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간 남원도공이야기 2
-일본 도예의 상징 사쓰마 야키(陶藝)-심수관요蟯
우리가 도착한 미야마(美山)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느낌을 주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쓰마야키의 본고장 도요지이다. 미야마는 임진왜란 때 납치돼 온 조선의 도공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미야마에는 수십개의 도요(가마)가 있지만 사쓰마야키를 대표하는 심수관 요(窯)가 가장 유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말로만 듣던 그 유명한, 미야마(美山)마을의 심수관도요지에 도착했다. 심수관 집은 미야마 마을 중간쯤 간선도로변에 자리잡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잘 가꾸어진 향나무 길 안으로 들어가니 대문 정면에 제주도 돌하르방이 반갑게 맞아준다. 현관에는 태극기가 일장기 보다 좀 더 높이 게양되어 있었다. 태극기와 함께 새겨진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관’이라는 현판이 선명하고 현판 위에 걸린 대한민국정부의 태극문장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은발의 턱수염이 덥수룩한, 도요복 차림의 14대 심수관 옹이 우리를 반긴다. 온화하고 자상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가옥들은 한국의 정서가 가득했고 도자기를 굽는 가마와 도자기 용어들도 모두 한국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차를 마셨다는 다실에도 들렸고 전시실엔 김대중 대통령의 이름이 담긴 명예 총영사의 임명장, 그리고 1999년의 대통령의 훈장증도 진열된 전시실도 둘러보았다. 심수관의 자랑은 초대 심당길로 부터 15대 심수관의 대표적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수장고이다. 수장고란 말에서 겸손함을 느낀다.
여기에는 한글 훈몽(訓蒙), 조선어집(朝鮮語集), 옥산궁유래기(玉山宮由來記), 표민대화록(標民對話錄)등 소중한 역사 자료가 진열되었고 가보로 보관 해 온 망건과 숙향전, 조상이 남원성에서, 왕자 이 금광을 호위하던 군관이었다고 기록된 문서등도 내 보여 주신다. 이곳에서 우리의 기념품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면서 기념촬영도 하였다. 우리가 간 1997년, 그분 나이 79세이었으니 지금의 나이는 97세쯤 될 것 같다. 그분에게는 1999년에 승계한 15대 심수관, 아들 일휘(一輝)가 있으나 작업실에서 일 하고 있었던 관계로 만나지는 못했다.
판매전시실을 둘러보는 나의 눈이 도자기 하나에 멈춰 선다. 크지도 작지도 아니한 동그랗고 목이 짧은 자기다.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은은하면서도 환하게 반짝이는 옅은 갈색이었다. 항아리 맨 밑에는 보일 듯 말듯 수관(壽官)이라는 낙관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니 도자기 전체에 희미한 실금이 가득했다. 불량품인지 정상 품인지는 모르나 우선 마음에 들어 여기 온 기념으로 사기로 했다. 값어치가 꽤나 나갈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아니했다. 정성스럽게 포장이 끝나고 난 뒤 나와 14대 심수관옹은 나란히 포즈를 취했다. 남원에서 와 있는 소녀가 나의 카메라를 눌렀다. 웬일인가? 카메라가 터지지 않는다. 전원이 다 한 것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이를 두고 한말인가. 일행이 모두 나간 상태여서 누구의 카메라도 빌릴 수 없다. 심옹과 나는 어이없이 웃으면서 다음에 한국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작별했다. 그의 해맑은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 가없다.
심 수관(沈壽官)가문의 고향은 전라도 남원이다. 현재 14대 심수관이 도자기의 맥을 잇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이른바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는 정유재란 때 일본인들은 우리의 도공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정유재란이 끝나던 1598년 12월. 일본 사쓰마 시마 비라(鳥平) 해안까지 끌려온 조선의 도공들은 43명. 이들은 사쓰마, 지금의 가고시마를 비롯해 일본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면서 당시 나무그릇 밖에 접하지 못했던 일본인들 에게 흙과 불의 신비한 기술을 깨우쳐 주었다. 17세기 초까지 백자를 만드는 기술은 중국과 조선만이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황족을 비롯하여 번주(藩主)들, 상류 무사. 거상 등 상류층에는 조선 도자기가 보물로 인식되었다. 특히 도요또미 히데요시 (豊臣秀吉)는 전쟁터까지 다기를 휴대하며 차를 즐겼다. 다기(茶器)를 공을 세운 무사에게 포상 품으로 수여했고 심지어 귀한 다기는 대규모 영지와 맞바꿀만한 가치를 지녔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 사쓰마 번주인 ‘요시히로’(鳥津義弘)가 전라도 남원으로 쳐 들어간 것도 실은 조선도공을 잡아가기 위한 술책이었다. 조선 백자에 군침을 흘리고 있던 일본은 이를 직접 만들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던 영주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도공들을 잡아 갔던 것이다.
문화의 힘이란 총칼보다 더 강한 것이다. 끌려온 조선도공들이 빚어낸 유려한 백자를 본 일본 통치자들은 그들을 보물 모시듯 극진히 보살폈다.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무라이(武士)의 계급까지 수여 했다. 문화를 아끼는 일본의 모습이 총칼을 들이 댈 때의 모습과는 대조적 인 것이다. 고향에 돌아 갈 날만을 기다리며 ‘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노래를 불렀던 선조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 한 채, 이국땅에 묻히게 된다. 그러나 선조들의 혼과 기술은 후세로 전해지면서 일본 도자기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이 정착한 가고시마의 미야 마(美山) 마을은 조선인의 도예촌이 된 것이다.
일본도예의 3대 산맥. 가라쓰 도예, 아리다 도예, 그리고 14대에 걸쳐 심수관가가 지켜온 사쓰마 도예, 모두 조선 도공들이 이룬 성과다. 오늘날 까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는 사쓰마 도예의 창시자 심 당길, 우리고장 남원출신인 그는 사쓰마에 터전을 잡고 후손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 했다. 그렇게 해서 2대 3대, 4대. 400년간 심 당길 에서부터 현재 14대 심 수관에 이르기까지 심 수관 가문의 작품은 일본 도예계의 역사가 된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개명하고 귀화했던 다른 도공들과는 달리 심수관이라는 우리 이름을 고집하면서 400년간을 기업을 이어오고 있는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는 1989년에 14대 심 수관을 대한민국 명예 총영사로 임명하였다.
심수관가의 집념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400년 전 심당길의 유언 때문이리라. 포로로 끌려 올 때 심당길은 흙과 유약을 가져갔으나 도예의 혼이라 할 수 있는 불씨는 가져 올수 없었다. 그들은 유약과 흙은 조선의 것을 쓰고 오로지 ‘불만’ 일본의 것을 썼다. 조선도공의 자부심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심 당길은 조선 땅에 두고 온 불씨를 항시 애석해 하며 후손들에게 고향의 불씨를 가져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월이 흘러 그 유언은 제 14대 심 수관에게 까지 이르렀고 400년이 흘러서야 심당길의 유언은 풀리게 된 것이다.
사쓰마야끼 전래 400주년을 맞는 지난 1998년 10월,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의 불씨 봉송작업은 눈물겨웠다. 남원 교룡산성 산신 단에서 부싯돌로 채화한 불은 순천 -진주-부산을 거쳐 400년 전 선조들이 건넸던 현해탄을 따라, 선조 심 당길 과 조선도공들이 배에서 내려 첫 발을 디딘 구시 키노(串木野)시의 시마 비라(鳥平)해변으로 직접 옮겨왔다. 이날 10월 21일은 공교롭게도 400여 년 전 끌려간 남원도공들이 여기에 도착한 날이다. 이어 22일 도공 1세대들이 만든 옥산신사(玉山神社)에서 남원의 불씨를 올리는 봉납 식을 가졌고 곧이어 14대 심 수관 집 앞에 건설된 한. 일 우호의 불꽃 탑(韓日友好의 炎)에 불을 밝힌 후 동시래정 장과 미산초등학교 3학년인 어린 소녀가 불 봉을 들고 3개의 방을 가진 재래식 가마인, 공동 가마< 통칭 400년 가마>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심수관은 규수 지방의 도공들에게 불을 나누어 준다. 고향의 불로 말이다.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도공들, 그 자손들이 대대로 꿈꿔온 고향의 불로 만든 도자기가 이 가마 속에서 1주일 후면 탄생되는 것이다.
( 참고; 태평양 전쟁 당시 외무대신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武德)'라는 인물이 있다. 도고는 사쓰마 임란 도공 후손으로 다섯 살까지는 박무덕(朴武德)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 는 사쓰마의 조선 도공 후예라는 멍에 때문에 출세하기는 애초 글른 형편이었다.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은 고심 끝에 족보를 사들여 성(姓)을 도고로 바꾸고 사쓰 마를 떠나 보낸다. 도고는 동경대학을 졸업한 후 외무고시를 통과하고 끝내 권력 최상부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책임자로 전범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 고 복역중 1950년 사망한다. 얼마전 일본사가들은 그가 1944년 4월 '한반도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를 해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혀 우익의 테러를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바로 그 도고의 슬픈 일생은 임란 도공 후손들이 갖는 원초적 아픔이다. 일본의 유명작가 시바 료타로는 20여년전 도고 시게노리를 취재하러 사쓰마로 와 서 조선 도공의 후손들의 애환을 듣게 된다. 심수관의 집은 도고가 태어난 집 이 웃에 있다. 시바 료타로는 곧바로 14대 심수관과 인터뷰 하고 임란 도공의 비애를 그린 '고향을 잊을 수 없다(故鄕忘く難じ候)'란 책을 쓰게 된다. 흔히 국내에서 '고향난망'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임란 도공들의 애환과 정착과정을 실감나게 그려 일본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