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일단 필리버스터에 대해 논하기 전에 국회가 무엇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국회의원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해. 필리버스터라는 행위의 주체가 바로 국회의원이고 그 장소가 국회니까 말이야.
중학교 교과서 <사회Ⅱ>의 2단원 ‘헌법과 국가 기관’의 ‘국민의 대표 기관 국회’ 부분을 펼쳐보자. 국민 주권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의 민주 정치를 시행하는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하는 일은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돼 있어. 국회는 입법 기관으로 법률을 제정·개정하며 국가 권력의 남용을 막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행정부와 사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그런 국회를 가리켜 ‘입법부’라 칭하지.
우리가 살펴볼 필리버스터도 국회의 입법, 즉 법률의 제정·개정과 관련 있어. 의회에서 다수당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법안이나 정책을 통과시키려고 하는 경우 소수당이 합법적으로 회의 운영을 막는 것을 필리버스터라고 하거든.
다시 읽는 필리버스터
필리버스터의 유래
필리버스터는 해적선·약탈자를 뜻하는 스페인어 ‘filibustero’에서 유래했어. 1850년대 초 본국의 정책에 반대해 중남미에서 폭동과 혁명을 선동한 스페인 해적들을 최초의 ‘filibustero’라고 하는데 이들은 국가의 명령이나 허락 없이 사적 이익을 위해 멋대로 외국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어. 그래서 ‘국가 이익의 방해자’라고 불리게 됐고 훗날 의회에서 의사 진행 방해자들을 칭하는 정치 용어로 자리 잡게 돼. 1854년 미국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두 지역에서 노예제 허용을 두고 대립했던 ‘캔자스 네브래 스카법’을 의결할 때 반대파 의원들이 오랜 시간 동안 토론으로 의사 진행 을 방해한 것을 필리버스터라고 부른 것이 그 시초란다.
참, 필리버스터라는 용어는 근대에 만들어졌지만 그 뿌리는 한참 전이야. 기원전 59년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거든.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려 애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대표적이지. 같은 이름을 가진 증조부와 구분하기 위해 ‘소(小) 카토’라고 불렸지. 그는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정부의 입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기나긴 밤까지 연설한 걸로 유명해. 당시 로마 원로원은 해질녘까지 모든 일을 끝내야 하는 규정이 있어 카토의 지연 전술은 표결을 막는 데 효과적이었지. 이 방식으로 카토는 당시 세력을 키워나가려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맞아~ 너희들이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의 남자, 시저!)의 시도를 막곤 했어.
세계 각국의 필리버스터
의원내각제의 본고장인 영국 의회에서는 18세기에 필리버스터가 도입됐어. 영국 하원은 필리버스터 발언 내용이 안건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돼 있어서 의제와 무관한 발언을 하면 의장이 발언 정지를 명령할 수 있지. 때문에 영국 의회의 필리버스터 기록은 상대적으로 짧아.
대통령제의 대표주자 미국 의회에서는 20세기, 특히 1970년대 이후에 비교적 자주 필리버스터가 시행됐어. 미국 상원은 필리버스터 발언 주제나 시간에 제한이 없어서 발언 도중 성경을 읽는다거나, 셰익스피어나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전화번호부와 심지어 요리책까지 낭독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 필리버스터 세계 최장 기록(24시간 18분)도 미국이 갖고 있는 이유지! 반면 미 하원에는 필리버스터 제도가 없어. 현재는 두 나라를 비롯해 프랑스·캐나다·이탈리아·호주·뉴질랜드·일본 등에서 필리버스터가 소수파 의원들의 투쟁 수단으로 쓰이고 있지.
연설이 아닌 다른 방식의 필리버스터도 있어. 2006년 프랑스 사회당은 국영 에너지 회사의 민영화를 막기 위해 무려 13만7천449건의 개 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고 해. 이 모든 개정 안을 다 표결로 처리하려면 10년이 걸린다지? 프랑스는 법적으로 의회에서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있어 고민 끝에 낸 묘책이라나 뭐라나.
필리버스터 연설 최장 시간을 기록한 미 상원의원 스트롬 서먼드.
한걸음 더 생각하기
한국 최초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운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대한민국의 필리버스터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 국회가 필리버스터 권한을 가지고 있었어. 국내에서 가장 상징적인 필리버스터는 1964년 초선 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이 꼽혀. 당시 김 전 대통 령은 임시국회에서 무려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어.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 과정에서 1억3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한 자유민주당 김준연 의원의 체포 동의안 통과를 막기 위한 행위였지. 대한민국의 국회법상 의제와 무관한 발언을 하거나 발언이 일정 시간 멈춘 경우에는 필리버스터가 끝난 것으로 간주돼. 따라서 동료 의원의 체포 동의안이 왜 불가한가라는 하나의 주제로 5시간 동안 논증을 이어가 결국 체포를 막아낸 그의 의지는 가히 초인적이라 할 수 있어. 그 후 박정희 정권은 유신을 선포했고 1973년 필리버스터는 폐지됐어.
19대 국회 때인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국회법)이 도입되면서 필리버스터는 다시 부활했고 2016년 2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국민의당 등은 테러 방지를 위해 국가정 보원에 정보 수집·추적권을 부여하고 테러 인물을 감시·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테러방지법’에 대한 반대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어. 192시간 52분을 이어갔지만 테러방지법은 결국 통과됐단다. 그런데 말이야, 당시 법안을 반대하던 민주당이 지금 다수당이 됐어도 이 법안은 유지되고 있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필리버스터, 행위보다 정신 생각해보기
필리버스터가 존중받는 이유는 그 안에 ‘약자 보호와 소수 의견 존중’이 라는 가치를 담고 있어서야. 본회의에서 안건을 최종적으로 의결하기 전 소수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다수당과 소수당이 타협 해 법안이 합의를 통해 처리되도록 유도하는 거지.
그렇다 보니 세계 각국은 정치적 쟁점이 강한 사안에만 제한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신청하고 있어. 그런데 자유한국당은 이번에 199개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어. 지난 23일 주호영 의원이 첫 타자로 약 4시간 동안 반대 발언을 했지. 재미있는 건 다음 발언자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등판해 선거법 개정안의 당위성을 4시간 31분 동안 설명했다 는거야. 대량의 법안에 대한 반대 필리버스터 신청, 반대를 반대하는 여당 의원의 필리버스터까지 꽤 이례적인 상황이 이어진 셈이야. 2016년과 달리 법안 상정 저지를 위한 자유한국당의 무리수라는 비판도 불거졌지만, 어찌됐건 이번 상황은 합법적인 국회의 의사 진행 과정이야. 하지만 그 안에 필리버스터의 취지를 제대로 담아냈는지, 상정한 안건에 대해 찬 반 토론을 진행하는 국회의원들의 논리가 타당한지, 공익에 무엇이 더 부합하는지 등을 시민인 우리도 돌아봐야 해.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국회가 진정한 필리버스터 정신을 실천하며 이 땅의 정치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길 바라. 이를 위해선 우리 모두가 깨어 있는, 성숙한 민주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