 모습을 절대 원치 않는다며 자신이 떠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나는 원하는 대답에 표독스런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수인은 자신이 만든 카피문구를 민욱의 책상 위에 사표와 함께 놓았다.
수인은 준성이와 만나기 위해 서울로 왔다. 바꾼 휴대폰으로 동현에게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았다. 아들이 보고 싶다던 새로 나온 SF영화를 예매하고 아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로비에서 기다렸다. 그 영화관 로비에 대형 화면에서는 영화광고와 각종 CF가 나오고 있었다.
코코커피의 광고다.
한류스타라는 남자배우가 커피를 들고 그 향을 맡고 있다.
그리고 뭔가 추억하듯 창 밖을 바라본다.
<사랑... 변할까봐 두렵나요?
사랑 없인 추억도 없다...>
그 배우가 그 향긋한 커피를 드디어 마신다.
<좀더 긴 추억을 선물하세요...>
<작은 글씨로 - 새로운 공법으로 향과 맛을 잡은 코코커피>
자신이 만든 그 카피를 보면서 미소 짓고 있는 수인이 옆으로 민욱이 다가와 선다. 수인이 보고 있는 화면을 함께 본다. 광고가 모두 끝나고 고개를 돌린 수인의 눈에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민욱이 보인다.
“어떻게?”
“준성이 할머니가 가보라던데요...”
“하나가...”
“김회장님께 이하나씨가 벌인 일이 어떻게 귀에 들어갔는지 모두 제 자리를 찾았어요. 그분 따님에게 엄격하시더군요. 저희 사무실로 직접 오셔서 사과를 하셨고 제 기획과 그동안 만든 회사 이미지 광고에 매우 만족을 하신다고 하더군요. 광고업체를 바꾼다는 결재서류를 보고 분노하셨다고 하면서 수인씨의 안부를 묻더군요. 저와 수인씨의 사이를 알고 계셔서 저도 당황을 좀 했습니다. 아마 하나씨는 지금 뉴욕에 있을걸요.”
“그럼?”
“김회장님 말씀이 여자는 여자가 봐야 한다고 수인씨 놓치면 전 바보라던데요?”
수인의 어깨에 손을 얹은 민욱은 자신의 어깨에 수인이 기대도록 했다. 그렇게 둘은 10여편의 광고가 지나가면 다시 나오는 코코커피 광고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어느 고귀하고 고결한 분위기의 노부인이 사랑스런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우주용사가 지구를 구한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상영관으로 향했다. 그 뒤로 10여명의 수행비서들이 따라가고 있다.
-막장은 어렵다... 막장 소설 끝...-
~~~~~~~~~~~~~~~~~~~~~~~~~~~~~~~ 하하하 저번에...
단편 2개를 장편으로 둔갑시키면서 너무 머리가 아파서 썼어요.
거기다 환타지소설 성우도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버리고...
재미로... 근데 보라랑 동현이랑도 알고보니 옛애인으로 삐리리 시켜놨더니
얘기가 너무 길어져서 걍 콱 끊었던 얘기... 막장... 진짜 힘들더라구요!
존경합니다! 막장 드라마, 막장 소설 아무나 쓰는거 아니네요...
막 사랑스럽지 않아도 사랑받아야하는 우리 수인아줌씨 불쌍... ^^
항상 단아하고 조용한 수인이랑 예쁘고 섹시한 보라가 제 얘기의 여주인공인데...
이놈의 막장으로 아주 고생한 두 캐릭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내면서
환타지 성우 다시 연재용으로 바꿀까 끄적이다가 써뒀던 이걸 보고
버릴려다 아까워 올립니다. 막장엔 변명도 긴 법... ^^ 유워레로부터
첫댓글 와 재미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머리 아플 때 한번 써봤던 건데 재밌다니 다행이예요. 좋은 하루 되세요. ^^
김회장은 원래 수인이 조아했고.. 동현이 이자식 죽일놈이네.어디서 바람을 피워..!!상어한테 던져버릴라.. 하나 통쾌하네여.ㅋㅋㅋ
김회장님은 시어머니... 진정한 복수의 화신... 시아버지는 강마담을 사랑하고... ^^ 강마담이랑 수인이랑 동시에 만나던 동현이 걍 수인이로 선택... 시아버님 순정파라 강마담하고 떨어지는 조건으로 수인이랑 결혼 허락... ^^ 제가 쓰고도 좀 어지럽네요. 막장은 다 그런거라며 도망갑니다. 글 내려야 할까 어쩔까 왔는데 감사...
아흑..복잡하고 긴 소설이네요..그래도 재밌어요 ㅎㅎ
노부인은 시어머니겠죠? 성격 많이 바뀌시네요 ㄷㄷ;..결국 준성이랑 영화보러가는건 시어머님..ㅋㅋ!
막장의 끝을 시어머니로 정했죠... 그래도 남편의 아들을 유혹한 님글 보고 전 '난 루저다!'를 외쳤답니다. ^^ 거기다 마지막 아드님의 이유있는 반항도 멋졌어요. 새어머니 좀 숨어서 울었을 듯...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