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편] 내장산 두륜산 영암국화축제장
강진 다산초당, 백련사를 다녀와서!
다산초당
차 향기 우러나는 계곡
강진 땅은 파릇한 차 향기와 함께 다산 정약용을 기억하게 만드는
곳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차분한 오솔길에 자리하
는 정자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구강포 앞바다의 모습은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사구시 학문의 꽃을 피운 다산 선생의 유배지인 이곳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비롯한 그의 학문적 완결을 보여
주는 수많은 저서의 탄생지가 되었다. 흔히 실학이라 일컬어지는
조선 후기 학문 흐름의 성지가 되는 땅이다.
다산초당은 학문적 완성지로만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본디 초가집이었을 건물은 다산의 사상을 흠모하는 후세 사람
들에 의해 다부진 기와집으로 다시 지어졌지만 60년을 지낸
건물의 모습은 여유로운 세월의 흐름을 담고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당시 이단의 사상으로 배척되었던 천주교에 물든 죄인으로
몰려 무려 18년의 유배생활을 하였던 다산은 그중 10년의 기간
을 이곳에 머무르며 조선 후기, 문화의 오지였을 국토의 끝자락에
학문의 꽃을 피웠다. 그의 학문을 흠모하여 모여든 제자들과
당대의 사상가, 고승들과 쉼 없는 토론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며
백성의 삶을 위한 정치와 제도를 뒷받침하는 사상을 완성하였다.
훗날 베트남의 혁명가 호찌민은 자신의 관 속에 《목민심서》를
함께 담기를 원했다고 하니 다산의 학문은 시대와 지역을 포용
하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문을 연마하며 다산이 즐겼던
유일한 즐거움은 유난히 차나무가 많았던 만덕산의 향기로움을
다기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자신의 호마저 차의 언덕(茶山)
이라 칭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던 그는 솔잎을 태워 찻물을
끓였던 마당바위와 만덕산의 맑은 기운을 담는 물 웅덩이를
만들고 정석(丁石)이라 새겨 넣었다. 백련사의 해장선사와
차를 나누며 깊은 학문의 경지를 토론하였을 그림 같은 모습을
다산초당의 아름다움 속에 비추어 본다.
천일각, 형제를 그리는 마음
다산과 함께 천주교 신자로 몰려 유배를 떠난 형 정약전은 16년의
흑산도 유배생활에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하였다. 다시 만나지
못한 형제의 모습을 다산은 천일각에 앉아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
며 그리워하였을 것이다. 정약전 또한 유배생활 중 남도의 어류를
분석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여 실사구시의 학문을 삶으로 실현
하였다. 어둠 속 한줄기 섬광처럼 빛나는 옛 선현들의 모습이다.
출처:(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마로니에북스)
▼동백나무 숲길을 통해 백련사로 들어갑니다
장안사(長安寺)
이은상 작시
홍난파 작곡
김성길 노래
장하던 금전 벽우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장하던 금전 벽우 찬 재 되고 남은 터에
이루고 또 이루어 오늘을 보이도다.
흥망이 산중에도 있다 하니 더욱 비감하여라
장안사 [長安寺]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사는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또는 556년(고구려 양원왕 11)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773년(신라 혜공왕 8) 율사 진표(眞表)가 중수하였고, 970년
(고려 광종 21) 불타 없어진 것을 982년(고려 성종 1) 회정(懷正)
이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4)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후인
고구려인 기씨(奇氏)가 돈과 공인들을 보내와 무너진
건물을 중건하고 새 누각을 지었다.
1458년(세조 3) 세조가 대웅전을 중수하도록 명하고 토지를 하사
하였는데, 1477년(조선 성종 8) 소실되어 일청(一淸)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1) 다시 불타 1545년(인종 1) 일청이 또 중건하고
, 1728년(영조 4)과 1791년(정조 15) 중창·중건된 뒤 1842년
부원군(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보시로 300여 칸의 대찰로 증축
되었는데, 1863년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주상하여 공명첩
(空名帖)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였다.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과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중심법당은 중층 구조로 되어
있고 각 영역 입구에 누각 건물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6전(殿)·7각
(閣)·2루(樓)·2문(門) 외에 10여 채의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6·25전쟁 때 불에 타버리고 축대·비석 등만 남아 있다.
출처:(두산백과)
2019-01-1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