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장리박물관을 둘러보고 공산성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은 3시였습니다. 날이 덥고 경사가 가파른 곳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2.7km나 되는 공산성 성곽로를 따라 모두 잘 걸었습니다.
공산성에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많은 역사적인 사건이 많습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이곳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하여야 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이 이곳에서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고 후삼국시대에는 이곳을 두고 왕건과 견훤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고려 현종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으로 몽진을 했고 임진왜란 때는 광해군이 세자의 신분으로 이곳에 머물면서 민심을 추스린 적도 있습니다. 이어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와서 5박 6일을 머물며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제의 고도였기 때문에 유물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자들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파괴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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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 길 옆에 송덕비가 늘어서 있습니다. 조선시대 공주는 임진왜란 이후 충청도 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던 곳이라 이런 송덕비가 곳곳에 많이 남아 있었는데 모두 모아서 이곳에 다시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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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인 금서루. 지금 통행로로 이용되는 곳이 과거 금서루가 있던 자리라 합니다. 남문인 진남루가 삼남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이곳은 조그만 문루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공산성이 대대적으로 훼철되면서 주 통행로가 되었습니다. 금서루는 1993년에 복원이 되는데 그 자리에 있질 못하고 약간 오른쪽 위로 비켜나 앉았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문과 지금의 통행로가 이상한 형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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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금서루 문. 아래층이 문이고 문 위에 다시 누각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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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문에 들어서면서 박세리와 박찬호를 세계 유산 홍보대사로 임명한 사진을 보고 있습니다. 공산성은 2015년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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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에서 바라다본 금서루. 작은 문 아래 다시 큰 문이 있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공존하는 성곽길. 유적은 한 번 파괴되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길로 일제강점기에는 공부 갑부 김갑순에게 소작료로 내는 곡식을 실은 우마차가 수 없이 통행하였을 것입니다. 공주지역 대표적인 친일파인 김갑순은 성안마을의 토지를 일제로부터 불하받아서 중군영 등을 훼철하고 대규모 창고를 지어 축재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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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루 문루 2층 누각. 최근에 복원된 3칸 건물입니다. 이곳에 올라서니 금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으로 조금 더위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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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루에서 본 공산성 서북 성벽. 왼쪽으로 전망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공산정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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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본 금강. 공주를 상징한다는 금강철교가 보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부선 철로가 놓이자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를 대전으로 옮기면서 주민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당시에는 최첨단 공법에다가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교량으로 명물이 되었습니다. 6.25동란 때는 미군이 천안전투에 패배하고 이곳 금강에 방어 전선을 구축하면서 저 다리를 폭파하였습니다. 지금의 금강교는 몇차례의 복구 작업을 거쳐서 복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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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정 2층. 바람이 불어와 여기서는 더위를 별로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민재의 얼굴이 더위에 익어서 빨갛습니다. 이 건물의 명칭이 공산정이지만 실은 정자보다는 누각에 가깝습니다. 공산정보다는 공산루가 어울리는 건물인데 공모로 얻은 이름이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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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쉬면서 공산성 이야기를 듣습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이라 하였습니다. 공산성이란 말은 문헌 상에는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공주성으로 불렸습니다. 공산성이 공주성에서 비롯되었는지 공주가 공산성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일설에는 강 건너 편에서 보면 이 산세가 귀 공(公)자와 흡사하여 공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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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성안마을이 있었던 자리 북쪽 강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곳에 망북루가 있던 자리였다고 합니다. 공산성의 북쪽 관문이지만 그 규모로 보아 공산성의 정문격입니다. 그러면 망북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임진란 때 공주는 다행이 전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정유재란 때는 왜군에 의하여 20일 정도 점령되어 있어서 공주 전체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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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남쪽으로는 조선 시대 중군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중군은 종 3품의 벼슬인데 보통 관찰사의 병사 업무를 보좌하는 역할을 합니다. 공주는 임진왜란 이후 충청감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에 중군영이 설치되었습니다. 광복루도 여기에 있던 중군영 문루를 옮겨가서 지었다 하니 일제강점기 전에는 온전히 군영이 보존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김갑순이 이 땅에 창고를 지으면서 훼손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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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서 본 공산정. 그런데 고려 때 왜 웅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공주라는 지명을 사용하였을까요.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땅이었던 이 웅진성을 공격하였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웅진성이 워낙 요새라서 함락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에는 차령 이남과 공주강(금강)바깥 사람은 쓰지 말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태조의 입장에서는 웅진이라는 지명조차 생각하기 싫어서 공주로 바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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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지나 석빙고 앞 고개. 아이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공주였을까요? 앞에서도 웅진산성의 산세가 공(公)자와 닮아서 공산이라고 하였다고 하지만 아마도 웅진의 원 이름인 고마나루와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금강이 역시 고마나루(곰나루)에서 왔다면 고마나 곰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글자를 차용하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참고로 한자에 곰으로 발음이 되는 글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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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 마루에서 내려다 본 만하루와 연지. 조선시대의 연지는 이렇게 석축을 깊게 쌓아 만들고 계단을 통하여 오르내리는 연지는 없습니다. 이 연지는 백제시대의 연지로서 그 후 조선시대에 복원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영조 때 홍수로 매몰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백제인들의 돌을 다루는 기술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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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루 앞에 있는 영은사.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승장 영규가 이곳 공주 출신입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곳에 합숙하면서 조련을 받은 승병들이 영규대사의 지휘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영규대사와 조헌은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면서 기세를 올립니다. 이후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열 배가 넘는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금산에 가면 이들을 기려 조성한 '칠백의총'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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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에서 만하루로 가는 길에는 암문이 있습니다. 암문은 성벽에 은밀하게 설치하여 적에게 아군의 정황을 노출시키지 않도록 만든 문을 말합니다. 성 밖으로 구원병을 청하러 군사를 보내거나 성 밖에서 물자나 식량을 반입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일종의 비밀 통로입니다. 공산성은 암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남한산성 같은 곳은 암문이 무려 16개나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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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루에서 아이들에게 한옥 건축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둥과 기둥의 앞뒤를 연결하는 들보, 들보와 들보를 연결하여 지붕을 받치는 도리 등등. 아이들도 처음에는 이런 용어가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지만 이런 용어를 모르고서 우리 건축물을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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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암문 옆에 통행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공산성은 임진왜란 직후 류근이 선조 35년 1602년에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때 감영을 지었는데 감영의 이름을 쌍수영이라 하였고, 공북문과 진남문을 새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에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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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이 1607년에 공주목사로 이곳에 부임하여 옵니다. 허균은 이곳에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9개월 만에 파직이 되었지만 이때 서얼 출신들을 이곳에 불러들여 가까이 지냈습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허균은 나중에 '칠서의 난'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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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 앞 우물. 아이들이 물을 마시면서 더위를 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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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는 처음에는 묘은사라고 하다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옮겨 온 뒤로 은적사로 불렸습니다. 나중에 다시 영은사로 개칭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이곳에 승병들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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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 머리 위로 물을 부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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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에서 더위를 잠시 잊고 다시 성벽을 오릅니다. 이곳이 가장 경사가 가파르고 힘든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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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보고 열심히 올랐는데 다시 한 굽이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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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이가 힘들게 계단을 올라서고 있습니다. 동일이는 처음 도보여행에 참석하는데 다른 아이들보다 힘이 많이 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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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어! 이제 경사는 한풀 꺾였는데도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 코스가 힘이 드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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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습니다. 뒤에 보이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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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 가장 높은 곳 . 여기서 서면 금강 북쪽 공주 신시가지와 금강이 한 눈에 들어 옵니다. 저 금강 물줄기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맨 처음 간 석장리박물관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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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금강은 백제문화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강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남하한 백제에게 금강은 중국, 일본과 교역하기 위하여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할 적에도 백제는 결코 금강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생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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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서 잠시 숨을 돌리면서 뒤처진 아이들이 오길 기다립니다. 여기서부터 다시 얼마 동안 내리막길입니다. 그 다음 오르막길은 그리 경사가 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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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루. 2층 누마루에 앉아서 김구 선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화를 들려 줍니다. 내일 우리가 갈 마곡사 '백범 명상의 길'에 대한 사전 지식이기도 합니다. 이 누각은 원래 중군영 옆에 있는 문루였는데 일제가 이리로 옮겨 와서 웅심각(雄心閣)이라 이름 지은 것을 백범 선생이 광복루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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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인지 아이들이 멸심히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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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류각. 백제의 동성왕이 건립하였다는 누각입니다. 이 지역을 조사하면서 누각 터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 건물을 올렸습니다. 이 건축 양식이 백제의 양식인지는 다시 논의를 해 봐야 할 사안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터를 그대로 놔 두는 것이 더 좋을 듯한데 이렇게 상상하여 건물을 짓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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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류각 옆에 서 있는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공주는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당하였습니다. 이 때 명군이 함께 공주를 탈환하였는데 이를 고맙게 여겨 세운 비입니다. 이 비는 원래 금강 변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를 수거하여 왜구라고 쓰인 부분을 훼손시키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은 것을 해방 후 파내서 이곳에 옮겨 세웠습니다. 답사를 해 보면 우리 국토와 역사가 일본의 손길을 피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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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루에서 내려와 다시 성곽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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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동문을 향하여 내려갑니다. 내리막길이어서 한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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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볕이 드는 곳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그늘이어서 그리 덥지는 않습니다. 동문루는 1993년에 복원되었습니다. 동문루로 불리다가 2009년 시민 공모로 영동루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영동루라는 편액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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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루 앞길. 한 때는 이 남문 앞이 백제 왕궁지가 아닌가 하고 추정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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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우물터. 왕궁지로서는 좀 좁다는 이견(異見)도 있지만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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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돌면 이제 출발지인 금서루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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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금서루가 보이고 성곽을 따라 가면 공산정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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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루 누문 아래로 통과하여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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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가 약간 넘었지만 아직도 볕은 여전히 뜨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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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으로 내려서자 아이들의 얼굴에 안도하는 빛이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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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내려서서 올려다본 공산성, 성벽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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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국밥 명가 이학식당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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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과 곰탕이 맛이 있었는데 국밥이 약간 매웠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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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를 대표하는 음식이 국밥입니다. 공주갑부 김갑순의 어머니도 가난하여 국밥 장수를 하여 김갑순을 키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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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의좋게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