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분은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가장 논란의 소지가 될 부분입니다.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은영전에 나오는 얀은 여러 인물이 복합된 인물입니다.
은영전에서 얀이라는 인물 자체가 역사를 통해 얻은 지식을
전술에 활용한다고 설정되어 있으므로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얀 웬리"라는 인물은 전체적인 베이스에 이순신 장군을 깔고
인격적인 면에서는 관대하다고 알려진 롬멜의 인격을 덧 씌운 후
얀이 펼치는 몇 몇 작전은 롬멜이나 넬슨, 블레이크의 전술도 보이며
그가 처했던 어떤 특정상황은 한니발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또한 은영전에서 얀의 전술사상으로 나오는 주역관제는 나폴레옹의 것이기도 합니다.
주역관제는 육전과 해전의 특수한 차이를 잘 모르던 나폴레옹의 생각으로
주역관제를 기반으로 한 영국상륙작전은 "트라팔가 해전"으로 물거품이 됩니다.
얀 웬리와 이순신을 비교해보면
첫 째 우선 둘 다 신통찮은 능력의 초급장교 시절이 눈에 띕니다.
얀 웬리는 초급장교 시절에 엘파실 성계의 민간인 구출작전으로 인해
"엘파실의 영웅" 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의 사관학교 시절은 전사론과 전략론을 뺀 성적으로는
일반 병사에게도 뒤떨어질 정도라고 소설에서 언급됩니다.
이후의 얀 웬리는 특유의 성격과 남보다 뒤떨어지는 능력으로
그리 눈길을 끌지 못하게 되나
부사령관으로 참여한 도리아 성계 전투에서
전사한 사령관을 대신해 함대의 괴멸을 막아
병력의 상당부분을 온전히 퇴각시키는데 성공하면서
함대 사령관을 맡게되고 이후 두각을 나타냅니다.
이순신 장군은 원래부터 수군은 아니였고
제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이순신 장군의 전기에는
군관임관 시험 중의 기마술 시험 도중에 낙마하여
발이 부러지는 대목도 나옵니다.
낙마한 후 부러진 발을 임시부목으로 치료한 후
계속 기마시험에 임하는 내용이 나오나 낙방을 합니다.
실제 28세이던 때의 이순신 장군은 훈련원 별과 시험에 응시 중에
말에서 떨어져 왼다리가 부러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부목으로 치료한 후에 계속 시험에 응시한 것은 실화인지
뒤에 각색된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여러번 낙방을 하다가 32세에 무과의 병과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이 됩니다.
롬멜이 1차대전 시에 보병 지휘에도 능해서
천부적인 용병술과 리더쉽 및 용맹을 보이면서
초급장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전후 보병전술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던 것과는
많은 격차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훈련원 봉사, 충청도 군관, 반포의 수군 만호를 거쳐
함경남도 군관, 훈련원 참군, 함경도 조산보 만호,
논둔도의 둔전관, 정읍현감 등을 거치게 되고
이 기간 동안의 이순신 장군은 파직과 휴관에 대한 기록도 나오며
백의종군을 했던 기록도 나오고
여러차례 수군에 종사했던 내용이 나옵니다.
조선으로서는 천만다행으로
임란 발발 14개월 전에 수군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됩니다.
조선수군이 조선육군에서 밀려나는 사람이 배치되는 자리였는지
혹은 당쟁의 결과에 의한 인사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훗날의 조선에게나 이순신 장군에게나 행운이 따르는 인사였다고 봅니다.
이순신 장군의 인사에는 그와 절친했다고 전해지는
당시 우의정의 자리에 있던 유성룡의 추천에 의한다고 나옵니다.
둘 째 함대의 일제사격술에 대한 것입니다.
얀 웬리 함대의 특징으로 자주 묘사되는 것이 일점일제사격술인데
이것은 이순신 함대의 특징인 적 선두집단에 대한 함포의 "일제타방전법"으로
이 함포술은 조선수군이 한산해전 당시 펼친 학익진을 통해
그 위력을 더욱 발휘하게 됩니다.
현대의 정확한 사거리를 가진 대포류의 무기에 비한 당시의 화포발사술,
육전과는 달리 파도가 끊임없이 출렁이는 해전이라는 상황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일제타방전법"은
어찌보면 당연하면서도 탁월한 전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산해전 당시 왜군의 수군을 지휘하던 장수는
히데요시의 신망을 받던 와키자카였는데
왜 수군의 전술은 유럽에서 함포전이 주전술이 되기 이전의
갤리에 의한 접근전과 같습니다.
와키자카는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괴멸시키라는
히데요시의 특명을 받고 110 여척의 대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조선수군의 선두 소함대의 유인술에 말려
휘하의 70여척을 이끌고 돌격했다가
매복중이던 조선수군의 학익진에 의해 50여척이 침몰하고
10여척이 나포되었으며 14척만이 탈출에 성공합니다.
유인과 반전에 의한 공격전술은 얀 함대의 기본전술이기도 합니다.
이후 와키자카는 일선 지휘관에서 해임되서
본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이후 다시 중용받지 못하게 되지만
자신의 영지에서 한산해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그글에서 자신은 용병의 용자도 모르는 장수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진정한 장수이며 용병가였다라는 내용의 문구를 남깁니다.
일본의 도고제독이 이를 연구해서 나오는 전술이
러일전쟁 때 발틱함대를 괴멸시킨 "T"자 전법입니다.
유럽이 함포전을 벌인 이후의 해전 내용을 보면
서로 유리한 위치를 잡기 위한 기동을 하다가
함포전이 시작되면 아군 1번함은 적군의 1번함을 2번함은 2번함을 맡는 식의
횡대 각개사격 전술이 주를 이루는 것과 차이를 보입니다.
승리한 도고제독에게 넬슨과 도고 본인에 대한 비교를 기자들이 질문하자
넬슨은 비슷한 수의 적과 싸워서 승리했지만
자신의 3배에 달하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에 승리했다고 우위의 평가를 내립니다.
이순신과 도고 본인에 대한 비교 질문을 받자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자신은 하사관 수준에 불과하다고 평가합니다.
셋 째 뛰어난 전술적 전략적 식견과 그에따른 결전입니다.
임란 초기에 왜 육군은 거침없는 진격을 합니다만
명군의 참전과 조선 각지의 정규군 및 의병의 반격은
그들의 길어진 보급선을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당초 계획은 수륙병진작전으로서 제해권을 장악한 후
조선의 서남해안 해로를 따라 보급을 한다는 전략이었는데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으로 수군이 괴멸되자
히데요시의 의도는 좌절되고
왜의 육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되어 점차 후퇴하게 됩니다.
한산해전은 적함대의 80%를 침몰시키거나 나포했던 커다란 전과와
학익진 같은 화려한 전술, 거북선의 활약으로도 유명하지만
왜군의 의도를 읽고있던 이순신 장군이 전술적, 전략적 결전의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정보력을 이용해 아군의 장비에 가장 적절하고 치밀한 작전을 짠 후
적에게 섬멸전을 펼쳐 승리함으로써
임란 초기의 위급했던 상황을 바꾸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전투입니다.
한산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한산해전에 참가하지 않은 적의 주력 40여척이
안골포에 있다는 것을 알아낸 후, 이틀 후 재차 공격을 벌여
10여척을 격침시키고 30여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둡으로써
히데요시가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을 격파하기 위해 동원했던
모든 왜 수군을 괴멸시켜 버립니다.
한산해전은 전술적 승리를 통해 급박했던 전략적 상황을 바꾼 전투로
한산해전과 안골포해전을 묶어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으로 불리게 됩니다.
넷 째 좁은 해로를 지키는 보루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은영전에서 얀 함대의 담당지역은 이젤론 회랑이었고
이에 따라 얀 함대의 전투는 좁은 회랑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임란 당시 해전의 주무대였던 한반도 남부해안이
특유의 다도해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 주로 전투를 벌이던
이순신 장군 지휘 하의 조선수군에 대한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은영전에 나오는 이젤론 요새의 발상 자체가
한산해전 이후 경상도에서 전라도 방면으로 가기위해 거쳐야 하는
좁은 물길의 끝자락에 있는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그 곳을 바탕으로 조선수군 최대의 전성기를 지휘하던 시기를
소설에서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산도에는 이젤론 요새포인 토울해머 같은 시설은 없었지만
제국군이 무서워 한 것은 이젤론 요새나 얀 함대보다는
얀 웬리라는 지장을 두려워하고 존경햇던 것처럼
임란 당시의 왜군이 무서워 한 것은 조선수군이 아니라
상황과 장비에 따라 최적의 작전을 벌이던 이순신 장군이었습니다.
다섯 째 전공을 시기하는 자국정치세력에 의해서 지휘권에 위기를 맞는다는 것입니다.
은영전에서는 동맹군이 암리츠아 전투 이후 괴멸의 상태에 이르지만
얀 함대와 이젤론 요새는 건재하여 이젤론 방면이 뚫리게 되면
돔맹 자체의 위기와 직결되는 상황이 됩니다.
동맹의 정치수뇌부는 점점 높아지는 얀 웬리의 인기를 시기하게 되고
페잔 측의 음모에 의해 동맹은 얀 웬리를 견제하고자
사문회라른 것을 열어 얀 웬리를 이젤론에서 소환하는데
이때 이젤론 방면에 제국군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고 위기의 순간을 맞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해전 대승으로 왜군의 수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륙병진작전이 죄절되고
히데요시는 왜 수군에 일체의 접전을 금하게 됩니다.
왜군 측은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되고
당쟁으로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시기하던 세력에 의해
이순신 장군은 파직당하고 귀양을 가게됩니다.
하지만 정유재란 발발과 이순신 장군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있던 원균이
왜 수군에 칠천량해전에서 대패를 당하게 되고
조선 수군이 전멸당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백의종군을 하게 됩니다.
여섯 째 불패의 신화입니다.
은영전에서 얀 웬리의 11함대는
원래 도리아 성역전투 패전으로 반쪽이 된 함대를
얀 웬리를 함대 지휘관으로 삼아 이젤론 요새 공략전을 벌이게 하는 함대였는데
소설에서 신기에 가깝다고 표현되는 얀의 전술에 의해 승승장구하게 되어
얀 웬리는 불패장군이란 명성을 얻게되며
이후 얀은 암살당하게 될 때까지 계속되는 불패의 신화를 남기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7년의 임진왜란 기간 중에
총 14회의 해전에 참가해서 승리를 하게 되는데
정확하게 임진왜란 12회, 정유재란 2회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까지 그가 참가한 해전은 모두 승리를 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의 불패의 신화에 최고의 명성을 더해주는 해전이
불가능한 전투를 승리로 바꾼 정유재란의 명량해전입니다.
정확히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했기 때문에
불패의 신화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명량해전같은 전투는 하고 싶지않은 전투이며,
이순신 장군 그 자신도 다시는 하고싶지 않은 전투가 명량해전 일 것입니다.
명량해전은 방성전을 통한 지구전이나 기습을 하여 승리를 한 전투도 아니고
이순신 장군의 지형을 이용하는 전술로 불가능에 도전한 승리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던 시기는
이미 조선수군은 유명무실해진 상태로
조정에서는 수군을 전폐하고 육전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순신 장군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거부를 합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12척이나 되는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능히 막을 수 있으나
지금 수군을 폐지한다면 이는 오히려 적이 바라는 바로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신은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계의 내용은 수군과 앞으로 있을 해전의 중요성을 지적하면서
물러설 수 없는 결전이 될 것 임을 알리는
이순신 장군의 전략적 안목과 의지를 엿보게 합니다.
"신에게는 12척이나 되는 전선이 남아있습니다."
"신이 살아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무모하고 오만하기까지 보이는 두 대목은
스스로가 불패의 장군이 되어 조정을 안심시키는 한 편
누구나 전의를 잃을 수 잇는 상황에서
자기최면을 하는 것 처럼도 보입니다.
장계를 올린 이순신 장군은 병장기와 병력을 모으고
12척의 전선을 수리하는 한 편,
건조 중에 있던 전선 한 척을 급히 완성해서 무장을 시키고
조선수군의 함선규모는 총 13척이 됩니다.
이 13척의 전선들 만으로,
200여척으로 구성된 왜군의 대규모 수군에게
물러서지 않는 놀라운 의지와 리더쉽,
그리고 지형과 쇠사슬을 이용하는 완벽한 작전을 통해서
아군 함선은 단 한 척도 침몰되지 않는,
불가능한 승리를 이루어내고 불패의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이후의 왜군은 다시는 제해권에 도전을 못하게 됩니다.
몇 년 전부터 원균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있는데
나아가 이기지 못할 줄 알았다면
이순신처럼 파직을 당하더라도 지켰어야 했음에도
그는 매질당한 울분을 참지못해 그 자신 뿐만 아니라
죄없는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고 나라마져도 위급하게 만듭니다.
전장의 승리에 우연은 있어도 패배에 우연은 없는 것입니다.
칠천량 해전의 내용을 보면, 원균은 정보에도 어두웠으며
왜군의 작전에 철저히 놀아나다가 한밤중에 기습을 받고
조선수군을 전멸당하게 만듭니다.
(혹시라도 원균 문제로 태클을 거실 분들은
원균 관계자료를 더 많이 읽어보시고 하시기 바랍니다.)
2차대전 독일의 최고의 지장이며 용장 중의 한 명이었던
앞서 전격전과 인격적인 측면에서만 설명을 했었던
롬멜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롬멜은 매우 뛰어난 야전지휘관으로서
독일과 비교가 안되던 전력의 폴란드 침공을 제외하면
본격적인 2차대전 발발 후의 그의 능력은
초기 프랑스 점령작전과 제해권이 확보가 안된 아프리카 전선,
이미 한계에 달한 후 밀리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던
이탈리아 방어와 프랑스상륙방어가 그의 작전지역이었습니다.
원래의 북아프리카 지역은 이탈리아가 담당하던 지역이었으나
영국 사막군에 이탈리아가 지리멸렬해지자
히틀러가 롬멜을 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 총사령관으로 투입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에서 패퇴하는 이탈리아 측의 원조 요청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원조요청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아마도 이것은 북아프리카를 앞으로 있을지 모를
발바로사 작전을 보조하는 전선으로 만들어
영국의 주의를 북아프리카 방면으로 집중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당초 독일 측의 목표는 트리폴리 지역을 집중적으로 방어해서
북 아프리카 전역이 고스란히 영국 손아귀에 놓이지 않게 할 목적이었고
히틀러는 1940년 중순부터 소련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북아프리카 전선 자체를 중요하게 보지도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에 부임한 롬멜은 연합군에 비해 열세인 병력과 장비 물자만으로
넓은 전선에 엷게 배치된 영국군을 가짜 기갑부대를 이용해 패배시키는 등
전투마다 순간 순간 대담하고 놀라운 작전들을 펼쳐 승승장구하며
원수에 오르는 등 롬멜 개인으로는 최고의 시절을 보냅니다.
롬멜은 뛰어난 전술능력으로 여러번 전투에 승리했지만
롬멜의 전략적 안목은 그리 훌룡했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사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사막전이 연합국 측이나 동맹 측이나 마찬가지의 문제를 일으키지만
양호한 제해권을 확보하고 있었던 연합국에 비해
동맹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초기의 독일군 상부의 의도와는 달리 북아프리카 전선에
제 2의 동부전선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영국이 이탈리아를 상대하며 얕보다가 롬멜에게 당했던 것처럼
롬멜 또한 전격전에 대한 맹신과 초기의 승리에 고무되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선을 확장시킨 것입니다.
이문제로 롬멜은 군수뇌부와 많은 마찰을 빚게됩니다.
롬멜은 항상 일선에서 야전을 지휘했기 때문에
독일과 독일군 전체의 능력을 조리있게 바라보지 못하고
너무나 눈 앞의 적만을 대상으로 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롬멜은 1차대전 전후의 독일에서
기갑으로 병과가 바뀐 후 기갑학교에는 다녔었지만
전선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배양하는
참모학교에는 전혀 다니지 않았으며 참모로 근무한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의 실전으로 닦여진 야전능력은 군사교리도 무시해가면서 기략을 즐기고
이 때문에 롬멜은 그의 휘하장군들과도 여러번 대립하게 됩니다.
그의 군사행동은 교범으로 만들어 질 정도로 탁월했지만
너무나 자유분방한 전술적 사고는 위험하기까지 해서
상부의 도움을 크게 바랄 수 없었던 그의 부하장군들 눈에는
도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며
그가 확장시킨 전선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롬멜에 대해 영국수상이었던 처칠은
"우리는 대단히 용감하고 재기 넘치는 적과 맞서고 있다.
영국군이 당한 참패 바로 옆에는 항시 이 걸출한 장군이 있었다."라는
적국 장군에 대한 이례적인 극찬까지 하는데
여기에는 사기적인 심리전의 요인이 있던게 아닌가 합니다만
저로서는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제해권을 중시해서 강력한 해군을 보유했던
영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국상공에서는 독일에 대항한 공중전을 치르고
양호한 제해권이 있었고, 사막이라는 특성이 있는
북아프리카에서는 육상전투를 치르는 것은
영국본토가 독일육군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므로
영국본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북아프리카로 돌릴 수만 있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북아프리카 전선 전체를 잃게된다면
영국은 기름 한 방울도 나지 않았으므로
매우 끔직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때마침 미국의 참전 및 독일의 발바로사 작전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전선은 영국 측에 매우 유리한 상황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지만 롬멜은 본국의 생산능력과 제해권이 없는 보급능력을 등한시하고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전선을 너무 확장시키게 되어
연합국 측과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이다가
연합군의 물량이 독일을 압도하게 된 후 히틀러의 명령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독일의 최선의 선택은 북아프리카 전선이 확장되어
보급문제가 처음 대두되었을 때
초기 목적에 맞게 전선을 축소시킨 후,
공격적 성향이 강한 롬멜보다는
임무에 맞는 책임자를 재인선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롬멜의 승리에 고무된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군단을 더 증강하게 되고 이는 보급 문제를 더 확대시키게 됩니다.
상황은 독일군 참모들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축소시키기엔
원수가 된 롬멜의 과감한 성공을 견제하기 힘들었거나
롬멜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이 너무(?) 컸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롬멜의 눈에는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보였겠으나
롬멜의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었던 군 수뇌부도 롬멜이 답답했고
롬멜에게나 독일에게나 둘 다 가장 나쁜 결말이 나게됩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은 롬멜 개인에게는 최고의 명성을 만들어주었으나
독일로서는 사막전 경험이란 것을 제외하면
동부전선과 마찬가지로 남는 것이 없는 장사가 됩니다.
또한 롬멜의 의도대로 군참모부가 지원을 잘해줘서
북아프리카에서 연합군을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동부전선의 상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던 상황이었으므로
제해권이 없는 독일로서는 북아프리카를 지켜내는 것은 무리였을 것입니다.
롬멜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관대한 인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던 듯이 보이며
자신의 작전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지원도 제대로 못해주던
군 상부의 참모들에게 극심한 반감을 느끼고 있었고
수뇌부의 참모들도 그들 나름대로 롬멜 개인의 명성만 올려주고
독일의 능력을 넘어버린 소모적인 전투에만 골몰했었던 롬멜에게
반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롬멜과 독일군 참모부와의 원만하지 못했던 관계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상륙을 저지할 수 있는 대응작전을 마련하던 독일 수뇌부와 롬멜이
다시 한 번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롬멜은 장갑총감이던 구데리안과도 크게 다투게 됩니다.
대응작전 마련은 지지부진해 졌으며
히틀러까지 참여하여 양측의 의견을 적절하게 안배한 작전내용은
내용은 상당히 좋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이미 독일군의 능력은 연합군에 대응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그리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게 됩니다.
롬멜의 군사능력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폴란드나 프랑스 같은 한정된 전장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야전능력을 발휘하지만
전격전이 한계에 부딪힐 경우
즉, 장기전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무리한 작전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전략적 식견은 부족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롬멜은 너무 무리해서 전선을 확장시키려는 경향이 있었고
그에 반해 독일의 능력에 맞게 동부전선을 축소시키고 싶어하던
동부전선의 일선 지휘관들하고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히틀러가 왜 이들에게 서로의 임지를 바꿔주지 않았는지가 궁금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얀 웬리와 롬멜의 연관성에 대한 것인데
롬멜은 너무 전투를 즐기는 경향이 있었으며
전략적 안목은 부족한 편이었다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점은 북아프리카에서의 롬멜은
전술적 승리를 통해 전략적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의 전술적 승리들은 전략적 상황들을 더 나쁘게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롬멜 특유의 기만전술 즉, 가짜기갑부대인데
임란 시의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는
그가 출전할 때 많은 어선들을 전선으로 위장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이 위장전선은 명량해전 당시에도 쓰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에 대해 언급하자면
한니발은 제해권 열악이라는 전략적 상황
즉, 해전을 통해 로마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카르타고 군이 이탈리아 반도에 직접 상륙을 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페인을 통해서 알프스를 넘어가는 것으로 반전을 꾀합니다.
한니발은 여러번의 전술적 승리를 통해서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이 로마에 적대적으로 변하게 되는 상황이 되기를 원하면서
로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않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벌어지는 가장 유명한 전투가 "칸나에 전투"입니다.
한니발의 "초승달 전술"은 우리식으로는 "학익진"이며
일본에서는 "쌍두진"이라고 합니다.
한니발의 부대는 제해권이 없는 전략적 상황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 직접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로마를 직접 공격했다가 실패할 때의 낭패한 상황을 우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경로를 통해서 본국에서 온 지원군은
북부 이탈리아까지는 도착하였으나
남부로마군 사령관 "가이우스 네로"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전술적 능력과 전략적 감각은 물론
정치적 능력도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음에도
로마를 공격할 수 있었던 최적의 상황을 외면함으로써
"칸나에 전투"에서의 전술적 대승을 바탕으로
로마를 공격해서 전략적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는 은영전에서 얀 웬리가 정식 동맹군으로서
라인하르트와 마지막 대결을 벌이던 전투인
버밀리언 성계의 전투에서 벌어졌던 마지막 상황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첫댓글참 비교가 잘 되어 있네요^^ 전 은영전을 읽은 사람들 중 다수가 제국에 매력을 느끼는 게 다나카 요시키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던가..그런 면에서 작가가 상당히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적 부활을 꿈꾸는 극우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만...각 개인을 실존했던 누구와 매치시킬 것인가는 지식이 짧아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나기 님의 글을 읽어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각 인물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만 얀 웬리가 충무공인가..에 대해서는..흠...그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뚜렷이 반대도 못하겠지만 라인하르트와 얀웬리는 제 나름의 고정관념이 있어서 한큐에 완벽하게 동의되지는 않네요^^;
극우는 아니더라도, 은영전 소설에는 게르만제국에 대한 동경...같은게 깔려있는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원래 일본인들이 게르만민족을 좀 좋아라한다죠.. 아무튼, 얀웬리vs충무공은.. 전략전술적인 면에서는 제가 소설을 중도하차한 관계로 이의제기에는 미흡하지만. 인물의 스딸로 보자면 노 코렉트 같네요.
음... 제가 알기론 이순신는 무인보다는 문인쪽이 아닐까하는... 과거시험에 낙마를 해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점, 몸이 자주 아팠다라는 점으로... 그리고 화약의 어떤 성분을 그전 시대에는 어렵게 구한것을 이순신는 쉽게 생산했다는 점, 화약을 일정하게 모아서 현대의 탄알 탄약처럼, 화포로 인한 새로운 전술,
이 글을 적을 때 제가 제시한 인물들에 대해서 개인의견을 적을 분이 상당히 많으리라 예상했었습니다.그런데 제 예상보다는 굉장히 적군요. 어차피 소설과 역사의 비교인데 맞고 틀리고에 대해서 증거도 없는 일이라서 그리 예상을 했었습니다. "흘러가는"님이 적은 "마이어"란 인물이 인상적이네여. 제가 모르던 인물이라
첫댓글 참 비교가 잘 되어 있네요^^ 전 은영전을 읽은 사람들 중 다수가 제국에 매력을 느끼는 게 다나카 요시키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던가..그런 면에서 작가가 상당히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적 부활을 꿈꾸는 극우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만...각 개인을 실존했던 누구와 매치시킬 것인가는 지식이 짧아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나기 님의 글을 읽어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각 인물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만 얀 웬리가 충무공인가..에 대해서는..흠...그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뚜렷이 반대도 못하겠지만 라인하르트와 얀웬리는 제 나름의 고정관념이 있어서 한큐에 완벽하게 동의되지는 않네요^^;
은하영웅전설을 이렇게 평가할수도 있군요 ^^
이순신제독의 무과 과거시험 낙방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다니...
은하영웅전설이여 영원하라~~~~~~~~~
다나카 요시키는 절대 극우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작품들을 보면 일본 군국주의와 독재, 전체주의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전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세계 전반에 걸친 지식은 없어서 확신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타메를랑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반증으로 새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헌데 그럼 은영전의 진의는 어떻게 해석하는 게 옳은 해석인 것일지...그 부분만은 더 알아보고 싶네요.
직접 다시 읽어보시고 판단하는게 가장 좋지 않을까요..?
극우는 아니더라도, 은영전 소설에는 게르만제국에 대한 동경...같은게 깔려있는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원래 일본인들이 게르만민족을 좀 좋아라한다죠.. 아무튼, 얀웬리vs충무공은.. 전략전술적인 면에서는 제가 소설을 중도하차한 관계로 이의제기에는 미흡하지만. 인물의 스딸로 보자면 노 코렉트 같네요.
충무공이야 어린시절부터 언젠가 나라에 큰힘을 보탤 장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지닌 대장부 형이고.. 얀웬리는 전형적인 책상물림스딸에서 천재성이 가미된 유형아닌지요? 신체적으로도 웬리는 좀 비리비리하고, 충무공은 전형적인 장수(장군도의 사이즈에서 압박)이니까..
별로 쓸모없는 이야기지만.. 징비록이었나에 보면 충무공의 어린 시절에 관한 언급을 보면.. "집 앞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 맘에 안 드는 자가 있으면 눈을 화살로 맞추려 하여 어른들이 두려워하였다." 라는 부분이 있다더군요.. 끙.. -_-;
음... 제가 알기론 이순신는 무인보다는 문인쪽이 아닐까하는... 과거시험에 낙마를 해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점, 몸이 자주 아팠다라는 점으로... 그리고 화약의 어떤 성분을 그전 시대에는 어렵게 구한것을 이순신는 쉽게 생산했다는 점, 화약을 일정하게 모아서 현대의 탄알 탄약처럼, 화포로 인한 새로운 전술,
이러한 것을 볼때 용맹한 장군보다는 제갈량처럼 천재성이 다분한 문인쪽이 아닐까요?
이 글을 적을 때 제가 제시한 인물들에 대해서 개인의견을 적을 분이 상당히 많으리라 예상했었습니다.그런데 제 예상보다는 굉장히 적군요. 어차피 소설과 역사의 비교인데 맞고 틀리고에 대해서 증거도 없는 일이라서 그리 예상을 했었습니다. "흘러가는"님이 적은 "마이어"란 인물이 인상적이네여. 제가 모르던 인물이라
그런지 지명도가 좀 약하다는 느낌말고는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