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기상이해-72. 마야(maya)
현대 힌두교에서 마야는 단순한 환영(illusion)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베카난다의 시대부터 지금 우리 시대인 라다크리슈난에 이르기까지 상까라의 ‘마야와드’(mayavada)는 이 세상의 삶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신과 같은 실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현상 세계는 실재한다.
이 현상계(phenomenal world)는 ‘무’(nothingness)가 아니다.
이는 신에 의해 의도되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다.
오직 브라흐만 만이 창조되지 않은 신적인 실재성을 갖는다.
이는 상대적인 실재로서 세상에 대한 라다크리슈난의 견해에 암시된 것이다.
이것은 우빠디야이가 주석한 토마스주의적인 우연 존재로서 마야에 대한 해석과 아주 가깝다.
신베단타주의자들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받아들이거나, 창조주와 동등한 실재의 창조를 거부하면서, 세상에 최대한의 '실재'를 제공해주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다.
데바난단은 이 마야에 대하여 가능한 기독교적 해석을 위해 자신의 주석을 제공한다.
그는 세속사와 구속사를 비교하는 가운데, 롬8:20의 허무함(vanity, metaiotes)를 발견한다.
이 세상의 ‘허무함’과 그 세속 역사의 더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사와 구속사는 단순히 병렬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새로운 창조의 ‘끝’을 향한 구속사의 계보에 따라 인류와 사건들을 안내하면서 세상 속에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시간은 영원과 함께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두 세계의 시민으로서의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것이 실제로 마야의 세계이며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하나의 세계, 시간에 의해 조건화되고 영원으로 관통하는 세계, 인간이 노력하는 장면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측면이다.
세상의 삶의 본성은 궁극적인 실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최종적인 목적의 관점에서 이해된다.
세속적 역사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한 그것은 마야의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그 목적에 맞으면 실재와 궁극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데바난단의 공헌은 마야를 존재의 영역으로부터 의지와 목적의 영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인간의 의지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 비실재는 실재로 넘어간다.
이 마야의 해석에서 성경의 허무함은 세속 역사에서 인간의 헛되고 자기 의지적인 활동이 스스로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 속할 수 있는 통치권을 요청하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는 진실로 실재하는 것과 마야의 영역 사이에 존재론적 장벽이 없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와 허무의 세계는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순응할 때까지 변형될 수 있다.
세상에서 악한 것은 무시되거나 견디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치유될 수 있고 치유되어야 한다.
데바난단은 일시적인 현실을 넘어서는 영원한 실재라는 의미에서 궁극적인 실재를 이해한다.
마야의 영역에 있던 일시적인 현실은 실재와 동일시될 수 없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그 실재를 반영해야 한다.
실제(actual)는 실재(real)를 반영하거나 관통할 수 있으며,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더 부합할수록 실제는 더욱 뚜렷하게 실재를 반영하게 되고, 마야는 실재 안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창조의 세계는 자연적으로 간주하던 것이 이제 초자연적인 실재를 관통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 자체에 의해 조건화되며 그 속에 실재하는 것은 역동적인 현존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야의 교리는 하나님의 목적이란 맥락에서 해석됐을 때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인도기독교사상>에서 (로빈 보이드 저, 임한중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