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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담심리자료창고 원문보기 글쓴이: 고바우
책 제목은 'The handbook of art therapy'로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저자는
Caroline Case and Tessa Dalley입니다. 책의 Contents는 9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목차 내용 -
1. Introduction 1
2. The art therapy room 15
3. The therapy in art therapy 34
4. Art and psychoanalysis 50
5. The image in art therapy 73
6. Development of psychoanalytic understanding 88
7. The art therapist 110
8. Art therapy with individual clients 133
9. Working with groups in art therapy 148
Chapter 5
The Image in Art Therapy
미술치료 내에서 만들어지는 심상(image)은 사고와 느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심상에 중개자(mediator)로서의 역할을 부여하는 내부적인 세계와 외부적인 현실간의 연결(bridge)이 되어야 하는 미술의 능력이며, 전반적인 예술(arts)이다. 심상은 무의식과 의식간을 중개하며 내담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측면들을 지지하고 상징화한다. 그림에서 양가감정과 갈등들이 언급되고 포함될 수 있다. 미술치료에서 내담자는 만들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설명하기 어렵거나 혹은 말하기 힘든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외현적으로 보는 내면의 경험이 중요하다-심미적인 경험. 미술치료자가 내담자의 허용을 얻어서 내담자의 세계로 들어가고 공감하는 것과 내담자가 그들을 알리고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심미적인 경험을 통해서이다.'미술에서 제작자와 관람자는 언급되지 않은 생각에 대해 이해를 공감한다'(Langer, 1963; 250).
치료과정을 기술하기 위하여, 미술치료자가 관찰한 것으로서 그것이 만들어진 방법으로 하나의 심상을 따라 가보자. 그리고 잇따라서 내담자가 그것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을 때에 얻은 통찰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 청년이 미술치료집단에 처음 와서 한 세션에서 아래의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찰흙을 집어서는 그릇(bowl)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안에 구역질하는 듯한 상(figure)을 구부려서 만들었다. 다채로운 색의 휴지를 꼬아서 ‘게운 오물(vomit)’을 만들었으며 그 혼합물을 더해주기 위해서 칠을 했다. 그는 또 하나의 상이 한 쪽에 바라보고 있는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2번째 인물로 옮겨가서 그릇 안에 있는 것을 2번째 인물이 1번째 인물에게 스푼으로 떠 먹이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릇 안의 내용은 ‘오물’에서 ‘음식(food)’으로 바뀌었다. 그 후에 그는 2번째 인물의 손을 또 만들어서 이제는 스스로에게 음식을 먹이도록 했다. 자신이 만든 장면에서 물러 앉아있으면서, 내담자는 마치 취약성을 느끼는 듯 했으며, 아주 널따란 투명한 필름으로 그릇 위를 덮었다. ‘오물-음식’은 이제 마치 반짝이는 귀중한 보물들과 같이 바뀌었다(종이 위에 칠한 것이 젖어있었으므로). 그 모델이 그에게 말할 수 없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는 만드는 과정동안 심오한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이는 Jung이 종종 치료를 연금술(물건을 변화시키는 마법), 기초적인 광물을 금으로 바꾸는 것에 비유한 것과 유사한 논리를 사용하여 치료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치료에서 그것은 마치 개인이 화가 나고 슬픈 어려운 느낌들을 오물과 같은 더러운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느낌들은 그 공간, 그릇 내에서 내담자에 대하여 치료자에 의해 수용되어야만(contain)하는 것이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이러한 원치 않았던 생각들과 느낌들, 우리가 싫어하는 마치 음식(food)과 같은 우리의 부분들을 재통합하고 그것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야한다. 그들이 다른 수준에서 의미와 경험들을 이해하고 재통합하는 것은 개인의 발달과 성장에서 점차 소중해지는 것으로서 보석들과 같다. 내담자는 치료과정 동안 적극적인 참여를 한다. 내담자의 건강한 부분은 아픈 부분을 돕고 먹이고(feed)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만족시킨다.
심상은 제작과정동안 그리고 집단에서 그것을 이후에 탐색하는 과정 동안 내담자 측의 이러한 생각들과 수반되는 느낌들을 나타냈다. 이것을 하도록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심상의 어떤 자질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2가지 과정들 혹은 작업방식을 그려보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이것들은 Freud에 의해서 기술된 1차적 과정과 2차적 과정으로서 기술되었으며 4장에서 전반적으로 설명되었었다. 2차적 과정의 상징화(symbolism)는 논증적인(discursive) 것이며, 그것은 직선적인 추상적 연속적인 위계(linear discrete successive order)를 지니는 언어들을 통하여 상징화되는 의식적인 이성적 사고이다. 심상이 만들어지는 방법에 대한 우리의 서술은 이러한 과정을 사용함으로서 기술된다. 그러나, 심상 그 자체는 연속적이지는 않으나 동시에 그 구성요소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상상적으로 작용하지만 일반화될 수는 없다. 1차적 과정에서의 상징화는 그래서 비 논증적이며, 말보다는 시각적인 심상으로 표현된다. 그 복잡성은 정신(mind)이 통각적인(apperceptive) 행위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6장의 상징화를 보라)
미술치료에서 만들어진 심상들은 치료과정동안 내내 그것들과 함께 작업하는 동안 다른 생각들과 감정들의 새로운 의미를 계속적으로 나타내거나 제안한다. 그것들은 이후에 의뢰될 수 있는 세션의 종료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인 산물이 될 수 있으며 혹은 만들어낸 일련의 심상들 내에서 그들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서 새롭게 간주될 수 있다. 몇몇 저자들(Milner, Rycroft, Langer)는 심상-경험(image-experience)을 기술하기 위해서 말(words)을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에 대해 기술해왔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이 어려움에 도전해 볼 것이며 미술치료에서 심상이 작용하는 몇 가지 방식들과 미술치료자가 심상을 가지고 작업하는 방식들을 제시할 것이다.
미술치료에서 치료자와 내담자 모두는 만들어진 심상에 심미적으로(aesthetically) 반응한다. 그것은 치료자와 내담자에 의해서 지각되고 다시 지각되며 언어적인 상호작용과는 다른 수준에서 우리의 상상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우리는 경험을 공감하고 있으며 말하지 않은 생각을 공감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가치는 환자들 중 많은 이들이 말을 하지 않고, 느낌을 잘 말하지 못하며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실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위에 언급된 내담자는 이미 자신의 집단에서 만들어진 이전의 심상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그의 상상적인 삶에 들어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집단에 있는 다른 이들의 부분이 되었다. 이런 역동은 9장에서 더 기술될 것이다. 이러한 영향력의 2가지 측면을 살펴보자.
이전의 집단에서, 다른 사람이 전날 자신이 꾼 꿈을 찰흙으로 만들었다. 꿈에서 그는 음식점에 가서 특별한 과일을 요구했는데 전혀 맛보지 못했던 이상한 과일을 받았다. 이 꿈과 그것을 찰흙으로 집단에서 만드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으로서 미술치료과정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꿈 심상은 맛이 좋았던 이상한 과일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꿈 경험이 첫 번째 내담자의 상상적인 삶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그리고 그가 담겨진 그릇에서 어떻게 그것을 꺼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내담자가 사용한 플라스틱 필름은 자신의 찰흙모델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요구했던 여성에 의해서 집단에 도입되었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다른 여성에 의해서 그림 속에 칠해진 그녀의 맨 살을 내 놓은 다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는데 그것들이 노출된 채 취약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내담자는 그리고 나서 그 내용을 변형하여 소중한 보물들로 바꾼 그릇을 덮기 위해서 필름을 사용하였으며 그 자신의 취약한 느낌을 방어하였다.
미술치료실에서 방의 내용물들은 실용적인 미술재료들과 집단의 정신적 내용들은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그 방을 사용하는 각 개인들의 상상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 미술치료자 역시 이 과정의 한 부분이다. 기술된 첫 번째 심상에서, 치료자는 바라보고 있는 인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치료자와 작업동맹을 형성한 내담자의 부분이기도 한다. 치료자는 음식의 형태로서 떠낸 물질을 되 먹여 준다. 치료자는 또한 그 자신을 먹이기도 한다. 치료자는 이미 치료에서 자신을 작업했었고 내담자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과 유사한 ‘여행’을 했었다. 치료자는 역시 필요하다면 그 자신의 치료를 지속하고 자문을 받음으로써 계속 배운다. 이런 식으로 치료자는 심상 속에서 스스로에게 자양분을 주는 내담자를 먹이는(feed) 동안 스스로를 먹인다(feed).
MESS AND MATERIALS
미술치료에서의 재료들(materials)은 심오한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정신, 느낌, 생각과 아이디어들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많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방은 이것을 할만큼 충분히 안전감을 주어야 하며, 모든 재료들에 대한 개방된 촉진(open access)은 표현에 이르는 많은 가능한 길들을 유용하게 만들 수 있다. 내담자는 종종 각 세션마다 혹은 같은 세션 내에서 아주 다른 재료들을 사용하며, 그들의 작업유형은 치료의 시기와 다른 단계에 따라 확실히 다를 것이다.
내담자에게 제시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몇 가지 다른 자질들과 힘(power)을 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미 찰흙이 3차원의 유연한 매체의 이점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상(figures)은 움직일 수 있고 새로운 부분이 부가되고 제거될 수 있으며 , 혹은 많은 다른 소재들로 조합될 수 있다. 그것은 담기 위해서 빈 공간을 그 안에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혹은 구조를 세우기 위해서 막대를 그 안에 넣고 사용할 수 있다. 요즘 새로 나온 찰흙들은 저절로 굳어서 가마(kiln)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세션의 마지막에 축축하게 보관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찰흙은 정서적인 이완을 돕는 것으로서 신체의 긴장을 경감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바로 그 신체적인 관련성을 촉진한다. 이런 이유에서 찰흙은 작업하는 가장 강력한 매체이다.
다른 2가지의 예들이 이 과정을 나타낸다. 5살 짜리 소년이 개인 세션에 달려 들어와서는 전 주에 그가 찰흙으로 만들었던 컵을 찾으려고 야단이었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그는 실망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안돼, 깨졌잖아.’ 그는 어쩔 줄 몰라하며 치료자에게 컵을 보여주고는 거의 눈으로는 식별이 되지 않는 작은 구멍을 가리켰다. 그것은 마치 그의 전 세상이 부서진 것과도 같았는데, 그것에 대해서 치료자는 반응했다. ‘걱정하지마. 내겐 깨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구나. 우린 이것을 고칠 수 있어. ’ 그러자 그 아동이 갑자기 말했다, ‘그래요 난 그것을 칠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바쁘게 물감을 짙게 풀어서는 그의 이전의 대상을 회복시켰다. 상징적으로 이것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였다. 그의 세계는 계속 가라앉고 실망하는 경험의 연속이었다. 세계에 대한 그의 기대가 일반적으로 이런 식으로 되어왔었기 때문에 이 ‘깨진’ 컵에 대한 그의 반응은 예측이 가능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계속 실망하게 되는 것의 고통에 대한 그의 방어였다. 그가 스스로 그에 대해서 뭔가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의 세상에 대해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이것은 절망감과 무력함을 그가 덜 느끼도록 도왔다.
다른 사례는 5일간의 미술치료 워크숍에 작업하러 온 20대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첫날에 와서는 큰 상자에서 찰흙을 집어서 치료자와 집단의 대부분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같은 장소에 앉아서는, 작은 인물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1주일 내내 그녀는 겨우 4인치 크기인 이 상을 만들었으며, 얼굴, 귀, 머리카락, 손가락 등과 같은 모양들을 세밀하게 만드는 데에 엄청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는 완전한 상을 만들고는 조용하게 내내 울면서 재료들을 몇 장 찢어서는 그 주변을 겹겹이 포박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카드보드지로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를 만들어서는 그 미이라로 만든 상을 그 안에 넣고는 슬픔 속에서 흔들었다. 5일째의 마지막에, 그녀는 이제는 확실히 관(coffin)이 분명한 것을 완성하였다. 집단은 그녀의 슬픔을 존중했으며 그녀의 심상에 대해서 너무 깊이 질문하지는 않았지만 종국에 그녀는 자신이 만든 상은 어릴 때에 사망한 그녀가 몹시도 사랑했던 여동생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슬픔 속에서 가족은 다른 형제들을 멀리 보내어 그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심상을 만든 것은 그녀가 이것을 다시 보고 여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슬픔을 공감하고 지지해 줌에 있어서 그 집단이 그녀의 가족이 된 것과도 같았다.
2가지 경우들 모두에서 재건설(reconstruction)은 복원(reparation)을 가능하게 했으며, 상실을 훈습하도록 한다. 다른 환경 하에서 미술은 특정한 시기에 방어하도록 돕는 데에 사용될 수도 있으며 이를 위해 특별한 매체가 선택되기도 한다. 14세의 사춘기 소녀는 펠트 팁 펜(felt tip pen)을 사용하여 심상을 나타냈다(그림 5.1). 스텐실들은 ‘유아용 세트’의 부분이었다. 각각의 것은 A4크기의 종이에 조심스럽게 놓여서 윤곽을 따라 그려졌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분홍색의 펠트 팁 펜으로 채색되었다. 마침내 각 각의 항목이 그 자신의 칸 속에 조심스럽게 완전하게 윤곽을 갖췄다. 이 세션 동안, 그녀가 현재는 ‘안전한 장소(place of safety)’에 있으라는 명령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보호를 계속 받아야 할 것인지 혹은 집으로 보내져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심문(court hearing)이 진행 중이었다. 심문(hearing)에 대한 그녀의 심각한 불안은 이러한 심상을 만드는 것을 통해 수용되었다.
우리는 이미 미술치료자와 방(room)이 내담자에 대한 수용체(container)로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림 혹은 모델은 정서들이 노출되고 지속되는 더 깊은 틀(frame)로 작용한다. 그녀의 심한 불안 속에서 그녀의 유년기에서 나온 아기고양이, 집, 공, 곰 인형, 인형 그리고 유모차 등 각각의 항목은 그림의 틀 안에서 윤곽을 얻었으며 그렇게 해서 아무 것도 튀어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물건들은 편안하고 어린아이 같은 분홍색으로 채워졌지만 또한 마치 자신을 아기와도 같이 치료자가 안아주고 수용해주기를 원하는 그녀의 욕구수준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 스텐실 항목들의 윤곽을 그리고 채우는 것에서 그녀의 보다 성숙한 자기(self )는 내부에 있는 아기부분(baby parts)을 피난시키고 조용히 흔들어준다. 펠트 팁은 통제가 가능하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고 예측이 좀 더 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목적에 유용한 매체이다. 물감과 물감용 붓과는 달리, 한가지의 색채가 갑자기 튀어나오지도 않으며 다른 것과 섞이지도 않는다.
내담자가 정서를 드러낼 준비가 되었다고 느낄 때까지 치료에서는 수개월의 작업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기다리는 이 긴 과정 동안 심상들은 그것들로부터 내담자가 취한 방어된 위치를 내담자에게 나타낼 뿐 아니라 구체화되고 반영될 것이다. 치료자의 일은 정서들을 끄집어내어 분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느낌을 느끼고, 그것이 수용되고 경청되고 이해할 것임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에서 각 개인은 그 자신의 속도로 발달해가며 치료자와 장면에 신뢰를 지니게 되면 내부에서 준비가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10세인 한 아동이 도판 1(plate 1)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성(castle)의 심상을 3개 만들었다. 처음의 것은 그의 슬프고 화난 느낌들을 반영하는 것으로 회색 종이 위에 만들어졌다. 출입구에 있는 성문(격자 문)은 그 성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는 치아(teeth)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 자신의 상황을 치료자에게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울퉁불퉁한 벽돌 창문들은 보는 이를 향해 슬프게 낭패한(upset)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성의 탑은 서 있으며, 성기의 모양을 하고 휘몰아치는 검은 하늘 속을 항해 들이밀고 있는데, 위쪽의 폭풍과도 같이 격노해있다. 이 아동은 이혼하고 재결합하여 두 부모가 모두 그들의 새로운 결혼생활 속에서 새로운 가정을 시작한 부모의 유일한 자식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다. 그는 6개월 간 각 부모와 번갈아 살았다. 정착된 집 없이 이런 식으로 사는 방식에서 오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하였으며 그의 불행은 반항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점점 보살핌을 요구하였으며 그림들은 평가센터(assessment center)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는 짧게 자른 머리와 큰 부츠를 신은 ‘대머리(skinhead)’ 소품(miniature)으로 치장했다. 성과 같이 그의 그림들은 그의 자아상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한 ‘요새(fortress)’를 나타내는 듯이 보였다. 위로 치솟은 남근 탑은 슬픈 어린 소년을 그 안에 감추고 있는 채로, 이겨낼 수 없고 억센 세상에 대한 그의 남성적인 태도(macho stance)를 반영한다. 그 다음의 심상은 보다 잔잔한 것이며 백지 위에 만들어졌다. 그는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칠하였지만 검은 무지개와 같은 둥근 호(arc)로 그것을 지워버렸다. 창문이 없었는데, 마치 ‘내부의 아이(child inside)’가 퇴각한 것처럼 보였지만 더 안전한 장소로 간 듯했다: 요새 심상은 말(statement)로 하는 것처럼 남는다.
그는 성을 계속 그렸다. 그 다음에 그는 처음으로 색채를 사용하는데 더 큰 종이를 사용한다. 현관은 검지만 성으로 들어가는 도개교(drawbridge)가 있고 그것은 접촉을 하려는 하나의 방식을 제시한다. 그는 이제 치료에 대해 보다 안전함을 느끼기 시작하며 세션에서 보다 많이 수용된다. 내담자가 반복적인 심상을 그릴 때에 마치 내담자가 치료에서 진전하지 않는 듯이 가끔 느껴지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몰입감(stuck)을 느낀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지만 대개는 각 그림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작은 변화들이 내담자의 이해나 진전에서 내적인 움직임을 반영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이 아동은 외부세계 속의 상황에 대한 그의 내적 방어들을 반영했던 성의 방어적 심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평가센터에서의 짧은 시간 동안 바뀌지 않았는데, 그의 외부적인 상황이 막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타난 변화들은 그가 센터에 들어왔다는 것과 그가 그 지역사회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방식을 반영해주는데, 성들이 점차 커지고 사람들로 채워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방어들은 그가 자신의 가족상황을 깊이 탐색할 수 있을 때까지 필요하였다.
우리는 내담자에게 개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색채들이 어떻게 해서 상징적인 가치를 얻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또한 문화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에 대해 위의 서술에서 알 수 있다. 이 아동은 자신의 초기 분노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회색 종이 위에 검은 색을 사용했다. 그가 점점 안정감을 느끼고 센터 안에서 있을 곳을 얻게 됨에 따라 그림들은 밝아졌고 다채로워졌다. 물감은 펠트 팁과 같은 것보다는 느낌을 표현하도록 돕는 데에 보다 미묘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보다 쉽게 흐르며 다양한 붓의 크기와 종이 크기에 따라 넓은 영역을 칠해낼 수 있다. 내담자들은 자신의 기분이나 느낌에 맞는 재료를 찾으면 한 세션 내에서 매체를 바꾸기도 한다. 한 개인이 매우 열중하여 칠하기에 빠져들게 되었을 때에 찰흙이든 물감이든 간에 마치 그 매체가 개인을 조종하여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일반적인 경험이다. 이것과 같이 가끔은 개인이 의식적으로 한가지를 만들기 시작하고는 그리고 나서 무의식에 선점된 것이 드러나는 또 다른 어떤 것이 만들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연령이 혼합된 미술치료 집단에 의뢰되었던 사춘기 소녀는 몇 몇의 어린 아동들과 놀아주면서 몇 차례에 걸친 세션들 동안 그들이 핑거 페인트를 사용하도록 도왔는데, 자기자신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망 후에 의뢰되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망하였을 때에, 소녀는 아버지와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갔었지만 새로운 삶의 위계에 정착할 수 없었다. 한 세션에서 더 어린 아동들이 핑거 페인트를 사용하도록 도운 후에,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서 그것들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한 줄의 행복한 사람들과 웃고 있는 태양을 만들어냈다. 그림이 마지막을 향해 가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다른 물감들로 가서는 또 다른 두 개의 그림들을 재빠르게 칠했다. 처음의 것은 자주 취해 있었고 알콜과 관련된 문제들로 사망한 그녀 어머니에 대한 아주 생생한 초상화이다(도판 3). 그녀 어머니의 광대웃음과 같은 얼들, 초점을 잃은 눈 등은 알코올 남용으로 고통받는 이에 대한 예리한 초상이다. 2번째의 그림은 죽은 이의 얼굴가면(Death's Head mask)인데(그림 5.3), 그녀의 상실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였다. 사람이 상실을 느끼게 되면 종종 마음에 그 형태가 없지만 공허감이 된다. 매체와 그녀의 상호작용은 그녀로 하여금 죽음을 의인화(personify)하도록 도왔다. 일단 이러한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형태를 지니게 되면, 그것은 일련의 심상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언어적으로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작이 된다.
미술치료실에서 유용한 모든 유형의 재료들을 나열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찰흙, 펠트 팁, 물감과 핑거 페인트의 특성들을 그저 간단하게 살펴보았을 뿐이다. 훈련을 생각하는 미술가들은 그들 자신의 미술작업을 만들어 가는 다양한 매체들의 상이한 특성들을 이미 경험해 왔으며, 내담자가 사용하기에 적절한 일상적인 범위에 친숙해질 것이다. 각 미술치료자는 우리가 ‘미술치료실’이라는 2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환경과 자원에 따라서 가능한 한 광범위한 선택이 가능하도록 해야만 한다.
미술치료실 내에서의 작업은 공간 내에서의 느낌들에 대한 깊은 탐색과 표현에 관련되는 것이며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자유롭게 재료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재료들을 선택하는 이유와 느낌이 표현되는 방식은 의사소통에서 핵심적인 부분들이다. 만일 미술치료자가 이것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없다면, 분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수용 받지 못할 수준까지 재료들을 흘리고 어지르는 것과 관계될 수 있다. 물감 통들을 잡은 아동이 다른 어떤 경험들을 위해서 그 물감을 사용하려는 의도 없이 그것들을 하나씩 차례로 쏟아내는 것이 한 사례이다. 치료자는 아동이 급성 불안을 경험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을 계속하도록 허용했는데 그것이 그녀의 불안을 참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치료자는 그것이 물감을 소비하는 것에 대한 그녀 자신의 불안인지 혹은 아동의 내적인 혼란과 통제불가능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견지에서 아동에 의해 의사소통되는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이 비워지고 있거나 혹은 비워졌음을 느꼈는가-이것들은 치료자가 그녀 자신의 역전이 반응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들이다. 아동의 행동결과에 대해 아동에게 지적하고 개입함으로써, 아마도 이것을 어째서 하고 있는 지와 아동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아동에게 질문함으로써 , 아동은 그 자신을 위한 어떤 것을 거머쥐게 될 수 있었다. 그것을 그저 쏟아내도록 하기보다, 아동은 스스로에게 제한을 설정하는 것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수용되는 것-아동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건들은 매체들에 대한 내담자의 상호작용에 대해 그리고 이해를 촉진하는 것에 대해 작업하는 과정의 모든 부분이다. 정반대의 사례가 있는데 더러워지거나 어질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펠트 팁이나 크레용 말고는 어떤 것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아동이나 성인이다. 이것은 대개 혼란과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하지만, 가능성을 탐색하고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에 대해 물감을 사용하고 색채를 섞어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모험함으로써만이 그것을 되찾는 경험이 성공적으로 협상(negotiate)될 수 있는 것이다. 매우 엄격하게 통제된 내담자들에 대해서 그들이 재료를 사용하거나 사용을 거부하는 방식은 종종 그 당시에 경험되고 있는 내적인 느낌들에 대한 유용한 지표이다. 더러워지는 것에 대한 무서움, 손으로 찰흙을 느끼고 혹은 찰흙주머니 속으로 손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것 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안을 느슨하게 바꿀 수 있을 뿐인 발달들이다.
미술재료들에 대한 흥미로운 것은 ‘돌발사고(accidents)’가 발생할 수 있으며 이것이 종종 그 당시에는 어렵긴 하지만 상황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한 10살 짜리 소년이 종이를 덧댄 봉투를 잘라내었는데 작은 폴리에스티렌 알갱이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의 스웨터를 덮은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다. 그 사건에 대한 그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그가 그것을 떼어내려고 노력하면서 겅중겅중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해롭고 독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명백했다. 그가 살아남아서 이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그의 통제를 벗어난 예측 불가능한 다른 상황들에 직면하도록 도왔다.
만일 집단에서 작업한다면, 집단 원들은 함께 작업하기를 선택할 수 있으며 복잡한 상호작용들이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한 개인이 찰흙의 특정한 조각으로 작업하도록 능력이 덜한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며 이것은 협동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 자존감을 구축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느낌, 의존감과 독립성의 문제들을 돌이켜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재료들이나 과제들은 이것이 생길 수 있도록 중요한 길을 제공한다. 집단에서 아동들과 함께 작업할 때에, 재료들을 사용하여 상호작용하는 것은 9장에 명시되어 있듯이 집단역동을 반영하며 또한 대인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은 미술치료에서 특히 중요한데 그들이 사용하기로 선택한 재료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흑인과 백인 소년 2명은 검은 물감과 흰 물감을 사용하여 함께 배를 만들기로 하였다. 이 과제를 완성하게 됨에 있어서 어떤 색채를 얼 만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논쟁과 비아냥거림은 그들 모두에게 어떤 개인적인 이슈들을 깊이 살펴보는 것이었으며 가장 복잡한 것이었다. 궁극적인 산물은 이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결로 나타났지만 그들이 몰입하게되었던 과정은 매혹적이었고 흥미로운 것이었다.
덜 경쟁적인 두 소년들과 함께 한 상황에서, 한 7살 짜리 소심한 아동이 아직도 심각하게 취약한 9살 짜리 인 ‘남성(macho)’과 함께 작업하기로 결정하였다. 종이 위에 그들은 열심히 경기를 하면서 맹렬하게 서로에게 태클을 걸면서 점수를 내고 다른 편이 되는 2개의 팀들 간의 시합을 그림으로써 축구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함께 공유하였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각 아동은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여기는 자기(self)의 부분으로서 다른 아동을 보았다. 그들 간의 느낌들은 아마도 운동장 속에서 그곳에서 그들이 나타내왔던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상연(enact)되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제 치료실이라는 안전한 경계 내에서 그리고 치료자의 수용적인 태도에 의해서 경로를 바꿔 표현될 수 있었는데, 그는 그 상황을 만들어준 것으로 경험되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느낌과 행동들이 성인에 의해서 경청되고 이해되고 있다는 느낌을 느낄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모사(copying)하고 하고자 하는 것은 집단에서는 강렬한 역동이며 다시금 주장성, 창조성, 독립성, 자신감 등등에 대한 문제들을 유발시킨다. 이것들은 개방적으로 시연될 수 있으며, 아동이나 성인이 발하려하지 않을 때에 특히 이것에 대해 작업하는 것이 흥미롭다. 사실상, 이것은 모두 비언어적인 수준에서 발생하며 혹은 심지어 의식적인 수준이 아닐 수도 있으며 이런 식으로 가깝게 관찰될 때에 재료들을 사용하는 힘(power)에 대한 지표를 준다.
다음의 짧은 삽화(vignettes)는 미술재료들을 사용함으로서 전달되는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신경성 식욕 부진증(anorexic)인 한 소녀가 자발적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이 아주 위협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한 세션동안 그녀는 도구에서 마른 찰흙을 문질러 벗겨내고 있었다. 그녀는 조각들로 무더기를 만들었고 그 무더기들을 한가지에서 또 다른 것으로 바꿔가면서 어린아이처럼 놀기 시작했다. 세션이 끝나갈 때, 그녀는 테이블의 구석에 있는 작은 무더기로 모든 조각들을 끌어 모았다. 그녀는 다음 세션에 와서 그 무더기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으며, 이것은 그녀에게 더 많은 자발적인 움직임을 하도록 만들었다.
유사하게, 다른 소녀는 팔레트에서 물감을 골라서 그것을 섞는 것에 세션을 할애하였으나, 실제로 종이 위에 칠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물감의 혼합이 그 세션과 관계가 있었다. 그녀가 다음 세션에 왔을 때에, 그녀는 그 팔레트가 씻겨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물감은 내담자에게 하나의 전체적인 조각(one whole piece)으로서 팔레트에서 그 물감을 들어내도록 할 수 있는 특정한 특징을 지녔으며, 이 물감조각은 그녀에게 소중한 것이 되었다.
(Claire Skailes로부터 저자에게 온 편지, 1990)
Arthur는 29세의 남성인데 중등도(moderately)의 정신지체로 기술될 수 있다. 그는 잠겨진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는데, 그의 폭력적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한 팔이 약간 말라있기는 하지만 거구이며 신체적으로 잘 발달해 있다. Arthur는 자신의 움직임을 협응시키는 것(co-ordinating)과 과제에 대한 자신의 열정(enthusiasm)을 통제하는 것에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조합은 종종 물건을 넘어뜨린다거나 혹은 섬세한 기계들을 부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그에게 가져온다. 그는 작은 몇 장의 종이들을 합하여 더 커다란 종이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을 즐긴다. 방에서, 이 큰 종이는 3개의 테이블 위에 놓이고, 든 분말 물감이 미술치료자의 도움으로 싱크대에서 깡통 가득히 혼합된다. Arthur는 페인트공 용 커다란 붓을 사용한다. 우리는 방의 옆쪽으로 옮겨가고 그는 자신의 그림에 바쁘게 흥분하여 색채를 더해가면서 더 많은 물감을 요구하고, 커다란 활달한 움직임을 사용하면서 3개의 테이블을 오가며 작업을 한다. 가끔 그는 물감통 하나를 넘어뜨리고 그것을 바닥 위에 엎지르며, 가끔 그는 그의 붓으로 벽이나 선반에 튀기기도 한다. 커다란 종이는 대개 그 위에 실제의 인물이 윤곽을 그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며, 가끔 이것은 미술치료자에 의해서 그(Arthur's)의 신체윤곽을 따라 그림으로서 완성되고, 가금은 Arthur자신이 윤곽을 따라 그리는 것 없이 그려지기도 한다. 인물들은 오려져서 벽 위에 부착된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가끔은 그의 어머니를 표상하며 그는 그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 상에 대해서는 분노하게 될 수 있으며, 만나러 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에게 욕을 한다.
William은 25세이며, 중도(severely) 정신지체이다. 그는 말을 하지 않으며 관습적인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에, 그는 자신의 바지를 내린다. 그는 세션 동안 아주 불안하게 되어 그가 부당한 압력을 받는다고 느끼면 방어하기 위해서 그의 손을 물어뜯고 울부짖는다. 가장 요구를 덜하면서 그에게 가장 직면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활동은 물놀이이다. 그는 가끔 자신의 머리에 물을 붓고, ‘혀를 굴리는 야유소리(raspberry noises)’를 내면서 캔 안에 있는 물을 불어댄다. 물과 깡통으로 하는 자유놀이를 할 시간을 허용함으로써, 그는 설득되어 보다 건설적이고(constructive) 창조적인 놀이, 그렇지 않았으면 거부했을 만한 재료들을 경험하는 것을 하도록 부추겨질 수 있다. William은 도망자(absconder)이며, 만일 문이 열려 있는 채로 있다면 그는 길거리로 달려 나가버릴 것이다. 커다란 방은 그에게 상호작용에서 후퇴할 말한 공간을 허용해주며, 가끔 그는 안락의자 위에 앉아서 다시 그 재료들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을 느낄 때까지 흔들기도 한다.
(저자들에게 온 Robin Tipple의 편지, 1990)
MEANING WITHIN A RELATIONSHIP
재료를 사용하는 과정과 나타나기도 하는 완성된 심상들은 모두 치료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이 과정을 치료를 받는 2명의 내담자의 작업을 통해 살펴보자. 첫 번째 만들어진 심상은 심리치료에서 첫 번째 꿈의 중요성과 유사한데, 그것이 나타나는 문제들(presenting problem)에 대한 부호화된 언급(coded statement)그것이 비록 내담자에게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의 일련의 심상들과 치료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것을 들춰내는 데에 수주일 혹은 수개월이 걸릴 것이다. 심상들은 내담자에게 개인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림 속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된다.
4명의 아동들이 사회복지 서비스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었으며 미술치료자에게 의뢰되었다. 이 아동들은 정신과적인 장애로 둘 다 고통받고, 권위적인 인물들과 접촉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부모들을 지니고 있었다. 아동들은 학교에 가는 것에 방해를 받았으며, 괴팍한 옷들을 입어야만 했다. 초인종을 눌러도 결코 응답이 없었으며, 그들은 집밖의 그 어떤 사회적 접촉에 대해서도 결핍되었다. 여기 우리는 가장 나이가 많은 13세 소녀에 대해서만 관련되어 있는데, 그 아동은 신체적으로 신장과 몸무게에서 평균 9세 정도였다.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있는 가운데, 그들이 소음과 같은 이상한 빈민굴의 언어(gutteral language of noises)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미술치료에서 그녀는 ‘코끼리 공주’, ‘코끼리 아기들’ 혹은 ‘코끼리 사람들’을 그림으로써 시작했다. 이것들 중 첫 번째의 것이 도판 4이다. 그녀는 이것을 도식처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으며, 만일 다른 것을 그리라는 지시를 받으면 한 줄의 ‘코끼리 사람들’ 이 나타났다. 심리검사결과 그녀가 중도의 학습장애를 지니고 있으며, 크레용을 가지고 그린 그녀의 그림은 정신연령 5~7세를 나타냈다. 그림에서 팔이나 손 혹은 다리나 발등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저 얼굴과 긴치마와 왕관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정상화(normalization)나 사회화(socialization)에 대한 그 어떤 시도에도 매우 저항적이었다. 그녀는 사실상 원할 때면 매우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구두끈을 매는 것과 같이 그녀 자신의 독립성을 조장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전투가 있었다. 관계가 발전함에 따라 ‘아기들(babies)’ 주변으로 모든 것이 따라 움직이거나 결정되는 것이 명백해졌다. 미술치료자는 상당한 애정과 함께 ‘아기 케이시(Baby Casey)’라고 불렸으며, ‘아기(baby)’는 다른 스텝들에 대한 모든 애정표현의 앞에 붙었다. 하루는, 그녀가 미술치료자에게 과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그녀와 2명의 형제들이 그들의 막내 여동생이 태어난 동안 수녀들과 함께 살았던 시기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그림 5.4). 이것은 아기기억들에 대한 상호작용(exchange)으로 이끌었다: ‘네가 아기였을 때에 대해서 말해보렴.’. 미술치료자는 기억이나 사건에 대해서 회상시키곤 했으며, 소녀는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을 아기로 생각하고 그녀의 작은 여동생 대신 그녀를 유모차에 앉히던 때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점점 아기말투로의 이러한 퇴행이 그녀 어머니의 질병에 대한 하나의 적응방식이었음이 분명해졌다. 이 심각한 적응과 수반되는 학교나 정상적인 행동들에서의 박탈은 그녀를 지적․신체적으로 발육이 정지된 상태로 만들었으나, 그것은 가정환경을 살펴본다면 상식적이었다. ‘큰아기’가 됨으로 해서 그녀는 정신증적인 삽화 동안 그렇지 않는다면 접촉이 불가능한 어머니와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를 ‘보다 반응적인 아기’가 됨으로써 어떤 방식으로 도왔으며, 또한 여전히 사랑 받고 어머니로부터 고립되지 않게 함으로써 그녀 자신도 도왔다.
우리는 그림들(도판 8)에서 채식하는 방식 혹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방식에서의 변화를 통하여 내적인 변화가 나타났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발달은 4단계를 통해 볼 수 있다. 3명의 아이들과 함께 가족이 평가센터에 의뢰되었고 그 동안 그들의 어머니는 대처가 어려웠다. 그들의 아버지는 정신질환으로 자주 입원하였으며 그들의 어머니는 이럴 때면 9살 짜리 맏이에게 가사를 돌보도록 한 채 그녀를 자신의 침대로 데려가곤 했다. Rosie의 첫 번째 그림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숲 속에 있는 자신의 그림이었다. 그림에서 그녀가 정서와 혼란의 폭풍 속에서 상실감을 느끼고 있지만, 센터에 들어오게 되면서 그녀는 여전히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통제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그림은 배경에서 그녀를 겨우 구분할 수 있는 윤곽만을 가지고 있다.
센터의 직원이 그녀를 보살피게 되자, Rosie는 동물소리나 아기들의 소리들을 내면서 바닥을 기어다니는 등 성숙이라는 형식(veneer)을 상실한 채 이전의 어린 단계로 퇴행했다. 이 아주 조증(manic)인 행동단계에서, 그녀의 모든 행위들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녀는 2번째의 그림을 채색했다. 그 인물은 웃고 있었으며 투명한 몸체를 통해서 보이는 배경의 혼란스러운 색채들과 어쨌든 교묘하게 어우러진다. 인물의 검은 윤곽은 비록 확실한 경계를 지니고는 있지만, 안팎의 똑같은 혼란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래서 실제로 내부와 외부간에는 경계가 없는 것이다. 그녀 내부의 혼란은 외부로 투사되고 있으며, 그녀는 그녀 주변으로부터 자신의 조증 행동에 대한 반응들을 흡수하고 있다.
3번째 그림은 치료자에 대한 그림이다. 그녀는 방어적인 둥근 호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녀는 꼬불꼬불한 금발로 이상화(idealized)되었으며, 앞쪽에 한 줄의 ‘아기’ 단추들을 달고 있다. 전이(transference)에서 치료자는 혼란을 탐색하려고 치료자와 함께 노력하는 신성한 착한 어린 소녀에 대하여 표상하고 있는 중이다. 그 방어적인 둥근 호는 치료자라는 형식 속에서 조증이고 종종 파괴적인 행동으로부터 이 부분은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따로 분리시켜 놓은 것이다. 문헌 속 사례연구들은 심상 속에 있는 전이현상들의 다른 측면들을 보여준다.(Case, 1987, 1990)
4번째의 그림은 치료의 후반에 그린 것인데, 동물 스텐실과 펜과 잉크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펜과 잉크는 Rosie에게는 애완용 토끼의 죽음과 그것이 그녀에게 지녔던 의미에 대한 몽상(reverie)을 하도록 도왔던 매체이다. 스텐실은 꼭 토끼처럼 보였기 때문에 선택되었으며 길다란 낙서와 같은 흔적들과 잉크자국들은 그녀의 의기소침(despondency)을 말해주며, 마음대로 종이를 파고든 것은 그녀에게 상실감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가족 내의 책임감을 그녀가 맡아야 하는 동안에는 허용되지 않는 그녀 자신의 안아주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자기에 대한 상실을 표상 해주며, 그녀의 조증 행동 동안 숨겨져 있는 점잖은 부분을 표상 한다. 그에 부착되었던 특정한 상실과 느낌들이 전반적인 정서적 상태로부터 변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질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COMMUNICATION WITH THE IMAGE
내담자들은 아주 종종 그들의 삶 속에 있는 어떤 비교할 수 없는(disparate)요소들을 함께 묶으려는 시도 속에서 엄청난 긴장을 겪은 상태에서 치료에 온다. 이것은 성인들 뿐 아니라 아동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치료자가 이러한 혼합된 느낌들을 수용하는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이러한 갈등적인 소망들 속에서 아동들과 성인들은 치료에서 종종 퇴행한다. 퇴행은 이전의 발달단계로 되돌아감으로써 개인이 그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알려진 역할과 상황을 터득하는 것이 훨씬 쉽다. 내담자들은 어지러운 채색화의 시기 혹은 그들로 하여금 갈등하는 정서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했던 오래된 질서가 깨질만한 재료들을 사용하는 작업의 시기를 거칠 것이다. Rosie의 사례에서 이것은 가 성숙(false maturity)의 일종이었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들에 대처하기 위한 시도로서 발달시켜야만 했던 가짜 성인(pseudo-adulthood)이었다. 재료들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만들도록 허용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발달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헌 속의 어떤 사례연구들은 이 과정을 재통합(re-integration)이 일어나는 지점까지 퇴행이 일어난다고 기술한다(Dalley, 1980, 1981). Kris(1953)는 이를 ‘자아(ego)에 고용된 퇴행’으로 명칭을 붙였으며 창조적인 과정이 이것을 촉진시키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술한다(6장의 ‘창조적 경험’을 보시오). 심상은 일련의 반영들과 강렬한 느낌들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심상들은 가끔은 말(words)을 대치하거나 보완하기도 하는데 혹은 실제로는 내담자가 말하기를 소망하는 것에 대해 치료자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그들 위에 말(words)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치료자에게 신호가 될 수 있다.
그림 5.5는 2명의 다투고 있는 부모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별거하고 있으며 막 이혼하려는 참이다. 아버지는 일요일에 방문해 왔다: 그들은 다툰다, 어머니는 그에게 ‘나가’라고 말하고, 그는 ‘싫어’라고 응답한다. 이것은 그들의 딸이 월요일 아침의 치료에서 그린 것이다.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들이 다투고 있는 동안의 그녀의 두려움, 그들 각각에 대한 그녀의 느낌들과 별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림의 부분들에 명칭을 붙이는 것과 날짜를 부여하는 것은 그녀가 무기력하게 느끼게 되는 상황들에 대해 어떤 통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이며, 이전에 논의되었던 그림 속의 아기장난감들에 대한 명칭 부여와 유사한 방식이다.
우리는 치료에서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보아왔다. 그것은 자기발견(self-discoveries)을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마치 Rosie 가 그녀의 토끼 스텐실을 만들고 있었을 때에 소년들이 함께 작업하여 상징적인 ‘매장식(burial)’ 속에 슬픔을 훈습 하도록 한 것과 같다. 가끔 심상을 완성하는 것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줄 것이다. 도판 6에서 나타난 추상적인 패턴은 보호를 받아왔던 16세 소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녀는 가정의 와해에 대해서 책임을 느꼈다. 그녀가 그림을 완성했을 때에,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는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역시 밖에 있어요’라고 말하고는 이것이 그녀 주변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전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현실화(realization)는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는데, 사춘기의 소녀에게 ‘나쁜’ 느낌들이 투사되는 경우 특히 청소년이 ‘나쁜 소녀’라고 느끼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이것은 해석에 대한 전체적인 질문에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내담자가 만들고 있는 혹은 완성한 심상을 볼 때에 치료자는 무엇을 하는가? 이 장의 시작부분에서 우리는 심미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치료자가 내담자의 세계에 들어가고 공유하는 것은 심미적인 경험을 통해서이다; 즉, 그것은 비언어적인 공유이다. 미술치료의 부분은 ‘마음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데, 그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내담자에 의해 일련의 심상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통해서 그 심상들에 대해 말없이 헌신(devotion)하는 것으로서 반응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미술치료자에게 있어서 위험은 너무 빨리 말을 건네는 것이 그 과정을 어긋나게 할까봐서 침묵 속에서 일관하여 말없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작업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데 그것이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에는 매우 나약하기(vulnerable) 때문이다. 미술치료자는 내담자에게 있어서는 미술치료의 부분인데, 그것은 실제로는 내담자만이 그것을 채색한 사실인데도 ‘우리가 지난주에 한 그림’ 혹은 ‘우리가 함께 그린 그림’이라고 언급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과정 동안, 치료자는 심상들에서 많은 어려운 것들을 ‘보게(see)’ 될 것이며 혹은 그 심상과 내담자에 대한 현실화(realization)를 얻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치료자가 명석한 해석으로부터 만족을 얻기보다는 내담자가 자기발견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말로서 언급하는 것은 강요(impose)보다는 명료화(clarify)가 되어야 하며, 내담자로 하여금 철회하도록 하기보다는 긴장을 경감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내담자에 대한 심미적인 반응이 지니는 힘의 한 부분은 하나의 심상 속에 있는 자신의 측면을 보는 것이며, 하나의 심상에 생명이 주어졌음을 보는 것이고, 다른 사람(치료자)이 일반적으로는 감춰진 것을 보아왔다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 된다. 다른 사람 역시 계속 보아왔다는 것을 보고(seeing) 아는 것(knowing)은 어머니의 눈을 들여다보고 우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반영을 보는 것과 같은 우리의 최초 반응들 중 한가지를 재경험하는 것이다. 그녀는 ‘한가지 특정한 총명함(a particular brightness)’을 지각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감각, 정체감, 가치감, 진가 등을 이러한 시선을 통해 얻게 된다. 심상은 치료자와 내담자간의 ‘시선(looks)’에 대한 매개이다. 치료자는 특별한 관심을 통해서 미술치료과정에 가치를 부여한다.
치료과정동안 내내 심상들이 만들어지며 연속적으로 보았을 때에 그것들은 내담자와 치료자 모두에게 있어서 치료적인 여행을 하는 동안 일어났던 변화들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심상들은 이 과정을 기록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며 몇 몇 내담자들은 그들의 작업을 되돌아보고자 하는데, 특히 치료가 종결될 때에 그렇다. 그들은 시간이 경과하여도 그들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수주일 혹은 수개월간의 치료 동안 얻게 되는 이해와 통찰을 위해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 다음의 사례들은 내담자들이 자신들의 특정한 어려움들을 훈습할 때에 심상들이 사용되는 방식과 심상이 지니고 있는 기능 속에서 치료자에 의해 수용되어 왔다고 보일 수 있는 방식들을 명백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림들은 그 자신들을 위해 ‘대변(speak)’하지만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많은 다양한 수준들과 잠재적인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내담자들이 한 말들은 스트레스와 혼란 그리고 불행한 시기에서 심상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사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제공한다.
내 그림들의 대부분은 그저 2가지나 3가지의 색깔만을 가지고 있다- 빨간색, 검은색, 그리고 가끔은 노란색 [도판 2를 보시오]. 내가 우울할 때면, 검은색은 전체적인 절망감을 나타내며, 나의 엄청난 무가치함을 나타낸다: 빨간색은 거의 질식할 것 같은 분노를 나타낸다-분노는 주로 나에 대한 것인데 이 무가치감 때문이다: 가끔 노란색은 사용하는 것은 미약하고 가끔은 빛나기도 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내가 인물을 그리면 그것은 대개 검은 윤곽이다. 난 인물이 윤곽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절망과 분노로 폭발할 것 같은 그 인물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에 있었을 때, 나는 미술이 거의 카타르시스적인 요소들을 지니고 있어서 아주 가치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주 나는 미술치료 세션에 아주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을 가지고 갔는데 뭔가를 해내려고 정말로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첫 시도를 하였을 때-그것은 내가 원할 때에 해도 좋다고 허용된 것이었는데- 나는 나의 적대감과 심지어는 공격적인 느낌들이 종이 위의 색채 속으로 재빨리 바뀌어 옮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정말로 불행하고, 쓸쓸하고, 고독한 것을 되돌아보는 것과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기억하는 것은 힘들다. 그는 매일을 잿빛이라고 보는데, 그것들은 사실상 최악의 비탄(blackest misery)이다; 그는 우울이라는 마비만을 기억할 뿐 그 혼란은 망각한다. 그는 공격성을 망각한다. 내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했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특히 힘들다; 어떻게 해서 내가 기억에서 일단 지워지고, 망각되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리라고 확신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은 당신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말한다…당신은 저항한다…당신은 망연자실한 채, 빈 종이 앞에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에 수치심을 느낀다…그래서 당신은 그 위에 당신의 삶을 적게 되고, 아마도 당신은 그것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당신의 삶과 유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의 한 부분이며 그래서 스트레스, 두려움, 분노, 좌절, 과거와 미래의 충격들의 부분이 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종이 위에 나타날 대에 당신은 처음으로 그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확신컨대 당신은 그럴 것이지만, 그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다[그림 5.6].
미술치료는 정말로 많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더 이상 버틸 에너지가 없다고 느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의 문제들을 분류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을 회피하면서 수년을 보냈다.
나는 내가 그렸던 첫 번째 그림이 이 세션이었는지는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뭔가를 나타낸 것에 대해 느꼈던 것은 기억한다. 초기에 나는 매우 저항적이었고, 내 그림 실력에 큰 자신이 없었다.
일단 그리고 치료자가 나의 그림을 받아주게 되자, 그후에야 나는 이완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내가 도움을 받으리라는 것과 아무도 나의 그림을 비웃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내가 지녔던 모든 것들을 세션에 쏟아 부었고 그 대가로 뭔가를 얻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나의 삶과 나 자신에 대한 느낌들의 다른 측면들을 나타낸다.
나타난 느낌들 몇 가지는 아주 부정적인 것들이며 내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상황들과 관계가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심상을 만드는 것이 사물들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며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 된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매우 어려운 어떤 것을 말로 할 때조차도, 그것에 대해 심상을 만드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울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종종 내게 보여지는 상황이나 느낌들이 무엇이건 간에 좀 더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들을 준다는 것을 안다-그것들을 다른 표현방식으로 바꾸는 것, 뭔가 창조적인 것이 심지어 최고로 어려운 상황이나 느낌들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난 약 1년 간 미술치료에 참가했는데, 내 인생을 10년 동안 비참하게 만든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처음에 가게되었다(난 지금 23세이다). 그렇지만 처음의 한두 세션 후에 음식문제가 실제적으로 잊혀졌고, 그것은 다른 문제들에 대한 주 증상이었으며 그것들에 대해서 음식이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났었던 것이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도 결정적으로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2번이나 자살시도를 할만큼이나 그것들이 나의 인생을 주도하도록 내버려두었었다.
나의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서 그림이나 채색을 이용하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에 시작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두어 세션이 지나자, 쉬워졌다. 나는 채색하는 것이 매우 이완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치료는 상대적으로 ‘고통이 없는(pain free)' 것이었지만 얼마 지나자, 그것은 정말로 내게 외상적인 것이었고 나는 포기하고 싶어졌다. 난 치료자에게 매우 정직했다고 생각하고 치료자에게 내가 치료동안 내내 느낀 것에 대해 말했는데, 이것은 내가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 그 과정의 일부였다는 것과 내가 나아지기 전에 거의 최악의 상태였었다는 것을 깨닫게끔 해주었다.
나는 치료자와 관계를 발전시켰고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모르는 나의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녀를 믿고 공유하였으며 그녀의 도움과 나의 인내력으로 그것을 통찰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치료를 종결했다. 그것은 내가 했던 그 어떤 것들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었으며 또한 가장 이기적인 것이었지만, 내가 도움을 추구하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힘을 발견해왔다는 점에서 내 자신에 대해 정말로 자랑스럽다. 나의 마지막 날은 굉장하고 상쾌한 것이었는데, 내가 스스로에 대해 배워왔던 것들을 이제 실습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어떤 의미로는 치료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채색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또한 내가 나의 문제들에 집중하고 분류하도록 도왔다. 이제 내가 특별히 슬프거나 우울해질 때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면 나는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내가 나의 치료자에게 말을 하고 그녀가 내게 말해주었을 것들에 대해 상상한다.
마지막에 연속적으로 나타난 그림들은 심상의 형성과정이 어떻게 해서 변화를 촉진시켰는가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정신증적인 혼란 속에서 완전하게 철회한 15세 소녀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창문에서 그녀가 볼 수 있었던 풍차그림을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미술치료자를 위해서 그것들을 미술실에 남겨두었다(도판 7을 보시오). 그것들은 그녀가 어떻게 해서 현실감을 다시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내적인 혼란에서 일어나 명료하고 질서 있고, 사람들과 잠재적인 관계가 있는 외부 세계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Chapter 6
Development of psychoanalytic understanding
미술 치료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로 치료할 때, 미술 치료사는 내담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내담자와 이미지 경험을 공유하는 공감적 방식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내담자와 만들어 가는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선 만들고 작업한 결과물에 대한 성공적 느낌을 함께 하는 것처럼 혼란스럽고 취약한 단계도 같이 겪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술 치료사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창조적 과정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 장은 정신분석 입장을 지닌 저술가들을 통한 창조적 과정에 대한 이해를 쫓아가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훈련받기를 생각하는 미술가와 일반 독자에게 자신의 작품 과정에 대한 미술가의 설명보다는 받아들여지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심미적 경험과 관련된 몇 가지 작업을 소개하는데 심미적 경험은 창조적 과정에서의 짝이 되는 구성 요소로써, 내담자 자신에 대해 알게 만드는 방식이 되며 내적 생각과 감정을 바깥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미술 치료사에 의해 이해되고 보여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첫 번째 대상에 대한 최초의 애착을 다른 대상으로 옮겨야 하는 감정의 압력인, 즉 어떤 사물이 다른 무언가를 표상 하게 되는 상징화 과정에 관한 이론에서의 변화와 발달에 관해 탐구하려고 한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에 의해 부여된 정서적인 것으로써 그림에서 느껴지고 펼쳐질 수 있는 특별한 힘의 이면에 있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THE CREATIVE EXPERIENCE
창조성의 경험은 미술적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Winnicott는 그것을 삶과 총체적인 생활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문화적 경험은 ‘우선 놀이에서 분명한 창조적 삶’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술가들과 미술 치료사들과 직접 관련시키는 것으로 국한하면서 미술 작품을 만드는 중에서 창조적 경험과 동기의 특성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프로이드가 창조성에 정신분석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본다. 정신분석은 미술가의 삶에 대한 이해, 경험과 작품에 대한 가망성과 작품에서 정신적 구조와 본능적 욕구를 구성하는 것들 간의 내적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술가적인 재능의 속성을 설명할 수 없으며 미술작품-미술적 기법의 수단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다(Freud 1925: 65). 프로이드는 미술가적 재능과 능력은 직접적으로 승화와 관련 있으며 연구를 위해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기 분석가들은 프로이드의 이러한 일시적인 결론을 확립하고 탐구의 패턴으로 농담과 꿈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해왔다. 특히 미술에 대해서 Kris는 창조적 상상력의 모든 표현물들에는 보통 주관적 경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특성은 의식적 노력, 높은 정서적 부과, 매우 정밀하게 문제해결을 하는 마음의 작업으로 한정된다(Kris 1975).
또 다른 중요사항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예로써 Leonardo에 관한 프로이드의 연구를 인용했다. 이태리 미술 역사에서 Mary the Virgin, St Anna and Infant을 위한 타협을 결말짓는 미술적 문제에 대해 명백한 해결이 없었다. 레오나르도의 개인력은 유년기의 두 명의 엄마를 겪었기 때문에 해결점을 찾으려는 강제적인 내적 필요를 그에게 제공한다. Kris는 개인적이고 미술적인 해결방식 둘 다와 그것과 연합되어 있는 형태와 내용을 본다.
정신분석에서 미술가를 연구하기 위한 기회가 있어 왔으며, 역시 미술 공부를 받지 못했으면서도 정신병에 걸린 환자로 자신의 질병 중에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게 된 미술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미술가들은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id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일차과정에 대한 통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Kris 1975: 25).
Kris는 미술가들은 명백한 종류의 심리적 특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들이 재빨리 심리적 기능의 수준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프로이드가 이 부분에 관해 언급한 유일한 진술은 미술가의 유동적인 억압에 대한 코멘트이다. Kris는 미술가들이 자아방어기제인 억압으로 인한 통제를 잃지 않고 무의식적 자원을 가볍게 두드릴 수 있는 유동적 특성이 있다는 Freud의 생각을 확장했다. 미술가/환자는 사회적 측면이 아니라 계속되어온 성격의 한 측면을 흐르도록 허락하는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다. 창조적 과정 중에 비우기를 위해 치료사에게 핵심적인 것으로 자아 통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Kris는 통제된 상황에서의 자유연상에 대한 프로이드의 원칙을 그대로 지키지만 모든 미술적 활동에서, 꿈과 환상의 대조 속에서 의미심장하고 통제된 이완과 퇴행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는 창조와 비판간의 연속적 내적 활동에서 이것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며 ‘일차적 과정으로의 표면적 기능의 통제된 억압’이라고 인용했다. 창조가 억압의 통제가 아니라 일차적 과정 자체의 작업이라는 생각은 Freud가 자동적인 무의식에 대해 비관적이었던 견해와는 분리되어 자아의 좀 더 역동적인 역할을 지적하였다. Kris는 무의식을 다음과 같다고 믿었다
그것의 더 하부(low) 구조에로의 잠재적 파괴효과에서 방향을 바꾸어 그것은 새롭고 보 다 이해 할 수 있는 개념과 이미지를 형성하고 (shaping) 새로운 연결을 형성하는 상당 히 쓸모 있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은 단순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표면의 생각은 완전히 일차적 과정의 모체 속에 잠겨있다.
(Kris 1953:262)
Kris의 또 다른 흥미로운 연구는 사회에서 미술가들의 태고적 역할과 기능을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미술가의 신화적 근거를 탐구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에서 시인과 음악가를 영감을 지닌 창조자로 화가와 조각가는 위대한 직공으로 구분하는 것에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화가와 조각가를 신과 경쟁했던 문화적 영웅 Prometheus, Hephaestus, Daedalus의 후예라는 신화적 전통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았다.: 창조자로서 미술가는 주술과 같은 힘을 부여받았고 모반과 저항 때문에 신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그는 이것이 미술가들이 보헤미안 보호구역에서 사회의 이탈자로 살아가게 하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이미지 주술에의 믿음에 대한 결과이다 : 우선 기억을 넘어서는 힘과 인간 현상을 밖으로 표현하는 능력이다. ‘제스처는 그것을 할 때 봐야만 한다. 단어(말)는 말할 때 들어야만 한다. 그림은 후에도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영원하며 시간을 통제하고 변천을 극복한다. 거기에 주술이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미술가들은 사라지는 것을 보존할 수 있다. Kris는 미술가와 관련된 신화적 전통과 미술가 내면의 심리적 과정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보았다.
미술가는 자연을 빌리지도 않고 베끼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것들 새롭게 창조한다. 그는 세상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스리고자 한다. 사물을 보면서 그들은 그것을 완전 히 가졌다고 자신이 느낄 때까지 그의 눈으로 그것을 취하고 그것을 만들기를 원한다. 그리고 칠하는 것과 조각하는 것은 두 종류의 꿰뚫는 활동이 된다-함께 통합되어서 시 각으로 다시 나타나게 될 때 말이다. 모든 선과 조각칼로 새겨진 모든 것은 단순화한 것이고 현실의 변형인 것이다. 현실의 파괴는 이미지를 세우는 것과 혼연일체가 된다. 자연의 풍광이 주어졌을 때 선들은 모양이 되고 새로운 형상이 나타난다. 비슷하다는 수준과는 별개로 자연은 재창조되어온 것이다.
(Kris 1953: 51)
Ella Sharpe(1950a,b)도 Freud적인 관점보다는 Kleinian 관점으로 Kris와 비슷한 시기에 미술과 정신분석에 관해 썼다. 그녀는 승화와 문명은 상호 포괄적이며; 식인풍습과 문명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미술이 어떻게 ‘삶의 표상물’이 되는지를 묘사하였다. 문명은 미술의 최초의 형태이며 또한 이러한 미술의 최초 형태는 삶(food)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다(Sharpe 1950a: 9). 그녀는 미술이 그 사회에 서비스, 즉 주술적 안심을 제공한다고 느끼고 위대한 미술은 자기-보존 기능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미술을 통해 이해와 불안의 세계, 이승의 것, 흥망성쇠, 죽음의 세계에서부터 우리는 잠시나마 도망간다. 또한, 확신과 불멸의 순간은 우리의 것이 된다(Sharpe 1950a: 128).
미술을 통해서 전능한 힘에 대한 착각은 현실 경로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자아는 힘을 가진 부모의 적대감에서 위로를 찾고 미술의 형태로 그것을 표현 하고자 한다. 창조적 경험은 부활, 모유, 정액, 아이들의 것과 같은 내면적 이미지들로 전능의 삶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그림이 본래 이미지, 담요에 투사했던 유아기 때 일체가 된 이미지들을 어른이 되어서 밖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미술이 부모에 대한 근원적인 동일시에 근거를 두고 있는 승화라고 주장한다. 그 동일시는 부모와 주술적으로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고 오랜 시간동안 억압해왔던 실제 식인풍습 같은 것과 상당히 유사한 심리적 현상이다. 식인 풍습 믿음에 관한 방식 이후 에 심리적으로 같은 맥락의 주술 현상이고 혼연일체가 된 힘을 지닌 주술적 재능이 미 술이다.
(Sharpe 1950a: 135)
창조적 기간동안, 대상과 일체가 된 적개심에 대한 불안을 중화시킬 필요가 있는, 초자아의 전능성은 자아로 바뀌고 환상 속에서 파괴되어온 이미지에 대한 상징적 재창조를 만든다. 그래서 미술은 정서적 경험에 대한 자연스러운 정리로 여겨져야 한다.
Ella Sharpe의 연구는 미술 과정의 “신체적-기초”에 대한 탐구를 한 Marion Milner와 관련된다. 이것은 미술의 생물적 근거에서 흥미로운 점으로 자기 보존적 기능을 가지는 감각뿐만이 아니라 신체감각에 근거하여 상상적 신체 지각, 내적 사고와 경험과 함께 어떻게 미술 작품이 생기는 가이다. 예를 들어 Milner는 상실과 분리를 다루는 방식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둘러싼 상상적 신체를 확장하기’라고 썼다. Milner는 깊은 신체 자아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술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만들려고 애쓰는 대상으로 향하려는, 마치 분석가가 분석 동안 분석을 받는 환자의 경험으로 들어가려는 식의, 자신의 내적 느낌에 대한 경험들도 썼다.
The Hands of the Living God에서 Milner는 원시 정신적이고 신체 자아적인 경험에 다다를 수 있는 환자에게 주의 집중하는 이러한 유형에 주어지는 경험과 기법으로 신체자아의 의미를 탐구했다. Sharpe는 미술가는 감각적인 매개물을 속에서 살아 있는 듯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 생생한 감각적 반응과 신체 지식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미술가의 승화는 말이 획득되기 전에 마치 유아기의 초기 단계와 같은 단계에서 상승하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미술가는 경험을 나누는 것이 언어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비언어적 공유).
아이는 옹알거리고 꾸르륵거리고 울고 소리지르는 것으로, 몸짓으로, 오줌누고 배변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미술가는 순수한 미술가는 그의 정서적 경험을 소리와 몸짓, 수채 화, 유화, 말로 표현한다. 아기일 때 사용되는 것과 같은 신체적 힘이지만 무한히 발전 되고 같은 재료로 상징적으로 물과 기름(수채화와 유화)이 사용된다.
(Sharpe 1950b: 142)
만약 미술가가 승화를 통해 현실과 연결될 수 있다면, 미술은 자기-보존 욕구로 여겨져야 한다. Sharpe는 창조적 작품이란 공격성을 극복한 승리를 나타내며, Kleinian의 표현처럼, 공포와 분노에 의해 위협받는 경험을 복구하여 잘 내적 투영한 대상으로 회복시키는 능력에 대해 반복된 확신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술적 과정과 창조적 경험에 대한 그녀의 견해를 종합하자면: ‘미술가들은 그의 본능적인 문제와 그의 몸과 연합된 정신적 환상을 다룬다’ 그는 그의 몸, 몸에 대한 이해, 정서적 상태를 다루는 몸의 경험에서의 충만한 지식을 사용한다는 것이다(Sharpe 1950b: 148).
Marion Milner는 직접 미술 작품을 만드는 것에서 창조적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Anton Ehrenzweig 그리고 Adrian Stokes와 함께 공유한다. 정신분석과 저술에 대한 전체적 경험과 더불어 이 내적 지식을 겸비한 이 세 사람은 현재의 이론을 자극하고 다른 분석가에 의해 제기된 의문점이 있는 일차 과정의 기능에 대한 재평가를 추진했다. ‘The Hidden Order of Art(미술작품 속에 숨겨진 질서)’에서 Ehrenzweig(1967)는 ‘미술 작품의 심원한 심미적 분석’을 시도했다. Ehrenzweig는 처음에 일차와 이차 과정에 관한 2가지 사고방식과 어떻게 그것들이 창조적 작업에서 상호작용 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창조 활동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통제간의 갈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의식적 생각은 예민하게 집중되고 고도로 분석을 분화시킨다. 무의식적 생각은 혼합되어 있고 세밀한 부분을 분석하기보다는 하나의 구조로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무한정인 방향으로 확장되어 결국 혼잡해 보이는 구조의 끝에 이른다. Ehrenzweig는 창조성에는 우리의 평범한 논리적 사고와는 모순되는 주의를 확산하고 흩뿌리는 능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술의 방대한 구조에서 믿을 수 없는 혼돈’을 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왜냐면 이 혼돈에서 숨겨진 질서, 무의식의 숨겨진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신화로써 죽어 가는 신의 테마를 맴도는 Golden Bough에서 Frazer에 대해 연구했다. 죽어 가는 신에 대한 자기 파괴적 상상은 합리적 표면적 감각에 대한 무의식의 기능인 자기 파괴적 공격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 창조되기 위해 사고와 존재의 낡은 패턴에서 벗어나게 된다.
Ehrenzweig는 보편적이라고 표현되는 세상에 대한 아동의 초기 시각을 탐구했다. 그것은 구분되지 않는 구조들의 혼합이었다. 그는 이것이 리비도적인 욕구가 약화되는 잠복기에 분석적 시각으로 바뀐다는 것, 시각은 구체적이고 개인적 대상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패턴으로 된다는 것을 알았다. 배경에서 형태를 구분하는 능력, 즉 뛰어난 형태주의자는 교육적으로 촉진된다. 본래의 혼합된 시각은 여전히 미술적 시각의 기초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상당히 넓은 범위의 모순된 형태들을 통합할 수 있다. 미술가는 세부적인 것에 주의를 주는 것과 전체 그림에 주의를 흩어 버리는 것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그리면서 동시에 애매 모호한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것이 미술가의 특권이다’ (Ehrenzweig 1967:30)
Ehrenzweig는 미술적 과정 동안 작업, 그림, 미술가의 성격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무의식이 검색을 하는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종합적인 통합은 미술작품의 표면적 구조에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무의식 검색의 진공 상태에 의해서만 통제된다’(Ehrenzweig 1967: 30).
미술 과정동안 두 가지 타입의 사고간의 갈등이 경험되고, 하나 또는 다른 것이 우세를 차지하게 된다. 미술가에게 있어서 매개물은 중요한 부분으로 작품의 범위가 된다.. Ehrenzweig는 ‘진정한 대화와 같은 것이 미술가와 그의 작품 사이에 일어난다’고 썼다(Ehrenzweig 1967: 57). 미술가, 아이디어 그리고 매개물과의 상호작용은 무의식과의 접촉을 가능하게 해준다.
미술가의 순수한 의식적 의도를 좌절시킴으로써 매개물은 좀 더 그의 성격의 숨겨진 부 분과 접촉하게 하고 의식적 응시(눈여겨보기)를 하기 위해 성격들이 끌어 나오게 한다. 미술가가 매개물과 겨루는 동안 작품에 의해 드러난 자신의 무의식적 성격과 싸우면서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투사가 있었던 의식적 수준에서부터 무의식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마도 창조성의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유익한 결과일 것이다.
(Ehrenzweig 1967: 57)
Ehrenzweig는 창조적 작업에서 세 가지 시기를 가정했다. 처음 시기는 작품에로의 자기의 분열에 대한 투사로 보았는데 왜냐면 분열은 정신 분열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기는 무의식적 검색과 무의식적 구조가 형성된 곳에서의 통합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미술 작품에 하나의 독립된 삶(life)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증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이차적인 수정의 하나로, 거기서 표면의 자아에로의 작품에 대한 부분적 재 내적 투영(re-introjection)이 일어난다. 그래서 거기에선 좀 더 높은 정신적 수준의 피드백이 있다. 이것은 이상, 불완전함과 미래의 희망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합의한 현실간의 간격으로 우울시기가 된다.
우리는 이미 어떻게 이차과정의 관점으로 일차과정의 작품을 관찰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쳤다. 여기서의 문제란 이차적 과정의 형태주의 기법으로 미술의 무의식적 구조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미술에서 하부구조들의 통합이 그것의 의식적 기호: 그림 공간을 통해서만 관찰된다’는 것을 알았다(Ehrenzweig 1967: 76).
Ehrenzweig는 미술 작품의 대부분은 명확한 구분이 안 되는 광범위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미술 작품은 미술가가 투사하기 위한 수용자로 자궁으로 역할을 한다. 그는 미술 작품이 그것 자체로 생명력을 가진다고 Adrian Stroke와 비슷하게 말하였다.
Anna Freud(1950), Marion Milner(1950)와 Ehrenzweig(1967)는 모두 분석 상황에서 분석을 받는 환자와 미술가, 그의 작품과의 관계에 대한 비교와 논평을 하였다. 그들이 나눈 창조적 특성은 무엇인가? Anna Freud는 마음의 부재- 의식적 논리와 이성이 없는-에 대한 동일한 요구로 보았다. 거기에는 이차적인 과정을 남기려는 것과 일시적 단계로 혼란을 받아들이려는 똑같은 완고함이 있다.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질서에 대한 압력으로 믿지 못함과 구분 안 되는 것이 마구 밀어 넣어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똑같이 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일한 공포도 경험한다. 화가가 자신이 불확실성, 전체적 그림을 추구하려는 성급함을 참지 못할 때에 방해받듯이 분석에서는 분석을 받는 환자에게 성급한 해석을 함으로 인해 그 과정과 분석가가 방해를 받게 된다. Ehrenzweig는 분석가의 ‘자유연상’에 주의를 두는 것의 효과를 비교하였다. 미술가처럼 분석가는 주의를 흩뿌려가며 전체 연상에 공정하게 주의를 주며 어떤 눈에 띄는 것에 집중되는 것을 거부한다. 분석가는 눈에 띄지 않는 부분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상징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고 끌어낼 것이다. 환자는 자신의 분열된 투사를 보다 상위 구조 수준에서 다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분석에서도 창조성의 세 가지 시기 모두가 존재하며 분석가는 미술 작품처럼 투사들을 받아들이는 저장소(자궁)로써 도움이 된다. Milner의 말에서: ‘그것이 참을 수 없을 때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리고 그것을 좀더 참을 수 있는 형태로 되돌려 주기 위해선, 멕베드처럼 고통스런 미술작품이 있게 된다’(Milner 1969: 219).
이론가들 사이에서 심적 창조성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상실한 대상을 재창조하고 보호하려고 노력하는지 아니면 Marion Milner가 주장했듯이 그것은 이차적 기능이며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을 만드는 것에 일차적 기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그러나 Anna Freud는 창조적 탐험과 분석 과정 둘 다 상실감정의 회복 이상의 의미이며 내면의 세계로 향하는 통찰의 힘이며 새로이 만들어진 기초 위에서 새로운 태도와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흥미로운 또 다른 거대 영역은 ‘Outside art', 'Art Brut' and Psychotic Art이다. 이것은 창조적 활동을 위한 동기에서 우리를 흥미롭게 하지만 이 장에서 연구해야하는 범위에는 들지 않는다. Kris는 Psychoanalytic Explorations in Art(미술에서의 정신분석적 탐색)이라는 책에서 심리적 미술의 부분에 이것을 할당했다. 그의 발견은 정신적 치유를 위한 힘과 균형을 바로잡는 것으로 미술을 본 Prinzhorn(1972)처럼 수집가로서의 열광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차라리 늘어가는 작품(결과물)안에서 정신은 세상과의 관계는 느슨해지고 바깥의 대상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부여하려는 열정적인 시도를 하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Storr(1978)는 유명한 미술가와 과학자의 예를 들어 성격의 유형을 연구하면서 왜 사람들이 창조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한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창조성을 소망-충족으로 보았고, 일반적으로는 드러낼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심리적 욕구를 제거하는 발산으로서 현실에 대한 대체적 창조를 위해 상상이 이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Kris가 연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영역을 조사했는데 그것은 바로 미술가의 성격특질이었다. 하나의 발견은 미술가는 강한 자아를 가졌다고 여겨졌으며 일차과정에 압도될 수 있는 자아와 원초아 간의 유동적 경계를 지녔다는 것으로 미술가와 다른 사람들을 구별했다.
강한 자아를 지닌 미술가는 다음의 성격 특성이 있는 것 같다: 독립적, 내적 방향성, 심미적 예민함, 긴장과 불안을 참아내는 능력 등이다. 천재와 광기는 미술가에게 관련되어왔지만 Storr는 창조적인 사람이 신경증적이라고 불려지기 쉬운 이유 중 하나를 그들이 정신병리학적으로 신경증적인 증상이 보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작품에서는 보여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신경증이 부정적 적응인 반면 작품은 긍정적인 적응이다. 그는 대개 창조적인 사람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창조적 작품은 정신세계가 와해되는 것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Storr 1978: 31).
Storr는 창조성이 ‘불쾌감과 불안’을 막기 위한 방어로써 이용된다고 주장한다. 우울한 성격은 그가 무언가를 만듦으로서 파괴되었다고 느끼는 세계를 대신하려고 할 것이다. 정신분열적 성격은 사람들에게서보다는 사물 속에서 의미와 중요성을 찾으려고 하며 내적으로 일관된 체계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반면에 강박적인 사람은 보호적 수단이나 대비, 방어를 위한 행동으로 창조적 작품을 시작할 것이다. 작품과정의 부분은 주관적인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와 관련이 있을 상징적이고 의식적 행동이 될 수 있다. 유명한 미술가와 과학자에 대한 그의 예는 아마도 기본적인 성격이 무엇이든지 간에 창조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Storr는 또한 영아기를 조사했다. 그는 비범한 불만이 우리의 오랜 영아기 본래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의 발전되고 이어져온 문화의 대가로 우리의 성숙이 늦어지는 것과 같다. 아동은 성인에게 오랜 기간 동안 의존하는데 그 결과로 긴 기간 동안 좌절을 겪는다. 그는 그것의 직접적인 결과로 우리의 ‘내면세계’가 발전한다고 보았다. 거기에는 만족 표상을 위한 요구가 있다. ‘ 그것은 창조성으로 이끄는 성인의 성적 관심에 대한 억제가 아니라 아동기 선구자에 대한 억제이다’(Storr 1978: 181).
Storr는 성인기로 이어지고 오직 상징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찾을 수 있는 아동기 불만족의 찌꺼기를 가정했다. 아마도 창조적인 사람들은 덜 확고한 정체감, 좀 더 개인적인 자기(self)를 가졌을 것이지만 의식과 무의식 과정사이로 좀 더 유연하게 그들을 옮겨가게 하는 애매 모호한 것에 대해 대단히 잘 참는다. Storr는 Jung의 연구로 확고하게 연결된다. ‘개인화’의 개념이-자신의 내부에 대립되는 요소들이 화합에 의해 자기 자신과도 조화에 이르게 되는-여기서 결정적이다. 이것을 통해서 미술 작품은 적응적인 것으로, 개인의 내면에 대립되는 요소들의 결합으로, 성격의 통합으로 여겨진다.
THE AESTHETIC EXPERIENCE
역사적 '심미적 경험'을 논의하는 것은 장엄과 美의 개념을 중심으로 집중된다. 장엄은 원래 외경심이 일어나는 깊은 곳에서 자연에 대한 응시에 의해 각성되고 만들어진 감정에 뿌리를 둔 경험이고 반면 美는 인간이 만든 완전하다고 느껴지는 인공물에 대한 응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논쟁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되며 무엇이 고상한 취미이며 어떻게 하면 일반적 동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것이었다. 美에 대한 정신 분석적 저술은 느껴지는 정서를 통한 정신적 과정에 그들의 초점을 둠으로 美가 이데올로기를 축소시킬 수 있을까와 같은 부분적으로 한발 비껴난 이슈였다. 특정한 시대의 미술이 사회의 주요한 요인을 표현하기 위해 체계화되었는가 아니면 미술이 주요한 의식들을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마도 이러한 의문은 대립되는 경향의 갈등이 결합하면서부터 나타났다. Adrian Stokes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
승화는(sublimation) 상당히 공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미술은 문화적 활동이다; 형 식의 이면에 있는 진정한 심상은 특정한 문화의 잠재된 것이나 실현화 된 것으로 여겨 진다.
(Stokes 1978: 110)
이러한 짧은 부분에서 우리는 단지 미술의 광대한 대상들 내에서부터 정신 분석적 기여의 발달을 쫓아갈 수 있을 뿐이다.
감동적인 시작을 하지 못했던 “기괴함”이란 것에 대한 Freud의 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마도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정신분석가는 美의 대상에 대해 상세하게 조사해야 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심지어 미 술이 단지 美의 원리가 아니라 감정의 특성에 대한 원리로 이해되어야 할 때도 말이다. 그는 정신적 상태의 다른 지층들에서 작업하며 심미적 경험에 관한 연구를 위한 자료인 정서적 충동이 억제된 것과는 관련이 없다. 정서적 충동은 목표가 방해받게 되고 그것 과 동시에 일어난 요인들에 대한 적대감에 의존적이게 된다.
(Freud 1919: 219)
Freud의 “기괴함(The Uncanny)”이란 주제는 당황스럽고, 익숙하고, 대개는 숨겨지고 감추어진 경험을 다룬다. 그가 화제로 삼은 예는 무언가가 살아있는 것인지 혹은 죽은 것인지 하는, 사람의 겪는 애매 모호함, 일치와 반복의 경험인 의심이다. 그것은 이러한 경험들과 미적 경험들을 정밀하게 연결시킨 것에 대해 놀라게 되는 환상적인 논문이다. 흥미롭게도 Peter와 Fuller(1980)는 Art and Psychoanalysis 에서 Nakin의 그림에 대해서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그것들을 다룸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그는 Nakin의 그림에서의 성적이고 관능적인 경험에 대해 묘사했다. 피부를 관통하며 ‘그림 안에 담겨 있는’ 몽상적인 공간에 다다르기 위해 이끌려지는 성적이고 관능적인 경험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그것이 ‘달아나기 쉽지 않고’ ‘익숙한’ 것이고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다 - 기괴함에 대한 프로이드의 정확한 묘사. 우리는 후에 Fuller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우선 그의 논문에서 프로이드의 계통적 논술을 따라가는 것부터 하겠다.
기괴함의 많은 예들은 사고의 전능함이라는 일반적 관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 영적 존재인 사람들이 있는 세계인 우주에 대한 오래되고 애미니즘적인 개념(사고),
그 자신의 정신과정에서 대상의 자애적인 과대 평가에 따른; 생각의 전능함에 대한 믿 음과 그 믿음에 근거한 주술적 기법에 따른; 다양한 외부 사람들과 조심스럽게 분류된 주술적 힘과 초자연적인 능력의 사물에 대한 귀인에 따른.
(Freud 1919: 240)
우리 모두 개별적 발달에서 애미니즘적인 국면을 겪으며 그것의 분명한 흔적을 보존한다. Freud는 기괴함의 비밀스러운 특성을 당황하고 억압되는 무언가가 다시 일어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래서 그것은 익숙하고 억압의 과정을 통해 멀리하게 되는 무엇인가이다. 그래서 기괴한 경험을 우리가 겪을 때 유아기의 콤플렉스는 기억과 연합을 통해 생생해진다.
프로이드는 미에 대한 이후의 2편의 논문인 ‘Creative Writers and Day Dreaming(창조적 작가들과 백일몽)(1908)’과 ‘Jokes and their Relation to the Unconscious(무의식에로의 농담과 그 관계)(1905)’에서 더 진보된 기여를 했다. 후기 작가(저술가)인 Gombrich(1966)와 Wollheim(1980)는 특별히 미술 안에서의 미적 경험에 대하여 이러한 점을 확립되고 확장했다.
Kris는 거꾸로 그들의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를 위한 대중의 안목을 주장했다; 그들은 모서리에서 좀더 중심으로 옮겨갔다. 그들은 수동적인데서 적극적인 것으로 옮겨갔다. 관객은 의식과 무의식간의 경계가 느슨해질 때 일어나는 흥분과 긴장의 감소를 경험한다. 대중은 미술가와 동일시한다. 그리고 또한 재창조한다. 거기엔 엄청난 잠재된 정서가 있는데 왜냐하면 관객도 무의식의 기제와 미술가에 의해 경험된 전능감에 이르게 되며 그들의 반응은 좀더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Kris는 “꿈 작업과 미술작업”에서 비교를 통해 이것을 부분적으로 설명했다 :
꿈에 나타난 것은 타협으로, 관객의 다양한 반응에 자극 받은 의미들의 다양성으로 미 술 작품에서 나타난 것은 과잉편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Kris 1953: 25)
Kris는 역시 ‘미적 망상’의 중요성에 대해 논의하고, ‘놀이로서 현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오직 놀이의 필연성과 공존할 수 있다 여기서 ‘미적 망상’의 근거가 있다고 했다.
Kris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kathartic(카타르시스적인)’이 쓰여졌다고 봤고 후에 프로이드는 미술을 종종 무의식적 긴장을 푸는 방법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법’으로 보았다. 정화는 본능적 요구들의 불협화음으로 위협받는 통제의 자아 재확립을 가능하게 한다.
심미적 망상(illusion)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도록 보장받고 고무되는 안전을 약속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쫓아야 할 우리 자신의 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Kris 1953: 45-6)
Kris는 캐리커쳐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을 썼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에서 농담의 이면에 있는 심리적 메카니즘과 관련이 있다. 그는 캐리커쳐에 대한 심리학과 또 다른 누군가의 ‘unmasking(가면 벗기기)’ 이면에 있는 기법, 타락시키기 기법에 대해 탐구했다. 캐리커쳐와의 관계에서 정신적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 즉 공격성이 발산되도록 하는 것으로서 의 억제를 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 것이다. 그는 쾌감과 불쾌감 사이의 중간단계로 이것을 묘사하였다. 캐리커쳐는 우상과 주술의 세계로의 회귀이다. 이미지 주술로의 가장 초기의 태도는 이미지와 인물이 동일하다고 보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적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왁스인형에게 상처를 주는 것). 다음 단계는 우상을 만들고 그 사람 대신에 거기에다 적대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Kris는 이것을 행동이라기 보다는 대화라고 묘사했다. 세 번째 단계는 적대적 행동이 그 사람과 비슷한 캐리커쳐에만 한정된다. 여기서 Kris는 공격성은 미술영역에 남아 있고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적대행동을 하기 보단 웃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단계를 미술치료에서 발견하는 것이 흔하지는 않으며 보편적인 캐리커쳐와 우상은 정치적 인물과의 관계에서 대중이 좌절하고 무력감을 느낄 때 재현된다.
우리는 이제 후기 저술가에게 영향을 준 두 개의 흥미로운 논문으로부터 심미적 경험에 관한 연구에 기여한 점을 살펴볼 것이다. 첫 번째 것은 Fairbairn의 'The Ultimate Basis of Aesthetic Experience'(1939)이고 두 번째 것은 Rickman의 ‘On The Nature of Ugliness and the Creative Impulse'(1940)이다. Fairbairn은 자신의 전체적 이론을 그들의 작품 속에서 ‘대상 발견하기’를 적용하는 초현실주의자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Freud는 자신의 무의식으로의 선구자적 연구 때문에 그와 접촉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Gombrich는 ‘명백히 Freud에겐 그와 같은 일차적 과정은 미적인 가치가 없었다’라고 코멘트 하였다(Gombrich 1966: 35). Freud는 미치광이 같은 표현주의자들과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미술과 함께 일차 과정의 메카니즘을 혼동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무의식적 메카니즘으로부터 나뉘어진 구조와 의사소통 가능하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Fairbairn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미술가들이 유지하고 구성한 숨겨진 상징적 의미심장함을 찾으려고 ‘대상 발견하기’를 사용한다고 보았다.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그들에게 그것은 ‘외부의 현실’과 ‘꿈의 내면세계’의 연합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는 발견된 대상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미술가의 태도와 구경꾼의 태도간의 중간지점’이라고 주장한다. 발견된 대상은 미술가의 정서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그는 모든 미술을 포함하기 위해서 ‘발견된 대상 이론’을 확장하였는데, 반면 그의 논문은 Stokes(1978), Milner(1950)와 Ehrenzweig(1967)과 같은 후기 저술가들이 가정했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능력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이 취약하다. 창조성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의 논문은 후기 개념으로의 단계로서 흥미로우며 심미적 경험이 가치롭다는 생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심미적 경험은 구경꾼이 그의 무의식적이고 정서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그에 게 상징적인 기능을 하는 대상을 발견하였을 때 구경꾼에게 일어나는 경험으로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Fairbairn 1939: 173)
심미적 경험이 ‘실패’하는 것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Fairbairn은 (a)욕구를 억압하려는 호소를 방해하는 속이기에 대한 고도의 정교함(예,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상징) 혹은 (b)초자아의 요구가 만족되지 못함으로 인한 속이기의 부적절함(예, 형식이 없이 내용만 있는 상징)을 주장했다. Fairbairn은 심미적 경험이 미술가의 욕구를 억압하기 위한 표현 수단을 제공하는 것과 자아가 동시에 초자아의 지위에 속성을 돌리는 것-본질적으로 보상의 수단(자아는 표상적 파괴충동이 있을 때 초자아에게 파괴를 보상하게 한다)-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심미적 경험은 사람이 자신을 표상하는 대상과 직면하게 된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일어난다. 그것은 단순히 ‘대상을 발견’하는 것만 아니라 ‘대상을 복구’하는 것이다.
(Fairbairn 1939: 178)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미술 작품은 삶과 죽음의 원리를 또는 파괴와 복구의 원리를 종합한 것이다. 미술에서 미의 개념은 질서, 조화, 통일과 같은 말로 정의된다. 그리고 구경꾼내면에 보상의 요구를 제공한다. 카타르시스는 비극물에서 동정과 공포와 같은 감정을 통해 경험된다. 비극물은 통제할 수 없는 파괴의 본성을 통합하는 것과 반면 구경꾼에겐 완전함의 인상, 즉 ‘대상과의 일체감’을 일으킴으로 감명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미술작품은 구경꾼에게 ‘대상과의 일체감’으로 감동을 일으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동시에 대상의 파괴를 의미하는 정서의 해방감도 줄 수 있어야 한다. 반면에 복구에 대한 조건이 여전히 불만족인 상태로 남겨 지게 되고 그러면 심미적 경험은 방해받게 된다.
(Fairbairn 1939: 180)
미술가는 창조와 파괴욕구의 상호작용을 중간매개물 내에서 표상하고 이것은 우리 같은 구경꾼에게 갈등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Rickman은 미술을 파괴를 극복하는 창조의 힘의 승리라고 보았다. 즉 고통의 부인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결심이다. 그의 논문에서 그는 추한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의 특성을 탐구하고 그러한 감정의 기저에 있는 정신적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Freud의 ‘기괴함-아이슬랜드의 말에서 ‘공포’와 ‘좋아함’을 의미하는 추함의 세계에 뿌리가 되는’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어 있는 경험의 영역이다. 그의 연구에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불완전한 이미지(예) 고대의 부서진 상)에 의해 야기되는 감정이다(Fuller는 Art and Psychoanalysis에서 정신분석에서 밀러의 비너스에 대한 장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Rickman은 그와 같은 상이 유아로부터 시작된 재 절단의 무의식적 환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괴충동 환상이 다시 일깨워지는 것은 대상 그 자체내의 결점보다 더 혼란스럽다. 환상은 무의식에 남겨지고 두려움과 공포의 영향은 그 상에 애착하게 만든다: ‘의식에서부터 지켜진 환상은 외부대상과의 관계에서 주관적 감정의 풍부함을 필요로 한다’(Rickman 1940: 298). (미술치료사는 내담자가 ‘자신’의 혼란스러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에 익숙해질 것이다.
Rickman은 미술 작품에서는 세 가지 만족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보는 것에서의 감각적 기쁨이 있다. 두 번째로 파괴와 복구의 경향성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갈등을 해결함에서 얻게 되는 긴장의 감소가 있다:
미술작품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도의 정서수준으로 우리의 마음에 호소한다. 미 술가는 우리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Rickman 1940: 307)
세 번째로 거기에는 불멸의 요소가 있다. 파괴를 극복하는 창조의 힘의 승리를 보면서 우리는 절망과 겨룰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다. 미술가는 어쩔 수없이 그들의 내적 대상을 미움과 질투로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도록 이끌어 진다.
모든 자연물에서 죽음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미술의 환상과 승리는 죽음을 살아 있는 세계로 되돌릴 수 있다.
(Rickman 1940: 308)
Rickman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는데
추한 것으로 인한 공포는 그것이 느슨해져온 파괴의 의지를 제공한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Rickman 1940: 234)
Adrian Stokes가 기여한 것을 살펴보기 전에 이 단계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저술가들-Hanna Segal, Marion Milner, Donald Winnicott-의 심미적 경험에 대한 생각을 요약해 보는 것이 유용하다. Kleinian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술가는 유아기의 우울한 상태를 통해 다시 작업한다는 것이다: 발달단계에 이르면 유아는 사랑과 증오가 동일한 대상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반적인 쓸쓸함은 사랑하는 대상을 상처 주고 싶은 파괴의 본능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내면세계의 조화를 재확립, 재건축, 복구하고 싶은 욕구 뒤에 이어지는 것이다. Hanna Segal은 이러한 보상적 욕구들을 ‘모든 미술적 창조성의 기초적 추동’이라고 보았다. 미술 작품을 만들면서 그것의 독립적이고 외현적 존재는 중요하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가 분리되도록 허락한 것처럼 분리를 가능하게 한다. Hanna Segal은 우리가 심미적 경험과 함께 미술가의 내면세계를 확인한다고 생각했다. Rickman이 제안한 것처럼 이것은 감각적 쾌감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작업과 관계 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우리의 감정이 풍부해지고 만족이 지속되게 된다. 그녀는 미술작업의 기본조건으로- 복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처음의 파괴를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는 파괴의 본능에 대한 부인밖에 없다. 그녀는 미의 요소-통일감, 내면세계에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통일된 대상에 대한 경험-뿐만이 아니라 추함의 요소-내면세계의 분열과 파괴에 해당하는- 둘 다 모두 심미적 경험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Ehrenzweig와 유사하게 그녀는 미술작품을 보는 사람이 내면적으로 작품을 완성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자신의 상상력이 마지막 틈을 이어줄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심미적 경험의 내면적 부분으로 구경꾼의 심리적 작업 즉, 미술가의 부분으로 불완전성에 대한 필요를 제안한다.
Donald Winnicott와 Marion Milner 는 둘 다 각기 틀의 역할과 환상적 영역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주석을 함으로 심미적 경험에 대한 정신 분석적 이해에 기여를 했다. Winnicott는 ‘Transitional Objects and Transitional Phenomena 전통적 대상과 전통적 현상’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내적 세계, 외부 현실과 둘 다가 원인이 되어 경험하는 제 3의 영역을 서술하였다. 내면과 외적 현실간의 분리를 유지해야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과제 속에서 각 개인을 쉬게 하는 곳으로서 변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이 중개적 영역, 망상의 영역은 ‘놀이’중에 길을 잃어버린 어린 아이 에게 있어 놀이의 영역과 직접적인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았다. 이 시점에서 Winnicott의 주제는 놀이와 미술적 창조성과 호소, 종교적 경험, 꿈으로 넓혀졌다(Winnicott 1958: 233).
Marion Milner는 외부세계로부터의 도피는 내면세계의 통합을 위해서 놀이나 미술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보았다. 만드는 자나 보는 자의 심미적 순간은 이러한 일시적 자기 상실동안에 일어난다. 그녀는 미술이 성인의 삶에서 건강한 아기가 생활에서 매일 경험하는 재생산의 상태를 위한 방법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미술을 적용함으로 사람들이 세상을 고정되고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게 한다. 색칠하기는 융통성 있는 매개물로 피드백을 제공한다; 그것은 화가가 실제로 질적으로 좀 더 민감해지길 기다리면서, 그리고 이것이 마치 아기에게 좋은 어머니처럼 화가에게 방법이 되어 의사소통의 기초가 된다. 그림 그리기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틀을 제공한다, 내적인 것은 상징적일 것이고 바깥에 있는 것은 실제적일 것이다. 내면은 감정과 아이디어의 상징이다. 치료의 많은 형태가 비슷한 경험의 틀을 제공한다. 그녀는 창조적 행위 속에서 사람들은 누군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부딪치며 살피고 그들의 경험을 상상을 통해 나누는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들의 질서를 찾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화가이자 미학자인 Adrian Stokes의 저술은 심미적 사고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적 사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우울 상태와 미술적 창조성과 심미적 경험 둘 다에서 일어나는 복구와 보상에 대해 Hanna Segal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편집증-정신분열적 상태의 구성요소를 찾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그는 또한 미술활동과 감상을 통해 대상과 분리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가슴과 세상은 하나라는 통합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가는 통합의 느낌을 재창조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대상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광대한 느낌을 새롭게 하게 된다. 개인 내 변화 가능한 아이디어가 있는 통합된 상태에서부터 ‘시적 동일시’물결이 일어날 수 있다. Stokes는 미술작품 자체를 대상과 분리되고 구별되어 지지만 평범한 재료로 만들어진 하나의 개인으로 보았다.
우리는 항상 심미적 경험에서 대상과 다르다는 느낌과 함께 서로 다른 비율로 결합된 동질성이나 통합의 느낌을 발견한다.
(Stokes 1973: 104)
그리고:
그것이 대상-타성(他性)과 함께 통합감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술이 사랑 속 에서 존재 상태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만약 우리가 유아적 내적 투영과 그 상태에서 강조되어진 보상적 태도를 강조한다면 이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러한 태도들 이 형식의 원천이 된다. 미술가가 창조적 과정에서 그것들을 결합할 때 감각정보와 관 련된 유아적 심리 긴장이 그에게서 시각으로 생생해지고 어떤 능력은 충족되면서 현상 적 세계와 감정적 세계가 마치 처음인 것처럼 새롭게 된다.
(Stokes 1973: 110)
심미적 경험에 관한 다른 저술에서, Adrian Stokes(1978)는 역시 ‘invitation in art(미술에서의 초대)’를 말했다. 그는 이것을 감정 이입적 동일시에로의 초대이며 기꺼이 미술작품을 조망하려 읽으려는 높아진 인식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그것을 물질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과정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미술대상의 가치는 ‘전체성의 모델이 되며 재구성한 대상을 분리하는 데 있다’라고 보았다. Hanna Segal은 우울한 감정에 대한 조증 방어로 ‘광대한 감정’을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조증 보상은 너무 달콤한 미술 작품에 대한 정서적 결과라는 점에서 Adrian Stokes와 다르다. 그러나 Stokes는 미술의 두 가지 형식을 편집증-정신분열적인 성향과 우울적인 성향에 훌륭하게 연결시켰다. 그래서 그는 경험의 더 초기의 형태로의 되돌아가는 것이 미술가의 한 가지 가능성이고 존재의 미적 방식이라고 보았다. 그는 현재 있는 것, 그것의 흔적을 남겨야만 하는 것을 파괴할 필요성에 대해 Hanna Segal과 유사하게 생각했는데 좀 더 미술가가 접한 문제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미술을 만드는 중에 불평등, 긴장, 왜곡에 의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예비적 요소- 복구하고 변환을 동반하여 드러내기-들이 통합되어 ‘작품’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Stokes 1978: 275)
초기에는 Fairbairn은 미술작품이 만들어 졌든 아니든 간에 탐구해 왔다. 그래서 Stokes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러나 우리는 곧 만약 비난이 어떤 최저 수준이하로 낮춰지면 미술, 창조는 멈출 것이 며 만약 감수성이 비난의 사실을 극복하게 되면 미술과 창조는 완전히 멈춰지고 거부된 다는 이상한 결론에 다다른다.
(Stokes 1978: 276)
미술은 갈등적인 추세들을 통합하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Eros(성애)로의 형식이 없는 경외는 죽음의 본능(Thanatos)이 제외되는 것으로 인해 더 의미심장한 재능이었다(Stokes 1973: 115).
Adrian Stokes는 내면 세계에 대한 정신 분석적 시각에서 미술의 대상이 특정 문화 내에 존재하며 역사의 특정 시점을 지시하는 외부세계로의 가교를 만들었다. 그의 기여가 중요한데 왜냐면 그것이 그의 저술을 통해 심미적 경험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려고 할뿐만 아니라 숙련한 미술가에 대한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Peter Fuller의 미술과 정신분석에서의 흥미는 ‘왜 어떤 미술은 기분 좋게 하고 보기에도 좋은 사물의 세계에 대한 관계지각을 전혀 할 수 없게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하는 부분적으로 추상화에 대한 탐구였다. 그의 책에서, Fuller는 심미적 경험에 바탕을 둔 유물론자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어떻게 대상관계이론이 그의 물음을 해명할 것인지를 탐구하였다. 여기선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가 그의 생각 중에서 몇 단계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Marion Miner의 연구에 대한 영향으로 공간에 대한 정서적 의미의 존재(being)로써 추상화를 연구하려고 했다. 입체파는 오래된 원근법에 기초한 정교한 미술 관습에서 벗어나서 보기의 새로운 방식인 어설프게 표현하기를 향한 노력의 시도였다. 그는 Cezanne이 변화 단계에서 풍경을 그렸고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를 섞었다고 본다.
Fuller는 대상 관계 이론이 흥미롭다는 것을 알았는데 특별히 초기의 주관적 시기에서 후기 아동기의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발달 단계의 과도기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세잔 부터 시작한 몇 몇의 화가가 정밀한 그림 그리기에 끝인사를 한 것이 아니라 인간경험을 탐험하는 새로운 이미지 그리기를 시작한 것이라고 보았다. Stokes는 연합과 대상-개별화라고 했다. 이것은 그림이 관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라고 하는 Miner 견해의 연속선이다. 우리는 Fuller의 Nakin의 그림에 대한 경험의 표현으로 돌아가서 처음에 언급한 ‘기괴함’에 대해 말할 것이다. Fuller는 이 그림에서 그림에 담겨 있는 망상적 착각의 공간으로 자신이 끌려 들어가는 것을 알았다. 그림에 대한 그의 경험은 마치 관객이 됨으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잠재적 공간-나와 내가 아닌 것의 가설적 영역-에서의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2가지 경험에 대한 Winnicott의 생각을 논의했다. Winnicott는 대상 엄마(id 긴장 높을 때 이용되는 엄마)와 환경 엄마(예상 못한 위험을 피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돌봐주는 엄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장엄(낭만적, 통합적, 채색된, 조소 양식)과 美(고전적, 질서정연하고 형식적, 조각 양식)라는 대상엄마와 환경엄마 경험에 대응되는 2가지 심미적 경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의 연구를 고무시켰던 Nakin의 그림으로 되돌아가서, Fuller는 이것을 관객에게서 생겨난 정서와 역설의 잠재적 공간에 대한 경험으로 묘사했다. 그는 이러한 초기 경험을 구식의 퇴행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일차적 과정과 함께 하는 잠재된 창조 작업으로 보는 Miner와 Ehrenzweig의 연구를 추종한다. 우리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두 과정-창조적인 사람은 합리적인 것의 한 가운데서 상상력을 유지하고 있다-을 본 Rycroft의 연구를 다음 부분인 상징에서 살펴 볼 것이다. 추상화는 새로운 통합을 하는 중에 ‘비우기’와 ‘내적 공간으로의 탐험’이 필요할 것이다.
SYMBOLISM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의 가교가 되는 미술의 유추는 중계자로서 그들의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또 의식적, 무의식적 상상을 연결하며 내담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부분을 보유하고 상징화하는 그림의 기능을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것으로 양가감정과 갈등은 그림 속에서 무언적으로 말하게 된다. 상징과정에 대한 이론은 Freud이후로 계속 의미있는 발전을 해왔다. Charles Rycroft(1968)는 Imagination and Reality (상상과 현실)에서 대단히 명쾌하게 이러한 주제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Rycroft는 Freud의 가장 초기이고 기본적인 생각으로 앞서 4장에서 언급했던 방출된 본능적 충동으로 인한 긴장을 통제하는 원시적인 심리적 기구로 상징을 보았던 고전적 이론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상징은 초기의 본능적 관심의 대상에서부터 심리적 에너지의 투자를 바깥 세상에서 보았던 다른 대상으로 대치함으로 형성된다. 일단 형성되면 상징은 일차과정이나 이차과정에 의해 사용된다. 일차과정에 의해 사용되면 그것은 본래 표상 했던 대상과는 독립적인 의미가 되고 신경증과 꿈의 기저에 깔린 환상 체계와 결합하게 된다. 만약 이차과정에 의해 사용되면 그것은 여전히 대상의 표상과 관련이 있고 바깥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의식적, 무의식적 과정을 도우면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적응의 한 부분이 된다.
일차과정에 의해 배출된 충동은 즉각적이지만 일시적인 긴장감소를 가져오지만 바깥세계와는 여전히 관계가 없다(예를 들어 긴장은 우리의 잠을 지키는 꿈을 통해 감소된다); 정신병적인 환상에서 현실에 대한 방어적 거부를 형성하면서 사용된다. 환상에서 미성숙한 자아는 소망-충족 착각을 한다; 신경증에서 환상적 삶은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진전되게 된다. 그러나, 이차적 과정 경로를 취한 충동은 의식적인 소망이 된다. 이 과정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로 적절한 대상을 찾는 중에 외부적 현실이 인식되고 분석되고 그리고 나면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기법이 이용된다. 이차적 과정이 외부 대상과 의사소통하고 접촉하고 상호작용을 이끌어 내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
Rycroft는 상징에 대한 고전적 이론이 ‘The Ego and the Id'에서 묘사한 Freud의 메타심리학 형성된 진전과 변화를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이 논문에서 그의 생각은 덜 엄격하며 다음을 주장한다.
(a)무의식적인 그 무엇이 꼭 억압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b)자아가 꼭 의식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c)의식과 무의식의 명확한 이분법 대신 자아는 ‘외부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id의 부분’이 된다.
상징에 대한 고전적 이론에 대한 Rycroft의 수정을 살펴보기 전에 현재 생각에 기여한 영향력 있는 저술가들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발달가능성이 있는 논문은 Ernest Jone의 ‘The Theory of Symbolism'이다. 그는 포괄적인 견해로 그 주제에 접근한다.
만약 언어상징이 그것의 가장 넒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주제는 거의 문명의 전제 적 발전과 거의 타협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발달은 진화적 대리물의 끝없이 계속 되는 시리즈, 즉 아이디어, 관심, 능력, 아니면 또 다른 경향성의 끊임없는 대체물이다.
(Jones 1919: 181)
Jone은 상징적이라는 용어의 다양한 적용을 탐구하였고 여섯 개의 보편적 속성을 찾았다. 상징은 어떤 아이디어의 표상이나 대체이다. 이차적 요소는 보통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무언가가 있음으로 인한 일차적인 아이디어(예를 들어, 감정의 의미와 같은)를 표상한다. 상징화된 생각은 비교적 추상적이고 복잡한 반면 상징은 감각적이고 구체적이고 따라서 응축되어 온 것이다. 그는 사고의 상징적 방식이 좀 더 원시적이 되고 발달의 좀 더 단순하고 초기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표상함을 고찰했다. 그래서 그것들은 피로하고, 졸리고 아프고, 신경증, 정신착란이나 꿈에서 좀 더 흔하다. 상징의 대부분 경우는 좀 더 혹은 조금 덜 숨겨진, 비밀이거나 따로 남겨진 어떤 아이디어에 대한 명백한 표현이다. 최근에 그는 상징을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resemble wit 비유적 기지’라고 생각했다.
Jones는 상징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구별을 한다. 첫 번째는 억압하려는 경향과 억압되는 것간의 심리 내적인 갈등의 결과로 비롯된 ‘순수한 상징’이다. 상징에 대한 해석은 보통 놀람, 의심, 혐오의 반응을 일으킨다. 감정은 승화되지 못하고 억압된다. 두 번째는 의식과 전의식은 남아 있는 채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퇴행하는 ‘기능적 상징’이다; 그것은 은유적이게 된다. 금지는 극복되고 어떤 감정적 압력은 느슨하게 된다. 은유를 형성하는 중에 감정은 과잉 승화된다. Jones는 같은 이미지가 이들 두 기능에 각각 적용되지만 이것은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의 논문에서 그는 상징의 기원에서 영향이 있는 요소를 구별했다. 첫 번째로 그가 쉽게 상징화된다고 보았던, 최소한의 노력이 드는 정신과정인 ‘정신적 무력’이다. 두 번째로 ‘쾌락-고통 원리’로(예를 들어 마음에 흥미를 끄는 것은 더 쉽다) 흡사한 것을 찾기 위해서 하게 되며 낯선 것이나 새로운 것일 때 그것의 구별되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경우보다 노력이 적게 든다. 세 번째로 ‘현실원리’이다 : 유사점의 식별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하는 것을 쉽도록 한다. 그는 상징을 퇴행적 현상-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유용하지만 나중에는 벗어나는 유사함에 대한 동일시-로 보았다. 그는 그것을 현실의 원시적 적용 수단으로 보았다. 요약하자면, 그는 억압하려는 경향과 억압되는 것간의 심리 내적인 갈등의 결과로 상징화된 아이디어는 가장 원시적이고 또 가장 특성을 많이 부여되었다고 보았다. 모든 상징은 자기와 혈연관계에 대한, 또는 탄생, 사랑, 죽음의 현상에 대한 생각을 표상하는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생각과 관심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Jones의 상징에 대한 논문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데 왜냐면 그것이 그가 ‘후기 정신분석학파 저술가’라고 불렀던 사람들에게 상당히 활발히 검토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Jung은 그들 중 몇몇을 포함하여 언급했었다). 그는 그들이 하는 것이 ‘정신 분석적 발견을 다시 표면적 의미로 되돌려서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징의 가치에서 그들이 흥미들 중 하나는 상징에는 신화적이고 연금술적이며 종교적인 원칙에 대한 탐구였다. 여기서 상징이 더 높은 윤리적 이상의 추구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윤리적 이상은 상징을 대신하는 이상과 역에 이르는 것에는 실패하게 된다. 극단적인 이상은 상징 안에 함축된 것으로 보이며 그것에 의해 상징화된다. 그러나 Jones에게서 이것은 관심거리와 활동의 단순한 승화였다. 그는 Jung이 상속된다고 보았던 ‘인류학적인 상징’ 주제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각 세 대마다 이러한 상징들이 새롭게 되며 정형화되는 것은 동질성에 대한 인류의 기본적이고 영구한 관심 때문이라고 보았다.
상징이 선천적이라는 생각은 ‘획득된 지식의 상속’이거나 ‘집단 무의식’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Rycroft도 역시 이러한 의문을 연구하면서 Jones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상징의 보편성’개념이 ‘집단 무의식’보다 본능적 행동을 동반하는 감각과 효과들의 동질성과 형태(gestalts)를 이루고 그들간의 유사성을 보는 인간마음의 능력에 있어 동질성에 의해 더 잘 설명한다고 덧붙였다. Jung 특유의 상징에 대한 접근과 분석 심리학에서의 그것의 위치는 4장에 개관되어 있다.
이들 상징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은 후기 분석가 특히 대상-관계 학파에게서 변했다. 이러한 이유로 Melanie Klein, Marion Milner와 Donald Winnicott의 연구를 간단하게 다시 살펴보고 ‘Phantasy 환상’(1970)에서 Susan Isaacs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론은 현실적용과 연관된 사고의 이차적 과정으로 유아가 그 시작에서부터 현실 적응적인 행동에 참여한다고 보는 대상관계 이론가들에게 유아와 어머니의 행동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었다. Rycroft는 ‘현실원리를 넘어서 Beyond the Reality Principle'(1962)에서 근본적인 통합을 가정하는 것에서부터 요즘 개념을 출발하고 혼돈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조직의 복잡한 형태의 진행으로서 성숙을 본다고 설명했다.
Klein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분석에서 무의식적 환상의 풍부성과 역동의 중요성을 발견했다. 그녀의 ‘The Import!ance of Symbol Formation in the Development of the Ego자아의 발달에서 상징형성의 중요성’(1930)이라는 논문에서 그녀는 상징의 전조인, 동일시는 아기의 신체기관과 그들의 기능의 모든 대상에 대해 재발견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던 Ferenczi와의 연구를 살펴보면서 시작하였다. 그녀는 모든 후기 저술가들처럼 상징에 대한 Ernest Jone의 연구-쾌락원칙이 쾌감과 흥미로 인해 현저한 유사성 때문에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동등해지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그의 생각-에도 영향받았다. Klein은 상징이 모든 승화와 재능의 기초라고 결론 내렸는데 상징의 균등화에 의해 사물들, 활동들, 관심들이 리비도적인 환상으로 되기 때문이다. Klein은 동일시의 기제로 활동하는 가학적 부분에서부터 불안이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의문 속에서 불안은 유기체들과 동등해지고 다시 유기체들은 다른 대상들과 동등해지고 새로운 대상들 안에서 관심의 기초를 형성하고 상징화라는 수단을 통해 새로운 대상에 대한 풍부한 감정의 확산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상징화가 모든 환상과 승화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주체와 보통 외부세계와 현실 의 관계를 세우는 근거도 되는 것이다. (Klein 1968: 238)
그녀는 아동에게서의 바람직한 발달에는 불안사이의 균형과 상징형성과 환상의 풍부함과 불안을 견뎌낼 만한 자아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Klein은 상징을 형성하려는 강박적 욕구와 상징의 지속적 발달을 ‘인류의 문화적 진화에로의 추동적 힘’으로 보았다.
자폐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들이 최초의 어머니와 적절한 다른 대상간의 적절한 상징적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Klein은 최초의 단계에서부터 유아가 고통스러운 경험을 덜기 위해서 상징을 찾음을 보여줬다. 초기대상(예 엄마의 몸)에 대한 환상 안에서 갈등과 박해는 대체적 대상(상징들)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찾도록 고무시킨다. 이러한 갈등들은 대체 대상(상징들)에 대한 관계를 따르며 영향을 주게 되고 결국 더 나아가 또 다른 대상을 찾도록 제시한다. 이 경우 그녀는 대체 과정이 전치과정과 비슷하다고 묘사하였고 Freud도 이런 요소들 중 하나가 꿈 상징화 과정에 깔려있다고 생각했다.
Dick에 대한 그녀의 빈틈없는 분석에서, Klein은 이 아이가 어떤 사물에도 얼마나 완전히 아무런 감정도 없이 대할 수 있는지 또한 그럼으로 해서 처음 치료적 관계를 맺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묘사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애착하지 못하였고 아무런 느낌도 없음을 보여주었다-그의 초기 영아기는 분명히 외상이었고 어머니에게나 유모에게 아무런 감정 없음을 보였다. 그의 관심은 기차와 문 손잡이였고 Melanie Klein이 점차로 그와 관계 맺기를 시작할 때 그 아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불안, 죄책감, 사랑과 다른 감정들을 보여줬다.
‘The Nature and Function of Phantasy 환상의 특성과 기능’이라는 그녀의 논문에서, Susan Isaacs는 무의식적 정신 내용의 환상과 의식적 백일몽, 허구와 같은 환상간의 중요한 구별을 했다. 또한 Playing and Reality (놀이와 현실)에서 Winnicott는 ‘창조적 놀이가 꿈과 생활과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론 환상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무의식적 환상은 본능적 삶에 대한 정신적 표상이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활발하다. 예를 들어 언어에 대한 이해는 언어사용보다는 상당히 일찍 시작한다. 환상은 충동들이 일어날 때 함께 활성화되는 것이다. 무의식적 환상은 실제 대상에 대한 유아의 경험과 환상적 삶으로 계속 수정하려는 현실에 대한 각색이다. 환상적 삶이란, Hanna Segal의 말처럼 상징적 방식 즉 미술과 같은 것으로 그것 자체를 표현한다: 모든 미술은 그것 자체의 속성으로 상징적이며 그것은 미술가의 환상적 삶의 상징적 표현이다.
Susan Isaacs의 phantasy와 fantasy(환상)에 대한 정의는 현실에 대한 대비로 ‘phantasy환상'를 사용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을 명확히 하는데 중요하다. 여기서 그녀는 외부적, 물질적이고 객관적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물질적 사실로서 심리적 현실 그것 자체의 객관성을 부인한다. 또는 그것은 환상, 물질적 현실의 역동적 중요성과 그와 같은 정신적 과정의 중요성을 평가절하 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녀는 계속 언급한다. Isaacs는 어떻게 초기의 환상이 신체적 충동을 고무시키고 신체적 감각기관, 정서와 함께 내적으로 형성되어지는지를 설명했다. 유아는 욕망과 공격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거의 없고 강력하고 압도적인 바램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 신체적 행동(활동)을 이용한다. 이들 초기 환상은 언어나 의식적이고 합리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Freud(1923)와 Jones(1919)은 둘 다 얼마나 오래된 시각 기억이 언어 안에서의 사고가 되는가에 대해 논평하였다. Freud가 말하길 :
그것은 언어에서 사고보다는 무의식적 과정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 그리고 개체발생학 과 계통발생학 둘 다에서 후자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Freud 1923: 23)
Isaacs는 본능과 자아 방어기제간의 실제 활동하는 연결로 환상을 보았다 :
본능은 경계선적 심리-신체적 과정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구체적인 외부 대상을 향하는 신체적 목표를 가진다. 그것이 우리가 환상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표상이다. 인간의 행동 은 우리가 외부현실 안에서 방출하려고 시도할 수 있는 본능적 욕구들에 의해 오직 환 상을 통해서만 이끌어진다.
(Isaacs 1970: 99)
그래서 현실-사고와 이차적 사고과정이 무의식적 환상이나 일차적 사고과정을 지지하며 엉키며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 환상에 대한 이론과 무의식적 과정은 아동의 놀이와 그것으로부터 끌어내어진 추론을 관찰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Susan Isaacs는 가장놀이(make-believe)가 어떻게 자동적으로 마치 --인 것처럼 생각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내고 조성하는지를 설명하였다. 가장 놀이 중에 아동은 그의 정서적이고 지적인 현실의 요구를 구체화 할 수 있는 과거경험에서 요소들을 선택 할 것이다. 그녀가 계속 말하길:
상상놀이에서 과거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은 구성적 가설에서 미래를 일깨우고 ‘만약 에’의 결과를 발달시키는 힘을 키우는 것과 관련된 것 같다. 아이의 가장놀이는 그래서 미술가, 소설가, 시인으로 구별되는 적응적이고 창조적인 목적뿐만이 아니라 현실감과 가설적 추론을 발달시키는 것과 현실감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Isaacs 1970: 111)
우리가 앞서 살펴본 상징화에 대한 Winnicott의 성취와 기여는 내적인 현실과 외부 현실간의 중간 경험 영역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대상과 관련하여 또한 상징형성에 있어 초기 단계의 중요성을 살펴보면서 ‘변환적 대상’이라는 개념을 만듦으로써 그는 문화적 경험의 영역을 설정할 수 있고 또 ‘착각’의 필요성을 탐구할 수 있었다. 진정한 자기(true self)와 허구의 자기(false self)에 대한 그의 탐구에서 초기관계와 상징을 만들고 사용하는 능력의 중요성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는 진정한 자기가 영아의 약한 자기가 영아의 전능적 표현에 대한 어머니의 실행으로 인해 강해짐으로 어떻게 생명력을 갖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허구의 자기는 영아의 제스처를 반복적으로 만족시키는 것에 실패하거나 자신의 제스처로 대체함으로 발달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영아에게 추종감을 준다. 진정한 자기는 자발적이다. 그러한 영아는 전능함을 버릴 수 있고 놀이와 상상을 통해 전능한 창조와 통제에 대한 착각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은 우선 영아의 자발성과 환각뿐만 아니라 만들어지고 궁극적으로 발산된 외부대상인 상징의 기초가 된다. 건강한 개인은 꿈과 현실 그리고 문화적 생활의 기초간에 중재적 공간으로서 상징을 사용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허구의 자기를 발달시킨 영아는 상징을 사용하는 빈약한 능력과 빈약한 문화적 삶을 가지게 된다. Winnicott는 극단적인 부산함, 집중 못함, 외부현실로부터 충돌들을 모으고 이것들에 반응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행동적 결과는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 Marion Milner의 기여한 바를 독자에게 상기시키려 한다. 그녀는 Adrian Stokes처럼 미술가로써의 그녀의 실제경험과 함께 분석적인 통찰을 맞물리게 엮어 낼 수 있었고 또한 새롭고 본래적인 방식으로 사고가 앞으로 더 나아가게 만들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내면세계와 외면 세계에서 끊임없이 작업하고 그것들 안에서 자유롭게 옮겨갈 수 있으면 그들은 서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동화하고 통합할 수 있고 점차로 self를 성장시키고 내면의 일관성 있는 핵심을 형성할 수 있다. 현실과의 부딪침은 내면세계를 통한 활동을 하기 위해 행동을 지속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 역도 역시 일어나는데 꿈, 미술, 그리고 환상을 통해 내면세계로부터의 생겨난 새로운 동기는 현실 지향적인 행동을 이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건강하게 기능 하도록 하는 또 다른 반쪽으로 필요한 실체로 일차적 과정에 대한 긍정적인 강조를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미술과정 즉 상징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Winnicott처럼 그녀는 건강한 어머니-자녀관계와 그것의 틀간에 많은 유사를 끌어냈으며 미술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데 필요한 틀과 유사하고 물론 분석 쎄션에서의 그것과도 유사하다. 그녀는 방어적 기능으로 상징을 보고 그것을 제한하는 대신에 세상을 향한 건강한 성장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Marion Milner는 그녀의 임상적이고 미술적 경험을 통해 차이들 안에서 정체감에 주목하는 유아기적 무의식적 경향성으로의 퇴행은 앞으로의 한 발자국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1955).
‘Imagination and Reality 상상과 현실'에서 Rycroft는 두 가지의 상징화에 대한 Jones의 구별이 실은 상징의 같은 과정이 다른 방식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방어나 성장을 위해서 일차과정, 혹은 이차과정(즉 신경즉적이거나 현실적인)이 이용될 수 있는 마음의 일반적 경항성이나 능력으로서 상징에 대한 이론을 공식화했다 ; 자기표현을 위해서나 고착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요약하기를(1968: 54):
상징형성과정은 대상에 대한 일차적인 본능적 관심에 관한 활동이나 생각으로부터 대상 에 대한 덜 본능적인 생각으로 고착의 대체를 구성한다. 후자는 전자의 상징으로 기능 한다.
상징은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으로부터 대체된 감정도 옮기게 된다.
Milner와 Rycroft의 이론 둘 다 여기와 관련하여 상징을 연구한 Philosophy in a New Key 새로운 열쇠의 저자인 Suzanne Langer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논평의 일부분은 언어처럼 상징화하고 의사를 소통하려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시작된 사람들의 다양한 비현실적이고 생물적이지 않은 활동(예를 들어 종교, 미술, 주술, 꿈)을 살펴보는 것이다. 일차적 과정의 재평가와 함께 그것의 징후를 수용한다고 반드시 무의식, 꿈, 상상적 놀이 미술적 창조가 새롭게 보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Langer는 상징의 종잡을 수 없고 관념적인 형식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차 과정의 상징은 산만하고 ;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은 단어를 통해 직선적이고 개별적이고 연속적인 순서로 상징화된다. 일차 과정의 상징은 산만하지 않고 말보다는 시각적이거나 청각적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것은 구성요소들이 연속적이지 않고 일제히 상상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일반화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복잡성은 통각적인 행동의 시작에서 끝까지 마음에 남아있는 것으로 제한 받지 않는다.
언어는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녀는 마음, 즉 감정을 그린다. 생각이 전부 말로만 표현되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세계를 ‘생각의 상징이 아니라 내면적 생활의 증후’라고 설명했다. ‘사고의 상징이 아니라 내적 삶의 상징’(Langer 1963: 85). 이러한 주관적 경험의 전체 범위에서 증후만이 추상적이고 미술적인 환상의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산만하지 않은 상징의 예로 그림을 정의하면서 그녀는 그것이 언어(예를 들어 어휘)처럼 의미와 독립되지 않은 단일체로 묘사하였다. 거기엔 내용과 동떨어진 고정된 의미는 없다. ‘그것은 개인의 대상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중요한 직접적 표상이다’(Langer 1963: 96).
표상적인 상징에 대한 반응에서 마음은 위치와 태도에서 순간적인 것과 보존된 것을 읽는다. ‘느낌은 점차적으로 명료해지는 분명한 형식을 가진다’. 또는 Adrian Stokes의 말에서 ‘...그것의 형식에 의한 강조는 상상이나 환상을 구체화하는 미술형식에 대한 의사소통을 구별한다’(Stokes 1978: 266).
Rycroft는 일차 과정의 기능-산만하지 않은 일관된 상징-은 경험과 연결된 상징을 표현하고 설명하고 의사 소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차 과정의 기능은 외부적 현실을 추상적 요소로 분석하고 그것들을 범주화하고 그들 사이에 있는 관계에 대해 공적인 진술을 하는 것이다. 만약 이차과정이 분리된다면 그것은 지적방어가 될 것이고 일차과정이 분리된다면 그것은 전-논리적인 물활론적 사고가 될 것이다. Rycroft는 이들 과정과 관련하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면서, ‘정신 분석적 치료의 목표는 우선 무의식적 의식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자아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도 아니며 정신 분석적 치료는 연합되지 않은 심리적 기능간의 연결을 재확립하고 그래서 환자가 자신의 상상과 적응간의 적개심을 느끼는 것을 멈추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Rycroft 1962: 113).
이것은 우리를 다시 이 부분을 처음 시작할 때로 데리고 간다. 내면세계와 외부 세계, 상상과 현실간의 가교로써 미술치료에서 이미지를 이야기했던 그 부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