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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네 가지 축복은 전적으로 내적 원리 즉, 마음과 정신의 원리를 취급한다.
그 복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보는 방법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나머지 네 개의 축복은 그런 자세의 외부적 나타남을 취급한다.
영적으로 가난하여 자비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자비를 보여준다.
그들의 죄를 슬퍼하는 자들은 마음의 깨끗함을 가지게 된다.
온유한 자는 언제나 평화를 추구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대가를 즐겨 지불한다.
자비의 개념은 전 성경을 통해 나타난다.
자비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인 선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자신의 예를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요구하신다.
그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자비의 세 가지 기본적 측면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자비의 의미 그리고 자비의 원천 그리고 자비의 실천이 그것이다.
예수님이 살며 가르치던 때는 자비가 없는 시대였다.
어느 로마의 철학자는 자비를 가리켜 ‘영혼의 질병’이라 불렀다.
그것은 약함의 최고 표시였다.
자비는 로마인들이 갖지 말아야 할 덕목이었다.
로마인들은 남자다운 용기와 엄격한 정의와 강한 훈련과 절대적 권력을 숭상하였다.
그들은 자비를 멸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자비는 약한 것이었기 때문이었고 약함은 어떤 인간의 한계보다 멸시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 역사에서 아버지는 자녀의 생사여탈권을 가졌다.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버지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면 그 아이는 살 수 있었고 엄지손가락을 내리면 그 아이는 죽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들은 종들에 대해 꼭 같은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다.
어느 때 어떤 이유든지 그들은 종을 죽여 땅에 파묻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이루어지는 낙태는 그와 같은 무자비한 자세를 반영한다.
자비를 멸시하는 사회는 잔인함을 숭상하는 사회다.
유대 종교주의자들도 자비를 보여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비는 교만하며 자기 의로 가득 차 있으며 남을 판단하는 자들의 특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대부분 청중들에게 자비를 보여준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비는 자기에게 선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사랑과 같은 범주로 이해되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자기에게 자비를 보여주는 자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었다.
그런 자세는 후에 예수님에 의해 정죄되었다.
마태복음 5:43-47에서 예수님은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축복을 이기적이며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해석해 왔다.
자비를 주는 것은 자비를 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여주는 것은 자비를 받을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비는 자기 유익을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자기 관심의 동기는 타락 이후에 인간이나 사회에서 일반적 특징이 되었다.
“만일 너희가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인기 있는 격언은 오늘날 사회에서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이기적인 기본 성격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비에 대해 자비로 되갚지 않는다.
이 사실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주님 자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자비로운 분이셨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고 장애자를 회복시켰으며 눈먼 자를 보게 하였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였으며 죽은 자를 일으켰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의 자비 없는 위선을 책망하시며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고 말씀하셨고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너 갈 길을 가라 지금 이후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외로운 자의 동료가 되셨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웠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비에 대한 응답은 무엇이었는가?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께 자비롭지 못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당신들의 선생은 왜 무가치한 인간들과 함께 어울리는가?”하고 물었다.
예수님이 자비를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무자비한 취급을 받았다.
예수님이 자비를 보여주면 보여줄수록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렸다.
자비의 궁극적 결과는 십자가였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비 없는 정부와 자비 없는 종교가 연합하여 예수님을 죽였다.
자비 없는 로마가 자비 없는 유대주의와 합하여 자비의 왕을 파멸시켰다.
“자비하다”는 말은 히브리서 2:17에서 예수님께 대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는 자비에 대한 최고의 예다.
그리스어로 된 구약인 70인 역에서 자비란 말은 하나님의 성격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헤세드’ 즉, 은혜라는 말의 번역이다.
그 기본적 의미는 고통 받는 자에게 도움을 주며 도움 없는 자를 구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동정심만 갖고 남을 도울 수 없고 또 돕기를 즐겨 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감정을 결코 말씀 하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결코 거짓 자비를 말씀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동적이며 침묵의 관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자비는 참 도움을 주며 이기심 없는 관심으로 진정한 동정심을 가진 행동을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에 속하는 백성들은 받는 자가 아니요 주는 자요 도움을 주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돕는 사람이며 정죄하는 자가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기적이며 자기 만족과 자기 의에 도취된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결코 남을 도울 수 없다.
때로 그들은 자신의 사랑 없음과 자비 없음을 종교적 의무로 정당화 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제자들이 왜 준수하지 않는가를 물어보았을 때 예수님은 마가복음 7:10-13에서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라고 대답하셨다.
위선적인 종교적 전통의 이름으로 부모를 향한 동정이 실제로 금지되었다.
자비는 사람들의 필요를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느낌의 동정이 아니라 실제로 동정을 보여주는 것이요 실제적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자비는 배고픈 자에게 식물을 주는 것이요 두려운 자들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요 거부된 자들에게 사랑을 주며 잘못한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며 외로운 자와 함께 하는 것이다.
순수한 자비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섯 번째 복은 인간에게 오는 자비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그 자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가르친다.
자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속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생과 더불어 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때만이 올바른 동기의 참된 자비를 가질 수 있다.
자비는 은혜를 통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자비는 처음 네 가지 축복의 요구를 만족시킨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자비의 길은 겸손과 회개와 항복과 거룩함의 길이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항하는 이방 왕과 타협하여 하나님의 뜻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지 않았다.
발람은 의로운 사람처럼 죽기를 원했지만 의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비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 속성과 상대적 속성을 갖고 계신다.
절대적 속성은 자신에게만 속한 것이지만 상대적 속성은 인간에게도 베풀어주신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자비다.
인간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피조물에게 자비로 임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때 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반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원천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원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6:36에서 “하나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부터 떠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조건을 주신 분을 떠나 그 조건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자비를 나눌 때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자비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명백한 방법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한 것처럼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처럼 우리는 배고픈 자를 먹이며 벗은 자를 옷 입히며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며 실제적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자비의 방법은 신약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백성들에게 자비를 원하셨다.
신명기 15:7-9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팍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 년 면제 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자비 없고 마음 없고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만날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냥 지나갈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자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29-31에서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그 절정에 자비 없는 자를 놓았다.
자비 없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거절하는 자의 특징이다.
잠언 11:17에는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고 하였다.
행복에의 길은 자비를 통해서이며 불행의 길은 잔인을 통해서다.
참으로 자비한 사람은 동물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지만 자비가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잔인하다.
잠언 12:10에는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하였다.
감람 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배고픈 자, 목 마른 자, 벗은 자, 아프고 옥에 가친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자신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5:41-45에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라고 하였다.
타락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사회에서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자비의 참된 특징은 주는 것이다.
동정을 주고 도움을 주고 시간을 주고 용서를 주고 돈을 주고 스스로를 주는 것이 참된 자비다.
왕의 자녀들은 자비하다.
자비함이 없는 자들은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자비는 심판을 이기고 승리한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13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고 하였다.
우리가 자비할 때 자비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사이클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에게 자비로우시고 복종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자비 이상의 것을 주신다.
다른 축복에서처럼 강조적 대명사 autos(they)는 자비한 자만이 자비를 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윗은 사무엘하 22:26에서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라고 하였다.
같은 진리를 야고보는 역으로 “자비 없는 자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6:14-15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설명하셨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자비가 구원을 얻게 한다는 말은 없다.
우리는 자비할 수 있기 전에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얻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공로로 자비를 주시지 않고 은혜로 자비를 주신다.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비에 대한 비유는 마태복음 18:21-35에 나타나는 빚진 자의 비유에서 잘 드러난다.
만일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자비를 받았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계속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로우실 것이다.
자비로운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준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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