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과학사학회
- 한국과학사학회지 보기
- 검색란 "박창범" 입력후 검색
(1) "박창범 , 라대일 ( Chang Bom Park , Dai Le La ), 논문 :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 Articles : Confirmation and Historical Consequences of Astronomical Records in Samguksagi ), 16권 2호 (1994), 167."
(2) "박창범 ( Chang Bom Park ), 논문 : 일본 고대 일식기록의 (日蝕記錄) 분석 ( Articles : Analysis of Japanese Historical Solar Eclipse Records ), 18권 2호 (1996), 155."
<< 지금까지의 연구현황 >>
1925년 일인 반도충부의 혓바닥 놀음에 놀아나 1990년도까지 반도충부의 논문을 답습하는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학계가 정사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부정하는 실증적 근거가 되었다
일본인들과 다른점이 뭐가 있는가 ?
일인 반도충부는 삼국의 관측지점이 대륙으로 나오니 이의 부정을 위해 중국기록을 차용하였다고 주장하였고 국내학자들은 이의 검증도 없이 이에 동조하였다
베껴써는 것도 제대로 못하여 누구의 글인지도 모르고 인용하는 학자들에게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가 사장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 그지없다.
[책소개]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저자 : 박창범 ㅣ 출판사 : 김영사
2002년 11월 20일ㅣ252쪽
ISBN : 8934911166
(삼국시대 천문기록이 밝혀 준 고대 역사)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식 기록을 추려 내고
신라, 고구려, 백제별로 분류해 각 나라가 기록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관측지를 각각 찾아보았다. 그러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위치가 나왔다. 애초에 삼국의 위치는 익히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왔던 대로 한반도상에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확인 결과 전연 다른 위치가 튀어나왔다. 신라와 백제의 경우 한반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대륙 동부에 최적 관측지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예측이 이렇게 빗나갈 줄이야! 뭔가 숨어 있겠군!'
단지 내 검증 방법을 한번 확인해 보기 위한 '테스트'에 불과했던 이 계산에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곧바로 일식 기록에 대한 나의 위치 추정 방법을 얼마나 믿을 수있는지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삼국 시대보다도 역사가 더 정확히 알려진 고려 시대의 일식 기록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고려의 최적 일식 관측지마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나온다면 그때는 나의 위치 추정 방법의 신뢰성부터 의심해봐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고려의 경우엔 정확히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 한·당·양나라와 같은 중국 여러 나라들도 연이어 확인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이 나라들이 기록한 일식의 최적 관측지들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각국의 강역과 맞아떨어졌다.
삼국의 위치 또는 《삼국사기》 일식 기록에 대한 의심을 더 이상 파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오히려 내게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삼국사기》일식 관측지의 결과를 당장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난감했다. 확고부동한 사실로 상식화되어 있는 한국사의 내용과 상충하는 이 결과를,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일단 더 이상의 판단을 멈추고, 시간을 두고 깊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해 못할 문제라도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의미를 띠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유경로 교수와의 만남)
그러던 중 우연히 유경로 선생님과 만난 자리에서 이 결과를 의논하게 되었다. 유 선생님은 한국 천문학계의 1세대로서, 원래는 외부은하 천문학을 연구하시다가 말년에 천문학사 연구에 정진하신 원로 천문학자셨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유 선생님은 논문 몇 편을 내게 건네주셨다.
일본학자 반도충부(飯島忠夫,1926)와 제등국치(薺藤國治,1985)의 논문 등이었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미 1920년대부터 우리 《삼국사기》의 일식을 비롯한 여러 천문 현상 기록들을 꾸준히 연구해서 많은 결과를 내놓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후 이 논문들과 서양의 과학사 논문, 국내의 과학사 책들을 보면서 현재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천문기록, 그중에서도 6세기 이전의 기록은 모두 중국 기록을 베꼈거나 지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서양 학자들은《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을 완전히 무시한채 《고려사》의 기록부터 비로소 인정하는 추세이다. 국내 역사학계에서도 3세기경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분위기이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의 일식 기록에 대해 한양대 김용운 교수는 서기 2, 3세기부터 실측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한국외대 박성래 교수는 신라와 백제의 경우 빨라도 서기 200년대까지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못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삼국사기》 천문 기록에 대한 이 같은 견해는 일본 천문학자들의 연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 특히 삼국 시대 초기 부분이 조작된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 시기 전체의 역사 기록을 불신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 《삼국사기》가 지닌 "사서"로서의 신빙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근거가 되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이 왜 그러한 결론을 내렸는가에 대해선 그들의 관련 논문 등을 읽어 보면 언뜻 납득할 만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도 그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 또한 그들의 논문을 접한 뒤, 내가 확인한 삼국의 최적 관측지가 왜 중국 대륙으로 나타났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본학자들의 말대로《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베낀 것이라면 당연히 그 최적 관측지도 중국 대륙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내 연구에서 계산된 삼국의 일식 관측지들이 지역적으로 서로 매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중국의 일식 기록을 무작정 베꼈다면 관측지가 모두 같게 나와야 하지 않은가 ? 또 중국 것을 베꼈다고 알려진 《삼국사기》의 기록이 오히려 그 '표절 원문'인 중국 사서의 일식 기록보다도
더 정확하다는 사실에도 의구심이 들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의 연구처럼 기록들을 개별적으로 검토하는 방법이 아니라, 삼국이 남긴 일식의 성질을 나라마다 집단적으로 서로 비교해 살펴보면 뭔가 다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가을, 나는 다시금 새 출발선에 섰다. 밀쳐 두었던 《삼국사기》에서 모든 천문 현상 기록들을 발췌해 펼쳐 놓고 이들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식관측지가 중국대륙으로 나타나는 이유)
기상자료를 추가로 연구하여 관측지를 재확인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신라와 백제의 최적 일식 관측지가 한반도에 있지 않고 중국 대륙 동부에 위치하는 이유를 나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의문마저 풀자면 앞으로 자연 현상 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관련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어떤 시나리오로 구성되든 간에 앞으로 우리 국사는 여기에서 밝힌 "삼국사기"의 자연현상 기록의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우리의 옛 책에 나오는 자연현상 기록을 역사학계에서 사료화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놓기 위해 이작업을 한 것이므로 새로운 역사나 사서내용의 유래를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이것은 역사학자들에게 넘겨드릴 몫이다. 나는 누가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사실까지만을 찾아 보여주고자 한다. 이것이 과학자의 능력이자 역사학에 대한 한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식 기록을 통해 파악한 관측 위치와 삼국의 위치와의 관계에 대해 굳이 나의 입장을 이야기한다면, 나는 한 나라의 역사서에 수록된 일식 관측지가 그 나라의 강역일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천체관측과 같은 중요한 일은 그 나라의 수도에서 이뤄지는 것이 가장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서에 기록된 최적 일식 관측지가 그 나라의 위치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단지, 이 경우에는 그 사서에 그러한 사료가 담겨지게 된 특별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처럼 각국이 직접남긴 1차 사서가 아닌, 후대에 여러 사료를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엮어 놓은 역사서에서는 참고된 사료의 불연속성과 이질성이 있을 것이고, 타지역 세력이 유입되면서 가지고 들어온 자료도 포함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이 당대에 누군가 "실측"을 해서 남긴 "독자기록"이라는 사실, 그렇지만, 그기록이 기존의 사관과 현격히 다른 내용이라는 상황 모두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삼국사기"의 내용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
단국조선 시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연구에서 내가 알아 낼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했다. 대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된 모든 천문 현상 기록이다. 여기서 내가 풀고 싶은 의문점 몇 가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
- 삼국의 강역 문제
- 과학과 문화의 시작과 수준문제
《삼국사기》의 신빙성 문제는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의 초기 내용이 '표절' 또는 '창작'이라고 국내외에 알려진 지금까지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실상 《삼국사기》는 삼국이 직접 남긴 1차 사서가 아니라 고려 시대에 남아있던 여러 국내외 사서를 근거로 고대 기록을 취사, 편집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당대의 원래 기록처럼 아주 자연스러울 수는 없을 것이다. 취사, 편집 과정에서 사료의 부족, 사료의 선택적인 취입·착오·윤색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러 참고문헌을 가져다 놓고 이야기를 엮다 보니 내용의 일관성이 떨어지거나 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이 사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읽는 자의 몫이다. 기록상의 흠을 어느 정도까지 파악하느냐, 그리고 용인하느냐에 따라 사서를 신뢰하는 정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삼국사기》의 경우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시대를 구획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 예는《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이 주변국, 즉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처음으로 나오는 시점을 잡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B.C.37년에 건국되었다는 고구려는 중국 문헌에 근거하여 태조 때인 A.D.356년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삼국의 초기 역사가 짧게는 90년에서 길게는 410년까지 잘려 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외에도 '말갈'과 같은 후대의 용어가 사용되는 시기, '오행'과 같이 후대의 중국 사상이나 고전이 삽입되는 시기, 국경이 불분명한 고대 국가로서 주변국과의 접촉이 너무 빈번하다고 생각되는 시기 등이 초기 역사를 의심하게 만드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논의 중에 가장 호소력을 가진 근거가 바로 천문 현상 기록들의 조작 여부와 그 시기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계산으로 진위를 따져 본 결과 《삼국사기》의 천문 현상 기록들은 위조되었거나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국사학계 내에서는 서기 500년 이전의, 특히 서기 200년대 이전의 삼국 초기에 대해서는 좀더 새롭고 풍부한 사료가 나올 때까지 연구를 보류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 시대의 초기가 역사적 여백으로 남게 되면, 그보다 더 이전인 삼한 시대와 고조선 시대는 삼국 시대 보다 더 큰 불신과 무관심 속에 방치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는 우리의 고대사 복원에 큰 장애로 작용할 것이다.
그 같은 역사적 불신의 한 발단이 천문학적 연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천문학자로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여러 천문학자들이 우리 《삼국사기》의 천문 기록을 연구하여 세계에 발표하는 동안 정작 국내에서는 우리의 고대 천문 기록에 대한 과학적 계산과 철저한 분석을 수행하여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일면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천문 기록을 발췌한 사료집마저도 나와 있지 않으니, 자국의 옛 천문 기록을 총정리한 사료집을 이미 오래전에 편찬한 중국과 일본을 생각해 볼 때 부끄러움마저 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중국과 함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천문 현상을 체계적으로 관측하여 기록을 남겨 온 천문의 나라이다. 지금이라도 스스로의 노력을 기울여 이 귀중한 유산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천문기록을 역사학계가 사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형태로 바꾸어 놓는 일은 천문학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좀 미묘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과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삼국시대 천문기록 연구에 대한 학계의 반응, 그 이후)
삼국시대 천문 기록에 대한 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뒤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중의 하나는 "이 발견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어떻냐"는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난 요즘도 같은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다. 역시 궁금해할지 모를 분들을 위해 그동안 반응을 덫붙여 두고자 한다.
자연과학자들은 논문을 쓰면 으레 그 분야의 다른 학자들에게 논문을 보내 사적인 검증 절차를 거친다.
이는 동료학자들의 의견을 먼저 구함으로써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 했을 때 발생 할지도 모를 논문에 대한 시비거리를 미리 걸러내고, 스스로도 자신의 연구 방향과 결과에 대해 보다 강한 확신을 다지기 위해서다. 나는 먼저 천문학과의 다는 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얼마 뒤 천문학회 학술대회에서 단군조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 다음 단국대 윤내현 교수에게 단군조선과 삼국 시대 논문을 보여주었는데,
윤교수는 삼국시대 일식 관측지에 대한 나의 연구 내용중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이 백제의 요동 경략설에 부합함을 지적했다. 반면에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또 단군조선 연구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한국상고사학보"에 실었는데, 당시 심사를 했던 서울대 최몽룡 교수는 이 논문이 새로운 역사 접근법을 시도한 점을 뜻있게 평가해 게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 뒤 한 재야 사학단체로부터 단군조선 연구에 대한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재야단체에서의 강연은 매우 호의적인 반향을 얻었는데, 무엇보다 단군조선을 확고한 국가로 설정하고 있는 많은 재야사학자들의 입장과 나의 연구 결과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연 말미쯤에 이르러, 단군조선 시대의 일식기록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점을 강조하다가 결국 아직 발표가 안된 삼국 시대의 일식기록 분석 결과까지 잠시 언급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들을 가장 잘볼수 있는 지역이 한반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대륙 동부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청중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중 김씨성을 가진 노인 한분은 "내 조상이 그럼 뙤놈이라는 말이요?"라고 항의하여 나를 곤혼스럽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오재성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는 얼마 전 재야 사학단체 모임에서 강연을 들은 한 사람으로부터 내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역시 재야사학자 중 한사람이었는데 여러모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그는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텁수룩한 외모로 전형적인 농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역사에 심취해 생업을 버리고 인생을 역사 연구에 바쳐온 감동적인 사람이었다. 역사를 대하는 그의 정열과 애정의 깊이는 놀라웠다. 나는 역사가 이렇듯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가져운 연구의 결과였다. 그 역시 나름의 방법을 통해 신라와 백제의 강역을 추정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끌어낸 두 나라의 강역이 나의 최적 일식 관측지와 매우 비슷했다. 그는 삼국사기의 지명, 교역품, 인물 등을 길잡이 삼아 연구를 했다고 했다. 이는 나의 연구배경과 너무 다른 것이라 그의 연구결과를 검증할 수 없었지만 어쨌던 그 내용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삼국시대 천문기록에 대한 연구 또한 학과 교수들의 검토를 거친뒤 천문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과학사학회의 학술대회에서도 구두 발표를 통해 공개했다. 이에 대한 천문학자들과 과학사가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학술진흥재단에 건의해서 우리나라 학문 분류에 고천문학이란 분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또 몇몇 천문학자들은 고천문학 연구를 시작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전공한 서울대 국사학과의 노태돈 교수와 송기호 교수가 보여준 학문적 격려와 지적도 잊을 수 없다. 특히, 노태돈 교수는 내 연구가 과학적 접근이란 점에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었다. "한국과학사학회지"에 투고를 권한 것도 그였다. 한편으론 현재 고대사학계에서 이같은 연구 결과를 수용하기에는 많은 상충점이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송기호 교수 엮시 같은 의견이었다. 또한 송교수는 나의 연구내용중 상대 신라의 최적 일식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라는 사실 정도가 지금까지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의 전부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결론적으로 고대사 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나의 연구방법은 신선하고 기대되는 바가 적지 않으나 그 결과에 있어서는 상충되는 점이 많아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의 연구 결과도 다른 연구자에 의해 재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후속 연구를 통해 나의 분석 결과가 설명될 수 있는 내용으로 고대사 일부가 재구성되거나 "삼국사기"의 정체가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천문역사학, 천문고고학, 고천문학과 같은 분야에 많은 학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역사와 관련된 이 논문을 쓰려고 할때 처음에는 이를 국제 학술지에 기고할 생각이었다. 국내 학술지 어디에 기고해야 할지 망설여져서였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 국내학술지에 싣기로 결정했다. 전문가의 연구란 그 학문과 관련된 전문학계에서 먼저 소화, 검증된 뒤에 일반인에게 알려지는 것이 올바른 단계라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국사에 대한 연구결과는 누구보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알 권리가 있고, 여기에서 우선 검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내학계에 먼저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 논문들을 발표한 지도 여러해가 되었다. 이때의 나의 판단이 과연 옳은 것이 었을까?
한편 이 연구를 하면서 고대 사서에 실린 천문현상 기록들을 하나씩 재연해 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즐거움 이었다. 수천년 전에 선조가 남긴 기록과 나의 계산이 꼭 들어 맞을 때, 그리고 켬퓨터 화면을 통해서나마 당시의 하늘을 바라볼때면 마치 초등학교 시절 소풍에서 보물찾기를 할때 꼭꼭 숨겨져 늘 찾지 못했던 보물을 이제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이 그릇된 이유)
이쯤되면 일본 학자들이 그동안 "삼국사기"의 실측 기록들을 중국의 것을 베끼거나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해온 이유가 궁금해진다. 일본 학자들이 제시한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라의 경우 일식을 포함한 천문 현상기록들이 대부분 서기 3세기 이전과 8세기 이후 양분되어 있어 그 시대별 분포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시대의 천문 기록은 가공의 신라초기 역사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꾸며 넣은 장식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둘째, 삼국의 일부 천문 기록들이 중국 사서의 기록과 표현이 같은데다. 그 중에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의 기록을 무작정 베끼다 보니 실제가 아닌 일까지 옮겨 적게 된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삼국사기" 천문기록에서 보이는 특이점을 이렇게 해석해야 할까?
"삼국사기"가 쓰여질 당시 신라 1,000년의 역사를 충실하게 기술한 참고 사서가 있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논리로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삼국사기"를 새로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나 고구려, 백제의 역사는 여러 사서로 나뉘어져 기술되어 있었을 것이고 역사 변천에 따라 사서 내용의 질이 변하고 양이 빈약해진 시대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연표에는 이같은 고대 사료의 부족문제에 대해 한탄하는 글이 남아 있다.
편찬자 김부식은 고려 인종에게 올린 표에서 "우리 나라의 옛기록인 고기에 많은 사적이 빠지고 없어졌으며, 중국의 사서들에는 우리 나라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리지 않았다" 고 통탄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기록은 "연대가 구원하고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또 고기, 화랑세기, 사기, 한서, 후한서, 북사, 양서, 당서, 신당서, 수서, 책부원구풍속통, 통전, 사이술, 고금군국지 등의 여러 국내외 사서들이 인용되고 비교된 점을 보면, "삼국사기" 편찬자에 사용된 참고문헌 내용의 분량과 질이 시대에 따라 일관적일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천문현상 기록수가 시대별로 크게 변하는 까닭도 사료의 변동에서 찾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또 천문 현상 기록중 일부가 중국측의 기록과 같다는 사실은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베껴 원래 없던 기록을 보충한 증거라고 볼 수 없다. 편찬자가 에로부터 전해 오는 삼국의 기록을 여러 참고 사서와 비교하다가 동일한 기록이 있으면 참고 사서의 표현을 빌어 고쳐 썼을 수는 있다.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이 천문기록에서 보인다. 예를 들어, 중국 사서에 없는 혜성 기록의 경우 하늘에서 혜성이 나타난 위치가 거의 팔방위로 "삼국사기"에 표현되어 있는데 중국 사서에 함께 나타나는 기록에서는 혜성의 위치가 대부분 중국식 별자리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중국의 참고 사서와 옛기록을 비교하다가 동시 기록이 없는 혜성기록은 그대로 두고 중국측 기록이 있는 경우에는 혜성의 위치를 팔방위 대신 보다 정확하다고 판단되는 별자리 이름으로 표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공동기록은 이와 같이 동시에 관측하여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중국사서에 가끔 쓰여 있는 대로 중국이 주변국의 기록을 전해 들어 적은 것일수도 있다.
또 일식의 경우 당시의 부정확한 일식 계산법에 근거하다 보니 중국과 삼국이 함께 실수를 범해서 일어나지 않은 일식을 일어 났다고 썼을 수도 있다. 일식을 빠트리지 않고 관측하여 왕에게 보고하는 일은
당시 천문학자들에겐 목숨과 직결된 중대 임무였기 때문에 실제로 볼 수 없었던 일식도 예상만으로 관측했다고 보고 했을 수 있다. 그렇기에 또 일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식이 고려와 조선 시대에 까지도 한중일 사서에 적잖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를 단지 베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 할 수는 없다.
어려운 대학수학 문제를 똑같이 틀리게 푼 두 초등학생의 답안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무작정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베꼈다고 단정 할 수 있을까?
엄격히 말하자면 일식기록에 관한 기존의 일본 고천문학자들의 연구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이 과학적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론은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대부분 같은날 중국 사서에도 나온다는 단순 비교와 신라의 일식기록 분포도가 "이상하다"는 심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수행된 일식 계산 결과는 사실상 일본 학자들이 결론을 내리는 과정에서 별반 참조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사서 비교를 통해 얻는 단순한 주관적 판단이지 "삼국사기"일식 기록이 중국 기록의 차용인지를 객관적으로 분석·검증한 과학적 결과가 아니다.
과학이 학문으로서 공신력을 지니는 까닭은 주어진 자료에 대해 객관적이고 반복 가능한 분석을 통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달과 행성의 근접 현상 관측 기록에도 그랬지만, 일본 학자들은 미리 주관적 결론을 세워 놓고 과학적 분석이 가능한 천문 기록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부분적인 분석만 하거나 비과학적 논리를 앞세워 결론을 합리화하려 했다는 혐의가 짙다.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었다)
어느 나라가 일련의 일식 기록들을 남겼을 때 이 기록으로부터 어떻게 최적 관측지를 찾을 수 있는가?
일식이 일어나면 지구에는 달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어떤 곳에는 달의 온 그림자가 드리워져 해가 달에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일식을 볼 수 있다. 그 주변 지역에는 달의 반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해의 일부만이 달에 가려지는 부분일식이 일어난다. 달이 해에서 좀더 비껴 지나가는 경우에는 부분일식만 일어난다. 어떤 경우이든 어느 한 일식은 지구상의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를 놓고 이야기하자면, 어떤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서에서는 볼 수 있지만 동쪽에서는 볼수 없다. 또 한반도와 그 이북에서는 볼 수 있지만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일식도 있다. 만약 어느 나라가 한반도에서 꾸준히 일식을 관측했다고 하자.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은 어디겠는가? 바로 한반도이다. 그 나라가 기록한 일식 중에는 주변국에서 볼 수 없거나 보기 힘든 일식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적 일식 관측지는 바로 이러한 일식의 성질을 이용하여 찾는다.
그렇다면 실제로 삼국이 각기 일식을 관측한 지점은 어디였을까? 이것을 알 수 있다면 삼국이 정말 독자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는지, 또 관측을 한 위치가 어디인지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나의 일식 관측지 추정 방법의 신뢰도를 확인하기 위해 고려와 한·당·양나라가 남긴 일식 기록들에 대해 최적 관측지들을 추적하고 이를 각 나라의 강역과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가 실제 역사적으로 이미 확인된 강역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삼국의 최적 일식 관측지를 찾아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수록된 일식 모두를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지구상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다. 그리고 서기 2~3세기에 주로 나오는 고구려의 일식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는 만주와 몽고에 이르는, 백제보다 북위도의 지역이었다. 신라의 일식 기록은 서기 201년 이전과 787년 이후로 양분되어 있다. 그중 서기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양자강 유역으로 나타났다. 서기 787년 이후에 나오는 하대(下代) 신라에선 한반도 남부가 최적 관측지로 밝혀졌다.
즉, ≪삼국사기≫에는 신라 초기에는 남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주로 기록되어 있고, 고구려에는 북쪽으로 지나가는 일식이, 백제에는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일식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매우 심상치 않은 결과이다.
중국의 기록을 베꼈다면 당시 중국 나라들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와 삼국이 기록한 최적 일식 관측지가 평균적으로 모두 같은 위치로 나와야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식 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관측지가 나라마다 매우 다른 위도상으로 각각 떨어져 나타나고 있다. ≪삼국사기≫가 중국의 기록을 무분별하게 베꼈다면 이런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 등이 고도의 천체 역학적 계산을 통해 중국 일식 기록을 선별한 다음, 북위도로 지나가는 일식은 <고구려본기>에, 저위도로 지나가는 것은 <신라본기>에, 그 사이의 것은 <백제본기>에 나누어서 삽입하는 등 주도면밀한 편집을 했을리 만무하다. 이 정도의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천체 역학적 지식과 첨단의 컴퓨터를 이용한 방대한 수치계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의 일식기록은 각각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라고 결론지을 수있다. 이를 확률적 계산으로 증명할 수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국 사서의일식 기록을 임의로 뽑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에 나누어 싣는 모의실험을 수천번 해 보면 삼국의 최적 관측지에 이 정도의 위도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0임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 의 일식 기록은 중국 기록의 모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서 실측했던 기록인 것이다. 한편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서 일식 관측을 했음에도 '우연히' 최적 관측지의 경도가 모두 중국 대륙으로 나올 확률도 사실상 0이다.(기존 발표 논문 참조).
이들의 일식 기록은 우연히 최적 관측지가 중국 대륙 동부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실측한 기록인 것이다. 요컨대 삼국의 일식 관측지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중국측 기록을 베낀 것이라는 기존의 결론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역사와 민족을 말하는 일부 사람들 가운데 다소 퇴보적,종교적 혹은 말(글, 경서)풀이 식의 있었는데..그들은 과학적인,즉 검증가능한 자료의 발굴에는 그다지 힘을 보태기는 커녕 심지어는 혹세무민하는 경향까지 보이기도 하였는데..박창범씨와 같은 분은 이런 일부 비주류사학계에 큰 자각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댓글 역사와 민족을 말하는 일부 사람들 가운데 다소 퇴보적,종교적 혹은 말(글, 경서)풀이 식의 있었는데..그들은 과학적인,즉 검증가능한 자료의 발굴에는 그다지 힘을 보태기는 커녕 심지어는 혹세무민하는 경향까지 보이기도 하였는데..박창범씨와 같은 분은 이런 일부 비주류사학계에 큰 자각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