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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스크랩 中國 내 高句麗 山城 및 古墳 유적 조사 현황
alive(한선) 추천 0 조회 61 08.11.14 10: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中國 내 高句麗 山城 및 古墳 유적 조사 현황

                                         徐 吉洙(서경대 교수, 고구려연구소 소장)

      차례

Ⅰ. 조사경위

Ⅱ. 고구려 산성의 현황

   1. 요령성의 고구려 산성

   2. 길림성의 고구려 산성

Ⅲ. 고구려 고분의 현황

   1. 집안의 고구려 고분

   2. 집안의 벽화무덤

   3. 환인의 고구려 고분

   4. 환인의 벽화무덤

Ⅳ. 앞으로의 조사 및 관리 방향

   1.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2. 한국의 고구려사 인식

   3. 앞으로의 조사 및 관리 방향

 

I.  조사 경위

 

중국 내 고구려의 유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분포를를 조사하고, 이어서 관계되는 문헌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지를 가 볼 수 없었던 한국의 학자들은 이 방면에 대한 연구가 불가능했었고 현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입수하기도 어려웠다. 몇 년 전부터 중국에 대한 여행이 가능해 지자 필자는 우선 중국 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의 분포 상황부터 조사하기로 마음먹었다.

 

1986년 처음으로 중국에 입국하였으나 여러가지 제약조건 때문에 고구려 유적에 접근이 불가능 하였다. 필자가 고구려 유적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3년 뒤인 1989년이었다. 그 뒤 6년 동안 9차례에 걸쳐 현지를 답사할 수 이었는데 특히 1993년 한 학기 동안 교환교수로 가 있었던 기간 동안 집중적인 답사가 가능하였다. 답사과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제1차 답사 (1989년 11월)

 

   장춘 길림성 박물관, 고고연구소, 연변대학 등을 방문하고 자료수집

 

2. 제2차 답사 (1990년 9월)

   장춘, 연길 등지에서 자료수집한 뒤 백두산을 거쳐 집안의 고구려 유물 조사

  집안 박물관, 장군총, 광개토태왕비, 五盔墓 5호 벽화고분, 국내성, 산성하 무덥떼, 장천 무덤떼 등.

   특히, 이때 산성자산성(고구려 丸都산성)의 동쪽 정상을 올라 처음으로 완벽한 산성을 조사함

 

3. 제3차 답사 (1991년 8월)

 

   선박편으로 大連 도착 → 瀋陽을 거쳐 丹東까지 요동반도 기초 조사 → 단동에서 桓仁 도착. 아직 미개방 지역이기 때문에 활동이 어려워 간신히 고구려 첫 수도 紇升骨城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五女산성만 답사 → 두번째 집안을 방문하고 전체적인 유적 분포를 파악하고, 특히 산성하 묘군을 집중적으로 답사 → 通化, 臨江을 거쳐 장백현 조선족 자치현의 발해 탑 조사, 남쪽 루트를 따라 백두산 등정(이 때 1990년 새로 세운 국경 定界石을 확인함) → 松江河, 漫江을 거처 서쪽 루트를 따라 백두산 등정 → 二道白河에서 북쪽 루트를 따라 백두산 등정 → 延吉, 圖們 거쳐 敦化에서 발해 유적 답사 → 吉林市 박물관, 龍潭山 고구려 산성 답사 → 장춘 길림성 박물관

 

4. 제4차 답사 (1993년 1학기)

  1. 崇德 → 陵源 → 喀左 → 牛河梁 등 大陵河 유역의 紅山文化 유적과 瀋陽의 新樂文化 유적 답사

   2. 장춘 → 연길 → 開山屯 船口산성 → 琿春 薩其산성(고구려 柵城) → 발해의 동경성(八連城) → 慶信 水流峯산성 → 旺靑縣

   3. 장춘 → 심양 → 蘇家屯 塔山산성(고구려 蓋牟城) → 燈塔 燕州城(고구려 白巖城) → 遼陽 (고구려 遼東城) → 鞍山 → 千山 古城 → 海城 英城子산성(고구려 安市城) → 靑石嶺 고려성산성(고구려 建安城) → 金州 大黑山산성(고구려 卑沙城) → 岫巖 娘娘산성(고구려 積利城) → 단동 九連城 → 鳳城 鳳凰산성(고구려 烏骨城 또는 안시성) → 通元堡 山城溝산성 → 本溪小市 下堡산성

   4. 심양 → 제2차 桓仁 답사 (오녀산성 초기 성벽 발견, 장군묘, 下古城子 등) → 木盂子 高儉地산성 → 紅廟子鄕 黑溝산성 → 響水河子鄕 轉水湖산성 → 木奇 西三道關 → 木奇城  → 上夾河鄕 五龍산성(고구려 南夾城) → 淸原 南山성(고구려 蒼巖城) → 英額門鄕 山城子산성(고구려 北置城) → 高麗營子村 鐵背산성(고구려 南蘇城) → 撫順市 勞動公園(고구려 玄菟城) → 撫順市 高爾산성(고구려 新城)

   5. 심양  → 催陣堡 산성 → 최진보 靑龍산성 → 威遠堡 龍潭산성 → 凉泉 성자산산성( 고구려 夫餘城 또는 屑夫婁城) → 山城鎭 성자산산성 → 遼源 城子山산성‧龍首山산성‧農工山산성

   6. 장춘 → 柳河 羅通산성 → 盤石 城子溝산성‧紙房溝산성 → 길림 용담산성, 東團山, 西團山, 帽兀山

   7. 장춘 → 通化 自安산성 → 세번째 집안 답사: 환도산성 종주, 광개토태왕능, 國東大穴, 장천 무덤떼, 禹山下 무덤떼(씨름무덤, 춤무덤, 사신무덤, 오회무덤), 東台子 옛터 등 → 고구려 南路 →財源 覇王朝산성 

   8. 장춘 → 農安 부여성 → 하르빈 장수왕 후손 방문 → 길림 → 연길

   9. 장춘 → 네번째 집안 답사 → 통화 → 다섯번째 백두산 등정(북쪽 루트)

5. 제5차 답사 (1994년 2월)

   연길 → 장춘 → 네번째 집안 답사 → 세번째 환인 답사 (上古城子, 下古城子 중점) → 上夾河縣 五龍산성 → 철령현 최진보향 李如松 후손 방문 → 得利寺鄕 용담산성‧馬圈子산성 → 瓦房店市 嵐崓산성 → 太陽升鄕 고려성산산성 - 大石橋 馬圈子 산성 → 심양

6. 제6차 답사 (1994년 6월)

   네번째 환인 답사 → 沙尖子鄕  城牆砬子산성 → 다섯번째 집안 답사

7. 제7차 답사 (1994년 7월)

   여섯번째 집안 답사: 국내성, 세칸무덤, 춤무덤, 씨름무덤, 五盔墓의 4호‧5호, 四神무덤, 장천1호, 牟頭婁무덤, 馬槽무덤

8. 제8차 답사 (1994년 8월)

   燈塔 岩州城(白岩城) → 本溪 邊牛山城 → 新賓 太子城山城 → 新賓 杉松山城 → 다섯번째 桓仁 답사 → 寬甸 高力城山 山城 → 鳳城 鳳凰山 山城 → 岫岩 松樹溝山 山城 → 岫岩 老城溝山 山城 → 岫岩 南溝山城 → 岫岩 古城山 山城 → 岫岩 馬圈子山 山城 → 莊河 旋城山 山城 → 莊河城山 山城 → 新金 馬屯 高麗城山 山城 → 新金 吳姑城山 山城 → 新金 老白山 山城 → 瓦房店 嵐崓山 山城 → 瓦房店 高麗城山 山城 → 瓦房店 得利寺山 山城 → 瓦房店 馬圈子山 山城 → 蓋縣 奮東山城 → 蓋縣 城子溝山城 → 蓋縣 煙筒山 山城 → 蓋縣 赤山 山城 → 蓋縣 高麗城山山城

9. 제9차 답사 (1994년 10월)

蛟河 橫道子山城 → 敦化 城山子山城 → 安圖 五峰山城 → 安圖 城門山山城 → 安圖 五虎山山城 → 龍井

 

城子溝山城 → 龍井 城子山山城 → 土城屯 古城 → 中坪古城 → 延吉 興安城墻 → 汪淸 廣興山城 → 汪淸 東四方臺山城 → 圖門 滿臺城山城 → 琿春 亭岩山城 → 琿春 薩其山山城 → 溫特赫部城‧裴優城 → 石頭河子古城 → 琿春 乾溝子山城 → 琿春 城墻砬子山城 → 琿春 通肯山城 → 營城子古城 → 龍井 養參峰山城 → 龍井 淸水山城 → 龍井 朝東山城 → 和龍 楊木頂子山城 → 和龍 八家子山城 → 和龍 三層嶺山城 → 和龍 松月山城 → 靖宇 楡樹川山城 → 大方頂子城址 → 集安(關馬墻山城, 採石場) → 일곱번째 集安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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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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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구려 산성

우선 일제 시대 때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한 기록, 북한 학자들의 기록, 중국 학자들의 기록을 모두 모아 보니 압록강 이북에 약 150~160개의 고구려 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중복된 것도 있겠지만 그것을 자세히 밝힐 자료가 부족했다. 일본인들의 연구나 북한의 연구 결과는 그것을 가지고 전체의 분포를 보기는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지난 몇 십년간 중국 학자들이 해낸 연구 결과가 중심이 되었다.

필자는 우선 고구려 성이라고 주장되는 성은 일단 모두 현지를 답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1990년 이후 150~160개의 성 가운데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100 여 개의 산성을 뽑아 답사한 결과 지금까지 103개의 성을 답사할 수 있었다.

본 고에서는 요령성과 길림성을 나누어 답사한 성들을 주로 강의 줄기에 따라 분류해 보고, 각 성의 현황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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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 1.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산성, 2.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성, 3.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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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성의 현황.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성에 관한 논문 가운데서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것은 1986년 중국 고고학회 제5차년회논문집에 요령성 박물관의 진대위(陳大爲)씨가 발표한 「요령 고구려 산성 초탐(初探)」이다. 진대위 씨에 따르면 현재 요령성 안에 87개의 고구려 산성이 있다고 한다. 진 씨는 87개의 규모에 따라 대‧중‧소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1) 대형 산성(둘레 2 Km 정도): 27 곳. 주로 요하(遼河) 동쪽 가의 산간 지역과 평원이 맞닿는 곳에 많다. 비교적 전형적인 것은 와방점시의 “용담산성”과 “남고산성”, 개현(蓋縣)의 “고려성”, 해성(海城)의 “영성자성”, 심양 진상둔(陳相屯)의 “탑산산성”, 무순시의 “고이산성”, 철령의 “최진보산성”, 개원의 “위원보(威遠堡)산성” 등이다.

2) 중형 산성(1~2 Km): 17 곳.  주로 요하 동쪽의 비교적 큰 지류 사이에 있다.

   벽류하(碧流河) 유역 - 적산산성, 성산산성

   영나하(英那河) 유역 - 선성산(旋城山)산성

   대양하(大洋河) 유역 - 삼성산, 낭낭성

   애하(靉河)유역 - 초하구(草河口)산성, 통원보(通遠堡)산성

   포석하(蒲石河) 유역 - 관수(灌水)산성

   태자하(太子河) 유역 - 암주성, 삼송(杉松)산성

   자하(紫河) 유역 - 청룡산산성

3) 소형 산성(200~1000 m): 37 곳. 대‧중형 산성의 주위에 분포되어 있다.

한편 孫進己 등이 지은 「東北歷史地理」에는 요령성에 있는 고구려 산성 54개를 정리하여 놓았다. 진 씨의 논문처럼 자세하지는 않지만 소재지가 분명하게 밝혀져 현지 답사하는데 도움이 컸다.

필자는 위에서 본 자료들을 참고 삼아 필자가 직접 답사한 산성의 현황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환인(桓仁) 주위의 고구려 산성 (정리번호 1~6번)

 

환인현 문물지에는 환인에 7개의 산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4개의 성을 답사하였다. 오녀산성은 높고 험준한 산세를 잘 이용하었기 때문에 남‧서‧북쪽은자연히 요새를 이루고 남동쪽 일부와 동쪽에만 성벽이 쌓여 있다. 가장 높은 곳은 6 미터 30 센치이고 밑돌 가운데 가장 긴 것은 1 미터 90센치나 되었다. 오녀산성이 전쟁 때 쓰는 산성인데 반해 평지성이라고 보는 하고성자성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집들이 꽉 들어찬 마을이 되어 버렸다. 고검지(高儉地)산성은 주위의 마을에서 돌을 허물어 간 곳이 많지만 아직도 3~4미터 정도의 높은 성벽이 남아 있다. 사첨자향에 있는 산성의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한‧두군데 2미터 정도만 남아 있다.

한편 신빈의 흑구산성과 전수호 산성은 부이강 가에서 환인 오녀산성을 통해 집안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는 중요한 성들인데 산꼭대기의 분지에 있는 흑구산성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고 전수호산성은 훼손 상태가 심하다.

 

2. 소자하(蘇子河) → 혼하(渾河)유역의 고구려 산성 (정리번호 7~15번)

 

학자들이 고구려 목저성(木底城)이라고 비정하는 목기성(木奇城)은 목기 옆을 흐르는 소자하를 건너 평지에 있는데 성벽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으나 고구려 때의 기왓조각들을 쉽게 주을 수 있다.

목기에서 남잡목(南雜木)으로 가는 국도 상에 일도관‧이도관‧삼도관(三道關)이라는 3개의 차단성이 있는데 이도관‧삼도관의 유적이 뚜렷이 나타난다. 현지에서 “설인귀의 동정(東征)” 때 고구려에서 쌓은 것이라는 증언이 많았다.

일도관과 이도관 사이에 있는 오룡산성(五龍山城)은 토석혼축성으로 성벽과 성벽 위의 길(현지에서는 말 타고 다닌 마도라고 한다)이 잘 남아 있다.

 

「동북역사지리」에서는 혼하 주변에 있는 여섯 성을 고구려 때의 성으로 비정하였다. 즉 산성자산성=북치성, 남산성산성=청암성, 철배산성=남협성, 노동공원=현토성, 고이산산성=신성, 탑산산성=개모성이다.

영액문향의 산성자산성은 토성으로 지금도 산성자리가 뚜렷하나 그다지 큰 산성이 아니고, 남산성산성은 오녀산성 처럼 4면이 모두 절벽인데 성을 쌓은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철배산성은 대화방(大伙房)저수지 동쪽 끝의 혼하와 소자하가 갈라지는 삼각주에 있다.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다. 고이산산성은 무순시 북쪽에 있는데 철령가는 국도가 바로 이 성 안을 통과한다. 무순 시내에 있는 노동공원은 원래 현토성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고구려의 기왓장들이 길에서 발견될 정도이다. 개모성이라는 탑산산성은 토성인데다 채석장이 되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3. 태자하 유역의 고구려 산성(정리 번호 16~23번)

 

환인을 떠나 고검지(高儉地)산성을 지나 평정산(平頂山)을 넘으면 태자하가 시작된다. 태자하를 따라 하협하(下夾河)에 다다르면 강 남쪽에 태자성산성이 있는데, 북쪽의 삼송산성(杉松山城)과 함께 마치 평지성과 산성처럼 태자성은 강가의 낮은 언덕에 있고 삼송산성은 깊은 산골에 있다. 두 성 모두 성벽이 남아 있는데 특히 삼송산성에는 고구려 때의 석축법을 알 수 있을 만큼 2미터 이상의 석축이 잘 남아 있다.

북풍성(北豊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본계 소시(小市)의 하보(下堡)산성은 성벽도 빈약하고 규모도 크지 않았고 마미주(磨米州)로 비정되는 변우산성은 토성으로 성벽의 흔적은 뚜렷하다.

 

태자하 유역에서 가장 튼튼하고 역사서에도 자주 나오는 백암성이라고 비정되는 연주성과 요양시의 요동성은 크게 대조를 보이고 있다. 요동성은 흔적조차도 없이 도시가 되어 버려 박물관에 가서야 백탑의 동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백암성은 압록강 이북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견고하고 웅장한 모습을 아직도 보여 주고 있다.

 

요동성에서 조금 내려가면 안산(鞍山)이 있고 그 동남쪽에 천산이 있다. 천산에는 당나라 때의 옛성이 있는데 설인귀가 그 성을 점령한 얘기가 전해 온다. 현재 옛 성벽으로 성을 재현하여 관광지를 만들었는데, 점령하기 전에는 마땅히 고구려 산성이었을 것이다. 태자하와 혼하가 합해지는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해성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조금 가면 안시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영성자성이 나온다. 토성이지만 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정문인 서문은 그 높이가 상당히 높은데 현지인 들의 말에 따르면 다시 쌓은 것이라고 한다.

 

4. 애하(靉河)유역의 고구려 산성(정리 번호 24~28번)

 

애하의 상류인 관수향(灌水鄕)에 고력성(高力城)이 있는데 고력(高力)은 고려(高麗)와 중국어 발음이 같기때문에 지도에서 바꾼 것으로 고려성, 즉 고구려 성이다. 현지에서는 마을 이름을 따 고대보(高臺堡)산성이라고 한다. 산성 서남쪽에 문이 있는데 무너졌지만 흔적이 뚜렷하고 산정에 석성이 약간 남아 있지만 주민들이 돌을 굴려다 집을 지어 버려 거의 없어졌다.

애하와 초하(草河)가 만나는 곳에 봉황성이 있는데 만주에서 가장 큰 산성이다. 아직도 6~9 미터의 성곽이 남아 있다. 초하 가에 두 개의 산성이 있다. 초하구진의 이가보(李家堡)산성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나무가 많이 자라 찾기 힘들지만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통원보진의 산성구산성은 규모도 작고 보존 상태도 좋지 않은 편이다.

한편 단동 동쪽 구련성향에 있는 애하첨(靉河尖)성터는 표지판 이외에는 성벽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5. 대양하(大洋河)유역의 고구려 산성(29~33번)

대양하 유역에는 특히 수암(岫岩)을 중심으로 고구려 산성이 많다. 대양하의 상류인 황화전(黃花甸) 근방에 보고된 4개의 산성 가운데 진가보(陳家堡)에 있는 성은 찾지 못하고 노와촌(老窩村), 영천촌, 곽가령촌에 있는 세 성만 답사하였다.

노와촌의 산성은 현지에서 고려산성이라고 부르는데 동네 사람들이 돌을 가져다가 집을 짓느라 모두 허물어 버려 성벽을 찾기 힘들다. 영천촌의 산성도 현지인 들이 고려성이라고 부르는데 원형이 상당히 많이 남은 토성이다. 곽가령촌의 고려성은 초자하(哨子河)라는 지류가 대양하로 흘러들어 가는 삼각주에 있다. 이곳도 마을이 가까워 돌멩이를 주어다 집을 지어 흔적만 남아 있다.

대양하 유역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은 낭낭산성이다. 「동북역사지리」에서는 이곳을 적리성이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관리인까지 있어 대단히 잘 보존되어 있다.

 

6. 장하(莊河)유역의 고구려 산성(34 번)

평산향(平山鄕)에 선성산(旋城山) 산성이 있는데 관광지를 개발하느라 모두 새로 쌓았다. 고증을 거치지 않고 성벽을 들여서 쌓아 진짜 옛 성터가 해자처럼 남아 있다.

 

7. 벽류하(碧流河)유역의 고구려 산성(35~39)

벽류하 상류에 있는 두 개의 산성이 있다. 나둔향(羅屯鄕)에 있는 적산산성은 험한 계곡을 막은 정문에 무너진 돌담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지형 지세가 험하고 규모가 커, 큰 성이었을 것으로 보였다. 십자가향(什子街鄕)의 고려산성은 둘레가 약 400여 미터로 작은 성이지만 높이 3미터가 넘는 석성의 성벽들이 잘 남아 있다.

벽류하가 바다로 흘러들어 가기 전 성산 부근에 대련과 난동 사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산(성산 참조)이 있으며, 그 서쪽에 있는 묵반향(墨盤鄕)의 고려산성은 꼭대기의 묘 빼놓고는 인공으로 쌓은 성이 없고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 특이했다.

성자탄(城子坦) 서쪽에 있는 성대향(星臺鄕)도 벽류하 유역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성산과 쌍벽을 이룰 만큼 규모도 크고 튼튼한 오고산성이 있다(오고산성 참조).

 

7. 복주하(復州河)유역의 고구려 산성(40~44번)

원대향(元臺鄕)에 있는 노백산성은 규모가 작아 보(堡)에 행당하고, 복주하 상류에서 큰 성은 득리사 산성과 남고점(嵐崓店)산성이다. 득리사는 말안장형의 산성이고 남고점을 산 정상을 둘러싼 산보형(山堡型)이다. 남고점산성은 군사(공군과 해군의 레이다 기지)기지 지을 때 지하 벙커 만들며 돌들을 다 써 버려 성벽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현지 주민들의 증언이다. 득리사의 마권자산성은 득리사산성을 올려다보는 낮은 산에 쌓았는데 돌로 쌓은 흔적만 남아 있다.

태양승(太陽升)의 고려산성은 성벽을 쌓은 곳은 극히 일부이고 마치 높은 산성을 쌓은 것처럼 불쑥 올라온 자연 지세를 잘 이용하였다.

 

8. 수군의 첫 공격지 대흑산산성(45번)

대련에서 조금 위로 올라간 금현(金縣)에 있는 대흑산산성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비사성(卑沙城)이라고 비정한다. 비사성은 중국이 수로를 통해 요동반도를 쳐들어 올 때 맨 먼저 맞딱드린 성이기 때문에 성도 견고했지만 공격 또한 집요했다. 대흑산산성은 몇 년 전까지 군사 보호구역이라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정상의 성과 점장대를 쌓고 골짜기의 관문(關門臺라고 한다)도 모두 새로 쌓았다. 옛날의 성벽은 관문 입구 가기 전에 오른쪽 산 위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 허물어 졌으나 축성법을 알 수 있는 1~2미터 높이의 벽은 아직도 존재한다.

 

9. 개현(蓋縣) 주위의 고구려 산성(46~50번)

개현 청석령향의 고려성산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고구려 때의 건안성(建安城)으로 보고 있다. 개현을 벗어나 영구쪽으로 얼마 안 가 옛날 건안성에 부속되었던 청석관(靑石關)이 나오고 왼쪽에 봉화대가 있다. 고려성촌에 들어가면 산밑에 바로 건안성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에서 오른쪽 능선에는 돌로 쌓은 석성이 이어지고 그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토축인 토석축 산성이다. 현지에서는 연개소문과 동생 연개소진이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건안성을 중심으로 북쪽 대석교(大石橋) 백채자향(百寨子鄕)에 보성(堡城)이 있고 아래로는 서둔향(徐屯鄕)의 연통산과 쌍대자향(雙臺子鄕)의 성자구산성, 양운향의 분영(奮英)에 각각 보성(堡城)이 있다. 분영산성은 거의 흔적이 없으나 마을에서는 아직도 고려산성이라 부르고, 백채자향과 쌍대자향의 보성은 분명하게 그 자리가 남아 있다. 가장 특이한 것은 서둔향의 연통산인데 분명한 문이 있고 축성술도 아주 뛰어나 보인다.

 

10. 요령성 북쪽의 고구려 산성(51~54번)

혼하 북쪽에서 요하로 흘러 들어가는 범하(汎河)와 청하(淸河) 유역에 고구려 성들이 있다. 범하 유역에는 최진보(催陣堡)산성과 청룡산성이 범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데 청룡산성은 토성으로 평지성 같고 최진보산성은 굉장히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청룡산성은 산성의 흙벽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만 최진보산성은 훼손이 심하다. 서쪽 성벽 북쪽에 축성법을 알 수 있는 벽이 일부 남아 있다.

청하 유역에서는 상류인 서풍(西豊)에 있은 성자산산성이 가장 큰 규모인데 돌로 쌓은 성벽이 제법 잘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곳을 부여성 또는 설부루성(屑夫婁城)으로 비정한다.

 

나.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 성의 현황

 

1. 집안(集安) 주위의 고구려 산성(55~61번)

국내성이라고 얘기되고 있는 집안현성과 환도산성이라는 산성자산성은 본문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다만 집안의 동대자 터가 고구려의 황성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 동대자 터도 모두 집이 들어서 자세한 답사가 불가능하다. 기록에 보면 집안에서 서북으로 진출하는 데는 북로와 남로가 있다. 북로를 따라 가다 보면 관마산성이 있는데 삼면에 차단성을 쌓아   큰 산성을 이루는 곳이다. 지금도 남‧북 두 곳의 석벽 일부는 남아 있으나 동쪽의 성벽은 찾지 못했다. 통화에 도착하면 통화역에서 혼하 건너편에 자안산성(自安山城)이 있는데 좁은 절벽 위에 있는 분지를 잘 이용하였다. 축성법을 알 수 있는 석벽도 일부 남아 있다.

남로는 소판차령(小板岔嶺)과 망파령(望波嶺)을 지나 재원(財源)의 패왕조산성과 이어진다. 망파령 차단성은 발전소 저수지에 묻히고 최근 도로공사 때문에 거의 파헤쳐 졌다. 패왕조는 산성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잘 쌓은 석성이었다.

 

2. 휘발하(輝發河)유역의 산성(62~65번)

통화에서 용강산맥(龍崗山脈)을 넘으면 길림합달령(吉林合達嶺)과의 사이에 송화강의 지류인 휘발하가 흐른다. 이 휘발하는 유하(柳河), 일통하(一統河), 이통하, 삼통하가 동북쪽으로 흘러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유하 상류인 산성진 북쪽에 산성이 있는데 토성이지만 성벽 높이가 2-4미터로 높고 마도(馬道)가 분명하게 나 있다. 삼통하 가의 대통구(大通溝)에 있는 나통산성(羅通山城)은 길림성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2미터 이상 높이의 석벽이 남아 있고 주위에 고려무덤이 있으며 평지성이 있다는 설도 있어 한때 수도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추측도 있다.

유하와 1‧2‧3통하가 합쳐지는 북쪽, 반석에 닿기 전에 두 개의 성이 있는데 모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문 있는 곳만 차단성 형태로 쌓은 성이었다.

 

3. 요원(遼源)부근의 고구려 산성 (66~68번)

휘발하 유역에서 길림합달령을 넘으면 바로 요원이다. 요원은 요하, 그 가운데서도 동요하(東遼河)의 발원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길림합달령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린 물이 바로 요하의 수원이 되는데 요하원(遼河源)이란 마을도 있다.

요원에는 3개의 산성이 있는데 시내에 있는 용수산은 공원이 되어 산성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성자산산성이나 공농산산성은 모두 토성인데 전자는 평지에 가깝고 후자는 산성으로 말길(馬道)이 잘 나 있다.

 

4. 송강하(松江河) 유역의 고구려 산성(69~70번)

송강하는 백두산 서쪽에서 발원하여 송화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무송현(撫松縣)에 속한다. 무송 북쪽에 있는 만양진(萬良鎭)의 대방정자(大方頂子) 산성은 꼭대기에 있는 낮게 쌓인 돌무더기를 빼놓고는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무송 서쪽의 유수천(楡樹川)에 있는 산성은 강가의 적벽을 잘 이용해 쌓았는데 동남쪽에 있는 옹성문 옆의 동남 성벽만 남아 있다.

 

5. 송화강(松花江)유역의 고구려 산성(71~74번)

송화강의 지류인 표하(漂河)에 있는 산성은 토성으로 정문인 북문은 옹성형태를 보이며 잘 남아 있으나 성벽은 다 무너지고 밭을 일구어 흔적을 찾기 힘들다. 현지 백성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길림의 용담산성은 고구려성의 특징을 보여 주는 여러 가지 유적이 남아 있고 보존도 비교적 잘되어 있다. 조그만 언덕처럼 작은 동단산은 선‧후기의 산성들과 섞여 있어 고구려 시기의 산성을 분명하게 밝히기가 쉽지 않다.

송화강은 부여를 지나 눈강(嫩江)과 합쳐지면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송화강이 부여에 닿기 전에 이통하(伊通河)의 물을 받는데 그 이통하의 상류에 농안(農安)이 있다. 농안은 고구려 때 부여성이라는 설이 유력하고 여기서부터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 농안 시내는 완전히 개발되어 성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다.

 

6. 목단강(牧丹江) 유역의 고구려 성(75번)

목단강시에서 돈화까지의 목단강 유역에는 발해의 유적이 특히 많은 곳이다. 목단강의 상류인 돈화시에서 서남쪽으로 22.5 km 지점에 있는 성산자산성은 발해 산성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중국역사지리에서는 고구려산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토석혼축인 이 산성은 들판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산의 한 면을 성으로 썼고 북쪽인 전면은 목단강의 지류인 대석두하(大石頭河)를 해자로 이용하였다.

 

7. 포이합통하(布爾蛤通河) 유역의 산성 (76~83번)

포이합통하의 상류인 안도 북쪽에 있는 오봉산성은 성의 유적이 분명히 남아 있으나, 무학(舞鶴)에 있는 성문산은 필자가 성문을 확인하여 줄 때서야 사냥꾼 안내인도 성문인 줄을 알 정도로 불분명하다. 오호산성(五虎山城)은 돌로 쌓았는데 계곡에 세 겹의 차단성으로 문을 만들고 산등성이를 따라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1~1.3미터 정도 높다. 넓이로 비슷하다. 상당히 험하고 깊은 계곡에다 쌓은 성이다.

태양촌의 성자구산성은 태양촌에서 강을 건너 바로 보이는 계곡인데 북쪽 문은 옹성이고 토석 혼축한 성이다.

 

포이합통화가 조양천에서 북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을 받는데 바로 조양하(朝陽河)이다. 이 조양하를 따라 올라가 팔도향 서산촌에 가면 평지성이 있는데 이 평지성 마을을 토성둔(土城屯)이라고 한다. 이 평지성은 대단히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동쪽에 여러 갈래로 나누어 돌담을 쌓아 놓았다. 담은 큰 돌로 기초를 튼튼히 쌓고 그 위에다 냇가 돌을 가져다 흙과 섞어서 쌓았다.

포이합통하는 도문에서 두만강과 합류하는데, 그 직전인 연길 근방이 이 강의 유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길시 북쪽에 흥안성터가 있는데 지금은 큰 길가 채소밭이라 알아보기 힘들지만 고구려 때의 기왓조각들은 쉽게 주울 수 있다. 이러한 평지성과가 대칭을 이루는 산성이 장안진의 성자산 산성이다. 동‧서‧북쪽 문은 옹성이며 성벽은 돌로 쌓았는데 현재 1~1.5미터 정도의 높이로 드문드문 남아 있다. 연길을 중심으로 둘러 쌓인 고구려 장성은 중간 중간 서 있는 봉화대를 점으로 잇는 산성이 눈으로도 확인할 만큼 남아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을 들어 연변대 박진석 교수는 성자산산성을 고구려 때의 책성(柵城)이라고 주장한다.

 

8. 해란강(海蘭江) 유역의 고구려 산성(84~86)

청산리 서쪽과 북쪽에서 발원하는 해란강이 동북으로 흐르는데 화룡에 닿기 전 송월(松月) 근방의 왼쪽 산에 송월산성이 있다. 도로에서 서쪽으로 바로 올려다 보이는 길가에 있는데 둘레가 2,080미터로 제법 크다.

화룡을 지나 팔가자진(八家子鎭)에 다다르면 강 건너 언덕에 산성이 있는데 바로 팔가자진을 내려다보고 있다. 토성인데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석정(石井)에서 해란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류가 팔도하(八道河)인데 팔도하의 발원지인 금곡(金谷)에 있는 산성은 비가 많이 와 못 가 보고 덕신(德新) 옆 하북(河北)에 있는 평지성은 가 보았는데 경작지로 변해 흔적도 없다. 그러나 이 곳에서 고구려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9. 사하하(嗄呀河)유역의 고구려 산성(87~89번)

해란강과 합쳐진 조이합통하는 도문에 닿기 전에 북쪽에서 내려온 사하하와 합쳐진다. 이 사하하는 쌍하(雙河)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전하(前河)라는 지류와 합쳐진다. 이 전하의 상류에 합마당(蛤蟆塘)이란 조선족 향이 있고 바로 서쪽에 두 개의 성이 있다. 해발 956 미터의 동사방대산(東四方臺山) 위의 산성은 절벽 위의 널따란 평지에 토성으로 쌓았다. 광흥산성은 동사방대산을 올려다보는 낮은 동네 뒷산에 설치한 보성(堡城)이다.

백초구진(百草口鎭)과 석현진(石峴鎭)사이의 영창(永昌)에 있는 만대성(滿臺城) 산성은 흙을 파서 성벽을 만들고 그 판 자리에 해자를 만들었는데 높은 곳은 10미터가 넘는다.

 

10. 두만강 유역의 고구려 산성(90~95번)

북한의 무산에서 두만강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지평리 건너편이 중국의 덕화진(德化鎭)이다. 덕화진에서 용화(勇化)로 가는 중간에 862미터 높이의 삼층령(三層嶺)이 있는데 이 산 위에 두만강 가에서는 가장 튼튼하고 높은 석성이 남아 있다.

부유(富裕)를 지나면 조동(朝東)이 나오는데 바로 서북쪽이 한왕산(汗王山)이다. 옹성이 분명하고 절벽 위에 교묘하게 돌도 쌓은 산성이 있다. 건너편이 바로 북한의 유선(游仙)인데 두만강 건너 바로 아래 내려다보인다.

 

삼합진(三合鎭)을 조금 못 가서 청수(淸水) 뒷산에 있는 산성은 토성이 마치 산등성이처럼 높이 남아 있어 동네 사람들이 산성이 있는 줄을 모를 정도였다. 두만강 건너에는 산등성이를 하나 넘어 회령(會寧)인데 산성에서는 잘 내려다보인다.

개산둔진(開山屯鎭)을 지나 선구(船口)에 있는 토성은 전문가가 자세하게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산성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이다. 건너편이 바로 북한의 종성(鍾城)이다.

두만강이 도문을 지나 양수진(凉水鎭)에 다다르면 제법 넓은 평야가 나오는데 그 북쪽 산에 있는 바위가 정자 같다고 해서 정암(亭岩)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이 산 위에 쌓은 산성은 동문 쪽에는 2.9미터나 높은 석벽이 남아 있으나 다른 쪽에는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두만강의 마지막 성은 경신(敬信) 벌판 남쪽 수류봉(水流峰) 위에 있는데 성벽 자체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이라 멀리서만 관찰하였다.

 

11. 혼춘하(琿春河) 유역의 고구려 성 (96~103번)

혼춘하가 두만강과 합류하는 지점 북쪽에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과 비우성(裴優城)이 있는데 모두 평지성이다. 두 성은 성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어져 있는데 두 곳에서 모두 고구려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세워졌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온특혁부성은 마을로 변해 흔적이 없고 비우성은 옹성‧치‧각루‧해자가 분명하게 남아 있고 성벽의 높이도 10미터 되는데 후대에 쌓은 것이다.

한편 혼춘에서 혼춘강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양포향(楊泡鄕)에 살기산성이 있는데 이 산성과 온특혁부성의 평지성을 묶어서 혼춘을 옛날 책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혼춘에서 러시아로 가는 동남쪽에 석두하자라는 평지성이 있는데 이 곳에서도 고구려 시대의 유물이 나왔다. 이 성은 혼춘에서 장령자를 넘어 소련의 뽀시예트만에 이르는 교통로이다. 살기산성에서 혼춘강 바로 건너편에 건구자산성이 있다. 토성인 건구자산성은 문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성벽도 상당히 높다.

 

지금까지 고구려 산성이라고 논의 되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이 춘화(春化)에 있는 성들이다. 영성자고성은 평지성이고 성장납자산성은 산으로 둘러 쌓였지만 그 산 자체가 성벽이 되고 평지성에 가까운 야산이다. 이에 반하여 통긍산성(通肯山城)은 높은 산 절벽 위에 돌로 튼튼하게 쌓은 성이다. 동북역사지리에서는 성장납자 산성을 책성(柵城)으로 보고 있다.

 

Ⅲ. 고구려의 古墳

 

   1. 集安의 고구려 고분

  집안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10,000 기가 넘는 무덤떼이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 근방에도 1,000 기 밖에 없는데 그 보다 10배 이상 훨씬 많은 무덤들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안현 내 고구려시대의 무덤떼(墓群)는 모두 32개 지역에서 발견 되었는데 (「집안현문물지」에는 75개 지역이라고 되어있다) 1962년 봄 집안현 전체의 문화유물을 전면적으로 조사할 때 파악한 숫자에 따르면 모두 12,358 기나 된다고 한다(李殿福, 집안 고구려 무덤 연구, 대륙연구소 출판부 간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인식」 14-15쪽). 일본의 한 학자는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고 평가했는데 실제 상황을 파악해 보면 실감나는 이야기다.

  이 가운데서 통구 무덤떼가 11,300 기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집안현문물지」에는 11,280 기로 20 기가 적다) 여기에는 장군총, 태왕능, 천추묘(千秋墓), 서대묘(西大墓) 등 고구려의 역대 왕능이 있으며, 씨름무덤(角觝), 춤무덤(舞踊), 세칸무덤(三室), 통구 12호, 마선구(馬線溝) 제1호, 사신(四神)무덤, 다섯무덤(五盔墳) 제4호와 제5호 등 고구려의 풍속을 파악할 수 있는 벽화무덤도 있다.

 

   1) 洞溝무덤떼

     (1) 下解放묘구 - 통구무덤떼에서 가장 동쪽에 있으며, 남쪽으로 압록강과 건너편에 북한이 건너다 보인다. 1962년 조사 당시 50 여기가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30 여기만 남아 있다. 유명한 모두루무덤, 환문무덤, 31호벽화무덤 등이 있다.

     (2) 禹山묘구 - 북쪽은 우산, 남쪽은 압록강, 서쪽은 洞溝河, 동쪽은 龍山에 이른다. 통구무덤떼 가운데서 가장 큰 무덤떼로 수천 기의 무덤이 모여 있다. 이 무덤떼에 광개토태왕릉, 장군총과 벽화무덤 가운데 씨름무덤, 춤무덤, 세칸무덤,  통구12호무덤, 다섯무덤의 4호‧5호무덤 등이 있다.

     (3) 山城下묘구 - 우산 북쪽기슭, 환도산성 밑의 통구하 골짜기 양쪽 가에 위치해 있는데, 약 1000 여기가 있다. 절천정무덤, 형무덤, 동생무덤, 귀갑무덤, 연화무덤, 왕자무덤 등이 있다.

   * 1993년 관광객 유치를 위해 집안 박물관에 의해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이루어 졌다.

     (4) 萬寶汀묘구 - 환도산성 서남, 칠성산 동쪽 기슭, 통구하 계곡에 위치하며 1000 여기의 무덤이 있다.

     (5) 七星山묘구 - 집안현성(국내성) 서쪽, 칠성산 남쪽 비탈에 위치하며 1000 여 기가 있다.

     (6) 麻線묘구 - 동쪽은 칠성산에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麻線溝河 兩岸에 이른다. 널리 분포된 2000 여기의 무덤 가운데 천추무덤, 서대무덤, 마선1호무덤 등이 있다.

 

   2) 長川무덤떼

    장천무덤떼가 있는 黃栢鄕 長川村은 집안에서 동북쪽으로 25㎞ 지점에 있다. 1962년 6월 15일 집안현 문화재 보호지구로 지정되었다. 장천 무덤떼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에 걸쳐 아주 심하게 파괴되었다. 1983년 5월 문화재 조사 당시 105 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積石墓, 方壇積石墓, 方壇階段積石墓 및 약간의 封土墓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무덤떼에서는 장천 1‧2호의 벽화가 유명하다. 1972년, 1974년 길림성 박물관에서 1, 2호를 조사하였다. 최근에는 조사가 가능한게 50 여기도 되지 않으며 83년 조사 이후에도 엄청나게 많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大高麗墓子溝무덤떼

    이 무덤떼는 집안에서 서남쪽으로 45km 떨어진 楡林鄕 大甸子村 동남쪽 700m지점에 있으며, 이 무덤떼는 길이 680m에 넓이 110m의 좁고 길죽한 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1917년 일본인 關野貞이 조사하여 조사보고서를 발표하였다. 1962년 4월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 고고조사대가 상세히 조사하였을 때 113 기의 무덤이 있었다. 1983년 5월 11일 집안현 문화재 조사단이 다시 조사를 할 때,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은 곳은 59 기 밖에 안되어 62년 조사때 비하여 54기가 감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묘장형태는 積石墓, 方壇積石墓(4기), 方壇石室墓(3기), 方壇階段積石墓(3기), 封石洞室墓(10기), 封土洞室墓(23기) 등이다.

 

   4) 太平溝무덤떼

    이 무덤떼는 집안으로부터 27km 떨어진 太平橋 동쪽에 있는데, 태평구하가 흐르면서 형성한 삼각주 위에 위치하며, 길이 450m 넓이 100m의 길쭉한 지대이다. 1962년 집안 고고조사대가 조사할 때, 60 여 기의 무덤을 조사했고, 1983년 5월 31일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다시 조사할 때는 74기를 찾았으나 대부분 파괴되고 실제 남아 있는 것은 26기 밖에 없었다. 묘장형태는 적석묘(11기), 방단적석묘(40기), 방단계단적석묘(4기), 봉토동실묘(19기) 등이다.

 

5) 高地무덤떼

    高地村(원명 : 高麗墓子)은 집안에서 서남쪽으로 75km 지점에 있는 대로향 동북쪽에 있다. 분포 면적이 2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상당히 큰 무덤떼로서 1962년 조사당시 145 기가 있었으나 1962년 조사 때는 불과 21 기만 남아 있을 정도로 심하게 파괴되었다. 1962년의 조사자료를 보면 무덤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묘장 형태는 대부분이 돌로된 무덤이었는데 쌍실묘와 단실묘로 나뉘어 지고, 일부 소형 석관묘도 있었으며, 봉토묘도 일정한 비율을 점하고 있었다. 이 지점은 집안에서 환인으로 넘어가는 도로변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때 국내성에서 흘승골성으로 왕래하는 육로 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규모로 보아 상당히 많은 주민이 살고 있는 주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6) 橫路九隊무덤떼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85km 떨어진 花甸鄕 橫路九隊 서산 비탈 아래 있는 강 언덕 평지 위에 있다. 1983년 5월 3일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조사할 당시 121 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묘가 적석묘인데 그 가운데는 약간의 방단적석묘도 보이고, 봉토석실묘도 있다.

 

   7) 古馬嶺高麗墓區무덤떼

    집안에서 서남쪽으로 90km  떨어진 高麗墓區에 있는데 행정상으로는 大路鄕 古馬嶺村 12隊이다. 고마령촌에서 남쪽으로 3.5km 지점이며 渾江에서 북쪽으로 250m 지점이다. 1962년 집안 고고조사대가 첫 조사를 하고, 1983년 4월 24일부터 6월 23일까지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두 차례에 걸쳐 조사를 한 결과 70 여기의 무덤이 있었다. 70년대 중반에 경지확장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과정에서 철기와 백회 쪼가리들이 많이 출토되었으나 모두 상실되어 버렸다. 현재 약 50 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36 기의 무덤이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묘장형태는 적석묘(6기), 방단석실묘(9기), 방단계단적석묘(7기), 봉토동실묘(13기) 등이다.

 

   8) 良民무덤떼

    집안에서 동북쪽으로 45km떨어진 靑石鎭에 雲峰댐이 건설되어 있다. 운봉댐에서 북쪽으로 3.5km 지점의 수몰지구에 원래 고구려 시기의 무덤떼들이 있었다.

    1964년 5월, 길림성 박물관 문화재 발굴대가 댐건설공사장을 조사발굴한 결과 모두 10 여 곳의 무덤떼를 발견하였다. 그 가운데 良民, 秋皮, 石湖, 樺皮 등 네 곳이 집안현 지역 안에 있었는데, 모두 205 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 良民무덤떼로서 모두 170 기의 무덤이 있었다. 양민무덤떼는 압록강 오른쪽 언덕의 沖積平原 위에 있었는데 길이 1km, 동서 넓이 1.5km의 규모였다. 170 기의 묘 가운데는 적석묘와 방단적석묘가 155기, 봉토묘가 15기였다. 비교적 큰 적석묘와 방단적석묘가 가운데 집중되어 있고 그 주위에 비교적 작은 적석묘들이 널려있었으며, 봉토묘는 무덤떼 동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댐공사가 급하게 진행되어 모두 발굴하지 못하고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고 묘장형태가 특징적인 무덤 30 여 기만 발굴하였다. 그 가운데는 적석묘, 방단적석묘, 계단적석묘, 봉토석실묘, 봉토동실묘 등이 있었다.

 

   9) 上下活龍무덤떼

    통구하 하구에서 압록강을 따라 밑으로 8km를 내려가면 麻線鄕 上活龍村이 나오고, 다시 8km를 내려가면 下活龍村이 나온다. 이 두 개 마을 주위에 분포된 고구려 묘를 上下活龍무덤떼라고 부른다. 1977년 겨울, 집안현 문물조사대가 이 두 곳을 조사하였고, 1982년 5월 老虎哨수력발전소 건설 당시 수몰예정지구를 조사하면서 무덤들을 발굴하였다.

    상활용무덤떼는 모두 14기인데 적석묘(3기), 방단적석묘(5기), 봉토동실묘(6기) 등이 발굴되었으며, 하활용천에서는 모두 34 기의 무덤을 발굴하였는데 모두 적석묘였다.

 

  10) 潘家街무덤떼

    집안에서 서북쪽으로 80km를 가서 頭道鄕 潘家街村 북쪽 들판에 있다. 주위는 모두 논이며 무덤떼의 동쪽에는 大葦沙河가 흐르고 400m 지점에 집안에서 통화로 가는 도로가 지나간다. 1965년 12월 집안현 박물관에서 처음 조사가 시작되었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곳 무덤떼의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았었는데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심하게 파괴되었다고 한다. 1983년 집안 문화재 조사대가 조사할 당시, 아직 44 기의 무덤이 남아 있었으나 80% 정도가 심하게 파괴되었는데 그 가운데 방단적석묘 4기, 적석묘 14기, 봉토동실묘 24기로 판명되었다. 집안 내에 약 70여군데 이상의 무덤떼가 있는데 대부분 계곡 비탈 위에 있고, 평원에 있는 무덤떼는 많지 않다는 면에서 이곳 무덤떼는 주목되고 있다.

 

11) 母背嶺무덤떼

    모배령은 노령산맥의 지맥인 報馬川山 줄기를 따라 내려가다가 渾江 좌측 언덕에 있는 평탄한 산허리에 있는데, 母猪背嶺이라고도 부른다. 財源鄕 泉眼村에서 서쪽으로 약 2.5km 지점이다. 1962년 문화재 조사 당시 50 여기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1983년 다시 조사할 때는 20 여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봉토동실묘가 많고 약간의 방단적석묘와 적석묘도 남아 있다. 판별이 가능한 묘장형태를 보면 방단적석묘 6기, 봉토동실묘 14기 등이고, 나머지 18기는 적석묘 비슷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 무덤떼의 동쪽에는 고구려의 覇王朝산성이 있는 것을 보아 고구려 때 이 일대가 고구려 南道의 한 지점으로 보인다. 이점으로 보아 모배령 무덤떼는 남도상의 방어및 전쟁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집안의 고구려 벽화고분

 

 

1) 모두루무덤 

 

 

     하해방무덤떼 남쪽에 있으며, 하해방촌에서 동쪽으로 500m, 集安-靑石간 도로에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밭가운데 있다. 1935년 일본학자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먹으로 쓴 문장가운데 牟豆婁란 이름이 나와 모두루무덤이라고 이름붙여졌다. 1963년 이래 집안현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수리를 하였고, 1978년 6월 묵서묘지 부근에 화학안료로 막을 입혔다. 널방 안벽에 해당하는 동북벽 상단에서 서북벽 상단 일부까지 이어진 진황색 가로띠와 그위에 쓴 묵서 묘지 이외에 벽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1994년 봉분을 높이고 무덤 안을 수리하여, 1994년 7월 현재  봉분에 풀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2) 씨름무덤(角觝塚) 

 

  우산남쪽 기슭 평지에 있다. 춤무덤 남쪽에 나란히 붙어있다. 북쪽으로 500m만 가면 집안-통화간 철로가 있고, 남쪽으로 1.5km 가면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다. 1937년 일본인 池內宏 등이 조사할 때 그림 가운데 두사람이 씨름하는 모습이 있어 씨름무덤(각저총)이라고 이름하였다. 1956년, 1962년, 1963년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고, 1966년 통구무덤떼를 실측할 때, 우산무덤떼 제457호무덤이라고 이름하였다. 1976년 7월 묘도와 문을 수리하면서 화학안료로 막을 입혔다.  무덤칸의 벽과 천장에 백회를 입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1994년 현재 화학안료를 칠한 벽화 위로 습기가 심하게 차 있었으며 1930년 대에 비해 횟조각이 떨어져 간 부문이 많았다. 평소에는 입구를에 산소땜을 하여 봉쇄하고 있다. 

 

  3) 춤무덤(舞踊塚) 

 

  果樹鄕 一大隊의 밭가운데 씨름무덤 북쪽에 나란히 붙어 있다. 1937년 일본인들이 발굴하면서 그림 가운데 춤추는 모습이 있다고 해서 춤무덤이라고 했다. 이 묘도 씨름무덤과 같이 일찍이 도굴되어 버렸다. 1956년 문을 폐쇄했다가 1962년과 63년 두번에 걸쳐 봉분을 높였고, 1966년 통구무덤떼를 실측할 때, 우산묘구 제458호로 이름하였다. 1977년 5월, 집안현 문물관리소에서 묘도와 문을 수리할 때 벽화위에 화학안료를 입혔다. 무덤칸의 벽과 천장에 백회를 입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이다.  

 

1994년 현재 화학안료 처리한 벽화 위에 물기가 많고 1930년대에 비해 파손상태가 아주 심했다. 널방 왼벽의 사냥도에서는 사슴, 말 등의 부분이 횟조각이 떨어져 나가면서 회손되었다.  널방 오른쪽 벽화의 춤추는 사람들 가운데서 세번째, 다섯번째 무용수의 머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고, 첫번째 무용수의 모자 절풍과 허리부분, 네번째 무용수의 머리 절반과 몸통의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널방 천장부 고임 안쪽 벽화의 세부 수박희 단면도 얼굴과 어깨 부분을 식별하기 어렵고, 고임 오른쪽 벽화 사람얼굴을 한 새에서도 사람 얼굴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평소에는 입구가 산소땜으로 봉해져 있다. 

 

   4) 통구12호무덤(馬槽墓) 

 

  집안-통화간 도로 북쪽 바로 옆에 붙어 있으며 300m 더 올라가면 우산을 오른다. 남서쪽으로 460m 지점에 다섯무덤이 있는 등 주위에 무덤들이 많다. 일제시대 통화가는 철로를 건설할 때 일본인들이 실측하면서 112호무덤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나중에 간략하게 제12호 무덤이라고 줄였다. 1937년 6월 일본인 黑田源次가 벽화가운데 말구이가 있다고 해서 말구이무덤(馬槽墓)라는 이름을 붙였다. 무덤의 문이 열려진 뒤 벽화가 심하게 파괴되었다. 해방후 집안현에서 문을 달아 봉쇄하고 보존하였다. 1962년 봄, 길림성 집안현 고고대에 의해 다시 조사를 하고 실측이 이루어 졌다. 1966년 통구고분군 실측 때 우산묘구 제1894호로 이름하였다. 1977년 5월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묘의 문을 수리할 때 화학안료로 보존 처리하였다. 백회면에 아교와 같은 접착성 물질을 덧입히고 표면을 윤기있게 다듬은 뒤  그 위에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장식무늬이다.  1994년 현재 북쪽 무덤 널방 왼쪽 전투도와 천장의 연꽃을 제외하고는 분명한 그림이 많지 않고 훼손상태가 아주 심하다. 평소에는 입구가 산소땜으로 봉해져 있다. 

 

  5) 세칸무덤(三室墓) 

 

  太王鄕 禹山村 제5생산대대 밭가운데 있다. 통화로 가는 도로에서 남쪽으로 철로를 바로 넘으면 길 왼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250m 만 더 가면 다섯무덤이 있다. 이 무덤도 일찍이 도굴되었다. 1914년 일본인 關野貞이 이 묘에 대해서 글을 발표한 뒤, 1935, 1936년 두 차례에 걸쳐 池內宏 등이 자세히 조사하여 「洞溝」 하권에 수록하였다. 이 무덤은 널방이 모두 세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세칸무덤(三室墓)라고 한다. 1972년 벽화를 보호하기 위하여 봉토를 높이고 문에 안전장치를 하였다. 1975년 8월 집안현 문물보관소에서 벽화를 화학안료로 보호처리하였다. 

 

 

   무덤칸은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장방형의 화강암제 깬돌로 쌓았으며 벽과 천장면에 백회를 입히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四神이다. 

  1994년 현재 습기가 차고 훼손된 부분도 있으나  회벽 벽화 가운데서는 상태가 가장 좋은 편이었다. 평소에는 산소땜으로 문을 봉해 놓고 있다.  

 

  6) 사신무덤(四神墓) 

  우산 남쪽 기슭 통구 평원 가운데 위치하며 남쪽에 다섯무덤 4호무덤이 이어져 있어 들어갈 때 먼저 4호무덤으로 들어간 뒤 다시 뒤고 돌아가면 사신무덤이 나온다.  

 1966년 무덤의 구조 조사와 실측을 할때 2,112호무덤이라고 불렀고, 벽화그림에 四神像이 있어서 사신무덤이라고 부른다. 1935년 10월 22일 일본인 齋藤菊太郞이 처음 조사하였으며, 이 조사과정에서 묘실 내 부공기와 외부 공기간의 접촉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벽화가 크게 파괴되었다. 해방후 중국 정부에서 여러 차례 수선하고 벽화에 화학적 보존처리를 하였다. 돌 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四神이다. 

  1994년 현재 가장 훼손이 심한 무덤 가운데 하나이다. 다섯무덤 4호무덤과 함께 주위에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7) 다섯무덤(五盔墳) 4호무덤 

  통구고묘군 통구무덤떼 가운데 우산묘구에 다섯개의 높은 봉토묘가 동서로 나란히 늘어서 있다. 이 모양이 다섯개의 커다란 투구같이 생겼다고 해서 다섯(투구)무덤(五盔墳)이라고 한다. 우산묘구 가운데서는 가장 남쪽에 있는데 이 무덤의 바로 남쪽에 철도 주택지구가 연결되어 있으며 남쪽으로 약 340m 지점에 집안역이 있다. 이 무덤은 일제시대 때 발견되었는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원조하기 위하여 출전했던 중공군에 의해 다시 개방되었다. 1962년 봄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관리소에 의해 전면 재조사 되었다. 중국측의 공식명칭은 집안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제104호묘이나 일반적으로 다섯묘(오회분) 4호묘로 불린다. 돌 표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四神이다. 

 

     1944년 현재 가장 잘 보존된 벽화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천정에 결로현상이 생기고 있으나 그림의 모양이나 색갈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무덤 주위에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8) 다섯무덤(五盔墳) 5호무덤 

  다섯무덤 4호무덤 동쪽 80m 지점에 있고, 남쪽으로 380m 가면 집안역이다. 4호묘와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일본인 학자가 일차 조사한 뒤 한국전쟁 때 개방되었고, 62년 봄 길림성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가 무덤을 전면 발굴‧조사할 때 현재의 이름이 붙여졌다. 널방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으며 바닥에 세 개의 관대가 놓여 있다. 돌 표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주제는 사신이다.

1944년 현재 회손 상태가 심한 편이다. 이 무덤은 집안시에서 유일하게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관람시키는 벽화무덤이다. 자주 열고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들기 때문에 특수한 장치를 필요로 하지만 아직은 예산관계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5호무덤만 따로 담을 쌓아 보호하고 있으며, 관광객을 위해 전기시설이 되어 있어 안내자가 전기줄에 이어진 전등을 끌고 들어갈 수 있다. 

 

  9) 장천1호무덤 

 

  장천분지 낮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장천무덤떼 중에서 가장 높은 봉토를 가지고 있는 무덤 가운데 하나이다. 서쪽 언덕위에 장천2호 무덤과 서로 맞보고 있다. 1970년 8월 길림성 박물관과 집안현 문물보관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널길을 제외한 무덤칸 안에 벽화를 그렸는데, 앞방과 이음길의 벽화는 벽면과 천장부에 덧입혀진 백회 위에 그렸으며 널방 벽화는 돌 표면 위에 직접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장식무늬이다. 

  1994년 현재 습기가 차고 백회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지만 벽화 내용을 상당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남아 있다. 이 무덤은 집안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쇠통으로 두 군데나 잠그고 또 산소 땜으로 봉해 놓고 있다. 

 

3. 桓仁의 고구려 고분 

 

  1) 高力墓子무덤떼 

  高力(高麗와 중국어 음이 같기 때문에 최근 중국에서는 고려란 지명을 대부분 고력으로 바꾸었다)墓子무덤떼가 있는 連江鄕 高力墓子村은 환인에서 동쪽으로 15 킬로 지점인 혼강 서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떼에서 동쪽으로 5 킬로미터 지점에 고구려 초기 도성인 오녀산성이 있다.  

 

  1956년 4월, 전 동북박물관에서 무덤떼를 조사하였으며, 1958년 10월 초 ~ 11월 하순과 1959년 3월 말 ~ 5월 초  무덤떼 가운데 일부만 발굴했다. 무덤떼의 남북 길이가 1000 미터였고. 남단에 비교적 규모가 큰 적석묘군이 있었는데 큰묘가 70 기 정도였다. 이 때 31 기를 발굴하였다. 

고력묘자묘구는 환인에서 가장 큰 무덤떼이다.  수량과 규묘 면에서 최대일 뿐 아니라 묘장형식도 積石墓, 方壇積石墓, 階段積石墓, 封石洞室墓, 方壇封土墓, 封土洞室墓 등 다양하다. 

 

  이 무덤떼는 혼강에 댐을 막아 모두 수몰되고 현재는 발굴이 불가능하다.  

 

   2) 上古城子무덤떼 

 

  六道河子鄕 上古城子村 동북 100 미터 밭에 있다. 동쪽으로 1.8 킬로 지점에 혼강이 흐르고, 동북 1.5 킬로 지점에 六道河가 서북에서 남으로 흘러 혼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남쪽으로 1.5 킬로 지점에는 고구려 초기 土城인 下古城子가 있다. 

60년대 조사 당시 200 여 기의 묘가 있었고, 면적도 남북의 길이가 200 미터이고 동쪽의 도랑에서 서쪽으로 산기슭까지 이어져 대단히 넓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토지정리를 하면서 무덤떼는 심하게 훼손되고 면적도 크게 축소되었다.  현재 남북 길이 150 미터, 동서 길이 200 미터, 총 면적 3만 평방미터 정도이며, 1988년 조사 당시 묘는 27 기 밖에 남지 않았고 남아있는 묘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 평지성인 하고성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 성에 살던 주민들의 공동묘지일 가능성이 크다. 

* 1994년 당시 상고성자촌 입구의 표지석은 두동강이 나 마을 앞에 버려져 있었고 밭 가운데 띄엄띄엄 널려 있는 무덤들도 관리를 하지 않아 매년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3)  大把 무덤떼 

向陽鄕 和平村  서쪽 500 미터 지점에 있다. 비교적 넓은 곳에 분포되어 있는데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는 무덤떼는 한 곳의 넓이가 13,750 평방미터 (길이 275 미터, 넓이 50 미터)나 되며, 80 여기의 묘가 모여 있다. 묘의 절대 다수가 방단적석묘인데 일반적으로 정방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6 미터 정도이고큰 것은 10 미터 짜리도 있다. 

대파무덤떼는 마을에서 가까워 주민들이 묘의 돌을 헐어다 담을 쌓는 사례가 많아 훼손 상태가 아주 심하다. 

 

  4) 楊家街 무덤떼 

  六道河子鄕 楊家街 동북쪽 200 여 미터의 밭에 있다. 무덤떼 동쪽 500 미터 지점에 六道河가 동남쪽으로 흘러가고, 本溪-桓仁 간 도로가 무덤떼의 서쪽을 지나간다. 

  현존하는 옛무덤은 모두 9 기인데 두 줄로 나란히 서 있다.  동서 방향으로 북쪽 줄에 4기, 남쪽 줄에 5 기가 있는데 두 줄이 대체로 평행을 유지하고 있다. 楊家街무덤떼는 남쪽 5 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상고성자 무덤떼의 유형과 대체로 같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며, 규모로 보아 한 가족의 묘지로 보여진다. 

  현지 주민들이 묘의 돌을 허물어 담을 쌓았기 때문에 훼손상태가 아주 심하다. 묘는 대부분 방단적석묘이다. 

 

5) 董船營무덤떼 

 

 

雅河鄕 董船營村에 있다. 환인진에서 남쪽으로 7 킬로미터, 雅河鄕에서 동남쪽으로 2.5 킬로미터 지점이고,  渾江 남류가 마을 서쪽 언덕 밑을 흐르며, 雅河의 동류가 마을 남쪽 700 미터 지점에서 혼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1987년 봄 本溪市‧桓仁縣 고고조사대가 이곳에서 고구려 때의 무덤떼를 발견하고 동선영무덤떼라고 이름붙였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오십년대 초에는 무덤떼의 규모가 상당히 커, 마을 동북쪽 산기슭 평지 위에 약 20~30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오십년대 말 토지정리를 하고 주택을 지으면서 많이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십 여 기 밖에 남지 않았다. 무덤떼는 띄엄띄엄 떨어져 있으며 묘장형식은 방단적석묘이다.  

 

6) 聯合무덤떼 

  雅河鄕 聯合村 동남쪽 25m 지점에 있는 밭 가운데 있다. 북쪽 약 500m 지점에 雅河가 흐른다. 무덤떼는 원래 상당히 넒은 지점을 차지하여 50년대 초에는 수 백 기에 이르렀으나 토지정리와 건물신축으로 무덤들이 많이 없어져 현재는 삼십 여 기 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많이 훼손되었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구려 중기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7) 灣灣川무덤떼  雅河鄕 灣灣川村 남쪽 밭 가운데 있다. 무덤떼와 北溝屯 사이에 환인-寬甸간 도로가 통과한다. 50년대 문화재 조사 당시 백 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으나 거의 파괴되고, 현재는 11 기 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것도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묘장형태는 방단적석묘이다. 1981년 환인현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8) 大靑溝무덤떼 

  普樂堡鎭 大靑溝村에 있다. 보락보진에서 서쪽으로 3km, 대천구촌에서 동북쪽으로 500m에 위치한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50년대 초기에는 무덤의 수가 수 백 기가 넘었으며, 무덤떼는 울창한 숲속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 경지면적을 확대하면서 무덤들은 대부분 파손되고 현재는 십팔기 정도가 남아 있다. 이곳의 묘장형태는 방단적석묘와 방단계단적석묘가 섞여있다. 현재 약 3 기의 비교적 완전한 방단계단적석묘가 남아 있는데 환인지방에서는 방단계단적석묘가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주목받고 있는 무덤떼이다. 방단적석묘와 방단계단적석묘가 섞여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3세기 전후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9) 四道嶺子무덤떼 

  환인에서 二柵甸子로 가는 도로를 따라 12km 쯤 가면 도로변에 낮은 산이 나오는데, 그 산을 반쯤 오르다 밑을 내려다 보면 산기슭에 마을이 보이고, 마을밖에 있는 밭 가운데 무덤떼들이 보인다. 이것이 四道嶺子무덤떼이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해방 이후 만 해도 상당한 무덤떼들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훼손되어  5 기 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 3 기는 거의 파괴되고 2 기 만이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다. 이 남아 있는 2 기는 방단적석석실묘인데 연대는 고구려 초기나 중기로 보고 있다.  

 

10) 大荒溝무덤떼  

  拐磨子鎭에서 남쪽으로 7km 쯤 내려가서 있다. 富爾江의 상류인데 약 30 여 기의 무덤이 있다. 1980년 11월 본계시‧환인현 문화재조사대가 처음 발견한 뒤, 수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다. 무덤떼는 길이 150m, 넒이 50m, 면적 7천 500 평방미터이며, 묘장형태는 대부분 소형 적석묘이다. 학계에서는 이 무덤떼가 비교적 신분이 낮은 평민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11) 川里무덤떼 

 

  鏵尖子鎭 川里村에 있다. 화첨자진에서 서쪽으로 약 6km, 천리촌에서 약 360m 지점에 있다. 1980년 4월 제 1차 문화재 조사 때, 확인된 것으로 당시 무덤떼는 이미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현재 약 9 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적석묘 형태이다. 천리무덤떼는 환인지구에서 발견된 무덤떼 가운데서 가장 서북쪽에 있는 적석묘이다. 많이 파괴되었으나, 밖으로 노출된 석실을 분석해 보면 원래 겉은 방단이나 계단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으로 볼때 대개 3-4세기의무덤으로 보고 있다. 1981년 3월 환인현 지정 문화재가 되었다.  

 

12) 米倉溝무덤떼 

 

  雅河鄕 미창구촌 북쪽 약 500m 지점의 낮은 산 위에 있다. 산꼭대기는 해발 272m 이고, 산언덕 아래는 혼강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주위는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다. 기록에는 대부분 봉토석실묘로 약 10 여 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미창구 무덤떼는 환인지역에서 비교적 큰 무덤떼이며 장군묘는 환인지방에서 가장 큰 무덤이다. 봉토묘란 고구려시대 후기의 묘장형태로서 대략 4세기에 시작하여 5세기에 성행했던 묘제이다. 

  1994년 현재 장군묘 이외는 거의 훼손되어 찾기가 힘들었으며, 무덤떼가 있었던 곳에 최근 이웃 마을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무덤들이 많이 들어서서 고구려 무덤떼는 거의 보존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13) 大甸子무덤떼 

  四道河子鄕 大甸子村 북쪽 약 1km 지점에 있다. 무덤떼는 14 기 인데 모두 봉토묘이다. 봉토 꼭대기 부분은 대부분 도굴되어 묘실 상단의 석판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다. 대전자무덤떼는 대부분 봉토묘로서 봉토석실묘 또는 봉토동실묘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형태의 묘장형태는 환인의 고력묘자무덤떼, 집안의 통구무덤떼 및 노호초무덤떼 등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것이다. 동시에 이런 무덤떼에서는 유물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특히 많이 파헤쳐졌다고 볼 수 있다. 

 

  4. 환인의 벽화고분 

 

환인지방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벽화고분은 米倉溝 장군묘 뿐이며, 이 고분은 또한 만주지방에서 집안을 빼놓고는 처음 발견된 것이기 때문에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 장군묘는 미창구무덤떼에서 다른 무덤보다도 크기가 가장 크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장군묘가 벽화무덤이라는 것은 이미 청나라 말기에 도굴꾼들에 의해서 알려졌다. 

 

 

ꡔ桓仁縣志ꡕ에 따르면 

 

“함풍 4년(1854) 근처의 주민들이 석수와 철공(鐵工)을 데리고 무덤을 이틀 정도 파헤쳤다. 황토층을 10자 이상 파니 4자 두께의 참숯층이 나왔고 그 밑에 또 5자 정도의 석회층이 있었다. 그 다음 3자 정도 두꺼운 석판이 깔려 있어 들어내려 했으나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덤 뒤 벽을 파헤쳐 겨우 구멍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는 2기의 돌관대가 붙어 있었고 사방 벽에는 하얀 회를 바른 뒤 홍색 꽃무늬를 그렸다. 선명하여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앞벽 양쪽에는 각각 돌문이 있었고 다른 한 방은 마치 안채 같았는데 산뜻하게 색칠한 것이 금방 그린 것 같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 하얗게 칠한 벽 위에 글자가 있었는데 들어간 주민이 무식하여 그 글자를 부셔서 떼어내 버렸다. 돌틈 사이로 들여다 보니 마치 등불이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 무었이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마을의 王得玉이란 사람이 한마을 사람들과 함께 가 보았는데 石洞에는 灰炭만 있을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고 되어 있어 이 때 이미 장군묘가 벽화무덤인 것이 밝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84년 4월 요령성‧본계시 고고학 발굴대가 발굴하면서 무덤 상단부 남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밑으로 4.2m 까지 파고 들어가니 큰 돌덩이가 겹쳐서 쌓여 있었는데 모두 6층이었다. 그 밑에 큰 석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길이가 3.5m나 되었다. 이러한 석판들은 묘실 외벽일 가능성이 크다. 1987년 문화재 조사 때 묘 전체를 실측하였는데 묘의 둘레는 144m, 높이가 7m이고 면적이 약 1,295 평방미터였다. 1989년 요령성 지정문화재로 되었으며, 1991년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1992년 논문이 발표됨으로 해서 벽화무덤이라는 사실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내용도 일부 밝혀졌다.  

 

  무덤의 외형은 절두방추형이며, 둘레 150m, 높이 8m로 널길, 2개의 곁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이다. 널방은 잘 다음은 장방형 석재로 쌓았으며, 천장은 4단의 평행고임구조이다. 널방 바닥에는 2기의 돌관대가 놓여 있다. 널방 네 벽 윗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20군데에 걸쳐 못구멍이 뚫렸으며 동벽의 2개의 구멍에는 구리못의 일부가 남아 있다. 만장을 걸기 위한 못자리로 추정된다. 무덤칸 안에 백회를 칠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벽화주제는 ‘王’字무늬와 연꽃무늬 중심의 장식무늬이다. 

 

  장군묘는 환인에서 발굴된 유일한 벽화무덤으로서  ‘王’字가 나온 것으로 보아 묘의 주인이 고구려의 왕인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성으로 옮기기 이전의 왕은 동명왕 뿐이기 때문에, 아직 발표는 않고 있지만 현지 연구가들은 이 무덤이 동명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의견을 모으고 있다.  

 

Ⅳ. 앞으로의 조사 및 관리 방향 

 

1.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 

 

  “고구려는 邊方의 한 少數民族으로서······” 

 

  중국에서 나오는 고구려 관계 논문이나 저서에 반드시 써 넣도록 한 문구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에 대한 기본 관점이다. 중국의 학문 연구현황은 아직도, 학자들이 자유롭고 다양하게 의견을 발표하지 못하고 국가의 기본 방침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연구성과가 각 성의 고고연구소나 문물관리소 또는 박물관 같은 국가기관에서 나오고 있고, 그러한 기관의 공식적인 발표가 모든 연구자들의 연구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 연구의 어려움은 중국이 고구려 문제를 국경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한국이 통일이 되면 반드시 옛 고구려 땅에 대한 故土回復을 부르짖을 것이다’라는 전제 아래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 그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한‧중관계사의 조직적 연구 

  국가 기관에서 한국 통일 후 있을 역사 논의에 대비해서 관계자료 수집과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으며 상당 수의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있다고 한다. 

 

  2) 백두산에 새로운 定界碑 

  남북한 상호 방문과 고위급 회담이 있은 뒤인 1990년 한‧중간의 국경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백두산에 높이 1 미터 정도의 돌로 된 정계비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두 설치하였다. 

 

  3) 만리장성은 한반도의 평양 위까지다 - 역사지도책에 공식화 

  우리는 흔히 ‘만리장성은 산해관에서 가욕관까지다(東起山海關, 西至嘉峪關)’고 알고 있고 중국 사람들도 산해관 안을 關內라고 하고 그 밖을 關外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역사책에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쌓은 장성을 말하고 그 만리 장성 북쪽에 이미 전국시대부터 장성을 한반도까지 쌓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전국시대의 장성이란 燕나라 장성을 말하는데 1990년 遼寧교육출판사에서 나온 「中國古代歷史地圖集」에 보면 ‘燕나라 장성은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에서 시작하여 동북쪽으로 뻗어 내몽고 赤峰을 지난 뒤 동남쪽으로 구부러져 바로 遼寧省 開原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꺽여 동남쪽으로 뻗어 조선의 博川을 거쳐 바다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한국의 청천강 입구까지 연나라 장성으로 그려 넣었다. 이와같은 논리는 1991년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나온 「중국역사지도집」이나 학생들의 교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秦나라의 장성은 한 술 더 떠서 장성의 끝이 한반도 평양의 외곽까지 이른다. 진나라의 장성에 대해서는 ꡔ遼寧古長城ꡕ(馮永謙·何溥瀅 編著, 遼寧人民出版社, 沈陽, 1986)에 이렇게 써 있다. 

 

  “······‘起臨兆 至遼東’인 秦나라 장성과 ‘東起山海關 西到嘉峪關’인 明나라 장성을 혼동하고 있다. 사실 진나라 장성은 명나라 장성보다 훨씬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진나라 장성의 동쪽 끝은 燕나라의 바깥쪽 장성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그 노선은 河北省 圍場縣 동북부에서 내몽고자치주의 赤峰으로 들어가 敖漢, 奈曼, 庫倫 등의 현을 거쳐 요령성 阜新縣에 이른다. 거기서 계속 동쪽으로 彰武, 法庫, 開原, 鐵嶺 일대와 요하를 지난 뒤 동남쪽으로 淸原, 新賓, 桓仁, 寬甸, 압록강을 지나 碣石山에 이른다.” 

 

  즉,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이 평양에 있는 갈석산까지 뻗어갔다는 주장이다. 이와같은 주장은 갈석산은 낭낭국에 있고 낭낭국은 평양이라는 일본과 친일 학자들의 논리였는데 갈석산이 난하 근처에 있다는 것이 밝혀 지자 중국의 학자들은 1940년대 부터 고고학으로 증명해 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ꡔ요령고장성ꡕ에 보면 ‘1940년 대에 고고학자들이 요령성의 서북부와 적봉 부근에서 燕‧秦의 옛장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50년 대 이후 요령성 고고학자들은 장성 유적에 대한 대규모적인 조사를 통해 새로운 발견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조사과정을 통하여 장성의 구조와 방향을 분명하게 알아냈을 뿐 아니라, 그 연대 검증에 실물적인 증빙자료들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요동지방의 진나라 장성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이어졌다는 논리는 연나라 장성이 한반도까지 이어졌고, 진나라 장성은 연나라 장성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나라 장성이 한반도까지 이어졌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윗 책에서 연나라 장성의 요동 부분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철령성 남쪽 50리 되는 新臺子鎭에서 燕‧秦‧漢 시대의 큰 유적지를 발견하였는데 성터일 가능성이 크다. 이곳에서 부터 동쪽으로 청원, 신빈, 환인, 관전 지역까지는 遼東山區이므로 장성이 지나간 노선이었다. 근년에 이 노선주위에서 많은 연나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철제 농기구, 明刀錢 등) 이곳까지 연나라 문화가 분포되었음을 알 수있는 근거가 된다. 장성은 바로 이곳을 지나 압록강까지 뻗었다“ 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당시의 유물이 발견되었을 뿐이지 장성이 발견되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유물이란 교역을 통해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장성을 추정하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고학적 성과도 없고 충분한 논의도 없이 연‧진의 장성이 한반도 까지 뻗어 있었다고 주장하고 교과서에 까지 실어 모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중국의 이와같은 주장은 다분히 정치적 저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소 국경분쟁이 있을 때 소련측에서 만리장성을 들고나와 국경을 주장해 중국측이 난처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장성이 국경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어느 왕조의 장성이건 그것이 중국의 국경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우리나라 고대의 여려 발전단계와 여러 경제유형에 처해있는 민족들이 단순히 방어상의 필요때문에 지세가 험남한 지역에 수축한 하나의 군사시설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세계의 어느나라 역사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성을 중국의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국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나 혹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ꡔ요령고장성ꡕ) 

 

 다시 말해 중국의 국경은 장성보다 더 바깥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異民族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큰 무기로도 사용하였다. 

  “춘추‧전국시기의 각 제후국이 쌓은 장성을 제외하고, 漢族이 세운 왕조가 쌓은 것으로는  秦‧漢‧隋‧唐‧明나라 때의 장성이고, 鮮卑·高句麗·契丹·女眞·蒙古 등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가 쌓은 것으로는 北魏‧東魏‧北齊‧北周‧高句麗‧遼‧金 때의 장성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장성은 어느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대의 각 민족 백성들의 피땀과 지혜의 결정체이며 중화민족의 공동 역사재산이다” (ꡔ요령고장성ꡕ) 

 

  선비족, 고구려의 산성도 결국은 중국의 산성이라는 아전인수격 논리인 것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만리장성」이란 일본 방송국의 텔레비젼 프로에서 촬영팀이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압록강 가의 만리장성 끝은 필자가 보기에는 고구려의 산성이 분명하였다. 중국 장성협회의 안내를 받았다는 촬영팀은 압록강 가의 성터만 보여 준 뒤 거기서 산해관까지의 장성은 전혀 보여주지 않고 갑자기 산해관부터 다시 시작하는 해프닝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중국이 만리장성은 한반도까지 이어?다고 주장은 하고 있으나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같은 중국의 교과서 왜곡은 어쩌면 일본의 교과서 왜곡보다 훨씬 심각할 수도 있다. 만일 중국이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한반도 통일 후 한‧중간에 국경문제가 생길 경우 평양까지 이르는 장성의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도 이 문제에 대한 사태 파악과 학술적 연구를 통한 대응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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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리장성에 대한 중국의   각 지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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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소화한 고구려 영토 

 

  중국에서 나온 역사지도집을 보면 중국에서 인정하고 있는 고구려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구려 영토에 비해 매우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고구려 성이라고 발표된 성터가 있는 지역 조차도 고구려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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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영토에 대한 중국의 지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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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한국의 고구려사 인식 

 

   위와같이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이 다분히 정치적인데 비해 한국인들의 고구려사 인식은 상당히 감상적이다. 현지에 간 한국인들이 ‘만주는 우리 땅’, ‘고구려 옛땅을 되찾자’, ‘고토회복’ 같은 자극적인 표현을 하므로 해서 중국 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옛 고구려 땅을 과연 찾을 수 있는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중국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등 확실한 대안이나 연구실적도 없이, 현재는 엄연히 중국의 영토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우리의 바램만을 얘기한다는 점에서 감상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민간 연구기관이나 개인 학자들, 또는 언론기관에 의해 중국 내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소개가 계속되면서 국민들의 관심도 대단히 커졌다. 앞으로 고구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더욱 커질 것이고 연구하는 학자들도 늘어날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은 우리가 쉽게 가볼 수 없는 북한과 중국 영토 안에 있기 때문에, 이들 고구려 유적을 어떻게 연구하느냐 하는 점은 앞으로 계속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해 일찌기 큰 비중을 두고 연구해 왔기 때문에 상당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국 안에 있는 고구려 유적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이후 별 성과를 걷우지 못하고 있다. 중국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60년대 초까지 북한과 중국은 공동으로 발굴과 연구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리므로 해서, 60년대 초 이후 학술교류는 중단되었다고 한다. 

 

  3. 앞으로의 조사 및 관리 방향 

 

1)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국이 고구려 유적 보존을 제안하는 것은 역효과를 낸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사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시각은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열의와 선의가 중국에게는 간섭과 부담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예를들어 한국이 만주지방의 고구려 유적을 보존하는데 참여하겠다고 하면 중국측은 그러한 한국의 의도를 따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이 한국인의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중국의 국책 내지는 국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 되고, 중국측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한 때 응할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한국이 중국에게 고구려 유적의 보존을 제안하는 것은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꼭 보존사업에 참가하고자 할 때는 국제기구를 통해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재 보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보다는 더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문화재를 담당하는 문물관리소와 전담 전문인이 군 단위까지 있어 문화재 관리 조직과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실제적인 연구 조사는 민간 연구기관을 활용한다. 

 

  이처럼 고구려에 대한 문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이다. 따라서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민간 연구단체에서 전문적으로 수행하고, 국가는 그러한 단체를 적극적으로 후원‧육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본다. 

 

3) 앞으로의 조사‧연구 방향 

 

   지난 수 십년 동안 중국‧북한‧일본에서는 고구려 연구에 대한 상당히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국내에는 그러한 연구 결과를 접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 연구는 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에는 고구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인적 자원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앞으로 국내에서 필요로 하는 고구려 연구자나, 중국이나 북한 현지에서 공동연구를 할 경우 필요한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가.  高句麗 관계 자료수집 및 자료센터 운영 

 

  가)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등 각국에서 발표된 논문‧논저 등 자료 수집 

  나) 자료의 분석 및 분류 

  다) 자료의 전산화 

라) 목록 출판 

  마) 고구려 관계 연구자들에게 자료 제공  

 

   나. 外國에서 발표된 高句麗 관계 論文과 著書의 飜譯 出版  

 

  국내의 고구려 연구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발표된 논저를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번역하여 출판해야 한다. 

 

  다. 高句麗關係 國際學術會議 및 관계 학자 교류 

 

  우리가 직접 발굴할 수 없는 현지의 학문적 성과를 공개하도록 하는 데는  현지의 연구자를 초청하거나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객관적 토론을 거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또한 적극적으로 우리 학자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연구 성과를 습득하도록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라. 고구려 연구에 대한 남‧북한 학술교류

고구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북한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고구려 연구에 대해서는 북한이 훨씬 많은 연구 인력과 업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그러한 연구성과를 일차적으로 흡수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고구려 연구는 남북한 학술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 發掘 調査 事業 

 

 

중국 및 북한과 공동 발굴조사 추진. 

  이 문제는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추진해야 한다. 

 

 바. 高句麗學會 構成 및 支援 

  가) 고구려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모아 <한국 고구려 학회> 창립 

나) 외국 및 북한의 학자들도 참석하도록 유도하여 교류 추진 

  다) 논문집 발간 및 세미나 개최 지원 

 

사. 高句麗史 및 古代史 硏究를 위한  留學生 派遣 

 

 

     가) 우리의 고대사는 중국 동북지방에 직접 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므로 유학생을 보내야 한다 

 

 

      나) 장학 사업 

 

 

   아. 現地에 사는 우리 同胞에 대한 歷史敎育 

 

      가) 조선족 중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우리 역사교육을 위한 초청 연수 

 

      나) 현지의 연구자에 대한 국내 유학 지원 

다) 연구기관이나 대학 설립 

 

 

   자. 고구려 유적 탐방의 활성화를 통해 현지 교육 

 

  고구려 유적의 발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중국도 관광 수입을 위해 현지를 탐방하는 것은 환영한다. 이점을 잘 활용하여 유적 탐방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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