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이끈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とうじょうひでき)는 1884년 12월 30일 추운 겨울에 태어나 1948년 12월 23일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꼬박 64년을 살면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 군인이면서 독재정치가로 알려지고 있다. 1941년 10월 18일부터 1944년 7월 18일까지 일본의 제40대 총리를 독재자로 지냈으니 그는 일본 천황이상의 권좌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도조 히데키의 명예욕과 훈장
* 그의 생애
도조 히데키는 1884년 도쿄 부고지마치에서 일본제국 육군중장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敎)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이와테 현으로, 그의 두 형들은 도조가 태어나기 전에 앞으로 일으킬 동생의 험한 역사를 보고 싶지 않아 세상을 먼저 등지고 말았다. 도조는 1909년에 이토 가쓰코와 결혼하여 세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190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17기로 졸업하면서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1907년 육군 보병 중위로 승진하였다.
1915년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임관 10년 만에 육군 보병 대위가 되면서 근위 보병 제3연대 중대장이 된다. 1919년 스위스주재 무관으로 급파되고, 1920년 일본에 돌아와 소좌로 승진된다. 1921년에는 독일에 파견되며 주재한다. 도조는 1922년 일본 육군대학교의 교관을 맡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929년 중좌로 승진된다.
1920년대에 그는 군 파벌에 연루되며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그리고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과 함께 군 중심의 국가를 표방했던 파벌 통제파의 주요 구성원이 된다. 이들은 천황중심의 국가를 표방한 극단적인 파벌 황도파를 이끄는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와 대립 관계로 형성했다. 도조는 후에 나가타 데쓰잔이 사망한 이후 통제파의 1인자로서 일본 육군을 주도하게 된다.
도조는 군사 행정가이자 야전 사령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고, 빠르게 승진해 1935년에는 관동군헌병대 사령관, 1937년에는 관동군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도조에게 “가미소리(剃刀;면도날)”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는 그가 빠른 일 수행 능력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 한다.
1937년 루거우차오 (Lugouqiao , 蘆溝橋)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 정부와의 타협에 반대하고, 중앙의 통제파와 연계하여 중일 전쟁의 확대를 유도하고 나선다. 1938년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 일본 육군 대신 밑에서 육군 차관이 되었다. 이후 1940년에는 제2차 고노에 내각 밑에서 육군 대신에 임명되어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계속 연임한다. 도조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외무대신과 협력하며 일본이 삼국 동맹 조약(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에 참가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주둔을 허용하며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쟁 준비를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정부는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에서의 일본군 전면 철수를 요구하며 나선다. 이 때 고노에 내각은 도조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를 이용하여 도조는 이에 강경히 반대하면서 오히려 고노에 내각을 붕괴시키고 만다. 1941년10월 18일 기도 고이치(木戸幸一) 등의 추천으로 내각을 조직해 제4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권력 강화를 지향해 관례를 깨고 내무대신, 육군대신을 겸직한다. 이 해에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을 담은 전진훈(戦陣訓)을 만들었다. 그리고 1944년 참모총장 등을 겸임하면서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며 일본을 마음대로 흔들면서 독재로 이어간다.
도조는 이로서 내각을 완전 장악하며 군사 독재체제로 일본전역을 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고 간다. 진주만 공습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 외무대신, 1943년 문부대신, 상공대신, 군수대신을 겸임하고, 그 해 대동아회의를 개최하여 일본 주도하에 아시아 국가들의 단결을 도모하라 했다. 이 때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학도병지원제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전쟁을 계속 수행하며 전쟁 초반에는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전선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1944년 국무와 통수의 일치 강화를 주장하며 육해군 통수부 총장의 경질을 단행하고 스스로 참모총장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전쟁 후반에 이르러 점점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렸고, 1944년에는 마리아나(Mariana) 제도를 연합군에게 빼앗기자 그 책임을 지고 내각총리대신 직에서 물러났다.
*체포, 재판과 처형 그리고 사후
1945년8월 일본의 패전 후,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는 도조 히데키 체포를 명령했다. 5명의 특수임무조가 구성되었고, 이들은 도쿄 교외에 있는 도조의 집을 찾았다. 그날 1945년 9월 11일은 일본이 도쿄 만에 정박한 미군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한 9일이 지난 때였다. 이날 도조는 체포조가 집에 도착하자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총알은 심장을 벗어나 실패했으나, 도조는 자살을 도와달라며 대동한 일본인 의사에게 자살을 요청한다. 의사가 자살자를 협조하자 특수임무조 5명 중 한명인 미군 정보병 존 조셉 윌퍼스는 그에게 총을 들이대며 긴급 진료를 명령했다. 이어 곧장 다른 의사를 불러 도조를 군병원으로 이송한 후 소생시켰다.
도조는 이후 전범 재판에서 총리를 지내며 진주만 공격을 명령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병원에 잠시 입원했다.
도조는 1948년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이타가키 세이시로, 무토 아키라(武藤章), 기무라 헤이타로(木村兵太郎),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히로타 고키(広田弘毅) 등과 함께 A급 전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12월 23일0시 1분에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도 조는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으면서 불교에 귀의해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咤)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라는 유언시를 남기면서 전범이라는 것을 부인 했다. 교수형 후, 도조 히데키 등 전범들의 사체는 유족에게 반환되는 일 없이, 요코하마 시의 한 화장터로 이송되어 화장되었고, 유골은 분쇄되어 항공기에 의해 태평양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고이소 구니아키 변호사와 그 화장터 근처에 있는 한 절의 주지가 화장터 직원의 안내로 잠입해, 잔회 두는 곳에 버려진 7명의 유회와 유골의 작은 조각을 회수하였으며, 회수된 유골은 아타미의 고우아 관음(興亜観音)사에 옮겨져 숨겨졌다고 한다.
1958년 무덤을 새로 만들자는 계획이 일어났고 1960년 아이치 현의 산가네 산(三ヶ根山) 꼭대기에 이장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순국 칠사묘라하여 축조되어 유골 잔회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1966년 구 후생성(지금의 후생노동성)이 제신명표(祭神名票)를 야스쿠니 신사측에 보내 1970년 야스쿠니 신사 숭경자 대표회(靖国神社崇敬者総代会)에서 결정되었으며,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 총리를 지냈던 전범 도조 히데키를 체포한 전 미군 정보병 존 조셉 윌퍼스 주니어(맨 왼쪽)가 2013년2월 28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그가 2010년 도조 체포의 공을 인정받아 청동별 무공훈장을 받을 당시의 모습으로 체포 당시 자살을 시도한 도조의 모습과 함께 찍힌 사진을 아들 존 조셉 윌퍼스 3세가 들고 있다. AP연합뉴스
다석(多夕) 을 옮기고 풀이한 박영호는 “도철(饕餮)이란 탐욕이 많아 사람을 해치는 야차(夜叉) 같은 사람을 말한다. 세계를 정복하여 통일천하를 이루겠다는 영웅들이야말로 도철의 표본이다. 알렉산더, 칭기즈칸, 나폴레옹, 스탈린, 도오조히데끼 등이 그들이다.”(다석 류영모 명상록 343p)라고 표현했다.
도철이란 불교에서 모습이 추악하며, 사람을 해치는 잔인 혹독한 귀신이라는 뜻으로 쓰는 말인데 도조 히데키를 그 안에 포함시켰다.
그의 생애에서 나타나듯 그는 전쟁을 일으키기를 즐겨했다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아 보인다. 중일 전쟁을 일으키게 했으며 태평양 전쟁의 발원이 그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그는 일종 전쟁광이라 해야 한다.
지금 일본 국회에 도조 히데키를 추종하는 자들이 오늘 신문에 168명으로 나와 있다. 이들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해서 A급 전범들의 잔해(殘骸)를 참배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로 향했다는 뉴스다. 물론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전쟁기념관이다. 우리로 말하면 현충원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도조 히데키를 참배하는 것은 전쟁을 즐기겠다는 뜻이 다분하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는 호국신사이며 황국신사로서 제2차 세계전쟁에서 전몰한 246만 명(2001년 통계)이 안치됐으며 천황이 참배하는 특별한 대우를 한다. 이는 언제든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국민이 되라는 뜻과 같다. 결국 전쟁을 즐긴다는 뜻이 있으니 우리 현충원과는 뜻이 180도 다르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과 한국이 야스쿠니를 방문하는 것을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며 우롱하고 있다.
초당파 의원 단체인 ‘다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국회의원 168명은 23일 오전 춘계 예대제(例大祭ㆍ제사)에 맞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 모임의 오쓰지 히데히사 회장은 “어느 나라든 국회의원은 순국 영령에 참배한다”며 “(한국, 중국이) 반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한국일보;2013.4.23)
이와 비슷한 발언을 아베 신조 총리도 이미 여러 차례나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마루야마 가즈마 참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전날 회의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할 수는 없다”고 밝힌 아베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의 표현 가운데 “모호한 점이 있다”고 대답하면서 ‘침략’이란 표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아베 총리의 무라야마 담화 수정 발언이나, 각료와 의원들의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에서도 기존 태도를 정면으로 뒤집고 나올 가능성을 예고한다. 아베 정부는 28일 일본이 미국 점령체제에서 벗어난 날을 ‘주권 회복의 날’로 삼아 정부 주최의 행사를 열기로 했다. 미국 점령 체제 아래 만들어진 헌법의 뼈대인 9조를 고쳐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게 아베 총리의 생각이다. 이를 위해 아베 총리 등 우익 정치세력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반성하고 이웃나라에 사과한 기존의 역사인식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지난 10일 “자랑스러운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교과서 서술에서 주변국을 배려하지 않을 뜻을 내비쳤다.(한겨레;2013.4.13)
* 아베 일본총리의 허황된 생각에 국제적으로 일침을 줘야 한다.
아베 일본 총리는 일본인들의 정신을 제국주의 수준으로 다시 끌어올리겠다는 뜻이 다분하다. 그리고 그 당시에 있었던 일본의 위상을 그대로 이끌어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어 금년 7월에 치러질 선거에서도 자민당의 승리로 이끌겠다는 뜻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일본 일부 국민들의 생각이 과거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로 했었다는 것을 자부심으로 하고 있는 극우세력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쟁 피해로 인해 전후 세대들이 얼마나 극심한 고생을 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아베 총리가 국민들의 추앙을 언제까지 받고 갈 것인지 몰라도 실수를 단단히 하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외교부에서 유감스럽다는 말로 끝낼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 일본 아베정부를 외교적으로 타격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북한의 위협에다, 일본으로부터 멸시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협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좋을 수 있는 시기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면 일본 아베정부 외교를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일본이 생각하고 있는 국외 학자들을 모아 과거 전쟁을 합리화 시키려고 하는 데에 반해 우리의 힘을 쏟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전쟁을 합리화 시키는 것은 전몰자들의 영혼을 추스르려 하기보다 피로서 세상을 지배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이다.
일본 아베 신조의 허황된 생각을 강력히 규탄하며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했는지를 알려 더 이상 망발을 할 수 없게 일본을 응징해야 할 것이다.
태평양 바다로 도조 히데키 유골은 거의 다 함몰하고 말았는데 잔해 몇 개를 주워 신사에 안치하고 머리 숙여 빌며 전쟁을 추앙하는 저 일본의 극우파들은 언제고 깊은 수렁 속으로 깊이깊이 함몰되고 말 것이다.
평화가 이렇게 좋다는 것을 모른다면 독수리 발로 타격하고, 그도 모자라면 호랑이 발톱으로 후려처서라도 가르쳐야 분이 풀릴 것이다.
23일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서 참배하러 온 일본 국회의원들이 걸어가고 있다. 아소 다로 부총리 등 일부 각료들이 21일 참배한 데 이어, 이날 일본 국회의원 168명이 야스쿠니신사를 집단 참배했다. 도쿄/신화 뉴시스
다음은 참고가 된 원문입니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584211.html?_ns=c3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083275&mobile&categoryId=2000011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51632081&code=970100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304/h2013042321041222450.htm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8299&mobile&categoryId=200000934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2&docId=139087115&qb=64+E7KGwIO2eiOuNsO2CpA==&enc=utf8§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RUj1GF5Y7tCssZ67L1osssssstG-279708&sid=W8FiFJ3ncFEAAGpsLmAAAA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