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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일인이 쓴 한국인 vs 일본인-
이 이야기는 어느 독일인이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린 글인데, 일본인을 "원숭이"라고 표현했다는 문제로 일본 유학생 중 한명이 일본의 어느 게시판에 올렸답니다. 그 후 그 독일인의 사이트는 해킹당하고 작성자의 개인 정보가 유출당해 일본의 우익들로부터 테러에 가까운 협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국인 유학생도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결국 한국어로 그 사이트의 문제가 된 글을 번역해서 올린 것입니다.
<이하는 그 어느 독일인의 글입니다.>
당신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地圖를 펴기 바란다.
아마 당신이 알고 있을 中國과 日本 사이에 韓半島가 있고 그곳에 韓國이라는 나라가 보일 것이다.
이야기는 이 조그만 나라의 어느 마라토너가 中心에 있다.
이 나라는 지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武力에 의존하는 나라 사이에서 놀랍게도 2000년간 한 번도 自主性을 잃어본 적이 없는 奇跡에 가까운 나라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이 한국인들은 나라 대신에 '民族'이라는 표현을 쓰기를 좋아한다.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본 한장의 사진때문에 나는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의 굉장한 이야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1936년 히틀러 통치 시절,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그때 두 일본인이 마라톤 경기에서 1位와 3位를 차지하였다. 2位는 獨逸人이었다.
헌데 시상대에 올라간 이 두 日本人 勝利者들의 表情, 이것은 人間이 表現할 수 있는 가장 슬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불가사의한 사진.... 무엇이 이 두 勝利者들을 이런 슬픈 모습으로 施賞臺에 서게 했는가. 과거도, 그리고 현재도 가장 人間的인 儒敎라는 宗敎가 지배하는 이 나라 아니 이 民族은 이웃한 日本人(죽음을 찬미하고 성에 탐닉하는)에 대해 '영리한 원숭이'에 不過하다는 價値觀을 가지고 있으며 불행히도 이 인간적인 품위를 중시하는 自負心 强한 民族이 이 원숭이들에게 '강간' 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侵略, 즉 植民地로 떨어지고 말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시 대부분의 불행한 식민지의 청년들은 깊은 고뇌와 번민에 개인의 이상을 희생하고 말았고, '孫' 과 '南' 이라고 하는 두 청년들 역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두 청년들은 달림으로써 아마도 자신들의 울분을 표출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두 청년들은 많은 일본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달렸을 것이다.
달리는 내내 이 두 청년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들은 승리했고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祖國 한국의 太極旗 (이 국기는 대부분의 나라의 그것이 革命이라든가 鬪爭이라든가 勝利 또는 위대한 皇帝의 문양인데 비해 宇宙와 人間과 세상 모든 것의 秩序와 調和를 의미한다) 代身에핏빛 동그라미의 일장기가 있었고, 스탠드에 역시 이 핏빛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때 이 두 청년의 표정이란.... 그들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 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뉴스를 전한 일본 검열하의 한국 신문 eastasia(동아일보를 지칭하는 듯)는 이 사진 속의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만다.
이 유니크한 抵抗의 方法,,, 과연 높은 정신적인 종교 유교의 민족답지 않은가.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신문사를 廢刊시키고 만다. 이 우습고도 단순하면서 무지하기까지 한 彈壓의 方法으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침내 이 민족은 解放되고 强要당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서운 또 한 번의 戰爭을 치른 후, 한江의 奇跡(한국인들은 지구상에서 일본인들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唯一한 民族이다) 을 통해 스페인보다도 포르투갈보다도 더 强力한 經濟的 富를 이루고 만다.
그리고는 1988년 수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데 이른다. 불과 50년... 태극기조차 가슴에 달 수 없었던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開幕式, 聖火를 들고 경기장에 들어선 작고 여린 소녀 마라토너로부터 성화를 이어받은 사람은 그날 너무나도 슬프고 부끄러웠던 勝利者, '孫' (손기정)이었다.
노인이 되어버린 이 슬픈 마라토너는 성화를 손에 든 채 마치 세 살 먹은 어린애와 같이 훨훨 나는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는가!! 어느 演出家가 지시하지도 않았지만 역사란 이처럼 멋지고도 통쾌한 場面을 보여줄 수 있나 보다.
이 때 한국인 모두가 이 노인에게, 아니 어쩌면 한국인 개개인이 서로에게 얘기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극적이게도 서울올림픽 도중에 일본 선수단은 슬픈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는 히로히토 일왕의 소식... .
그런데 韓國人들은(이해할 수 없는 집념과 끈기, 그리고 暴力과 같은 單純함이 아닌) 놀라운 精神力으로 그들이 50년 전 잃어버렸던 金메달을 되찾고 만 것이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黃'이라고 하는 '孫' 老人과 너무나 흡사한 외모의 젊은 마라토너가 몬주익 언덕에서 日本과 獨逸의 선수들을 따돌리고, 마침내 더 이상 슬프지 않은, 祝祭의 월계관을 따내고 만 것이다.
경기장에 太極旗가 올라가자 이 '黃' 은 기쁨의 눈물과 함께 왼쪽 가슴에 달린 태극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는 스탠드로 달려가 비극의 마라토너 '孫' 에게 자신의 금메달을 선사하곤 깊은 예의로서 존경을 표한다... '황' 을 가슴에 포옹한 '손' 은 말이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는 人間에 대한 信賴에 限없이 자랑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인간이란, 이 한국인 아니 이 한국 민족처럼 폭력과 거짓과 다툼이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불굴의 의지로서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悲劇的인 눈물로 시작된 歷史일지라도 歡喜와 高貴한 기쁨의 눈물로 마감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상 어느 민족도 보여주지 못했던 人間과 國家와 民族의 尊嚴을 이 한국인 아니 韓國 民族이 보여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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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크게 한번 외쳐 봅시다. ☞ 대 ―― 한 민 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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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금 전 남산 산책로 두 바퀴(12키로)를 달렸습니다. 10월 말, 메지저 대회를 대비하여 훈련을 하고 나면 체력 소모가 많습니다. 그 핑게로 생맥주를 마시며 잠시 즐기다 귀가를 합니다. 그리고는 이 글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눈물이 흐르다 나중에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늘 긴장하고 사는 우리의 가련한 모습 떄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촛불 시위로 얼룩진 현실 때문이었을까요? 때론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죄라고 합니다만, 앞으로는 퇴색한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벗어나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마음은 여전합니다.
" '황' 을 가슴에 포옹한 '손' 은 말이 없다." 88 성화를 받으시고 어쩔 줄 모르는 감격에 펄펄 뛰시던 손기정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Again 1936,은 바로셀로나에서 황영조 선수가 달성했고, Again 1966,은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진출로 이루었습니다. 이제 Again 2002 를 뛰어넘는 날이 오겠지요. 엄지 선생님처럼 지나간 그 날을 잊지만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감동하여 가슴은 '뭉클', 눈시울은 '찔끔'하면서 읽었습니다.
오래전 인터넷에서 본 글 입니다만, 몇번 읽어도 감동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여린 가슴을 정확히 읽어낸 그 독일인은 누구 인지 무엇하는 사람인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과연 그때 손기정선수가 그런 마음을 가졌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한없이 부끄럽고 슬픈 얼굴을 ...'을 하고 있는 사진이 있어 예전에도 이 사진만 보면 가슴에서 징소리가 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우리 국민이 다 한 번 읽어봐야하는 귀한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예, 그 사진 저도 보았습니다. 3위를 한 남승룡선수와 시상대에서 비통하게 고개숙인 그 모습. 그리고 60년대쯤에 우리나라 어느 국회의원에 밤중에 베르린의 기념공원에 가서 손기정 선수의 소속국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꾸어 놓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발견되어 다시 원상복구 되엇지만... 그 국회의원 이름이 지금은 생각 안나네요.
아마 박영록의원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즘 집도 절도 없이 컨테이너에서 기거한다는 소식도 들은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