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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문제 2 / 종기 화상으로 인한 나병
레 13:18-28
18 피부에 종기가 생겼다가 나았고
19 그 종처에 흰 점이 돋거나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생겼으면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20 그는 진찰하여 피부보다 얕고 그 털이 희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이는 종기로 된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21 그러나 제사장이 진찰하여 거기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제사장은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22 그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이는 환부임이니라
23 그러나 그 색점이 여전하고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종기 흔적이니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할지니라
24 피부가 불에 데었는데 그 덴 곳에 불그스름하고 희거나 순전히 흰 색점이 생기면
25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색점의 털이 희고 그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면 이는 화상에서 생긴 나병인즉 제사장이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가 됨이니라
26 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에 흰 털이 없으며 그 자리가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그는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27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만일 병이 크게 피부에 퍼졌으면 그가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나병의 환부임이니라
28 만일 색점이 여전하여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화상으로 부은 것이니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은 이는 화상의 흔적임이니라
레 13:18-28 / [심한 부스럼] 살갗에 부스럼이 생겼다가 나았는데 19) 부스럼이 생겼던 그 자리가 또 다시 희게 부르터 올라오거나 희고 불그스레하게 얼룩이 생기면 그 사람은 제사장에게 자기 상처를 보여야 한다. 20) 제사장은 그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 부스럼이 났던 자리가 주변의 살갗보다 더 우묵하게 들어가고 그 부위에 난 털이 희게 변해 있으면 그 사람을 부정한 자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것은 부스럼 났던 자리에 문둥병이 다시 생겨난 것이다. 21) 그런데 제사장이 그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 털이 희게 변해 있지도 않고 환부가 주변의 살갗보다 우묵하게 들어가지도 않고 오히려 수그러들었거든 이레 동안 다른 사람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그 사람을 격리시켜야 한다. 22) 그렇게 이레 동안 격리시켰다가 살갗에 더 퍼졌거든 제사장은 그 사람을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의 살갗에 번진 병은 문둥병이다. 23) 하지만 그 자리가 더 이상 헐지도 않고 번지지도 않았으면 곪았던 흔적이므로 제사장은 그를 깨끗한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24) [불에 데어 생긴 문둥병] 살갗을 불에 데어 그 자리가 불그스레하거나 희게 헐었을 경우 25) 제사장이 그 사람의 살갗을 자세히 살펴보아 그 환부에 난 털이 희게 변해 있고 그 자리가 주변 살갗보다 우묵하게 들어갔으면 그것은 불에 데어 생겨난 문둥병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그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 병은 문둥병이다. 26) 제사장이 그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 그 부위에 난 털이 희게 변해 있지도 않고 그 자리가 주변 살갗보다 우묵하게 패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아물었으면 제사장은 그를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이레 동안 격리시켜야 한다. 27) 그렇게 이레 동안 두고 보았다가 제사장이 다시 그의 환부를 자세히 살펴보아 살갗에 더 번졌으면 그를 부정한 사람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의 살갗에 번진 병은 문둥병이다. 28) 하지만 그 헌데가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고 오히려 아물었으면 그것은 불에 덴 곳이 단지 부르튼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제사장은 그를 깨끗하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의 살갗은 불에 데었다가 아물었기 때문이다.
종기나 화상으로 인해 악성피부병이 발병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화상의 흔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나병에 관한 규례에 있어 제사장의 역할이 주목됩니다.
종처를 보라(18-23) 어떤 사람의 피부에 종기가 생겼다가 나았습니다. 그 종처에 흰 점이 돋거나 희고 불그스름한 색점이 생겼으면 제사장에게 보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진찰해서 피부보다 얕고 그 털이 희면 전염성 악성피부병으로 판단하여 부정하다고 해야 합니다. 이처럼 종처에 종기가 나았다가 다시 발병할 수 있습니다. 종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우리의 습관이나 죄도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발병한 종처에는 처음부터 뚜렷하게 붉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불그스름한 색점이 돋습니다. 환자는 그때부터 빨리 제사장에게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을 이레 동안 가두어 격리하고 피부를 살핍니다. 만약 피부에 색점이 퍼지면 그는 여전히 부정한 상태에 있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색점이 퍼지지 않고 여전히 있으면 그것은 종기 흔적일 뿐입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을 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피부병은 나았지만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죄의 흔적도 남습니다. 의의 흔적도 남습니다. 바울처럼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기 바랍니다(갈 6:17).
화상에서 생긴 나병(24-28) 나병을 얻게 되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본문에서는 화상 후에 나병이 발병하는 경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화상도 나병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화상은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는 반면 나병은 사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피부가 곪고 썩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합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이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나병과 같은 죄가 발병한다는 것은 상당한 영적 위기입니다.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자각하지 못하면 결국 죽게 됩니다. 죄는 나병과 유사점이 있습니다. 화상을 입은 사람이 피부에 이상이 있어서 제사장을 찾아오면 제사장은 화상자리의 피부를 살펴봅니다. 환부의 털이 희고 그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면 화상에서 생긴 나병입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을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환부에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우묵하지 않으면 이레 동안 가두었다가 다시 그를 진찰합니다. 그 때도 여전하여 색점이 피부에 퍼지지 않았으면 화상의 흔적으로 선언합니다.
적용: 화상으로 생긴 나병은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나병이 아닐까요?
어느 스승 아래 제자 둘이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움직이는 것은 바람이다, 아니다 나뭇가지가 움직인다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승이 말했습니다. "지금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나뭇가지도 아니다. 바람이 불고 있는 곳은 너희의 마음 속이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너희의 마음이다. 그렇게 세차게 움직이는 마음은 너희 마음의 벽에 부딪혀 상처를 남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슴에도 멍을 남기는 법이다. 너희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이는 그 차디찬 바람은 도대체 어디서 불어오는 것이냐?“
< 설 교 >
제사장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레위기 13:18-28 / 정승대 목사님
혹시 여기 계신분중에 중병을 앓아 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이 계신가? 예를 들어 암을 앓았다가 치료함을 받았다던가, 아니면 불치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시다가 기적적으로 치료함을 받으신 분 있으신가? 저는 개인적으로 백혈병, 혈액암, 척수 악성 종양으로 불치병을 앓은 적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2년동안 항암주사를 받으면서 깨끗히 치료함을 받았다. 2년 항암치료 마지막 날, 스케줄이 끝나는 날, 병원에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축하한다고 케익도 잘라주고, 샴페인도 터뜨리고 또한 신문사에서 기사가 나와서 사진도 찍고 2년동안 아팠던 내용을 기사로 신문에 낸다고 기사도 오고 심지어 병원장이 와서 축하파티를 열어준적이 있다.
히마탈리지 병동이 한 사람살았다고 얼마나 축하해 주던지 이제 치료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파티를 하고 나서 제가 2주만에 병원에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허리가 끊어지게 너무 아파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이유는 제가 이제 다 나았다고 2년동안 병원에서 갇혀있다가 해방이 되니까 새벽예배서부터 밤늦게까지 너무 무리해서 갑자기 허리가 아픈데 중요한 것은 제가 백혈병이 시작될 때 느꼈던 몸의 통증과 너무 비슷했다는 것이다. 제가 병원에 갑자기 입원하니까 의사와 병동이 난리가 난 것이다. 제가 병원에 다시 누워있는데 얼마나 서럽고 두렵던지 2년 동안 눈물을 한번도 안 흘려봤는데 그때 너무나 심적으로 힘들었다.
혹시 재발되지 않았을까, MRI를 찍고 여러가지 검사결과가 이틀 후에 나왔는데 제 인생에서 그때만큼 두려웠던 적이 없다. 너무나 심적으로 힘들어서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만약 다시 아픈다면 저는 죽으면 죽었지 이 하이 인텐시브 키모 테라피를 받았는데 다시 치료를 받지 못하겠더라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경험을 하신 분이 있는가? 제가 이런 서론을 길게 하냐면 오늘 본문에 내용이 18절에 보면 중병을 앓았다가 고침을 받았는데 의심스런 나병이 다시 생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말을 하면 불치병을 알았다. 그런데 고침을 받았다. 그런데 다른 병으로 재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늘 본문 18에 ‘피부에 종기가 생겼다가 나았다.’ 그런데 19절에 다시 피부병이 생긴것이다. 여러분 여기 종기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쉐인’이라는 단어이다. 이 쉐인은 말은 아주 심각한 병인데 주로 피부병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병을 말한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당시에 10가지 재앙가운데 독종 재앙이 있다. 출애굽기 9장에 나오는데 악성종기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 악성종기가 바로 쉐인이라는 단어이다. 또한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다. 그때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다시 치료함을 받는다. 이사야가 무화과 반쪽을 가지고 상처에 올리니까 나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열왕기하 20:7절에 보면 히스기야왕의 병이 상처인데 이 말의 원어가 종기 ‘쉐인’이라는 말이다.
(열왕기하 20:7)
이사야가 이르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상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또한 욥이 사탄에게 얻었던 악창이 바로 쉐인이다. 욥기 2:7절에 보면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낫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종기, 쉐인은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심각한 병이다. 그런데 나음을 입었다. 깨끗함을 입었다. 그런데 나병과 같은 피부질환이 다시 그 자리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사람이 얼마나 좌절감이 들겠는가? 본문은 이 사람이 이러한 몸으로, 불안한 마음으로 제사장에게 나왔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외면상, 표면상 내용이 굉장히 차가워 보인다. 여러분 제사장의 역할이 마치 병에 걸린 사람을 아랑곳없이 격리 시키고 이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이 될까봐 7일동안 가두어 놓았는 것처럼 우리가 문장을 읽을때 그렇게 보여진다.
그런데 13장을 잘 읽어 보면은 이 13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가 이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처번째는 7일을 가두어 둔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왜 7일이라는 기간을 주셨을까 하는 것이다. 여러분 만약에 이 가장이 그 당시에 악성 피부염에 걸려서 만약에 나병이라고 판명을 받는 다면 가장이 없는 가정은 정말 온가족이 고통을 받게된다. 그런데 여러분! 이 당시의 상황을 다르게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의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환경자체가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다. 물이 없어서 몸을 제대로 씻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그런데 나병을 가진 사람이 어떤 계기로 인해서 누구에게 살갗이 닿기만하면 피부병이 생기는 환경이다.
그런데 악성 피부병이 아니고 고칠수 없는 나병이 아니고 비슷한 경우라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비슷한 경우만 나타나도 가족들도 그 사람을 피하게 되어있고 공동체 사람들도 그 사람을 소외 시키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그렇치않으면 그냥 비슷한 피부질환인데 그렇치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억울하게 공통체에서 격리될 수있고 진영밖, 공동체 밖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가 치료를 받았을때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몇 주 동안 나가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항암주사를 맞으면서도 교회 예배는 꼬박꼬박 드렸는데 몇주 동안 상처를 받고 시험이 들어서 교회를 나가지 않은 적이 있다. 그것은 교회를 갔는데 청년부 예배가운데 옆에 앉은 청년형제가 백혈병도 옮기는 병 아니냐고 마치 에이즈 환자처럼 자리를 옮기고 피해가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제가 너무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러분! 백혈병도 이기고 암도 이겼는데 한 사람말에 제가 완전히 무너졌다. 한동안 심적으로 너무나 힘들었다. 제사장이 신중하게 당사자가 억울하지 않도록 7일동안 하루 이틀이 아닌 하루 하루 살피는 것뿐만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충분히 살피고 정말 신중하게 판결해서 그가 정말 악성 피부병이 아니면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단지 엄격한 기준으로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배려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환경속에는 나병과 비슷하기만해도 다 쫓아 낼 수 있는 환경이다.
그 가운데서 제사장들에게 규례를 주어서 7일 동안 잘 관찰해서 신중하게 판결해서 한 사람도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규례이다. 여러분 7이라는 것은 사랑의 규례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도 누구를 판단할때 정말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다. 비슷하다고 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해서 아닌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이런식으로 무조건 정죄하고 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서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번째 레위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는 ‘진찰’이라는 단어이다. 13장에 계속해서 제사장이 진찰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20절, 21절, 25절, 27절 계속해서 제사장이 진찰한다.고 이야기 한다. 여러분 진찰은 의사가 하는 것이다. 진찰은 치료를 하기 위한 수단이 진찰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이 진찰했다고 말할수 없는 것은 제사장이 이 사람이 정결한지 부정한지 판결해서 부정하면 진영밖으로 격리 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치료의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진찰이라고 말할 수 없고 이것을 관찰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런데 레위기 기자인 모세가 계속해서 제사장들이 관찰했다고 하지 않고 진찰했다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의 진찬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진찰이라는 뜻은 원어로 ‘라하’ 라는 단어이다. 이 라하라는 단어는 그 뜻이 ‘주의 깊게 살핀다. 주의깊게 관찰한다, 주의 깊게 염려한다. 주의 깊게 염려한다.’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시각적인 현상으로 제사장이 병자를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장이 주의깊게 살피고 보호하고 감찰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치료하는 의사는 아니지만 이 환자를 위해서 마음을 다해서 섬기고, 사랑하고, 기도로 돌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가 병원에 왔을 때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면 먹는 약에서 부터 굉장히 하나하나 자세히 물어보시는 것이다. 그때 제가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목사님 뭘 안다고 이렇게 하나하나 자세히 물으실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관심이고 사랑이고 하나하나 자세히 기도하시는 사랑의 돌봄이었다.
마태복음 8:3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누가복음 5:12 /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병자를 진찰하는 제사장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이다. 예수님도 나병환자를 보시고 마태복음 8장3절 그리고 누가복음 5장 12절에 보시면 동일하게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부정한 나병환자에 손을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문둥병자,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만나서 손을 대셨다는 것은 단순히 접촉했다. 잠시 만졌다라는 말이 아니다. 헬라말에 이 뜻은 꽉 잡았다는 것이다.아니면 골고루 만졌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손이 진물나는 나병환자의 피부를 어루만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온전한 손이 문드러지고 응크러진 부정한 병자의 손을 꼭 붙잡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얼마든지 나병환자를 낫게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손을 내밀어서 불결과 부정의 상징인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민 것은, 접촉한다는 것은 받아들임의 표시이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나병병자를 고쳐 주신것뿐만 아니라 불결하다고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 사람들의 통념, 고정관념을 불식시키시고 그 사람을 받아 주신 것이다. 목회가 아픈 사람과 함께 하고 힘든 사람과 함께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은혜을 허락하셨다. 예수님처럼 제사장처럼 약한 자를 위해서 또한 내 마음에 나병환자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에 격리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을 베풀고 기다려주고 섬기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으시길 바란다.
기도
하나님의 관심은 회복이지 저주와 사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랑과 배려입니다. 연약한 한 사람까지도 살리는 것입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십니다. 한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주, 정말 왕같은 제사장처럼 삼은 우리가 예수님처럼, 제사장처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섬기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정한 피부병과 정결
레위기 13:18-46
1. 본문에는 나병의 다양한 증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기, 화상, 옴과 같은 증상과 정결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는 부정한 사람과 정결한사람이 확실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제사장의 선고에 따라 정결함을 회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부정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결과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부정함과 정결함의 결과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2. 제사장은 종기, 화상, 옴과 같은 여러 증상을 보고 부정한자와 정결한자를 판정했습니다.
만약 피부에 생긴 환부가 더 이상 퍼지지 않고 아물면 부정한 상태에서 다시금 정결하게 회복되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피부병과 같은 질병을 부정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질병이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처음 세계는 질병이 존재하지 않았던 온전한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질병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죄가 세상을 오염 시킨 결과가 죽음이요 질병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피부병 역시 부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피부병에서 회복되면 정결하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람은 다시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 졌습니다.
이것은 죄로 오염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 하십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과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의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 다시 정결하게 된 자들만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십니다.
어떤 치료제로도 치유 될 수 없는 부정한 자를 오로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거룩하고 온전한 자로 변화시켜 주 십니다.
3. 피부에 흰털과 염증이 발생한 환자는 심각한 전염성이 있는 것으로 판정했습니다.
그런 경우에 제사장은 그 사람을 부정하다고 선언합니다.
선언 이후에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진 밖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그의 부정함 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 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부정한 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분리됩니다.
하나님은 부정하고 오염된 것과 함께 거하실 수 없습니다.
부정한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4.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된 이러한 상태를 성경은 영적죽음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금 정결함을 회복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처해 있는 부정한 상태를 자각하고, 자신의 부정함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크게 외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화로 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이사야65) 라고 했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치료 받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부정한 자신의 모습을 각성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의의 길로 가기를 결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정한자들입니다.
그로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영광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정결하게 되는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 할 때,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하게 됩니다.
부정함을 씻고 정결함을 얻기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 그분의 보혈로 값없이 죄를 씻김 받으시기 바랍니다.
피부병과 정결의식
레위기 13장 / 찬송가 : 320장 “나의 죄를 정케 하사”
레위기 13장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나병이라는 질병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명사 ‘차라아트’는 개역개정 성경에서 ‘나병’으로 번역되었지만 현대의 한센병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질병은 사람뿐 아니라 오늘 본문 47절에 보면 의복이나 가죽제품에도 생겼었고, 14장 37절에 보면 집의 벽에도 생겼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병은 사람에게 악성 피부병을 일으키는 세균으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어쨌든 공동체 안에 악성 피부병 증세가 발견 되면 3절에 제사장은 증세를 살펴 부정하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45-46절에 나온 것처럼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서 부정하다 판단 받은 사람은 자신의 병이 나을 때까지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성 피부병으로 인해서 부정하다 판단 받고 진 밖에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것이 공동체가 쫓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발생한 문제도 아닙니다. 오히려 병이 나을 때까지 진 밖에 따로 살도록 함으로써 환자는 공동체의 의무에서 벗어나 완전한 쉼과 휴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밖에 격리되어 살도록 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병이 전염되는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성 피부병 환자를 공동체 밖에 잠시 머물도록 한 것은 환자 개인을 위해서나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5-6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사장은 일주일 단위로 피부병 환자를 돌봐야 했습니다. 피부병이 다 나앗는지 어떤 차도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굉장히 세심하게 공동체 전체가 피부병 환자를 대했던 것을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공동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세심한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는 자녀가 될 수도 있고, 부모가 또는 남편과 아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심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가정과 자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공동체가 전체가 함께 세심하게 작업해야 했던 정결의식이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정결은 나 혼자 깨끗함을 선언 받고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가 함께 해 나가야 하는 과정입니다. 혹시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세심한 돌봄이 필요한 지체가 있지 않은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정결과 신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그들을 돌보고 함께 성장하는 영적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 가정과 교회 가운데 회복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