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 후 낮잠을 자다가 깨어 차 한 잔 하며 왔다 갔다 하다가 모처럼 앉아 글을 씁니다. 아침 주일미사 후, 지난 주간 청소하고 정리한 지하 강의실 입구에 액자 몇 개를 새로 내다 걸고, 수사님이 준비해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낮잠을 잤지요. 요즘 점심만 먹으면 이렇게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다가 전화 벨소리에 깨지요.
돈암동으로 이사 온 후 바로 시작한 수도원 정리 정돈 및 청소가 1단계(?) 마무리 되었습니다. 수도원 본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내일 가구점으로부터 지하 다용도실의 교육 및 회의를 위한 탁자와 의자 몇 개를 들여놓으면 다 끝이 납니다. 앞으로는 지하 차고와 도서관을 정리하고 도배만 새로 하면 되지요.
성무일도와 미사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하는데, 대개 식사 후 바로 일을 시작합니다. 일을 하다가 보면, 어느새 점심식사 시간이지요. 새벽부터 그렇게 돌아다니면, 점심 먹고는 대개 그냥 쓰러지게 됩니다. 한 시간 또는 두 시간 그렇게 낮잠을 잔 뒤, 저녁기도 전까지 다시 일을 시작하지요. 그 날 하던 일이 덜 마무리된 때에는 저녁 먹고 나서 밤까지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수도원의 주일미사는 강론 대신 형제들이 돌아가며 “복음 나누기”나 한 주간의 “생활 나눔”을 합니다. 오늘 미사를 함께 한 형제는 저를 포함해 모두 셋이었는데, 두 형제가 이런 나눔을 하셨습니다.
한 분은 중국에서 10여년 선교를 하시다가 귀국하신 수사님이신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강원도 수도원에서 사시다가 돈암동 수도원으로 새로 이사를 온 요즈음, "문화적인 충격"을 받으신다고요. 당신이 80년대에 미국을 가셨는데, 사람들이 아직 쓸 만한 물건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버리는 것을 보시고 그런 생각이 드셨대요. 이 나라가 곧 망하겠구나! ^^
참고로 이 수사님은 우리 수도원에서도 이름난 분이십니다. 사람마다 "아무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수도원 안에서 이분의 이미지는, "부지런함(근면)"과 "가난함"으로 이름난 분이십니다. 절대 비싼 물건 안 쓰시고, 남들이 버린 물건을 얻어 쓰시거나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선호하시죠. 싼 게 비지떡(?)이라고, 그렇게 산 물건들이 가끔 쉽게 부서지거나 깨어지고 고장 나는 문제가 발생하곤 하지만, 수사님은 당신의 그런 삶의 방식을 좋아하시고 행복해 하신답니다. 한편 수사님과 함께 사는 형제들은 겨울철에 종종 보일러실 난방기 타이머 경쟁을 벌이곤 합니다. 당신은 두꺼운 솜털 바지 입고 다니시니 모르시지만, 다른 형제들은 수사님이 관리담당으로 오시면 갑자기 실내기온이 뚝! 떨어지는 체험을 해야 하거든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기름 아껴야 한다고~. 다른 회원들이 “수사님, 추워요~” 하면, 빵빵한 솜털 바지 입으신 수사님, 당신은 잘 이해가 안 가신다는 듯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시며 왈(曰), “추워? 추워?” ㅎㅎㅎ
또 수사님은 얼마나 바지런하신지! 제가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살 때 그리고 그 이전 다른 공동체에서 살 때, 함께 생활하던 형제들이 저를 평하기를 '매우' 부지런한 사람이라 했거든요. 그런 제가 두 손 들 정도랍니다. ^^ 하루 종일 안팎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며 무얼 하시든 하시거든요. 한편 그렇게 일하시는 와중에도 틈틈이 묵주기도를 하루 수 백단 씩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사이에서는 "묵주기도의 대가"라는 소문이 났지요.
이런 분이 돈암동으로 이사 오셔서 ‘문화적인 충격’을 왜 받으셨는가 하면, 제가 또 우리 수도원에서 이 방면으로 소문난 사람이거든요. 곧 "깨끗이 비워버리고, 청소하기!” 아마 이리로 이사 와서 지난 3주간 매일 청소하며 버린 가구며 쓰레기만 2.5톤 트럭으로 두 대는 족히 될 겁니다. 재활용센터, 고물상, 폐기물처리업자가 각기 시차를 두고 골고루 다녀갔지요.^^ 뭐든지 아끼고 모으는 수사님께서 이런 강적(?)을 만나셨으니, 충격 받으실 만도 하겠지요?
다른 사람이라면 버리더라도 눈치를 보며 버리거나 하나씩 슬금슬금 처분하는 지혜라도 있을 텐데, 저는 그런 게 없거든요. 성격이 한 번 시작하면 단숨에 해치워야 합니다! 한편 청소할 때 제 기준이 “단순” 그리고 “소박”인데, 때로는 너무 깨끗이(?) 치워 탈이 나기도 합니다. (버리기 전에 미리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는 하지만) 너무 열심히 청소하다 보면 간혹 내겐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겐 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또 그런 거 있잖아요? 평소 거의 쓰지 않다가도 버리고 나면 꼭 쓸 일이 생기는! 그럴 땐 형제들의 눈총을 피할 길 없지만, 그거 무서워 내가 장 못 담그랴~! 기회 닿을 때 버려버립니다. 대개 이렇게 버릴 수 있는 '기회'란 것이 짧으면 4년, 보통 10년마다 한 번 오는 기회거든요.
이처럼 미친(?) 내 청소 모습에 ‘문화적인 충격’을 받으셨다는 수사님의 생활 나눔에 이어, 오늘 주일 미사를 주례하신 신부님의 나눔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분도 지난 몇 주간 충격을 받으셨다네요! 에고~ 이번엔 또 뭔 충격일까! 한참 아래 후배를 원장으로 모시고 살면서 선배님들이 이처럼 고생이 많으십니다. 몇 주 안 되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충격들을 받으셨다니, 듣는 제가 다 민망해지더군요. 이번에는 뭔 충격인가 귀 기울이며 말씀을 들어봅니다.
당신이 몇 년간 수도원 바깥에서 특수사도직(노인병원 원목)을 하시다가 수도원에 다시 돌아왔을 때, 수도원이 청소며 정리정돈이 되어 있지 않고 너무 엉망이어서 심히 괴로우셨답니다 (전에 살던 공동체 구성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사시던 분들이 다른 일들은 한 가락들 하시는데, 청소 같은 살림살이에는 거의 문외한이었거든요. 사람마다 안 되는 것이 한두 가지씩 있잖아요!). 그것도 당신은 충격이었는데, 반대로 이번에 새로 온 구성원들은 얼마나 부지런한지 또 충격을 받으셨답니다! ‘충격’이라고 하시지만 아마 ‘깜짝’ 놀라신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사실 신부님께서 충격을 받으신 것은, 40년 이상 수도원에서 형제들과 함께 살면서도 각 형제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잘 몰랐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었죠. 그동안 당신이 몰랐던 형제들의 새롭고도 다른 모습들을 이제 비로소 발견하시는 거죠. 이를 통해 당신이 그동안 사람보다는 일에 몰두한 사람이었다는 반성과 그 충격이었습니다).
아무튼 지금 이 공동체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알겠지만, 이 변화의 원인 가운데 분명한 하나는 제 '청소'가 몰고 온 충격이라면 충격이겠지요. 지난 3주간 저의 이러한 '청소' 일이 형제들에게 던진 파문의 실체는 시간이 흐르며 그 정체가 밝혀질 것입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수도공동체가 요즈음 겪는 이러한 충격이나 변화가 나쁜 방향이 아닌 좋은 기운과 방향으로 이끌어져 가고 있다고 느껴져, 그것에 감사하고 있답니다.
2011. 2. 13.
아리랑 고개에서
첫댓글 혁신의 시작은 청소에서 시작되는 것이로군요. 어쩌면 이미 내부으로부터 시작된 변혁의 가장 단편적인 가시화가 아닐까...
저도 요즘 제 일신의 변화를 기대하며 청소도구를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
신부님! 글 읽고 저 또한 대형사고 날뻔한ㅎㅎ 결혼이듬해 청소사건이 떠오릅니다! 차분히 시간내어 글..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저도 그래요. 주변의 필요없는 물건들을 없애다가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요, 말끔하게 정리하고 나면 텅비어진 공간의 충만이라고 할까요. 그런 공간의 여백이 좋아서요. 근데 공간뿐아니라 생각에도 일에도 만남에도 늘 이런 여백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데 신부님의 글에 많이많이 공감합니다.
아리랑고개... 신부님의 첫마음이 가장 잘 녹아난 곳이 아닌던가요? 좋습니다. 예수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지는듯...뿌듯합니다.
베드로 신부님의 주변정리에 여념없이 부지런함이 그려집니다...그런데 더 쓸고닦는 부지런함의 대가 가계시군요..
돈암동 수도원의 봄기운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