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그 시간들을 후회하듯이, 후회의 언어들이 측은하다. 그 언어들이 주인을 잘못 만나 주인을 힐난하는 눈빛이다. 수천, 수만 개의 언어의 눈들이 무서움으로 다가서는 순간이다. 그 눈들에게 ‘그래도 내가 살아온 냄새, 색깔, 소리들인데 어떻게 하냐?’라고 겨우 달래가면서 내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을 건져 올린다.” 이영춘 시인이 열한 번 째 시집 <봉평 장날>을 내면서 한 겸손의 말씀이다.
시집의 표제작인 이 시에는 시인의 고향과 그곳의 가난, 그 가난과 평생을 함께한 ‘노모의 깊은 주름살’, 그리고 그 가난의 상징인 올챙이국수가 높은 밀도로 긴밀하게 그려져 있다. 그것들이 ‘저문 산 그림자 결무늬’와 연결된 하나의 이미지로 어우러졌다가 종래에는 ‘붉은 한 점 허공의 무게가’ ‘깊은 허기로 내려앉는’다. 참 숙연해지는 가난과 슬픔이다. 화려한 수사나 꾸밈이 없기에 오히려 언어의 조합이 찰지고 깊이가 더 느껴진다.
단단하고도 묵직한 시어들에 의해 가난의 슬픔 속에서도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내고 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 자연스럽게 어머니 젖을 빠는 행위처럼 그것은 이미 자연의 섭리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각인된 서정들이다. 정교한 톱니바퀴와 같이 고도로 문명화된 기계적 사회에 살아가고 있지만 고향과 어머니라는 구심력은 늘 작동되고 있으며, 그것은 변치 않은 진리이다.
시인이 자신의 지나온 흔적들을 건져 올려 쓴 시들은 고스란히 인간의 구심과 구원에 관한 것들이다. 시인의 시는 곧 그 근원을 일깨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시를 읽는 것은 흥미본위가 아니라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삶의 어느 순간 홍수처럼 범람해오는 자신의 감정을 돌이켜 보고, 이기기 힘든 고통과 슬픔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이다.
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고 세계를 둘러보는 일이기도 한데, 나와 세상을 이어주고 나를 나의 내면으로 이끄는 길이 되어준다. 때로는 오히려 슬픔을 더 깊게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게 위로가 되고 그곳에 바로 시의 힘이 있다. 이영춘 시인의 시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