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버드통신> 1
‘늪’과 ‘뭍’의 이중주:
- 미국견문록 -
고 영 섭
1. 낯선 한국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카를 ‘꿈과 기회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은 ‘전쟁을 먹고 사는 나라’로도 이해하고 있다. 아메리카 미국의 이미지에는 이상을 내포하는 ‘기회’와 현실을 외화하는 ‘전쟁’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한 때 미국은 영국 이주민과 정착민에게는 자유와 평화와 기회의 나라였지만 흑인과 노예에게는 지옥과 같았다. 그만큼 미국은 다양한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있는 나라이다. 이것은 미국 연방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1775~1783)과 남부와 북부와의 시민전쟁(1861~1865) 등을 거치며 오랫동안 만들어온 이미지들이다. 이후 미국인들은 자국 체제와 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토론과 합의를 거쳐 새로운 형식과 가치를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1805~1859)은 그의 미국문명론인 『미국의 민주주의』(1832~1833년)에서 미국을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는 ‘천 갈래 길을 숨긴 숲’”이라고 표현했다. 또 우리시대 프랑스 철학자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1948~ ) 역시 그의 미국문명론인 『아메리칸 버티고』(2005~2006)에서 “자신의 위기와 운명에 대해 이토록 근심스럽게 파고드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토록 자신의 정체성에 현기증(Vertigo)을 느끼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미국의 철학적 정치적 유산 속에는 이 도전들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소재가 존재하는 나라이기도 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처럼 ‘한 점으로 수렴되는 천 길의 숲’과 ‘천 길의 숲으로 확산되는 한 점’으로 교직된 나라가 미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앙리 레비의 갈파처럼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양한 50개의 각 주들은 저마다 독립된 하나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연방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이들 각 주들은 주법과 문화 및 풍토와 기후면에서 차이가 적지 않다. 비행기로 대서양 끝에서 중부를 ‘직항’(none stop) 혹은 ‘환승’(transformation)하여 광활한 몇 개의 나라(주)를 거쳐야 태평양 연안에 이를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부 끝 보스턴에서 서부 끝 로스엔젤레스까지 가려면 비행기로도 시차(3시간)를 포함해 약 10시간은 가야만 했다. 때문에 자동차를 끌고 서부 코스 여행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해 8월에 이곳에 온 뒤 바깥에서 보던 미국과 안쪽에서 보는 미국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했다. 이 거리와 틈새를 무화시켜가는 데에 나는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였다.
우리는 대개 한 나라를 ‘한반도’ 혹은 ‘남한’의 잣대를 가지고 이해하는 데에 익숙해 있다. 해서 종종 우리는 미국을 하나의 나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천 여 년 전에 고구려와 대발해와 같은 ‘제국’의 경험은 있어도 남한은 현재의 미국의 ‘연방’과 중국의 사회주의와 같은 경험은 해보지 못했다. 그 때문일까. 나 역시 이곳에 와서 살면서 미국이 결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국은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이 모여와 살면서 끊임없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창출한 ‘헌법’과 전 세계에서 끌어들인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이다. 나아가 ‘성조기’와 ‘애국심’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이다. 그러면서도 놀랍게도 민주주의를 꽃 피우고 있는 나라이다. 이 사실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피부에 와 닿도록 느끼고 있다. 때문에 인류가 성취한 모든 것을 종합하고 있는 미국 문명은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눈앞의 리얼한 현실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그들에게는 중국과 일본에 견주어 볼 때 한국은 매우 낯선 나라임이 분명하다.
2. 아메리카의 뿌리
아메리카는 오래 전 몽골 초원에서 건너온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이 첫 주인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존재하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아메리카로 건너온 영국의 청교도들 역시 이곳 자연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겪으면서 환경에 적응하며 아메리카를 개척해 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민주주의를 실험하며 오늘날의 미국을 형성시켜 왔다. 이들은 자국의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 세계 곳곳에까지 군대나 특사를 파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곳이라도 자국인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국민은 아메리카가 지켜내야 할 ‘미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큰 눈과 비 그리고 큰 태풍과 지진 등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각 주 정부들이 즉시 임시 공휴일을 제정하여 시민들을 적절히 보호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있다.
처음 영국에서 이곳으로 건너온 청교도들과 죄수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도움으로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 청교도들은 차츰 현지에 적응해 가면서 원주민(인디언)들의 땅과 목숨을 빼앗아갔다. 처음 청교도들과 죄인들을 신대륙에 보낸 영국은 뉴 잉글랜드 7개 주의 인디언들을 추방시키고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어 갔다. 이 때부터 미국은 원죄를 안고 출발했다. 이즈음 신대륙 식민지의 본국인 영국은 자국의 산업혁명과 중상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식민지 신대륙 사람들에게 피와 기름을 혹독하게 짜내는[苛斂誅求] 정책을 강화했다. 1754년에는 이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직물 제조도 못하게 하고 영국의 완제품만을 수입해서 쓰게 했다. 그리고 1763년에는 동부 사람들의 서부 이주를 제한하여 광대한 토지를 갖지 못하도록 통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에는 주요 수입품인 설탕과 당밀에도 세금을 과도하게 부과해 이곳 사람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식민지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7년 전쟁으로 영국 스스로가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것을 신대륙에 떠넘기려고 각종 문서, 신문, 팜플렛에 이르기까지 높은 인지세를 부과했다. 이렇게 되자 이 지역 사람들의 돈은 설탕과 당밀에 부과된 세금을 통해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시에 뉴 잉글랜드 지역은 술 생산에서조차 큰 타격을 입었다. 급기야 영국 정부는 신대륙으로 들어오는 차(茶)에다가도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이곳 사람들은 영국인처럼 일상으로 마시는 차에까지 세금을 부과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그들은 미국의 역사를 쓰기 위해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때는 1773년 12월 16일 밤이었다. 크리스마스 축제를 맞을 준비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티 파티(Tea Party)를 주도한 사무엘 아담스는 50 여명으로 청년들로 비밀결사대를 조직한 뒤 인디언 노동자로 가장하여 선박에 접근하였다. 이들은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배 2척에 뛰어올랐다. ‘자유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급진파 젊은이들은 하역작업을 기다리던 차 1,500파운드(3백 42상자)에 불을 지르거나 바다 위에 던졌다. 그리고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 이들의 항거를 지켜보던 성난 노동자 농민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본격적인 항의 데모에 합세하였다. 시위가 거세지자 주요항구의 하역작업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중상주의 강화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투쟁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3. 교육도시 보스톤
때마침 시민과 상인들 역시 “대표 없는 곳에 세금 없다”(No Taxtation without Representation)고 외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영국 의회에 참석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영국 수입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며 거세게 항의했다. 하지만 영국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영국은 이 사태를 신성한 영국 의회의 입법권에 대한 반역이라 주장하면서 탄압의 강도를 높혀 갔다. 이듬해 3월 영국 정부는 보스턴 항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바다에 버려지고 불에 타버린 찻값을 배상하라는 조례와 징벌세법을 제정하여 보복행위를 노골적으로 강화해 갔다.
1774년 미국 각 주의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자는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먼저 젊은이들은 식민 본국인 영국 정부의 과도한 세금에 반기를 들었다. 그 첫 번째 의사 표시가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 12)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새로운 나라 미국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먼저 수차례의 토론을 거쳐 1776년 7월 4일에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연방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점차 원주민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영토를 넓혀 갔다. 그 다음에는 노예제 유지 여부를 두고 남북 전쟁을 치루었다. 그리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서부 지역 7개 주를 빼앗았다. 뒤이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고 하와이를 합병하여 50개 주로 연방을 확고히 했다.
이후 서부에서 사금을 발견하여 서부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연방의 재정을 튼실히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끊임없는 토론과 합의를 거쳐 행정의 자치(주)와 정치의 통합(연방)을 담아낸 헌법을 공고히 해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럽인들조차 부러워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꽃 피워냈다. 그리고 이들은 ‘법’과 ‘돈’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호로 ‘꿈’과 ‘기회’의 제국을 만들었다. 현재 신대륙에 사는 약 3억 8백만의 인구들 대부분은 이러한 꿈과 기회를 찾아 미국에 모여든 이들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이곳의 시민이 되고자 밀입국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도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들의 살육과 추방을 통해서 이루어진 나라라는 ‘원죄’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상처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미국인들은 근대 이후 강대국인 일본과 러시아와 경쟁하면서 살아왔다. 이제 이들은 중국을 의식하면서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미국의 리더들은 동아시아의 분단국인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들 강대국 사이에서 분단의 현실을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세계 각국에서 건너와 정착한 미국인들에게는 남한(South Korea)보다 북한(North Korea)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북한의 김일성 왕조의 벼랑 끝 전술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박힌 탓인지도 모른다. 남한에서 온 나는 한국에 대해 낯선 미국인들을 보며 한국을 설명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그러나 많은 미국인들은 남북한의 분단 현실을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미국 50개 주 중 동북부의 뉴잉글랜드 7개 주에 속한 메사추세츠 주는 영국 식민지의 발상지이자 미국 역사의 뿌리이다. 이곳의 주도인 보스톤은 흔히 ‘그레이트 보스톤’(Great Boston) 혹은 ‘비씨너티 보스턴’(vicinity Boston)으로 불린다. 이것은 약 60만의 인구가 사는 보스턴 타운(Boston Town)을 둘러싼 주변(근린)의 시들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미국의 8대 도시인 비씨너티 보스턴에는 약 300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곳은 미국의 금융도시인 뉴욕과 행정도시인 워싱턴과 달리 교육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때문에 여기에는 하버드(Harvard, 1636~ )대와 엠아이티(MIT)대를 비롯한 100여개의 대학이 집중되어 있다. 시내 한복판을 흐르는 찰스 강 주변에는 60여개의 대학이 모여 있다. 해서 이곳은 미국 북동부 지역 중에서도 가장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전 세계의 유수한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교육 환경이 좋기 때문이다.
4. 하버드 대학
보스턴의 로간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오면서 나는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유럽에 온 착각에 빠졌다. 거리 곳곳에 서있는 붉은색 혹은 황토빛 벽돌 건물들은 유럽의 전통 도시의 풍경을 그려냈다. 2008년 6월에 세계불교학술대회를 개최한 조지아주도(州都) 아틀랜타 시의 에모리 대학 주변의 정경과는 너무나 달랐다. 또 최근에 다녀온 로스엔젤레스와 센프란시스코 등와 같은 서부 도시들의 분위기와 달리 유럽의 도시처럼 ‘고전적’이고 ‘역사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하버드의 캠퍼스 역시 유럽 전통 대학의 교육과 문화 시스템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내게 체감되었다.
우리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235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오면 미국은 유럽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시내 곳곳에 서 있는 2~3백 년 된 건물들과 교회들이 유럽의 역사 유적지처럼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이곳이 유럽의 어느 곳이라고 느끼게 될 정도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에 대한 이미지와 실제의 미국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했다. 그것은 밖에서 보던 미국과 안에서 보는 미국 사이의 오해의 ‘거리’였다.
세계 대학 순위에서 늘 1, 2위를 고수하고 있는 하버드대학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는 곳이다. ‘하버드(대)’의 ‘부가가치’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관광객들이 보스톤에 오면 반드시 이곳을 필수 코스로 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루에도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존 하버드 목사상 앞에 모여서 사진을 찍는다. 하버드 학생회에서도 하루에 대여섯 번씩 교정의 투어를 정례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개 한 번에 20~50여명의 관광객들이 모여 투어를 한다. 투어가 끝나면 학생들이 벗어놓은 모자에 관광객들은 자발적으로 기부를 한다. 적게는 1인당 10달러에서 많게는 50달러 이상을 넣는다. 이것은 이곳 학생들의 자부심과 관광객들의 부러움이 빚어내는 풍경이다. 미국에 좋은 대학들이 수없이 많지만 여기에서는 하버드대와 MIT 및 예일대의 자부심이 어느 곳보다 높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하버드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제일을 자랑한다. 뿌리가 된 디비니티 스쿨(신학대학)과 세계종교연구센터를 비롯해서 하버드 칼리지 내의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와 범어인도학과 그리고 케네디 스쿨(MBA)과 로우 스쿨(법과대학) 등에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있다. 100여 개가 넘는 도서관 중 1,300여만 권의 장서를 갖춘 와이드너 중앙 도서관과 150여만 권의 동양학 연구 장서를 갖춘 옌칭도서관은 전 세계 아시아학 연구를 뒷받침한다.
아시아센터에는 한국학을 비롯해서 중국학과 일본학 및 내륙 아시아와 인도학 등 여러 분야가 모여 있다. 일본학과 중국학에 뒤이어 한국학은 베트남학과 남아시아 및 내륙아시아학과 함께 연구되고 있다. 1930년대에 체결된 하버드대-연경대학의 학술교류에 의해 하버드대 연경도서관 내에 연경연구소가 개소되면서 중국학은 널리 일반화되었다. 특히 중국학은 ‘페어뱅크(교수) 재단’과 중국학 연구 재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일본학 역시 ‘라이샤워(교수) 재단’의 후원아래 대대적인 연구를 축적해 오고 있다. 반면 한국학은 ‘와그너(교수) 재단’의 성립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한국 내 몇몇 학술재단들의 지원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하버드 내 한국학 연구의 기반인 옌칭도서관의 한국관은 옌칭연구소의 한국실로부터 출발했다. 이후 한국학은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를 기반으로 하여 서두수-에드워드 와그너-데이비드 맥캔(한국문학) 교수로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카터 에카르트(한국현대사), 김선주(조선후기사), 닉 하크니스(인류학) 교수 및 마크 바잉턴 연구교수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다. 옌칭도서관 한국관은 김성하-윤충남-강미경 한국관장으로 이어지면서 한국학 자료가 축적되어 가고 있다. 현재 한국관은 희귀본 4,000여권을 포함하여 약 15만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다. 한국학 연구의 또 하나의 기반인 한국학연구소는 1981년에 동아시아 연구를 위한 페어뱅크 센터의 후원 아래 설립되었으며, 1993년에 하버드대학의 한국학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한국학 연구
한국학연구소는 하버드대 내에서 ‘한국’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연구소는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와 연계되어 있다. 연구소에서는 격주 혹은 매월 단위로 1) 코리아 콜로퀴엄, 2) 어얼리 코리아 프로젝트, 3) 김구포럼, 4) 코리안 시네마테크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정기 프로그램 이외에도 비정기적인 프로그램도 열고 있다. 한국학연구소는 한국문학 전문 연간 문예지인 『어제일러』(Azalea, 진달래)를 창간하여 현재 4호까지 간행해 오고 있다. 이 잡지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시조와 시 및 소설과 평론 등 여러 장르들을 엄선하여 영어로 번역하여 싣고 있다. 미국 내 한국문학 강의 교재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어 향후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교두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리아 콜로퀴엄은 미국 내 한국학자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한국학 관련 학자들을 초빙하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가을부터 금년 봄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호주 및 영국과 일본 등지에서 온 학자들이 발표를 했다. 주제와 분야는 대개 문학을 비롯해서 역사학과 미술사학 및 정치학과 사회학 등이 대부분이다. 지난 10월 3일에는 「시조의 길: 시적 형식의 다섯 가지 특성의 발견」(데이비드 맥캔 교수), 「퇴계학파의 구성」(조휘상 콜럼비아대 박사), 「선조의 유산: 어떻게 조선왕조 사회는 작동되었는가」(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 「개발 지원을 통한 남한 발전 경험의 전환의 도전」(김은미 이화여대 교수), 「동화의 유산: 한국에서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동시대의 오해」(마크 카프리오 일본 입정대 교수), 「1931~1945, 한국 식민지 전쟁시기의 미국 인식」(문유미 스텐포드대 교수), 「1876~1945, 한국 근대 여성사」(최혜월 호주 국립대 교수), 「빠뜨릴 수 없는 처분: 만성 적자 시기의 과잉인구와 일상생활」(켄 카와시마 토론토대 교수) 등의 주제에 대해 발표를 하였다.
또 연구소 내 한국고대사연구실이 주관하는 ‘어얼리 코리아 프로젝트’(Early Korea Project)는 한국의 동북아재단 지원을 받아 매해 두 차례의 정기 발표회를 갖는다. 지난해 8월 3일에는 「B.C. 1500 ~ A.D. 950, 정착, 가족, 사회」주제로 강봉원(경주대) 교수 외 2인의 발표가 있었다. 늦가을에는 「고구려와 수당 전쟁」이란 주제 아래 임기환(서울교대) 교수 외 5인의 발표가 있었다. 지난 겨울에는 「영산강 계곡의 철기시대 고고학」이란 주제로 최성락(목포대) 교수가 발표를 했다. 금년 봄에는 「신라와 일본 사이의 결혼동맹」(조나단 베스트, 웨스릴안대), 「고구려 벽화무덤」(전호태, 울산대) 등의 발표가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연간지 『어얼리 코리아』(Early Korea, 초기 한국) 시리즈에 게재되며 현재 3권까지 발행되었다.
그리고 한국국제교류센터가 지원하는 ‘김구 포럼’은 한국 현대사 관련 주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포럼에는 주로 한국의 전현직 관료인 및 기업인들이 발표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래 금년 상반기까지 이영조(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스코트 신더(아시아재단 한미 정치센터 소장), 한승수(전 국무총리), 오세훈(현 서울시장), 정종욱(전 주중대사), 김선철(콜롬비아대 박사), 김병준(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교수 등과 기업인인 이상완(전 삼성 LCD 대표) 사장 등이 발표를 했다. 이 ‘김구 포럼’과 함께 한국현대사 이해의 일환으로 ‘한국(남북한) 영화 관람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다.
지난해 프로그램에서는 한국의 독립영화들(베즈테리안, 뇌절개술, 사마리아, 택시블루스, 박쥐, 은하해방전선)과 식민지시대 필름들(집없는 천사, 반도의 봄, 미몽, 군용열차, 어화, 지원병, 조선해협, 병정님)을 집중적으로 상영하였다. 이와 동시에 교내 공연 및 영화 상영관인 카핀터 홀에서는 지난 12월에 홍상수 한국감독의 작품들(강원도의 힘, 오! 수정 외 8편)을 특별 상영하였다. 한국학연구소의 금년 프로그램에는 194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한국영화(서울의 휴일, 자유결혼, 청춘쌍곡선, 여사장, 우리의 향기, 미스홍당무 등)를 상영하였다. 이외에도 보스톤 미술관(MFA, Museum of Fine Arts)에서는 지난 해 12월 2일(목)부터 12일(일)까지 ‘MFA 한국영화제’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홍상수), ‘맨발의 꿈’(김태균), ‘마더’(봉준호), ‘브랜드 뉴 라이프’(퀴니 레콤트), ‘밀양’(이창동), ‘비몽’(김기덕), ‘똥파리’(양익준), ‘영화는 영화다’(장훈) 등의 영화를 상영하여 한국문화를 널리 선양하였다.
또 하버드대 방문교수(학자)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공유하기 위해 격주로 집담회를 열어왔다. 문사철학 뿐만 아니라 도서관학에서 경영학 및 전자분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공학자들의 전문적인 발표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마련했다. 지난 해 10월 초에 시작한 모임[이건창(성대), 도면회(대전대), 고영섭(동대), 전호태(울산대), 김광림(일본 니가타대), 고영진(광주대), 이상완(전 삼성 LCD사장), 이선열(서울대 박사), 박선미(서울시립대 박사), 김사인(동덕여대), 박현순(서울대 박사), 윤충남(전 하버드대옌칭도서관 한국관관장, 보스톤칼리지), 전승희(하버드대 박사), 이영준(하버드대 박사), 김남희(프로페서 미시즈 와그너, 전 하버드대 한국어강사), 김광림]은 금년 현재 17차 모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지한 질문과 답변을 거치고 나면 학교 앞 중국식당(홍공, 연경)과 태국식당(태국 퀴진) 및 베트남식당(레)과 한국식당(사부야, 코리아나)으로 자리를 옮겨 토론이 이어진다. 가끔 하버드대 앞에서 제일 오래된 ‘존 하버드 1636’ 맥주집에서 2차를 한다. 그곳에서 만든 맥주를 마시며 못다 한 얘기들을 나눈다. 학교 앞에 적당한 한국식당이 없어 아쉬웠지만 반면 각국의 식당을 오가며 식도락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6. 문학의 현장
지난 해 늦가을(11. 10)에는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의 한국작가(시인) 리딩 이벤트가 열렸다. 이것은 한국학연구소가 한 해에 한 차례씩 한국의 작가(시인)들을 초청하여 작품을 읽는 마련하는 스페셜 이벤트이다. 미국에 건너온 한국의 작가들은 미국 내 각 대학의 한국학연구소에서 마련하는 ‘작품 리딩’ 투어을 통해 미국 문단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이미 적지 않은 한국의 작가(시인)들은 미국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리딩하고 질문을 받으며 이곳 사람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이번에는 하일지 작가와 천운영 작가가 참석하여 각기 자신의 대표작인 『진술』과 『바느질』의 주요 부분을 작가의 육성으로 읽고 청중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곳에 참석한 한국학 연구 대학원생들과 미국인 참석자들은 작가들의 육성으로 작품을 몸소 체감하며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해온 작가(시인)들의 작품은 이미 한국에서 읽혀온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원작들은 한국학연구소의 연간문예지 『어제일러』에 영역되어 미국 독자들에게도 널리 읽혀오고 있다. 해서 한국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곳의 독자들은 이들 작품에 대해 크게 주목하고 있다. 이벤트가 끝나자 작가들은 학교 앞에 있는 ‘존 하버드 1636’ 맥주집으로 가서 작품과 그 주변에 담긴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며 참가자들과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또 지난 해 초겨울(12. 3-4)에는 옌칭도서관 컴먼 룸(common room)에서 ‘하버드 시조 페스티벌’(Harvard Sijo Festival)이 열렸다. 금요일에는 데이비드 맥캔(David MacCann) 교수(한국학연구소장)의 시조대회 개최에 대한 ‘환영사’에 이어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교수(브리검 영 대학)의 「시조의 매력」(The Magic of Sijo) 강의가 있었다. 정통 미국인인 맥캔 소장과 피터슨 교수가 전통 시조를 얘기하고 자작한 시조를 읽는 모습이 처음에는 좀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현대 한국인들도 가까이 하지 않는 시조와 시조창을 벽안의 미국인들이 ‘연구’하고 ‘창작’하며 ‘낭송’하고 ‘노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대 한국인들이 ‘낡은 것’이라고 멀리 했던 ‘우리 것’을 코가 큰 그들이 평생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는 모습은 커다란 울림으로 되돌아 왔다. 그 순간 “아, 언제나 남들에 의해서 겨우 우리 자신을 발견할 만큼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자기 부정 속에서만 살아왔는가?”라는 물음이 내면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이바나 이(Ivanna YI)의 황진이의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의 시조창과 그녀가 이끄는 워크 샾이 계속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텍사스에서 자란 그녀는 시를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고전 바이올니스트로 활동했다. 그녀의 시는 음악으로 만들어져 아스펜 뮤직 페스티벌과 커티스 음악연구소 및 카네기 홀에서 불려졌다. 그녀는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한국에 돌아가 정통 시조 명창에게 시조창 사사를 받은 재원이었다. 그녀는 관중들에게 황진이의 시조를 창으로 채보한 ‘청산리 벽계수야’를 우리 시조의 맛과 멋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그녀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떻리>” 평시조인 「청산리 벽계수야」를 한 소절씩 선창하며 관중들을 장인 굴곡으로 이루어진 시조창의 맛과 멋으로 이끌고 갔다.
청산 …………-- ㄴ ㅎ리, 벼 ‧‥- ㄱ 계 수 야
수 이 가 ………-ㅁ 으 ‥‥ ㄹ
자 라 ………‧ ‧ ㅇ ㅎ 마 라
일 도 창 하 ………-‥-허 며 …………… ㄴ
다 ㅎ시 오 기 ㅎ
어 ㅎ 려 워 ㅎ 라
명 ………‧ ㅇ 워 …‧ ㄹ 이 마 ……………․ ㄴ 고 ‥ㅇ 사 …… ㅎ ‥ㄴ 허 니
쉬 여 간 ………‧ 들
토요일로까지 이어진 시조대회는 3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오픈 워크 샾으로 진행되어 읽기와 창작으로 펼쳐졌다. 계속해서 저녁 8시에는 캠브리지 제일교회의 대강당에서 시조대회를 이어갔다. 약 300여명의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이 한국의 시조 페스티벌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1부의 ‘시적 파격어법’(Poetic License)순서에서는 김선호(Sun Ho Kim) 교수(보스턴대)와 베스 휘트셀(Bess Whitesel) 댄서가 열정적인 무용시극을 보여주었다. 2부의 ‘시조시들 낭송’(Reading of Sijo Poems)순서에서는 피터슨 교수가 권근의 「산촌에 밤이 드니」와 성삼문의 「이 몸이 주거가셔 무어시 될꼬하니」의 영역(Richard Rutt)시조를 낭송하였다. 3부의 ‘시조의 섬광’(Sijo Sparking)’순서에서는 맥캔 교수가 자작 시조 「설레임」(Expectant)을 영어로 낭송하였고, 버트란트 로렌스(독일계 미국인) 음악인은 백담사에 주석하는 조오현 선사의 시조 몇 수를 낭송하였다. 행사를 끝난 뒤에는 약간의 다과와 칵테일 파티가 이루어졌다. 캠브리지의 초겨울 밤을 한국 문화로 수놓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미국의 한복판에서 미국인들과 어우러져 한국의 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