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무 (외 2편)
박정수
평생 자라지 않는 손가락이 있다 지워진 지문이 바늘 끝에 묻어나오곤 한다 바느질, 아주 느린 기다림의 호흡이다 거듭되는 밤의 실마리가 밀려들어가고 혼잣말이 여며지는 순간순간 새벽은 한 뭉치 졸음이었다가 기다림이었다가 동이 틀 무렵 한 여인의 밤이 엄지손가락 끝에 남겨졌을 때 문득 파고드는 불면의 침입
바느질을 한다…….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 발소리와 숨을 고르던 겨드랑이 근처의 솔기가 바르르 떨리고 어쩌면 지쳐가고 있는 건 또 다른 날들의 귀가였을지도 모를 희미한 심지 속 봄날처럼 손가락 끝에서 떠나지 않는 골무는 아무리 찔려도 비명 한 번 내뱉지 않는 명치 끝 같다 손가락 마디만 한 세월 안으로 조각조각 이어진 기다림이 기워진다
문신
후미진 골목에서 시작되었지
처음엔 그저 달빛 때문이었어
나만큼 초라해 보였지
그래서 밤이면
비릿한 골목을 쏘다니기 시작했었지
목련은 왜 달빛에 더 환할까
의문을 갖지 말아야 했어
거짓말처럼 그때부터
몸에 꽃이 피기 시작한 거야
비릿한 달빛만 비치면
소나기 속에서
자목련은 피고 있었지
짧은 비명들이 번지고
꽃송이는 물이 오르지
엉덩이에서 시작된 정원은
어깨로 향하는
긴 능선을 자유롭게 넘어서지
유두가 발갛게 곤두서곤 했어
그때부터였어
자목련은 비가 오는 날
피기 시작한 거야
비릿한 달빛 없어도
이포나루
노을은 흐르는 강의 내력까지 잡아 삼켰다
백년 전
이곳의 흥정물은 소금이었다
굽이굽이 싱거워진 삶의 내력을 돋구는 데엔 소금이 제격이었다
때로 가뭄에 콩 나듯 오지 않는 기다림을 움켜쥔 채
몇몇은 쉽사리 불어나지 않는 강심을 애태우기도 하며
새벽 가까이 포구의 안쪽을 헤매었으리라
梨浦나루
東西간의 교류가 남한강을 묶어놓았던 곳,
상인들의 흥정은 멀리 장호원까지 들릴듯 끊어지지 않았고
내 가계의 내력도 그곳에서 시작되었음을 저 강은 알리라
강은 거울이다
무수히 변화된 일상들을 비추며 희부연 기억 하나도 놓치지 않는,
오랜 세월
침묵의 깊이만 어루만지고 있는 강은 금이 가지 않는 거울이다
할머니의 손맛은 川西理를 낳았고
그 기억의 맛은 강을 따라 서해 어느 비린 항구까지 닿았음을
소금들의 내력은 거슬러 거슬러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젖은 강에 손을 디밀면 그때의 흥정소리 지금도 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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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나루 : 소금이 교역되던 곳
--시집 『봄의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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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본명 박혜정) /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2008년 《시작》신인상 당선.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지원금을 받음. 시집 『봄의 절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