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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의회 시대
역사적으로 성경은 니케아 공의회 이전에 이미 교회 회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의 기원은 전통적으로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였다.
하지만 이후 약 300년 동안 교회는 공의회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지난 2000년 동안 모두 21번의 공의회가 카톨릭 위주로 모였다.
주요 쟁점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회 325년 니케아 회의 : 아리우스 정죄
2회 381년 제 1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아폴리나리우스주의의 정죄
3회 431년 에베소 회의: 네스토리우스파의 정죄
4회 451년 칼케돈 회의: 유티케스주의의 정죄
5회 553년 2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단성론자 정죄
6회 680-681년 제 3회 콘스탄티노플 회의: 단의지설지지하는 교황을 파문시킴
7회 787년 제 2회 니케아 회의 :성상파괴 논쟁
8회 869-870년 제 4회 콘스탄니노플 회 : 포티우스 분리문제
9회 1123년 제 1회 라테란 회의 : 성직자 서임권 논쟁
10회 1139년 제 2회 라테란 회의: 이중 교황의 분열 종식
11회 1179년 제 3회 라테란 회의 : 교황 선거법
12회 1215년 제 4회 라테란 회의 :발도파와 십자군
13회 1245년 제 1회 리용 회의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
14회 1274년 제 2회 레용 회의: 동서 교회 연합
15회 1311-1312년 빈 회의 : 템플 기사단 문제
16회 1414-1418년 콘스탄츠(현 스위스 지역) 회의 :교회의 개혁과 후스의 처형
17회 1438-1439년 펠라라/피렌체 회의 : 동방 교회와의 통합 문제
18회 1512-1517년 제 5회 라테란 회의: 교회의 개혁
19회 1545-1563년 트렌트 회의; 신교문제와 교회 개혁
20회 1869-1870년 제 1회 바티칸 회의 :교황무오설
21회 1962-1965년 제 2회 바티칸 회의 :교회와 신앙의 개혁
예루살렘 사도 회의 다음 가는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니케아 공의회는 정통적인 신학 정립에 있어서 교회사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동과 서로, 그리고 개혁으로 갈라지기 전의 교회는 에큐메니칼한 교회, 하나의 교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후 그리스도 교 안에는 여러 교파가 대립되어 각각 자기 주장을 내세워 혼란을 거듭할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하여 교회의 교리를 확립한 니케아 공의회는 에큐메니칼 공의회 였다.
이단 논쟁이 격화되고 교회가 분열되자 온 교회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가 어려워져서 어떤 공의회가 진정한 에큐메니칼 공의회 인가가 분명치 않게 되었으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첫 번째의 일곱 공의회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인정하고 그 공의회들로부터 나온 자료들과 가르침들이 교리와 신조의 기초로서 받아 들여 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공의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 325),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 에베소 공의회 (AD 431), 칼게돈 공의회 (AD 451),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553),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680~681), 제2차 니케아 공의회(AD 787)이다.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논쟁들 중에서 기독론 논쟁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 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중 예수님의 신성을 확립한 이 논쟁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Nicea, 325년 5월)에서 일단락을 맺었는데, 이 회의는 318년 아리우스 (Arius)에 의해 발생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소집 되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와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323년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지역 주교관구에서 정죄 되었으나 논쟁은 깊어만 갔다.
314년 8월 1일 도나투스 논쟁을 중재한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324년 9월에 감독 코르도바의 오씨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송 하였는데, 그는 325년 초 안디옥을 거쳐 니코메디아에 이르는 과정에서 안디옥에 머물며 안디옥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아리우스와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정죄되고 안디옥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황제는 도나투스 논쟁을 해결할 때처럼 교회의 분쟁을 중재하여 자신이 지켜온 로마 제국이 이분화 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로마 제국 전체의 감독들을 소집함으로써 최초의 세계교회 회의를 열게 하였다.
니케아 회의의 장소는 처음 앙카라로 예정 되었으나 후에 니케아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 (Cursus Publicus)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틴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고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간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은 세 개의 파로 나위어져 있었다. 가이샤라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도파, 안디옥의 루시안에게서 공부한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좌파, 그리고 정통 우파인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 및 기타 소수파로 갈라져 있었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헬라어의 300을 가리키는 T 는 십자가를 의미했고 18의 수 IH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참석자의 수는 주님의 수난의 표식과 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기에 주께서 회의에 계셨다고 하여 이회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십자가의 표식과 예수의 이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단자들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제압하는 하나의 승리였던 것이다.
회의에서는 ① 부활절의 날자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일로 주장) ②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안의 래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활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③ 성직자의 직위 ④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⑤ 분열자들과 이단지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⑥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 삼위일체 논쟁의 시작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중엽에 걸쳐 필론Philo(B.C 20 경 사람)이라는 자가 등장해서 헬라철학과 유대교라는 양대사상을 연결하려 했다.
즉 헬라철학과 유대교 사상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표현들일 뿐이며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진리명제의 문자적 의미와 우화적 해석을 내세웠다. 여기서 그는 신은 인격적이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으로 초월하시기에, 제 2신에 해당하는 중재자 개념을 제시했다.
필론은 그런 중재자로서 ‘로고스’를 말하는데 이는 지성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신에 의해 창조된 것들 중에서는 ‘로고스’가 가장 고귀하고 서열상 최상이지만 여전히 신보다는 열등하게 위치되어진다.
이처럼 플라톤과 그의 후배들에 의해서 신론이 이런 식으로 흘러오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성육신 교리가 철학적으로 딜레마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스토아 학파의 경우. 로고스 사상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서 신학 초기의 핵심적 주제였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사상을 뼈대를 제공하는 가교로 간주된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실재의 보편적 법칙’을 의미하던 로고스가 스토아 학파에서는 ‘만유에 내재하는 신적 힘’을 뜻하는데 까지 확장되므로서 신관 구성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물론 인간론이나 구원론에 있어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 스토아주의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주목하므로서 구원이란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죄에 관심하므로서 신의 은총을 통한 구원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보편적 로고스에 의한 참여 사상에 신론을 통해서 주입이 되어버리면 스토아주의 만인평등사상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기독교의 인간관과 혼합이 되어 버린다.
뿐만아니라 스토아 학파의 운명주의적 신의 섭리론은 나중에 예정론의 내용을 가득 채우게 되는 정신적 토양이 된다. 이런 신관이 초대교회에 흘러 들어오면서 환영도 받지만 동시에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신에서의 완전성과 부동성의 일치는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되어가면서 하나의 신학적 딜레마로 등장하게 된다. 지고의 신인 성부는 완전-부동하시되, 성자는 고통과 죽음까지 당했으니 성부와 성자의 일체성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에 의하면, 있음과 선함의 정비례 관계에서의 정점인 신은 있음 자체이며 그런 한에서 지고의 완전자이며 동시의 지고의 신이다. 그런데 지고의 완전성이 전능성을 의미한다면 지고의 선(善)성과 함께 신의 주요한 속성일진대, 이 세계에서 엄연히 실제로 경험되는 악의 현실과 관련하여 그 양대 속성이 어떻게 엮여야 할 것인가하는 소위 신정론(神正論) 문제가 바로 여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이 전능한 동시에 지선(至善)하다면 이 세계에 도무지 악이란 있을 수 없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신의 두 속성이 양립하는 것은 모순이므로 하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전능함에도 악을 허용할 만큼 지선하지 않거나 반대로 지고의 선이기는 하지만 악을 폐기할 만큼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는, 그야말로 신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도전 받는 상황을 상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와 연관하여 초대 교부철학과 신학의 집대성자인 어거스틴을 비롯한 플라톤의 기독교 후예들은 기꺼이 플라톤에 의해 제시된 ‘있음 자체’라는 신 개념에 호소한다. 즉 없음이 전혀 없이 있기만 한 있음이라는 의미에서 있음 자체인 신은 바로 그 있음 자체라는 본성에 의해 전능하고 동시에 지선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동일화의 바탕에서 더욱 있을수록 더욱 선한 것이어서 완전히 있기만 하는 한 있음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지선이라는 정비례 관계가 깔려 있다. 그런데 있음과 선함의 이런 정비례 관계는 거꾸로 더욱 없을수록 더욱 악한 것이어서 완전히 없음은 당연히 최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있음은 선한 것이고 없음은 악한 것인데, 악한 것은 결국 없는 것이어서 기껏해야 ‘선의 결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빛과 어두움이 관계와도 같아서 선은 빛이요 악은 어두움일진데 어두움이란 그 자체로 있는 것이라기보다 빛이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악은 실재성이 없음으로서 형이상학적 지위가 부여되지 않으니 신의 전능성과 지선성의 공존에 어떤 손상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 교부들 중에는 성부도 성자와 함께 고통을 받았다는 성부수난설과 신의 수난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 이들은 신의 완전-부동성에 위배된다는 이유도 여지없이 이단으로 찍히고 말았다.
그렇지만 사실상 신이 완전- 부동성은 헬라적 개념 결합일 뿐이며, 유대교에서도 고백되어 온 민족신으로의 여호와는 부동적이고 초월적이기만 하지 않고 지극히 내재적이고 역사개입적이어서 이 구도에서 신의 완전성은 고난받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역동성과 결합되어야 하는 개념이었다.
즉 인간과 함께 고난받을 수도 없는 부동성은 있음의 성질을 충족시킬지언정 참된 뜻에서의 완전성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오히려 미흡한 것이었다.
고난받을 가능성을 거부하는 부동성보다 고난받을 가능성까지 내포하는 역동성이 완전성을 더욱 폭넓히는 것으로 이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의 배경 속에서 신약성경의 선재언명(先在言明)을 해석하려 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이 문제의 종교사적 측면을 검토해 보자.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 및 그 분의 하강을 언급한다고 칠 때, 그 신약성경이 성경외적 신화적 표상들을 넘겨 받았으며, 또 넘겨 받았으면 오늘의 우리로서는 우리의 표상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시킬 수 있으며 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선재와 육화(肉化)라는 표상들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기상천외의 새로운 관념들이 아니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신약성경는 이러한 관념들로 그전부터 미리 주어져 있는 도식들을 재기용(再起用)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자기의 운명에 관심을 둔 영지주의적 해석은 신약성경에 말씀하시는 뜻과는 다르다. 영지주의적 관심은 구속주의 육화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본질의 기원을 깨달음(인식)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구속주가 되어 구원받는다는 데 있었다.
구속주 신화는 인간이 자기의 참된 본질을 자신에게 확보하기 위한, 말하자면 하나의 실물예시(實物例示)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 본질에서 이미 소외되어 있고 그러기에 구원이 필요로 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운명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 비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하고 특수한 운명에 대한 해석과 소개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원형이 아니다. 그노시스(영지 靈知)에 있어서와는 달리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구세주도 아니요 구원이 필요한 구세주도 아니다.
영지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유의한다면, 영지주의적 표상들은 기껏해야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표현하려는 동원된 2차적인 표상을 함께 사용한다는 것 뿐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신약성경의 기원을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찾아야 한다. 영지주의와는 달리 이 테두리 안에는 하나의 역사적 사고(思考)가 확립되어 있다.
구약성경 및 유대교의 표상에 의하면 구속사상 중요한 인물들과 사건들은 관념적으로나 혹은 묵시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이 세계 안에서 실재해 있어온 바이다.
묵시문학 계통의 표상에 의하면,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인자(人子)’라는 인물과 그의 할 일과 연결되어 있다.
지혜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의인화되어 나타나는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러난 것이며 그분의 반영이며 모상(模像)이다. 이 지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조언자로서의 구실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만물의 어미’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기독교의 교부신학은, 경전화와 교리화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제도화와 함께 전개된 교부학과 그리고 교회 밖 이교도들의 공격에서 교회를 방어하기 위한 호교론으로 구별될 수 있다.
먼저 사도 교부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초대교회의 열광적 환상들이 다소 가라앉으면서 소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일정한 규범이나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런 필요성에 의거하여 경전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는 교리와 신조의 정립도 포함되었는데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나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100년 경 사람) 등이 당시 이를 주도한 대표적 교부들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신과과 기독론의 정립에 힘을 쏟았는데 당시 이교도들과의 관계에서 신의 유일성 개념 확립을 주요한 과제로 삼았고 그 유일성 안에 절대성, 창조성, 그리고 전능성이 개념들을 포함시켰다.
특히 기독론에서는 영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가 그의 구원활동을 위해서 역사의 예수님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입장을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피력했다. “그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침묵 가운데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다”
이로써 일찍이 초대 교부시대부터 한 존재가 신(神)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이중성의 선포를 위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클레멘트가 지적하듯이, 그리스도를 신격화하게 되면 두 가지 방식의 기독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즉 로고스가 육체를 입었는가 아니면 아예 육체로 변하여 나타났는가? 이다.
나이 어린 기독교가 유대교의 범위를 넘어 헬레니즘 세계의 통속철학적 사상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이 두 정신은 충돌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후 2-3 세기에 벌어졌던 이른 바 ‘단원설(單元說), 또는 유주론(唯主論)’과의 대결은 이 충돌의 첫 조짐이었다.
단원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결합하려던 신학적 노력들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단원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되,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힘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 힘은 비위격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는가 하면 (여기에 속하는 것이 테오도투스Theodotus of Byzantium(190년 경 사람)의 이른바 동력적 단원설이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이 특별한 출현양식으로 이해하려 했다.(여기에 속하는 것이 노에투스 Noetus, 사벨리우스Sabellius, 프락세아스Praxeas의 이른바 의태적 단원설이다.)
터툴리안은 이 마지막 양태적 단원설에 ‘성부수난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왜냐하면 이 이론에 따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의 탈을 쓰고 수난을 하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대결에 이르기는 기원 후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Arius와의 논쟁과 더불어서였다.
아리우스는 기원후 260년경 리비아에서 출생했고, 오리겐의 신학적 후배인 안디옥의 루키아누스의 제자였다. 아리우스의 가르침 내지 주장은 이른바 중도(中道) 플라토니즘에 해당된다. 이 철학의 특징은 일종의 노골적인 부정신학(否定神學)에 있었다.
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고, 출산되지 않으며, 생성하지도 않고, 기원도 없으며, 불변적이다. 그러므로 아리우스에 기본적 문제는 생성하지도 않고 분여(分與)될 수도 없는 이 존재, 곧 신을 생성과 다양이 이 세상과 어떻게 연결시키고 매개하느냐에 있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아리우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로고스’개념이었다. 여기서 로고스는 일종의 제2급 신으로서 피조물 중에 첫째요, 가장 탁월한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사업의 중개자로 파악되어 있다.
따라서 로고스는 시간에서 무(無)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며 가변적으로 그르칠 수 있는 존재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진 것은 순전히 시련을 극복한 그의 도덕적 자질과 그 실적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로고스론은 구원론적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 로고스론이 하나의 우주론적 사별과 하나의 도덕으로 변모한 셈이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기독교의 헬라화를 의미하며 이 헬레니즘화는 사실 심각했다.
2세기 중엽에 순교자로 널리 알려진 유스티누스Flavius lustinus, Justin Martyr(100-165) 는 호교론자였다. 기독교의 사상을 당대의 마술적이거나 미신적인 풍조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정신적 사고를 제공해 주는 로고스 철학으로 보았다.
그는 기독교 사상은 삶에 의미에 관한 포괄적 진리를 가르칠 만큼 보편적인 것이어서 비록 무신론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이성에 따라 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까지 갈파했다.
말하지만 유스티누스와 같은 호교론자들은 기독교만을 옳고 다른 종교들은 거짓이라는 배타주의적 방식을 취한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로고스가 궁극적 기준일진대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육화했다고 선언하다 다소 포괄적인 방식을 취했다.
신론으로 말하지만, 일찍이 플라톤의 신개념의 원형이 되었던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라는 개념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구약성경에서 유래한 창조성과 전능성을 포함하는 인격성을 지닌 유일신 사상이 또 다른 축을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고정․영원․불변․부동․필연 등의 속성을 지닌 존재와 인격적으로 행동하는 신 사이의 긴장이다. 로고스의 보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전자의 요소, 즉 플라톤의 신개념의 요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경에서 이어지는 인격신 사상은 그것 없이 기독교가 성립조차 될 수 없는 절대적 요소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대가로 지불해서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이런 상황은 당대 현자들이 공격거리였고 호교론자들이 엄청난 수고를 요구하고 중대한 과제였다.
그렇다면 당시 유스티누스를 포함한 호교론자들이 해결책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사변적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존적 경험에 호소함으로써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로고스는 신의 자기계시의 원리로서, 한편 자신에 대해 자신을 나타내는 신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 신의 말씀으로서 신과 동일하지는 않으나 결코 분리될 수는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바로 여기는 헬라철학의 존재개념과 기독교의 인격신 사상 사이의 적극적 조합이 구축된다. 즉 예수님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영이 인간 예수님과 결합했다는 양자론으로써가 아니라 로고스가 친히 인간화했다는 변화론을 택함으로서 보편성과 인격성 사이의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모색했다.
교회 밖의 공격이 당대의 철학사상이나 이교적 교리에 의한 것이었다면 사실상 교회 안에서의 도전이 더 크고 위험했다는 점을 다소 주목을 요한다.
특히 영지주의의 문제에서 이런 점이 더욱 절실하다. 영지주의란 지식, 신비적 합일, 성적 결합 등을 뜻하다는 그노시스를 중시하는 일종의 혼합주의적 운동이다.
그런데 이 혼합주의 파급효과가 지대해서 헬라철학의 종교화나 유대교 사상과의 혼합을 초래했음은 물론 로마법 사상과 기독교 신학에도 스며들어갔다.
당시의 대표적 영지주의자인 마르키온은 선악이 두 영역을 철저히 구별하는 이원론을 따라 구역의 신과 신약의 신을 구별하고 이 피조세계는 악하므로 세계로부터의 초월을 뜻하는 금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로 영지주의는 영과 육 사이를 분리를 토대로 에온이라는 천상의 구원자가 육화한다는 것은 가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의 정체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인지라 기독교인들은 영지주의를 그토록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교부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거부했는가?
1세기에 교회 밖 이교도들의 공격에 대한 호교론이 로고스 개념의 적극적 수용과 변형을 통해서라면 2세기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단인 영지주의의 혼란에 대해 교부들은 그런 호교론을 더욱 체계화적으로 사용하여 신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제 로고스론의 뿌리였던 헬라의 삼신론과 같은 다신교 사상은 헬레니즘의 신비주의가 강조하는 신의 초월성에 힘입어 기독교 신학 안으로 온전히 채택될 만큼 일신론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레네우스와 이에 쌍벽을 이루는 터툴리안은 위대한 신학적 공헌을 이룩한 인물들로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지주의의 혼란에 대해 교부들은 사도들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었고 여기서 정경채택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었다.
정통파가 ‘한 하나님’을 옹호한 제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부들은 일제히 ‘한 감독’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교회의 정치 제도를 합법화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신론의 영지파적 수정론을 그 교회제도에 대한 공격이라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였다.
그러므로 영지파와 정통파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의 본성을 변론할 때에 그들은 그때마다 영적 권위에 관한 문제점을 거론하였다.
로마교회로부터 내려온 바 가장 오랜 문헌 중 하나인 로마의 감독 클레멘트(약 90-100)의 서신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 로마교회를 대변하는 위치에서 클레멘트는 위기를 맞은 고린도의 크리스챤 공동체에 서신을 보낸 것이다.
사실인즉 고린도교회의 모모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 클레멘트는 소수의 성급하고 독단적 인물들이 그들의 직위에서 축출했으며 아무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이름 있는 사람들과 어리석은 자들이 슬리로운 자들과 젊은 자들이 노인들과 대항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을 정치적 언어를 사용하여 ‘반란’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축출 당한 그 지도자들에게 본연의 권위를 회복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그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존경하며 순종해야 된다고 경고하였다.
무슨 근거로 인하여 그런 말을 했는가? 클레멘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이 홀로 만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곧 모든 것들이 순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이시며 주인이시다.
그는 곧 법을 제정하시며 반역자들을 징벌하시며 공손한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재판장이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는 실제로 어떻게 집행되는가?
이에 관하여 클레멘트는 실천적인 신학을 논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적 권위를 세상에 있는 통치자들과 지도들에게 위임하신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 그같은 지명 받은 통치자들은 누구인가?
클레멘트는 감독들과 사제들과 집사들이라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거나 머리를 숙여 교회의 지도자들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짓는다.
이같은 이론에 말려들어 클레멘트는 어떤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통하여 임명을 받은 교권자들을 불순종하는 자는 ‘사형을 받는다’고 경고하였다. 이 서신은 기독교의 역사상 극적인 순간을 표시한다는 뜻이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두 계층으로 나누는 이론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따라 교회는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라는 엄격한 질서에 따라 조직될 수 밖에 없었다.
성직자계층 안에서도 감독이나 사제이거나 집사이건 간의 각자의 위계 안에서도 각 사람의 서열을 정할 것을 클레멘트는 주장하였다. 각자는 반드시 자신의 지위에 해당되는 규칙과 계율을 언제나 준수해야 한다.
이 서신은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당혹감을 주었다. 고린도에서 발생한 논쟁에 관한 근거가 무엇이냐고 그들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어떤 종교적 관심사가 문제점이었던가?
그 서신은 그 문제점을 똑바로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서신의 저자가 그 문제점을 무시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는 마치 고린도교회를 신적 권위의 본보기로 확립할 것을 뜻했다.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인, 주님, 사령관 및 임금의 자리에서 통치하시듯이 그는 땅에서는 자기의 통치권을 교회 성직제도의 회원들에게 위임하시며 그들은 장군들이 되어 통솔하는 군대에 명령을 내린다.
또한 그가 세우신 임금들은 백성을 다스리며 법관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의장의 역할을 한다. 클레멘트가 간단하게 말하고자 하는 점은 로마 이외에 있는 크리스챤들이 제2세기 초엽에 이르러 수렵하게 된 사실을 로마의 크리스챤들은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는 것이리라
놀랄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같은 이론을 주장한 중요한 임무들은 바로 감독들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이근호 목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