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 이용웅 선교사 가족 카페 ☆
 
 
 
카페 게시글
상담자료 스크랩 하나님 이미지의 회복
☆~구름꽃~☆ 추천 0 조회 190 12.08.22 22: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나님 이미지의 회복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라디아서 4:4∼7)
 
  내적치유 사역에 종사해오는 사역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하나님 이미지가 회복되지 아니하고서는 치유가 잘 진척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도 지난 몇 년 동안 내적치유 사역을 해오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만약 내담자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상담자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한 1서 20)는 말씀이 있듯이,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담자로서의 나를 사랑의 마음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셈이 됩니다.


  동일한 원리로 만약 내담자로서 성도가 상담자로서의 목회자인 우리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사람들이 치유자로서 목회자에게 찾아와 자신들의 일생에 발생한 어떤 상처를 고침 받기 원할 때 있어야 할 가장 최초의 치유는 창조주와 그들과의 관계이다. 어떤 사람은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채로 어떤 사람은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를 안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큰 분노 감정을 안고 우리를 찾아 올 수 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강한 분노감정 때문에 이들과의 대화가 용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고서도 이들은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부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할 때 언제나 중요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 두려움을 느끼는 권위인물(authority figures)이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부모님들과 같은 권위인물에 대한 감정들(두려움, 분노 등)을 대게 숨기거나 부인하기 때문에 직접 질문함으로 물어봐야 한다. 부모님들에 대한 분노감정은 언급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분노감정도 언급하기가, 곧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불편하고 어렵다. 역기능가정 자녀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는 완전하다. 심지어 그들에 관해 말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존 브래드 쇼는 (가족)이란 책에서 이 사실을 잘 설명한다


  내적 치유 사역자로서 우리들이 해야할 일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그것이 기도를 통해서든 무엇이든, 언제나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갖고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선포하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관해 선포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비 그 자체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있는(have) 모든 훌륭한 뛰어난 속성들은 하나님께 돌렸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제한된 인간성도 돌려드린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제한된 인간성의 한계로 말미암아 그분의 능력도 제한된다는 것이다는 것이다. 우리의 제한된 사랑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에 대한 그 분의 능력을 제한한다. 우리의 제한된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에 대한 그 분의 능력도 제한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능력도 제한한다. 이렇게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우리는 우리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도 제한시키고, 사역의 능력도 한계 지워져 가는 것이다. 이 사실은 상처 입은 심령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체험을 통해 갖고 있는 하나님 이미지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를 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담 과정 중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들을 때 화가 나고, 답답하며, 기분 나쁠 때가 많아요."라고 고백하는 내담자들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는 "그런 설교하는 목사 놈이 미웠어요."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를 벗어버리도록 도와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 이미지의 확인


  먼저, 하나님 이미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것은 매우 쉽고 간단하다. 어떤 종류의 하나님 이미지를 사람들이 갖고 있는지 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단적인 배경을 알아봐야 한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주님은 몇 차례나 거듭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도 보았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먼저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지 않고는 인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거듭 반복해서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여러분께서 다음의 단어를 생각할 때 어떤 이미지가 머리에 떠오르는가? "고향집"(Home). 어떤 사람은 집에 대한 멋있는 기억 때문에 몸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 집이란 것은 구덩이(pit)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 나올 수 없는 지독한 곳, 지긋지긋한 곳 말이다.


  이제 아버지(father)란 단어를 생각해보자. 이 말은 어떤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가? 보호해주고 지원해주며 사랑해주고 인정해주며 격려해주는 어떤 분의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니면 엄하고 판단하며 권위적이고 학대하며 알콜 중독 또는 잔인한 이미지의 어떤 분이 떠오르는가? 우리가 사역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져가는 우리의 하나님 이미지는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 이미지로 우리가 선언하는 하나님 이미지가 된다. 어떤 때에는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 이미지는 너무나 좋은 훌륭하신 하나님 이미지이다. 사람들이 우리 앞에 올 때 그들은 우리로부터 우리 안에서부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느끼거나 체험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때 나의 내담자에게 일반에 알려져 있는 분을 지칭하면서 "그분처럼 그런 좋으신 아버지 상을 갖고 계신가요" 혹은 "XXX님이 누리시는 하나님 임재는 제게서 보고 느끼는 그런 분위기입니까."하고 물어보면 대답은 "아뇨 그렇지 않아요."이다. 매우 엄한 신앙 전통을 가진 교파, 근본주의 혹은 율법주의 등의 교파 출신들은 대개 매우 엄한 융통성이 없는 아버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 매우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하나님 이미지를 검사해보아 그 이미지가 주님의 축복 속에 치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먼저 치유 받아야 함을 의미하고, 그런 연후에 그 이미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함도 의미한다.


  본인은 치유 받기 위해 또는 기도 받으러 우리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서적인 반응(emotional response)을 받기 원하지 지적인 반응(intellectual response)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성경 기자들은 지적인 정보만 우리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병들고 지친 영혼들에 대한 주님의 정서적인 반음들도 전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사 독생자를 보내주셨으며, 주님께서도 사람들과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며, 울기도 하시는 등의 기사도 전한다. 이러한 정서적인, 곧 감정적인 반응들 때문에(대개 부족한 정서적 반응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 면에서도 꽉 막혀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찾아오는 것은, 우리가 목회자, 곧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며, 우리들의 기도 속에 하나님께서 임하실 것을 믿고 또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영혼을 위한 기도가 우리의 중재의 도움을 통하여 응답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죄책, 수치, 용서 못함, 또는 영혼의 거짓 표준 때문에, (여러 면에서 자신들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화가 나있기 때문에, 증오의 죄가 자신 속에 있으나 어찌할 수 없는 등)의 이유로 자신들이 직접 기도하기보다는 우리를 통해 기도를 인봉한 채 하나님께 보내어 줄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기도에 대해서는 신념이 없지만, 그들을 위한 우리의 중보 기도는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만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듣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들의 영혼이 정화(catharsis)되는 것을 체험하기도 한다.


  어느누구도 하나님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예수그리스도 우리 주님만큼 누린 사람은 없다. 어느누구도 아버지 하나님을 주님만큼 사랑의 관계 속에서 교제한 사람도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도 아들되심(sonship)에 대한 완벽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유대교도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이름을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들과 급진적으로 달랐다. 주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셨을 뿐 아니라 "아빠, 아버지"(Abba)라고 불렀다. 'Abba'는 아빠(daddy)에 상당하는 '아람어'(Aramaic)이다. 여기에 정통 유대교인과 주님과의 차이가 있다. 정통 유대교 신봉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possessing)이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아빠(daddy)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시었다. 더구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하신다.


  Judith MacNutt라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치유목회를 하는 분이 계신데 이 분이 이스라엘에서 기도 훈련을 위해 몇 년간 체류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어린 자녀들이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에, 아이들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버스 정류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들을 향해 양손을 벌리고 달려가면서 "Abba, Abba"라고 부르며 달려가는 장면을 볼 때 Judith는 매우 부러웠다. 그때 그녀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왜 나는 저 아이들처럼 하나님에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아빠라고 부르며 달려가 안기지 못할까?"


  그녀는 지상에 계신 육친의 아버지(earthly father)와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천상의 하나님 아버지(heavenly Father)를 향해 그런 감정을 어느 정도 투사(projection)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이로되 아빠와 같은 친밀감(intimacy)이 개발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에 성적 학대를 당하였거나 크고 깊은 영혼과 육체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빠(daddy)"로 부르기를 대단히 어려워한다. 그런 자의 하나님은 여전히 쳐다보기만 하면 죽음이 찾아오는 그런 하나님이다. 시내 산 아래에도 갈 수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처형당하시자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 오직 그 해의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십자가의 속죄가 완성되는 그 순간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간격 하던 휘장이 꼭대기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그분의 마음(heart)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함께 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에 여러분은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배우셨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알고있는 그 하나님을 내담자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서 내담자와 함께 기도관계 안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과거 어린 시절에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영혼의 두려움과 암흑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들과 영혼 내면의 준거의 틀(inner frame of reference)면에서 너무나 다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요구하고 주장하며 밀치는 하나님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함께 과거로 되돌아가 하나님에 관해 무슨 가르침을 받았으며, 어떤 설교를 들었는지 조사해봐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 인애와 용서, 그리고 화해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그와 정 반대되는 하나님이신가.


  오늘날 본인이 접하게 되는 한국교회의 일부 설교에 나타나는 하나님 이미지는 여전히 이용하고(manipulation), 통제하고(control), 두려운(fear)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하나님 이미지가 더 많은 것 같다. 용서와 자비와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는 부족해 보인다. 여전히 이방신의 이미지들이 설교 속과 자녀들에게 향한 부모들의 메시지 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우리의 자녀들,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하나님 또는 예수님 이미지를 그림(drawing)으로 그려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그들은 우리의 하나님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두려움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이런 시도를 통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집사님이 있었다. 이분이 어릴 때, 식구들 모두 함께 교회에 나가는데 유독 아버지만 주일만 되면 낚시하러 가거나 사냥하러 다녔다. 그때마다 그 교의 담임목사는 5 살배기 어린 여자아이에게 고개를 가로젓고 혀를 차면서 "너도 알지 네 아버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후 아이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특히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자를 때마다 울면서 애걸하였다. "아빠, 아빠는 교회로 가셔야 해요. 아빠는 지옥으로 가고 있단 말예요." 아버지는 "아니야, 염려하지 마, 내가 지옥으로 가고있는 것이 아니야, 염려하지 마"하며 딸을 달랬지만, 아이는 교회로 갈 때마다 목사님의 말이 생각나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였다고 한다. 생일 때는 기쁨보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더 많이 느꼈다. 물론 그 아이의 아빠가 지옥에 간 것이 아니다. 그는 신자였었고 후에 그 교회 담임목사가 바뀐 후 출석하였다.(사실상 문제의 근원은 그 교회의 목사와 그 아이의 아버지간에 불편한 관계였고 그 목사는 어린아이에게 부당한 전이감정을 쏟아 부은 것이다.) 여기서 본인이 강조하는 문제는 이 여자아이의 영혼 속에 두려움(fear)이 스며들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예수님은 정말 좋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이 말이 여러분의 영혼 속의 어떤 부분에 와 닿지 않은가? 여기서는 두 가지 이미지가 담겨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예수님, 평화의 인간이며 유대지방의 언덕을 거니셨던 분, 결코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셨던 분. 그리고 그에 비해 하나님 아버지, 요구하고 주장하며 검사하고 짚도 없이 벽돌을 만들라고 하시며 결코 만족치 않는 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분이라는 이미지, 바로의 신. 그러므로 어린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역 기능가정 출신들이다. 알코올 중독 또는 더 심한 중독에 걸린 부모들을 둔 가정 출신의 자녀들이 많다. 이런 가정의 자녀들은 결코 부모들을 만족케 할 수 없고, 하나님도 만족케 할 수가 없으며, 어느 누구도 만족케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 중의 어떤 이는 부모들로부터 단지 "너는 실수로 태어난 아이이고, 너는 실수덩어리이다."는 메세지를 일찍부터 들어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곧, 영혼의 어떤 부분들 속에서 이런 메시지가 들려오는 것이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못났다." 그랬다면 이런 질문을 해보기 바란다. 어린 시절에 무엇을 배웠는가? 하나님에 관해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주님의 어떤 부분을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매우 깊숙이 인간 영혼의 심층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역기능 부모들


  본인이 보기에 거의 모든 영혼의 상처가 발생하는 토양은 가정 안에 있는데, 그 주된 원인은 실패한 부모들이다(failed parents). 이 세상에 완전한 부모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나의 아내도 자녀들에게 실수를 범한다. 본인도 때로는 성질도 내고 거칠게 아내나 자녀들을 대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주며, 함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들, 상처들을 가지고 갈 수 있다. 부부간에도 주님 앞에서 함께 기도할 수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이 세상의 어떤 이들보다 더 기도할 수 있다.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기도는 너무도 중요하다. 많은 부모들이 찾아와서 말한다. "교수님(목사님), 저는 우리 아이들을 망쳤어요."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다. 아이들을 하나님, 그 분께로 데리고 가라. 그것은 바로 여러분 부모들이 이 세상의 어떤 이들보다 여러분의 가족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자신이 태어난 가정에서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자란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거의 불가능하다. 지적으로는 "예"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결코 머리에서 가슴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미국에서 어떤 집사님이 여덟 번이나 아이를 자기 방 침대에 옮겨놓고 재우려고 해도 잠들지 못하는 아이문제로 지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아이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여덟 번째로 아이를 침대에 뉘어놓고 방에 들어갔더니 다시 아이가 찾아 왔길래 물어보았다. "외로워요...."하는 것이 그 아이의 대답이었다. 다소 뜻밖이라 생각하면서 "얘야, 예수님이 너와 함께 계시잖아"라고 했더니, "그렇지만 엄마, 피부가 있는(skin) 예수님이 더 좋아......"라고 아이는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렇다. 이것이 해답이다. 지상의 부모들(earth parents)이 아이들이 생애 최초로 체험할 수 있는 최초와 신(God)인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만질 수 없고, 손을 뻗어 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에 의하면, 아이들이 최초로 경험하는 신뢰(trust)는 이들이 태어나는 가정의 부모에게서 형성된다. 부모의 어떠함에 따라 이들의 기본적인 신뢰(basic trust)가 개발되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 잘못되면 나중에 주변의 권위인물들을 신뢰하기가 힘들어진다. 장성하여 결혼을 해도 서로 헌신을 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 신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일생 최초의 신뢰경험이 어떠한지 발견하여야 한다. 본인은 내담자가 잘 몰라 표현을 못하면 다음과 같은 요점의 질문을 한다. "누가 밤에 잠자리에 눕혔습니까?" "당신을 안고 침대에 뉘이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누가 젖을(우유를) 먹였습니까?" "외출할 때 누가 안고 나갔습니까?" 이러한 단순한 질문들을 통해 내담자는 자신이 어릴 때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외로움을 느끼며 자랐는지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한 번도 엄마, 아빠가 잠자리에 데리고 간 기억이 없어요." "어릴 때 제가 잠잘 때는 두려워서 혼자 떨었어요." 이러한 의사 교류를 통해 상담자는 내담자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줄 수가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엇과 같을까요."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두가지 성을 받았다. 곧, 남성(masculine)과 여성(feminine)이다. 아버지(남성)뿐만 아니라, 자녀를 학대하고 소홀히 다루며 방치해두는 어머니들이 많다. 이 모든 문제들은 깊은 상흔을 영혼에 남긴다. 그리고 대개 목회자들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러나 상처입은 영혼들에게 이것은 단지 불가능한 일이다. 여러분의 교회에서는 어떤 이미지의 하나님이 선포되는가? 무슨 이미지, 의미가 여러분 영혼세계에 이미 갖고 있는 하나님 이미지를 강화시키는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속 사람을 강건케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엡 3:16). 어떤 사람의 속 사람이 강건해지도록 도와주려면 먼저 그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 관계의 회복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하나님과 부모들과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상호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 논한바와 같이 하니님 이미지를 회복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관계는 물론 아버지 또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 이미지는 일반 세속적 상황에서의 치유자들, 의사들이나 상담자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목회자들 또는 크리스찬 상담자들만이 다루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것은 에모리 대차교의 찰스 거킨(Charles Gerkin)이 말했듯이 내담자의 영혼의 문제, 곧 "역사적 뿌리"(historical root)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된다.


  부모님들이 생존해 계실 때는 화해가 가능하지만, 부모님들이 돌아가셨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및 고통, 사망, 상실에 관한 주제와 관련된 하나님 이미지는 생략한다. 고난과 사망 등의 주제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안태길 교수(침신대 교수, 한국치유목회연구소장)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