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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맞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인맥과 파워
‘國富 축적의 주역’ 자부하는 ‘국가대표 秀才집단’
‘우리가 한국을 먹여살렸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들의 한결같은 자부심이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황무지에서 적수공권으로 고도 산업화의 터를 닦아 국가경제를 견인했다는 뿌듯함이 배어난다. 그들은 미래 디지털 시대에도 성장의 활로를 열어갈 선봉을 자임한다.
1975년 봄 서울 성북구 공릉동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캠퍼스. 며칠 전 중간고사를 치른 전자공학과 2학년 학생들은 느닷없는 ‘전원 재시험’ 통보에 의아해했다. 문제의 과목은 ‘공학수학’. 당시 공대 학생들에겐 필수과목이었는데, 수학이라면 난다 긴다 하는 공대생들도 치를 떨 만큼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요즘 서울대에 들어오는 학생 중에선 30% 정도만이 이 과목 수학능력을 갖췄다는 게 교수들의 귀띔이다).
그런데 전자공학과 학생들에게 ‘공학수학’을 가르치던 수학과 교수는 첫 중간고사를 치른 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50명 중 무려 30여 명이 만점을 받은 것이다.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이라 꽤 까다롭게 문제를 냈는 데도 그렇듯 ‘참담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은 무용지물. 고민 끝에 교수는 재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점수가 너무 좋아서 재시험을 치르게 된 초유의 ‘사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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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공학과 중에서도 서울대 전자공학과는 인문계, 자연계를 막론하고 수재 중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전국 최고의 인기학과였다. 지금의 수능시험 격인 대입 예비고사에서 못해도 전국 순위 200위 안에는 들어야 합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 취직해 생산라인으로 파견을 나가면 여공들이 요즘 영화배우 장동건, 권상우를 대하듯 몰려와서 “손이나 한번 잡아보자”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아래 위를 훑어보곤 했다.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서울대에 다닌다고 다 같은 서울대생이 아니다’는 특유의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 여느 서울대 학생이 ‘평민’이라면 공대 학생은 ‘진골’, 전자공학과 학생은 ‘성골’로 쳤다. 요즘은 어느 대학에서나 의예과가 톱을 달리고 있으나,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서울대 자연계열 19개 학과 중 전자공학과가 단연 수위였고 의예과 커트라인은 7∼8위, 치의예과는 공대 최하위 학과보다 커트라인이 낮았다.
“당시 서울대는 계열별로 신입생을 선발, 1학년을 마친 뒤 성적순으로 학과를 배정했는데, 정원이 50명인 전자공학과에 들어가려면 공대·자연대·사범대 이과 신입생 1120명 가운데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했다. 그러니 전자공학과에 맨 꼴찌로 붙은 학생의 학점도 4.3점 만점에 3.8점이 넘을 정도였다.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2학년 1학기까지는 대부분 4.0대 학점을 유지하지만, 우등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2학기에는 난생 처음 2.0대의 충격적인 학점을 받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학생들이 하도 어이없어 하니까 교수님이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여기에서 꼴찌해도 다른 데 가면 1등이다’며 격려해주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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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들은 학창시절이나 지금이나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1960∼70년대에 서울대 공대에 다니던 학생들은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배지를 마다하고 ‘S’자 좌우에 각각 ‘工’ ‘大’라고 써넣은 공대 배지를 만들어 달고 다니며 차별화를 겨냥했다. 이 배지가 당시 서울공고 배지와 디자인이 비슷해 “너희가 공대생이냐, 공고생이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하지만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한술 더 떴다. 서울대 배지에는 펼쳐놓은 책 양면에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 대신 ‘전’자와 ‘자’자를 써넣은 사제(私製) 배지를 달고 다님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차별화를 기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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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대부분 산업현장이나 대학, 연구소 등에 진출해 주로 R&D(연구·개발) 업무에 종사했다. 그들은 자본, 기술, 숙련인력 등이 태부족해 황무지와도 같았던 산업여건에서 한국을 세계적인 전자산업 강국으로 키워낸 주역이라 자처한다. 자신들의 두뇌와 근면으로 가전, 반도체, 정보통신 등 국가 생존전략과 직결된 첨단 전자산업 발전을 견인, 막대한 국부(國富)를 창출한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전자공학과 출신의 한 기업인은 “서울대 전자공학과가 지금까지 배출한 인력은 2000명 남짓하지만, 1900억 달러에 달하는 우리나라 수출실적 가운데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은 부분은 드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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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각지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전자공학과 동문들 활약상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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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金貞植·75·48학번) 대덕전자 회장은 1972년 회사 설립 이래 32년간 인쇄회로기판(PCB) 한 분야에 전념해 왔다. PCB는 PC, 휴대전화 등 각종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 장비에 반드시 들어가는 핵심 부품. 국내 최대의 PCB 메이커인 대덕전자는 지난 2000년에 2억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고, 미국의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계 200대 우수 중소기업에 2년 연속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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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길어서 전문은 위 태그로 들어가서 읽어보시길..
옛날 기사긴한데 지금도 그닥 변한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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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설전자 눈에 "잡학과"였던 설의가 설전자를 능가하는 입결이란거 외엔..
나도 고딩때 "설대 전자공" 출신의 첫 느낌이 "저게 사람인가?" 했었으니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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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여러 뻘짓속에서도 이만큼 버틸수 있었던건 우리덕분이다"...이건 사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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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까지 전국 최고의 인재가 설전자에 몰렸고 이들이 삼전,하닉을 이끌고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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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서울대에 500억 기부금 낸 김정식 회장도 소개됨
그냥 인맥 학벌로 꽁으로 처먹은게 아니라 대학 입학 후에도 피터지게 공부해서 실력을 갖춘 다음에 부리는 부심이라서 인정할 수밖에 없음.
그러게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정확히말하자면 90년 중반이후죠. 글고 반도체땜에 지금 한국경제가 버티고있는게 현실인데, 옛날얘기가 아닙니다. 걍 입시현실은 지금 반도체 개발주역들이 대학생일때 저런 성적으로 들어왔다는 얘기구요. 전 님이 더 안타깝네요.
신동아 보냐??? 저런 기사 있는건 어캐 알고 퍼옴 ㅋㅋㅋㅋㅋ
월간조선은 안봄???
우연히 보게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