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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방송광우회 放送廣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우암
서울에서 경기도 김포를 지나 강화도쪽으로 가다 보면 ‘대명포구’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어항(漁港)이다. 동네사람들이 바닷바람 맞으며 잡아온 온갖 해산물을 구경하고, 먹고, 사 올 수 있는 곳이다. 그 옆에는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낸 군사지대 덕포진(德浦鎭)이 있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은밀한 공간이다. 그 옆에는 은퇴한 부부 교사가 만든 박물관이 있다. 병마로 시력을 잃은 아내는 학교 대신 여기에 재현해놓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풍금 치며 동요를 부르고, 낙천적인 삶에 대해 가르친다. 다리를 건너면 문화유적의 보고(寶庫) 강화도가 지척이요, 길을 더 이어 애기봉에 오르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북한 개풍군이 코앞에 보인다. 자,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 대명포구 기행.
만선(滿船)의 꿈
바다 건너 강화도쪽으로 해가 기운다. 왼쪽으로 새로 생긴 초지대교가 바다를 가로지르는데,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울리더니 포구에 배가 들어왔다. 출항한 지 닷새만이다. 남편과 아들들을 기다리던 가족들이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배를 바라본다. 닻이 내리고, 항구가 갑자기 부산해진다. “야, 많이도 잡았다!” 망태 속에 차곡차곡 재어놓은 꽃게들이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사를 퍼붓는다. 꽃게와 물고기들은 트럭에 실려 바로 옆에 있는 어시장으로 운반된다. 그 시장, 이렇게 생겼다.
꼴뚜기가 노닌다, 살아 있는 돌게들, 산 채로 간장 부어 게장을 만든다. 열 네 마리에 1만원, 갓 잡은 새우로 젓갈을 만들어 한 병에 파는 값이 단돈 1만원, 겨우내 토굴에 삭힌 토굴젓은 2만원, 벤댕이 젓갈에 황적어 젓갈이 한 병에 만원씩, 아침에 잡아 덜 판 생선이 한 소쿠리에 전부 만원, 어허, 황적어에 벤댕이에 괴물같은 농어에 능청맞은 장어라, 인간 뱃속으로 들어가실 생선들이 흘러넘치는구나~!
그런 곳이다. 자기 배의 이름을 걸어놓은 상점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아이 손을 잡고 놀러나온 가족들이 입맛을 다시며 구경을 한다. 값이라는 게 ‘전부 만원’ ‘전부 오천원’이라고 적혀 있다. ‘전부’라는 고기 이름이 아니라 소쿠리 하나에 담긴 물고기 전부를 말한다. 대도시에서는 몇 만 원씩 할 어족들이 거기에 가만히 앉아 있다.
사람들한테 최고 인기 품목은 새우젓과 꽃게. 갓 잡은 새우부터 햇젓, 6월에 잡은 육젓, 가을에 잡은 추젓, 토굴에서 삭힌 토굴젓까지 한병 그득하게 담아 1만원부터 파니, 입맛 떨어진 분들은 얼른 대명포구 어시장으로 가실지어다.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도 대명 어시장을 찾아볼 일이다. 펄펄 살아 있는 생동감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물론 공짜!
어시장이 있으니, 시장 옆에는 당연히 해물음식점이 널려 있다.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도 된다. 꽃게탕 하나, 광어회 하나 시켜놓고 소주 한잔 삼키고 노을 한번 바라보면 막 싸우고 채 화해하지 못한 연인들의 못된 마음도 금방 사라진다
신미양요의 공간 덕포진, 그리고 손돌목
박물관에서 길 끝으로 50m만 가면 덕포진(德浦鎭)이 나온다. 덕포진이 뭔가. 조선 선조 때 건설된 군사요새, 그리고 지금은 아늑한 주말 나들이 장소요,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이다. 또 권력자의 횡포로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전설이 스며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종 3년(1866년)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문수산성과 강화성을 공격해 많은 피해를 주고 철수하다 이곳에서 별군관 이기조가 이끄는 부대 요격을 받고 혼비백산 도주했다. 또 신미양요(1871년) 때는 강화 광성보와 함께 미국 해병대 공격을 합동 격퇴했던 곳이다. 그 군사요충지에 1989년 야외공연장, 야영장, 체력단련시설이 있는 청소년 수련장과 덕포진 전시관이 만들어져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늘어선 포대 자리는 들풀이 무성한 오솔길이 됐다. 교육박물관을 찾은 가족들이 이 오솔길을 걸으며 주말을 즐기는 풍경이 많이 보인다. 흙 밟을 기회가 드문 도시 어린이들에게 붉은 황톳길, 우리 꽃, 우리 역사를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는 썩 괜찮은 장소다.
덕포진과 강화도 사이 좁은 해협 이름이 ‘손돌목’이다. 슬픈 사연이 있는 바다다. 사연인즉,
고려 고종이 몽고군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신하던 날이었다.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뱃길을 안내했다. 강화도 광성보 앞바다를 지나자 물살이 험해지며 배가 나가지 않았다. 피난길에 있던 초조한 왕은 손돌을 몽골 첩자로 여기고 그 자리에서 처형하고 말았다. 그때 손돌이 하염없이 울며 이리 말했다. “소인은 죽사오나,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만 가면 저절로 뱃길이 트일 것이나이다.”
과연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렸다. 왕은 잘못을 깨닫고 크게 뉘우쳤다고 했다. 그 뒤로 사람들은 덕포진 앞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불렀고, 산에는 지금도 손돌이 묻힌 무덤이 남아 물길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해마다 손돌이 죽은 10월 20일쯤 큰 바람이 분다고 믿으니, 며칠 남지 않았다. 그 바람을 손돌 바람이라 한다.
애기봉
포구 기행은 끝났다. 하지만 시간이 더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공간이 있으니 바로 애기봉(愛妓峰)이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포구에서 나와 서울~강화 48번 국도로 강화쪽으로 가면 하성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애기봉 이정표가 나온다. 시골길을 한참 들어가면 아늑하기 짝이 없는 도로가 나오고, 그 끝에 검문소가 나온다. 신분증 확인 후 주차료 2000원을 내고 들어간다. 거기에 강이 있고, 그 건너에 이북 땅이 있다. 정확하게는 황해북도 개풍군이다.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오솔길이 다 보일 정도로 나무가 없는 민둥산 아래에 논이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아파트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다. 산 너머에 개성이 있다. 이 아파트들, 1980년대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애기봉에서 남조선 인민들이 자기들을 구경한다는 걸 깨닫고서 서둘러 지은 게 이 아파트들이다. 열 집 가운데 세 집은 비어 있는, 유령의 아파트다. 강에 접하는 곳에 대전차 방벽을 콘크리트로 해안선 따라 세워놓았다. 애석타, 강 하나 건너면 갈 수 있는 곳. 오로지 눈으로만 방문할 수 있는 곳, 거기다. 마침 기러기 한 쌍이 강을 건너 그리로 날아가는데, 왜 그리 섭섭한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주말 나들이는 여기에서 종료. 삶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대명포구에서, 추억 속으로 당신을 인도할 사랑의 교실, 그리고 가슴 먹먹한 강 건너 개풍까지.
::: 여행수첩
▲ 대명포구 가는 길(서울 기준):올림픽대로 끝부분인 개화로타리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쪽으로 가다가 17.6km 지점인 누산리에서 양촌 방면으로 P턴→대곶,대명 방면. ‘초지대교’ 이정표를 따라가도 된다. 강북에서 올 경우 새로 만든 신일산대교를 건너면 빠르다. 유료 다리라 2000원이 필요하지만, 교통 체증이 없다.
▲ 대명포구 앞 대명초등학교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초지대교. 건너편이 강화도다. 과욕은 금물. 오늘은 대명포구에만 집중하실 것. 강화도까지 넘봤다가는 심신이 지친다.
▲ 덕포진, 덕포진교육박물관:대명초등학교 사거리에서 석정 방면으로 우회전. 포구에서는 좌회전이다. 왼쪽에 진천정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덕포진은 메인도로가 아니라 이 식당 앞 작은 길로 들어가야 한다. 길이 하나이고, 이정표가 곳곳에 있으니 찾기는 문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