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 판서 김공 묘갈명(贈判書金公墓碣銘) - 이재(李縡)
[생졸년] 1553년(명종 8)~1607년(선조 40) / 향년 54세
예전 임진년(1592, 선조 25) 왜구가 대거 침입하자 영남과 호남이 먼저 무너졌다. 선조께서 여러 도의 백성에게 하유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니, 사방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이 많이 일어났다. 당시 김만수(金萬壽) 공은 봉산(鳳山)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공은 광산(光山,광산 김) 사람으로 키가 아홉 자 남짓이었으며 담략이 남달랐다. 형제 셋이 있었는데,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가 모두 씩씩하고 용감하기로 이름났다. 공은 당시 실직하여 집에 있었는데,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며,
“내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감히 죽지 않겠는가.”
하였다.
응모한 장사가 9백 명이었는데 여러 사람이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천수를 후미로, 백수와 구수를 선봉으로 삼아 밤새 난리가 난 곳으로 달려갔다. 장단(長湍)에 도착하여 조방장(助防將) 유극량(劉克良,?~1592)과 군사를 합쳤다. 임진(臨津) 전투에서 관군이 대패하고 백수가 죽자, 공은 두 아우와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본군(本郡)으로 돌아와 재주 있고 용감한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쌓아 다시 거병할 계책으로 삼았다.
공의 아들 광협(光鋏)은 나이가 열아홉이었는데, 용맹이 모든 군사 중에 뛰어났다.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로 어가를 모시고 서쪽으로 갔는데 부절(符節) 하나를 받고 와서 연해의 여러 고을을 순찰하다가 공과 만났다. 당시 적병이 가득 차서 황해도 전체가 적의 소굴로 전락하여 관리들은 모두 인수를 풀어놓고 달아났다.
순찰사 이일(李鎰,1538~1601)이 공을 임시로 본군의 군수로 차임(差任)하니 민심이 조금 안정되었다. 8월, 여러 군(郡)의 군사와 함께 공격하여 적을 크게 이겼다. 성상께서 의주(義州)에 계시면서 처음에는 황해도 백성이 모두 적을 따랐다고 들었다가 공의 승전보가 당도하자 몹시 기뻐하며 학사(學士) 이호민(李好閔,1553~1634)에게 교서(敎書)를 지으라 하고, 공에게 의병장(義兵將)의 호칭을 내려 충의를 장려하는 한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하였다. 공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으니, 부자와 형제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였다.
당시 적의 대군은 평양(平壤)에 있었고, 적의 우두머리 한 사람이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선령(洞仙嶺)을 막아서 지원하였다. 공의 군사는 율진(栗津) 가에 있었는데, 얼마 후 적병이 부거원(富車原)으로 와서 주둔하였다. 공이 몰래 강을 건너 공격하여 하루에 세번 싸워 세번 이기니, 적이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다. 광협(光鋏,아들)이 밤을 틈타 적의 병영을 공격하여 대장을 찔러 죽이고 적을 무수히 죽였다.
또 남은 적을 추격하여 고정촌(古井村)에서 물리쳤으나 이날 탄환에 맞아 죽었다. 장수들이 모두 공을 조문하자 공이 말하기를,
“아이는 제 죽을 곳을 찾았는데 무엇하러 조문하는가.”
하였다.
이듬해 봄, 명나라 군사가 평양을 함락하자 공은 적이 동쪽으로 달아날 줄 알고 구수(九壽,동생) 등을 보내 지현(砥峴)에 군사를 숨겼다가 수십 명을 참수하였다. 이해 가을, 적이 영남으로 물러나 주둔하자 조정이 남쪽 변방을 중시하여 공을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등용하였다.
공은 의병을 해산하여 각기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부임해서는 군사와 백성을 다독이고 밤낮으로 무기를 수선하며 군량을 모았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한산도(閑山島)에 주둔하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1567~1596)이 광주(光州)에 주둔하였는데, 공은 각기 군량을 도와 운송이 끊이지 않았다.
갑오년(甲午年,1594) 체직되어 돌아왔다. 녹훈(錄勳)할 적에 공(公)을 미워하는 자가 저지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두니, 식자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공의 모친은 나이가 아흔이었는데, 공은 세상 일에 뜻이 없어 십 년 동안 집에서 지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으로 몸을 상해 병이 되었다. 상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미년(丁未年,1607) 2월 9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5세였다. 본군 우기산(禹岐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자가 덕로(德老)이며, 그의 선조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에게서 나와 8대를 연이어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휘 남우(南雨)가 이조 참판을 지냈다. 증조 윤하(潤河)는 찰방을 지냈고, 조부 국니(國柅)는 경원 판관(慶源判官)을 지냈고, 부친 대유(大有)는 훈련원 판관을 지냈다. 모친 낙안 오씨(樂安吳氏)는 감찰 세훈(世勳)의 딸이다. 공의 배위는 거창 신씨(居昌愼氏)이며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배위의 부친은 현령 방우(邦祐)이다.
광협이 죽은 뒤 천수의 아들 광철(光鐵)을 후사로 삼았다. 광철은 2남을 두었으니 진남(振南)과 분(玢)이다. 진남은 일찍 죽고, 분은 3남을 두었으니 세홍(世弘), 세웅(世雄), 세호(世瑚)이다. 덕임(德任)은 세웅의 소생이며, 덕인(德仁), 덕기(德基), 덕보(德普)는 세호의 소생이다.
공은 어려서 군영의 모습을 만들고 놀았으며, 장성해서는 독서하여 대의를 대략 통달하고 옛사람이 순절한 대목에 이르면 오열하였다. 병법을 더욱 좋아하여 종종 통쾌하게 군대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람들이 겨루지 못했다. 평소의 뜻과 절개가 이와 같았으므로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재야에서 떨쳐 일어나 탁월한 공을 세워 볼 만하였던 것이다. 아, 훌륭하도다.
공은 만력(萬曆) 12년(1584) 무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장례원 사평, 풍천 부사(豐川府使)를 지냈다고 한다. 선조께서 특별히 공조 판서에 추증하고 광협은 그보다 한 품계 낮은 벼슬을 추증하였다. 숙종 무자년(戊子年,1708, 숙종34), 고을 사람들이 또 공을 위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나는 공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서술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씩씩한 김공이여 / 仡仡金公
만인의 으뜸이로다 / 萬夫之特
난리를 당하자 의기를 떨쳐 / 遭難奮義
나라 위해 힘을 다했네 / 爲國殫力
한 고을의 적은 병사로 / 一郡殘兵
지주처럼 우뚝 섰네 / 屹若瀾柱
공에게 훌륭한 아들 있어 / 公有令子
범처럼 힘이 있었네 / 有力如虎
창을 들고 말을 달리니 / 提戈躍馬
왜구가 넋을 잃었네 / 漆齒褫魄
얼마 후 시신으로 돌아오니 / 俄以尸歸
모든 군사가 통곡하였네 / 一軍雷哭
공은 말하였네, “조문하지 말라 / 公曰無弔
죽을 자리를 찾았으니.” / 死得厥所
의리와 절개가 더욱 드러나니 / 義烈彌彰
공은 실로 어진 아버지였네 / 公實賢父
안타깝도다 위대한 공적이 / 惜哉偉績
사라져 전하지 않네 / 湮沒無聞
그래도 징험할 수 있으니 / 猶有可徵
오봉의 문장이라네 / 五峰之文
내가 숨겨진 행적 드러내어 / 我闡其幽
시로 무덤에 표시하노라 / 詩以表墳
--------------------------------------------------------------------------------------------------------------------------------------------------------
[脚註]
[주01] 증 …… 묘갈 :
이 글은 김만수(金萬壽)의 묘갈명이다. 김만수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덕로(德老)이다.
1553년(명종 8) 태어나 1607년(선조 40) 2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오봉의 문장이라네 :
이호민의《오봉집》권10에 실려 있는〈황해도 의병장 및 도내의 대소 백성에게 내리는 교서[敎黃海道義兵將及道內大小民人等
書]〉를 말한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