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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이란 무엇인가?
마음공부를 하는 경우나 종교의 경우에도 보통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음공부가 수행을 통해서 하는 공부라고 하면,
“어떤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 따라오겠지요.
수행(修行)이라는 말에서 수는 닦을 수(修)이고 행은 행할 행(行)이죠.
여기서 ‘닦는다.’는 말은 ‘익숙해진다.’는 뜻이에요.
실천수행이라고도 하는데, 실천해서 익숙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물을 닦는다고 할 때에도 유리창을 닦는다거나 방바닥을 닦는다거나 물건을 닦는 것도 한두
번 닦는 게 아니라 계속 닦아서 반짝 반짝 빛이 나고 깨끗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는 거거든요.
한두 번 닦아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계속한다는 뜻이 있죠.
마음을 닦는다고 할 때에도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해지도록 익힌다는 거예요.
<논어>의 첫머리에 공자가 말한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말이 있어요.
배우고서 그 배운 바를 늘 익힌다는 뜻이에요.
회사에 처음 입사하면 수습사원(修習社員)이라는 말을 하죠.
수(修)나 습(習)이나 뜻이 같습니다. 익힌다는 뜻이에요.
회사 일을 익힌다는 말이거든요.
수습(修習)한다는 말은 그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수행이라고 할 때 수(修)라는 글자는 수습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에요.
익힌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마음속에 중생의 마음도 있고 부처의 마음도 있어요.
하나의 마음이지만 양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늘 중생의 마음만 익혀 왔어요.
중생의 마음을 익혀 왔다는 것은 중생의 마음의 특징인 분별하고 생각하는 것을 익혀 왔단 말이에요.
그 까닭에 중생의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하거든요.
우리는 모두 태어나서 지금까지 중생의 마음을 익혀 왔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에만 매우 익숙해져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중생으로 살아가는 게 큰 불편함이 없는 것이에요.
익숙하면 편하지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이란 부처의 마음에 익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마음공부에서 부처의 마음에 익숙해져가 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런데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의 마음은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경험한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익숙하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수행을 하려면 일단 먼저 부처의 마음을 한번 깨달아 경험해야 해요.
한번 깨달아 보면 ‘아! 이런 것이 있구나.’ 하고 경험하게 되죠.
그렇게 경험하게 된 부처의 마음에 익숙해지는 것을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은 뒤에 깨달은 마음에 익숙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깨달아야 부처의 마음을 경험하게 되고,
그런 경험을 계속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익숙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마음공부에서 수행을 말한다면,
깨달은 뒤에 그 깨달음에 익숙해져 가는 게 바로 수행이에요.
행(行)이라는 것은 행동한다는 거니까 실천한다는 뜻이죠.
결국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익히는 행동을 계속한다는 뜻이지요.
익숙하게끔 익히는 행동을 계속하는 거지요.
먼저 깨달은 뒤에 그 깨달음에 익숙해져 가는 게 수행입니다.
그러면 깨닫기 전에는 수행이 불가능할까요?
스스로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혼자서 익힐 수는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 혼자서 행하는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수행할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그 길은 이미 깨달아서 깨달음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는 스승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스승을 찾아서 정신적으로 그에게 의지하여 그의 가르침과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지만, 스승의 마음은 이미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내려놓고 스승을 우러르며 스승의 깨달은 마음을 따르고 좇아가는 것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의 수행이 됩니다.
이것을 일러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합니다.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스승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곧 깨닫기 이전의 수행인 것입니다.
이심전심의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스승은 자신의 깨달음에 대하여 경험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성실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듣는 제자는 서서히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들으면, 단지 말을 듣고서 이해하는 정도를 넘어서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스승의 깨달은 마음 가까이까지 제자는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정도에 이르면 제자는 그 곳에서 스승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불가사의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늘 긴 설법만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짧은 대화 속에서도 스승의 가르침에 자극 받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제자가 이미 오랫동안 깨달음을 추구해 왔다면 이미 자기 마음의 문 앞에 당도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단지 스승의 한 마디 말이 제자의 마음을 격발시켜 깨닫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선(禪)에선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깨달음이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깨닫기 위한 수행으로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해 놓고 있기는 해요.
“좌선을 해라.” “기도를 해라.” “염불을 해라.” “경전을 읽어라.”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얘기하는데
이게 사실은 이치가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좌선을 한다는 것은 대체로 앉아서 의식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관법(觀法)을 행하죠.
머릿속에 떠올린 하나의 생각에 의식을 집중하여 관찰하거나,
호흡이나 눈앞의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 관법이죠.
이것은 의식을 집중하는 훈련이죠.
의식을 집중하는 훈련이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올까요?
물론 의식을 집중하는 훈련을 하면 이 공부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면은 있을 수 있어요.
산만한 것보다는 집중을 잘 할 수 있으면 마음공부에 도움은 분명히 될 것입니다.
산만하다는 것은 계속 일어나는 온갖 생각에 얽매여 따라다니는 건데,
그렇게 산만한 것보다는 집중력이 있는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곧장 연결된다거나 그런 집중이 곧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어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집중하는 게 아니라
분별하는 중생의 습관을 벗어나 분별없는 부처의 마음이 실현되는 거거든요.
집중을 한다는 것은 내가 무엇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의 관계 속에서 집중은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분별하는 중생심에는 주관인 ‘나’라는 것이 있고 객관인 ‘대상’이 있단 말이에요.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거나 무엇을 관찰한다고 하면, 내가 그 무엇에 집중하는 것이고
내가 그 무엇을 관찰하는 거죠.
염불을 하는 것도 내가 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염(念)이라는 게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말이므로, 나라는 주관이 있고 생각하는 대상이 있어요.
중생세계를 분별세계라고 합니다. 분별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의 이런 분별을 벗어나면,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어요.
나와 남이라는 주관과 객관이 없기 때문에 집중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집중도 없고 산만함도 없죠.
그렇기 때문에 집중을 계속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또 집중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깨달음도 아닙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단지 분별에서 벗어나는 것이에요.
분별을 벗어나면 공(空)이라 하고, “한 물건도 없다.” 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듯이,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별은 없으나 살아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분별없는 마음으로서 살아 있을 뿐,
집중한다거나 산만하다거나 하는 차별도 당연히 없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집중하는 것이 곧장 깨달음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는 없어요.
깨달음을 비유로 표현하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닫는다는 말이 어두운 잠에서 깨어난다거나 어리석음에서 깨어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한 문으로 번역할 때는 각(覺)이라는 글자를 쓰죠.
영어로도 awake와 같은 단어를 쓰잖아요.
이처럼 깨달음이라는 말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이에요.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밝게 깨어난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깨달음을 비유하여 꿈에서 깨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꿈을 꾸는데 기분이 좋은 꿈 같으면 깨고 싶지 않지요.
그런데 아주 나쁜 꿈, 악몽, 가위를 눌리거나 하면 깨어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꿈이 꿈인지 몰라요. 그런데 악몽을 꾸고 계속 괴로우면
‘이게 악몽이구나.’ ‘꿈이구나.’ 하고 꿈속에서도 알게 돼요.
깨고 싶거든요. 깨고 싶지만 눈이 쉽게 떠지질 않아요.
꿈속에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만, 깨어날 수 있는 무슨 방법이 꿈속에 있습니까?
없어요.
꿈을 깨려고 꿈속에서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자체가 꿈이기 때문에 깰 수가 없습니다.
꿈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꿈을 깰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역시 꿈일 뿐이죠.
실제 악몽을 꾸면 그런 생각도 못합니다.
그냥 깨고 싶어서 진땀이 나고 발버둥을 치고 안달을 할뿐이지,
실제 악몽의 상황에서는 어떤 방법을 쓰면 깨어날까 하고 생각하는 여유를 부릴 틈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있어서 ‘어떻게 하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까?’ 하고
꿈속에서 생각하더라도 그 자체가 꿈이기 때문에 아무 효과가 없고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방법이란 게 있을 수 없어요.
꿈속에서 꿈을 깨려고 손으로 다리를 꼬집는다고 꿈을 깰까요?
악몽에서 깨어난 경험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악몽을 꿀 때에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은데도 마음대로 깨어나지 못하니까 안달복달하면서 절실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악몽 속의 공포는 자꾸자꾸 더 심해지죠.
더 두려움에 떨게 되고 더 괴롭게 됩니다.
그래서 막 발버둥을 치다보면, 어느 순간에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절박하게 되면 갑자기 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지면서 악몽이 끝납니다.
마음공부에서 깨달음이 딱 이런 식이에요.
이런 식이지 무슨 요령이나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나 명상에서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모든 수행의 방법들은 실질적으로 별 소용이 없는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고 싶은 이 발심, 이 절실함, 이것이 극에 다다를 때에 저절로 깨달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하거든요.
시절인연이란 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가 되어야 꽃이 피고 때가 되어야 싹이 트듯이, 깨닫고 싶은 절실함이 쌓이고 더 쌓이고 깊어지고 더 깊어지면
저절로 깨달음이 일어나는 때가 오는 겁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도 있듯이 계란 속에 있는 병아리가 부화해서
알을 깨고 나오는 것도 같은 이치죠.
때가 되어야 합니다.
병아리가 안에서 제대로 크지도 않았는데 알을 깨고 나올 수는 없어요.
때가 되면 저절로 알을 깨고 나오려고 병아리가 알 속에서 발버둥을 치게 되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보면 알을 깨고 나오는 겁니다. 깨달음의 경험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수행의 방법이 원인이 되어 깨닫는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에요
. 깨달은 뒤에는 분별을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거듭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과거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 삽니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세계가 아닌 낯선 새로운 세계에 들어왔음을 비로소 경험합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평소처럼 생활하지만 이제는 ‘나’라는 것도 없고, ‘나의 것’이라는 것도 없고,
‘내가 사는 세계’라는 것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어서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는
처음 겪어보는 낯선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는 번뇌도 없고 해탈도 없고, 삶도 죽음도 없고 삶과 죽음에서 벗어남도 없고,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생각이 없고 말이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계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온갖 것들이 잡다하게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깨달아 들어오면
너무나도 가볍고 홀가분하고 좋으며, 무엇보다도 이제 비로소 원하던 일이 성취되어서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음이 분명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의 세계를 한번 맛보면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삶은 돌아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게 됩니다.
마치 지금까지 몸에 맞지 않은 불편한 옷을 입고서 힘들게 살아오다가
이제 비로소 딱 알맞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새로 경험하는 이 깨달음의 세계가 좋은 것입니다.
이제부턴 좋지만 아직은 낯선 이 깨달음의 세계에 익숙해져 가야 하는 공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중생의 분별심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 아직 여기에 익숙하지 못해서
아직까지는 힘이 없고 낯선 상태이긴 하지만,
벌써 마음은 달라져 있기 때문에 굉장히 가볍고 좋죠.
그러니까 이 가볍고 좋은 여기에 익숙해지려고 하는 그 욕망이 이전보다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빨리 여기에 익숙해져서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가볍고, 좀 더 망상에 시달리지 않고,
좀 더 아무 일이 없고, 좀 더 아무 문제가 없고, 좀 더 지혜롭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어나죠.
그러므로 이 때부터 더욱더 이 공부에 몰두하게 됩니다.
공부에 더 마음이 기울어져서 선지식의 법문도 더 많이 듣게 되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이 세계가 좋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익숙해진다는 것은 짧은 시일에 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욕심으로는 빨리 익숙해져서 빨리 더욱 자유롭게 되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는 안 돼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하죠.
사실은 남은 여생 동안 천천히 익숙해져 가면서 지혜도 서서히 밝아지게 됩니다.
깨닫고서 깨달은 세계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것을 ‘익숙해져 간다.’는 뜻에서 수행(修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은 뒤에 깨달음에 익숙해져 가는 공부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마음은 중생의 망상하고 집착하는 어리석고 무겁고 어두운 마음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번뇌와 망상이 없는 지혜롭고 자유롭고 가볍고 밝은 보살의 마음으로 천천히 변화해 갑니다.
이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은 역시 생각으로 배워서 익히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마치 나무의 새싹이 땅에서 솟아나온 것과 같아서,
그 싹이 자라서 줄기가 되고 가지가 나오고 잎이 생기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마치 아이가 태어난 것과 같아서,
이 십여 년은 자라야 그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요점은 싹이 나올 때에 이미 큰 나무가 되어 열매가 맺힐 가능성은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것과 같고,
아이가 태어날 때에 이미 사람으로서의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한 사람의 어엿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요컨대 깨달음에 익숙해지고 깨달음의 지혜가 밝아지는 것은
오랜 시간 직접 겪어가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기간에 보고 듣고 배워서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수행이란 실천수행이라고 하듯이 오로지 직접 체험하고 겪어가면서
타고난 지혜가 밝아지고 타고난 본성이 발휘되는 것이지,
지식으로 배워서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을 일러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듯이
여래의 본성과 지혜는 본래 우리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깨달아서 수행하는 것은 그 여래의 본성과 지혜가 드러나 발휘되는 것입니다.
무심선원-2023, 무사인 5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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