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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있기까지
부녀지도자반 제7기 오 월 기
(경북 달성군 화원면 설화동)
저는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동 새마을 부녀지도자 오월기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은 대구에서 구마선 국도를 따라 서편으로 14km 지점이고, 달성군청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 입구 바로 서편에는 구마고속도로 진입로와 14,000평의 새마을공장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동네 중심에는 100평의 공동 정미소, 80평의 양곡창고와 60평의 동회관이 있고, 부녀회 공동구판장, 연탄창고와 1,574평의 공동답 등에서는 연간 590만 원이라는 거액의 공동수입을 볼 수 있습니다. 가구 수는 305세대, 셋방살이 30호가 있으며, 남자 918명, 여자 935명으로 구성된 꽤나 큰 부락입니다. 보리 고개 때는 산나물, 들나물로 연명을 해야 할 만큼 생활이 어려웠던 우리 마을이 근검, 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아 부지런히 일을 하여 오늘날의 부자 마을이 되기까지는 결코 순탄한 길을 걸어오진 않았습니다. 그동안 따뜻한 충고와 격려를 해 주신 여러 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며, 협동과 단결 속에서 피와 땀으로 점철이 된 우리 마을의 발전상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얼마 전 개통을 본 구마고속도로와 영남지방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 지금도 봄이면 온 사방이 꽃들로 뒤덮이고, 새소리 요란히 귓전을 울리는 산골 두메 마을이었다.
<낯선 땅 일본에서>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봄, 갑작스런 아버님의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들은 몹시 심한 타격을 받았으며, 이것이 또한 전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가야만 했던 커다란 원인이 되고 말았다. 산도 설고, 물도 설은 타국 땅 일본, 잘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초라한 차림으로 배를 탔던 우리들이었지만 간 곳은 거의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별을 보며 일터로 나가시던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남들은 도란도란 행복한 꿈속에서 헤매고 있을 적에 새벽이 가까워 오는 밤하늘의 별빛을 등에 받으면서 귀가하시곤 하셨다.
입은 갖고 있으되 말 한 마디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단 한 마디의 말조차 건네는 친구도 없이, 우리 남매들은 오누이 비둘기처럼 외롭고도 쓸쓸한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그때 경험했던 철저한 고독 벽은 지금도 생각만 해도 서러울 지경이다. 그럭저럭 고생 속의 1년은 흘러 이듬해 봄, 옆집 아이들은 모두들 학교에 간다고 야단이었으나 나의 부모님들은 그런 건 생각지도 않으시는 것 같았다. 부모들의 손을 잡고서 학교 길을 걸어가는 아기들을 볼 때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고이곤 했다.
그 당시에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게 공부를 해 보는 것이었으므로 어떻든 학교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며칠 후 이웃 사람을 따라서 학교엘 가 보았다. 그러나 나의 이름은 없었다. 물론 있을 리도 없었지만, 생각 끝에 우리가 살고 있던 인근 파출소에 가서 서투른 일본말로 얘기를 했으니 자기네들은 얼굴만 쳐다보면서 마구 웃어대더니 한참 후에야 확인서를 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바라고 바랐던 입학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를 하고,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 일터로 나가 아기를 보아주기도 하고, 저녁밥을 지으며, 집안일을 내가 도맡아 했을 때, 그렇게도 고마워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될 수 있는 대로 나의 부모님들이 하시는 일을 열심히 도우려고 노력했으며 학교 공부에도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5학년이 되던 3월 어느 날, 아버님께서 갑자기 무너져 내린 공사장의 돌더미에 묻혀 넉 달 이상의 입원을 요하는 심한 중상을 입으셨다. 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으며, 당장의 끼니 걱정과 함께, 실의에 빠진 어머님을 돕느라 온갖 힘을 다 썼다. 그러나 그렇게도 원했던 학업만은 그만둘 수가 없어 당시 출생 6개월이 된 여동생을 업고 등굣길에 올랐다. 누가 뭐라 해도 남들처럼 떳떳한 미래의 삶을 위해서는 배워야겠다는 각오로써 우유병을 싸들고 짐수레를 끌고 통학을 시작했다. 손가락질하던 나의 동료들, 그리고 인상이 좋지 않으시던 담임선생님, 수업시간 중에 배고파 울던 나의 여동생, 오늘도 한 끼를 우리에게 먹이시려 애쓰시는 어머님의 고된 노동 등 이러한 모든 나의 환경들은 실망은커녕 더욱더 강한 인간으로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어떠한 비난도 나에게는 아랑곳이 없었으나, 5월 20일, 저축의 날이 다가왔을 때 나는 또 한 번 가난한 죄와 조선인으로 태어난 설움을 맛보아야만 했었다. 그날따라 몹시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었다. 여전히 기침을 해 대는 동생을 업고서 휴식 시간이면 으레 교무실로 달려갔다. 좀 더 따뜻하고 편한 곳에서 동생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이를 이유로 해서 이날 우리 학반에서 발생한 분실 사고의 범인으로서 내가 죄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그날 오후 교무실로 불려가 모진 매를 맞으면서, 등에 업힌 채 못 견디게 울어대던 동생의 모습은 지금도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아마 동생의 울음소리는 누명을 쓰고서도 한 마디의 변명조차도 할 수 없는 나의 울분까지도 한꺼번에 터뜨린 것이었으리라. 그 후 동생이 학교에도 들어가기 전에 이 세상을 먼저 떠나 버리고 말았으니 지금의 나의 슬픈 추억이란 이루 형언하기조차 힘든 애수로 가득 차 있다.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남의 돈은 버려진 쓰레기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하라”시던 부모님의 말씀을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는 나인지라, 그러한 누명을 덮어쓴 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었다. 이 억울한 누명은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벗어야만 되리라고 생각했다. 정직한 사람은 세월이 이를 증명해 준다고 했듯이, 결국 범인은 내 손에 의해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한편으로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그렇게도 모진 매를 나에게 내려 주던 학교 당국의, 그 학생에 대한 처사에 대해서 몹시 분한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여기서도 한 민족의 서러움을 맛보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누명을 벗기 위하여 몇 달 간이나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 야유 속에서도 우리 조선인들의 긍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상당히 가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6학년 졸업반이 되니, 모두들 진학 준비에 여념이 없었으나 한 푼 두 푼 모아서 조국에 땅을 사기 위해 송금하시는 부모님들의 고생을 보고선 도저히 진학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가사를 돕는다는 게 도리인 줄은 알았으나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지라 밤이 늦도록 홀치기도 하고, 여름방학이면 풀을 말려서 팔기도 하고, 또한 공장지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주워다 팔아 학비를 모으면서, 되도록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얼마 후 「나고야」여중에 입학을 하여 사십 리 길을 매일 자전거를 타고 통학을 했다.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이름 석 자가 조선 이름이라 마음대로 취직도 할 수가 없었다. 가사를 도우며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있기를 얼마 한 후 여자 정신대로 소집을 받아 군수공장에 들어갔다. 때는 바로 소화 17년, 대사변이 날로 급박해져 갈 무렵이었다. 천성이 성실하다고 들어오던 만큼, 누구보다도 성실히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그 결과 의무실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근무 중 우리 한국 사람이 입원하면 나도 모르게 인정이 끌려 남보다도 더욱 자주 돌보아 주게도 되었다. 어떠한 편의도 제공해 주려고 노력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었다.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탄로가 난다면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야만 했기에 동료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우리 동족을 위해서는 어떠한 동정도 협조도 아낄 수가 없었다. 이듬해 8월부터는 일본 적십자 병원으로 차출되어 날로 늘어만 가는 공습 속에서도 오늘은 있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생명들을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면서 일을 하곤 했다. 최후의 일각까지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선 - 비록 나에게 구박을 준 생명들이었지만 - 온갖 정성을 다했다. 일본서 생활해 본 사람이면 다 알 듯이, 그들은 얼마나 조선인들을 차별대우 했던가? 어떠한 직장이나 학교에서, 조선 이름을 가진 자는 떳떳하게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던가 말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들을 배우고 기술을 익혀 언젠가는 정신적, 물질적으로 그네들을 앞서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긍지와 끈기 있는 민족성을 그들에게, 아니 세계만방에 보여 주어야만 한다. 명절만 다가오면 자리를 깔고서 조국 하늘을 바라보면서 세배를 하시던 부모님의 모습, 타국 땅에서의 서러움을 누구에게도 원망 않으시고 속으로만 삭히시던 훌륭하신 어른들의 인내, 회고하면 정말 악몽 같이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시절들을 기억해야만 한다. 좀 더 잘 사는 나라가 되기까지는 이들을 기억하며 더욱더 허리끈을 졸라매어야만 한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온갖 시달림을 받으시던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적십자 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소화 19년 3월 드디어 일본에게도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3월 9일 동경 야간 공습으로 온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으며 11일에는 당시 거주지인 「나고야」도 B29기의 폭격으로 완전히 불바다가 되고 말았던 것 이었다 죽어 넘어져 있는 사람의 시체는 나무 장작이 그을린 것처럼 되어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눈 하나 바로 뜰 수 없이 위험하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신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게 되던 8월 15일이 지난 몇 달 후(12월 10일) 우리 가족들은 그리고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잘살아 보겠다며 고국을 떠날 때의 코흘리개 소녀는 벌써 어른이 되어 시부모님을 모신 신부가 되어서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7월 말경,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을 때 모든 거주민들은 꼭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내일의 운명, 아니 몇 분 몇 초 후의 운명이 어떻게 돌변할지를 모르는 그야말로 최후의 시간들을 살고 있었다. 비참하고도 무서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 조선인들은 더욱더 단결하고 긴밀한 연락이 오고 갔다. 이미 우리들의 운명은 하늘에 맡겨진 것, 마지막으로 조선 이름이라도 부르며 죽어 보자는 게 우리들의 소망이었다. 그래서 「히로시마」 폭격이 있은 지 며칠 후 고향 선배님의 주례로 우리 고향인들 만이 모인 가운데서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 후 조국 광복의 기쁨을 맛봄과 동시에 시부모님과 시동생, 남편을 모시고 시댁 고향인 이 마을로 돌아왔으며 어리광부리던 시절과 학창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지라 한국의 풍습과 언행에 있어서 별로 능숙하지 못했으므로 또 다시 적응을 위한 공부를 해야만 했었다. 내 조국의 풍습도 완전히 모르는 채 맞이하여 보내는 모순된 생활 속에서 시동생, 시부모님 시중을 들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라 고 할 수가 없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나, 시부모님께서도 계시고 게다가 나의 고향인지라 별로 난관 없이 무사하게 날들을 보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그마한 평온도 나에겐 오래 머물러 주질 않았다. 6남매의 자식들을 남겨 둔 채 시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만 것이었다.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감수해 온 나였고, 어떠한 어려움도 스스로 극복해 온 나였다. 그러나 이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눈물도 흘릴 수 없었고 통탄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떠한 말들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20세 밖에 안 된 연약한 며느리에게 아직 어린 6남매의 시동생들을 남겨 둔 채 가신 부모님들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직 몇 살 되지 않은 시누이들과 어른들의 마음을 알리도 없는 시동생들을 뒷바라지 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만 나오곤 할 뿐이었다.
<한탄만 하고 지낼 수 없어>
그러나 매일 한탄만 하고 지낼 수는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확신을 갖고 바보같이 한숨만 쉬는 생활은 청산해 버리기로 작정했다. 여섯 시동생, 시누이들의 어머니로서 내 남편이 아내로서 더욱더 충실하면서 생계를 도맡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눈물겹도록 어려운 생활의 연속은 끊일 줄을 몰랐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중노동,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해결되지 않는 생계문제, 정말 도망갈 곳이라도 있었으면 어디론가 멀리 혼자서 가 버리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이 어린 애송이 신부에게 이리도 많은 짐들을 짊어지게 한단 말인가? 제2의 인생을 위해 단란한 가정을 꿈꾸는 게 신부의 역할이 아닌가? 인생이 몇 막으로 구성된 연극이라고 누가 말했지만 내가 맡은 배역은 아무래도 잘못 정해진 것이었다. 한마디의 동정과 한줄기의 눈물만을 받기엔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배역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배역을 맡든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야 하는 게 배우의 임무이듯이 나에게도 주어진 임무에(차라리 운명이라고나 할까?) 순종을 해야만 했다. 도대체 운명이란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눈물을 머금고서도 순종을 하고 추구해야 하는지, 가끔씩은 삶의 이유와 억지로 존재를 해야 하는 이유조차에도 회의를 느끼곤 했다. 무수한 경쟁 속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단지 고생만을 위해서였던가?
하여튼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나에게서도 두 형제의 아들이 태어났다. 자꾸만 늘어나는 부양가족들과 설상가상으로 판잣집 대문을 두드린 남편의 입대영장은 더욱더 자신을 암담하게 만들었다. 그때가 1952년 4월이었다. “미안하다”는 단 한 마디의 말씀만 남기시고 떠나버린 남편, 그때 내 눈앞에 보인 세상은 그저 캄캄하기만 했다.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는 고해의 파도 위에서 차라리 생을 포기할 수 있는 자신만 있었더라도 이 어둡고 가기 힘든 길을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을 것을…….
역시 사막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는 있는가 보다. 그렇게도 쪼들리던 생활이었지만 중학교 1학년이었던 막내 시동생,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막내 시누이와 첫째, 둘째 아들들의 맑고 깨끗한 눈빛 속에서 또 부지런한 그들의 생활 속에서 색다른 삶의 재미를 찾아 볼 수가 있었다. “부모는 고생한다지만 제발 너희들만은 훌륭한 인물이 되도록 자라야지. 암, 꼭 그래야지.”라고 속으로 빌면서 기대와 희망을 걸곤 했다. 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아무 고생도 모르고 자랄 시동생들은, 내가 울면 같이 울고 내가 웃으면 철없이 뛰어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항상 좋은 성적을 얻어 왔다. 더 이상 서로 울지 않기로 맹세를 했기에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 갈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고 또한 숙명을 저버릴 수 없는 한 인간이었기에 법칙에 순종하며 현실을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씩씩한 군인의 아내로서, 불쌍한 고아들의 위로자로서 비록 지금은 서럽고 고달픈 가시밭길 위에 있을지언정, 미래의 평탄한 길을 향해 뛰어야만 했었다. 자기 목숨보다도 더 나라를 사랑하는 일본 여성들의 정신을 장점으로 본받아 주인 없는 내 가정을 남에게 욕먹지 않고 영위해 나갈 수 있도록 어떠한 길이든지 삶을 찾아서 나아갔다. 그러던 중 입대 전에 남편이 근무하시던 우체국 국장님을 찾아가서 부탁한 결과 편지 배달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다. 처녀 때였으면 모르거니와 가정 주부로서는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남자처럼 작업복을 입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자전거를 타고 맡은 일에 충실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이 괴로웠던 사실은 배고파 울어 대는 아기에게 옳게 젖 한 번 주지 못하고 거리에서 마음만 태우던 때의 그 심정은 도저히 글만으로 표현하기엔 불가능한 것 같다. 마을마다 일선 장병들의 서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근 1년 동안이나 편지를 배달하면서, 이제는 그 일에도 익숙하게 되어가려고 할 무렵 막내 시누이와 두 아들의 중병으로 몇 달을 결근하여 우리들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그 직장마저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얼마 안 되는 퇴직금과 직원 일동이 주신 성금으로 면직 양말기계를 사서 삯을 받고 짜 주기도 하고, 실을 사서 시장에 팔기도 하고 밤을 낮 삼아 일을 계속했다. 시누이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그런대로 일곱 식구들의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겨울철에는 얼마 안 되었지만 약간의 저축도 하 수가 있었다. 봄이면 조그만 농토이길 했지만 채소를 가꾸어 내다팔기도 하고 시간이 있으면 농촌에서 간장을 사다가 35리 나 떨어진 대구 시내까지 새벽에 나가 팔고서는 저녁 늦게야 돌아오곤 했다. 당시엔 피난민이 많았으므로 힘은 들었으나 장사는 꽤나 잘 되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버스를 흔하게 구경할 수 없었으므로 차비가 몹시 비쌌다. 그래서 올 때나 갈 때나 머리에다 짐을 이고 걸어 다니기가 일수였다.
오직 살아야만 한다는 일념 속에서 고생을 낙으로 삼고 오직 기다리는 것은 무사하시다는 남편 소식 뿐 이었다. 아침, 저녁 두 손 모아 빌면서 웃으며 상봉할 수 있길 원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시도해 보고 농번기에는 지게꾼 노릇까지 하면서 얼마를 저축한 결과 얼마 후엔 몇 마리의 병아리로 양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늘이 돌보셨는지 시작한 양계는 잘 되어 마침내는 양계법을 좀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까지 생기게 되었다. 인근 마을 청년들이 매일 같이 몇 사람씩 문의하러 찾아오는 것을 볼 때면 마냥 즐겁기만 했으며 열심히 아는 바를 설명해 주었다. 돼지 새끼도 기르고 해서 이제는 목돈을 저축하기에 이르렀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좀 더 큰 계획도 세울 수가 있었다. 역시 인간에겐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이다. 뒤돌아보면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으나 이제 더 이상 눈물도 흘릴 필요가 없었다.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 늘어나는 경제력, 금상첨화 격으로 다가온 남편의 제대 날짜, 이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행복과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 얼마 동안을 복받친 기대 속에서 즐겁게 살았으나 사람의 걱정은 한이 없는 것, 남편만 제대하시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세상은 그렇게 나를 놓아두질 않았다. 약 1년 동안이나 남편이 신경통으로 앓아누운 것이었다. 무슨 운명을 갖고 세상에 태어났는지 황소처럼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는 다만 험난한 인생항로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순한 표현이 도어 버린 것이다.
세월은 흘러 1957년 3월 남편은 달성군청 통신기사로 취직이 되었고, 양계도 100수에서 600수로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어리던 시동생, 시누이들도 이제는 모두 차례차례로 출가하여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지난날의 꿈같던 모든 고생들이 그들의 재생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다 잘사는 마을을 만들어 보려는 꿈이>
인간에겐 행복보다는 불행을 많이 만난다고 생각하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직면한 불행에 정면으로 부딪혀 극복하는 데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5형제의 어머니가 된 나, 우리 내외는 잘살아 보겠다는 굳은 결심 아래 남편은 직장에 나가시고 나는 양계를 계속하여 복잡한 생활 속에서나마 지나간 고생 시절의 뼈저린 내 나름대로의 생활론을 실천해 보기 위해 부녀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18년이란 기나긴 세월동안 견딜 수 없는 욕설과 갖은 수모를 참아가면서 손짓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시던 완고하신 노인들과,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긴 꼬리치마만 끌면서 가난을 한탄하던 주부들을 설득시켜 1960년 3월 43명의 회원들로 부녀회를 조직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 부락에서는 계속된 2년의 흉년으로 보리 고개 때는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살기 좋은 부자 마을이 될 때까지 부지런히 일하고, 남에게 의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조·협동하는 정신을 갖고,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아 푼푼히 저축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차차 범위를 넓혀 가며, 배우면서 실천한다는 신조로써 내 고장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온갖 노력을 다 해나갔다. 조직 당시만 해도 아녀자들이 성냥 한 통 조차 살 돈을 벌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나 시장 안 가기 운동을 시작해서, 절미 2되씩 모은 것을 밑천으로 이룩된 소비조합의 운영으로 사정은 달라지 게 되었다. 이미 시작된 부녀 사업을 좀 더 잘 운영하기 위해 양계를 하고 있던 나는 계란을 팔고 돌아오는 길이면 한 푼의 차비라도 절약해 보려고 소비조합 물품을 혼자서 구입해 오기도 했다. 언제나 마중을 나와 주는 회원들을 볼 때면 한량없이 고맙고 즐겁기만 했다. 아직 익숙하지 못한 사업이라 우리 회원들은 사카린, 주모 등을 분량대로 나눠서 봉지에 손수 넣어서 팔아야만 했다. 그러다 보면 아기들을 업은 채 새벽 2시경까지 일을 하는 게 예사였다. 백미 한 되가 36원 밖에 되지 않은 당시의 실정이었는데 우리는 1만원 밑천으로 10일마다 3,500원 정도의 이익금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4·19 혁명이 일어난 3일 후, 계란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통행금지령이 내려 인근 파출소 부근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때는 4월 하순이라지만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등에는 아기를 업고 있었으며 잠시 옆에 서 있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아기가 울어대는 바람에 그 아주머니한테 짐 보따리를 맡겨 두고 부근 가게에 가서 아기 젖을 먹였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를 믿어버린 게 실수였다. 소비조합의 물건을 싼 보따리와 그 아주머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벌고 만 것이었다. 파출소에 신고를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신에 힘이 빠지는 듯 했으며 어디 부탁하려야 할 곳이 없었다. 당시 시가로 1만 원이라면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게는 거액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이 돈을 혼자서 마련해 보려던 생각과 의욕은 점차로 줄어서 고심하던 중 당시 달성군 부녀회장 이셨던 최 정만 여사께 이 사실을 얘기하면서 걱정을 하였더니 무이자로 1만 원을 빌려주셨다. 그 후, 모든 일이 잘 해결이 됐을 때 이 돈을 갚기 위해 6개월 적금을 시작했다. 당시 계란 한 개가 3원이었는데 매일 16개씩 저축을 해도 여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어려울 정도였다. 남편에게 상의 한 번 못한 것은 아내의 도리가 아닌 줄은 알았으나 사정상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티끌도 모으면 태산이 된다고 하듯이 이듬해 4월 우리 부녀회에서는 기본금의 배나 되는 금액을 제하고서도 각 개인에게 광목 한 통씩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만큼 많은 돈을 모았었다.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한다면 한낱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겠지만 당시엔 길쌈 잘 하는 며느리가 최고라고 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광목 한 통씩을 그저 얻은 아녀자들은 그것을 끌어안고 눈물까지 흘리곤 했다.
또한 배움에 있어서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남을 지도하려면 좀 더 많이 알아야만 하고, 적어도 최신 책자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한글 교육을 실시했다. 그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동네 학생에게 한 달에 쌀 한 말씩을 주고 1주일에 3회씩 배우기도 하여 실시했으나, 여자가 글은 배워서 뭐하는가 하는 식의 반대 이론으로 참석자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끈질긴 설득으로 점차로 향학열이 높아만 갔다. 나는 때를 놓칠세라 전문가들을 데려다 편물지도도 아울러 실시를 했다. 편물을 해서 완성된 물건이란 당시엔 거의 보기에도 힘들었고 심지어는 편물이란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대다수였다. 소비조합으로 늘어난 이익금으로 공동으로 실을 구입하고 바늘을 사서 우선 양말, 장갑 만드는 법 등을 지도하니 모든 아녀자들이 차차 흥미를 붙이기에 이르러 마침내는 아이들 간소 복 만들기도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난 후에는 자신들의 긴 치맛자락도 점차로 개선하게 되었으며 의복에 있어 일종의 조그만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저축하기 위해서 회원 5명이 1조가 되어 대구 시내까지 물품 구입을 나가면 왕복을 도보로 했으며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재미있었던 옛일로 생각이 된다. 다른데 비해서 매우 큰 부탁이었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는 재봉틀이란 단 한 대 밖에 없었다. 솜씨 없는 나였지만 손수 재단을 해주고 재봉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우리가 단체로 만든 작업복은 형체는 다 갖췄으나 도저히 밖에는 못 입고 나갈 만큼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한국인이면 모두 다 기억하듯이, 1963년 6월 15일, 사라호 태풍이 우리나라를 심하게 두들기고 지나갔다. 당시 두 아들이 군대에 가고 없는 노부부가 마을에 있었는데, 이 부부는 태풍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논 270평이 거의 침수되고 만 것이었다. 전 부녀회원들이 모여 의논한 결과 그분들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회원들을 동원시켜 꼬박 3일을 작업을 하니 모두들 몸살이 나서 야단들이었다. 말이 복구 작업이지 리어카도 없이 가마니에 끈을 달아 꾸려다 나르고 돌을 이어다 나르는 일은 너무나도 힘겨운 노동이었다. 5일 만에 완답을 이루고 나니 주인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를 하셨으며 1년간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 논을 우리들에게 빌려 주셨다.
그 후 1년간 공동작업을 실시, 모내기, 논매기 후에는 커다란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이듬해 봄에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부락에서는 최초로 노인잔치를 개최했으며 당시의 즐거워하던 주민들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부녀회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달라졌으며 모든 방면에서 이해와 협조를 아끼지 않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런대로 설화동 부녀회가 우리 면 뿐만 아니라 인근 면까지도 일 잘 한다는 소문이 날 정도가 되었다. 1968년 화원 낙농지 개간 당시 불같이 무덥던 8월 5일부터 13일까지 회원 전원이 공동작어복 차림으로 삯군 노릇을 하여 열심히 일한 결과, 인건비 200원인 것을 우리 회원들은 250원을 받게 되었다. 당시 모인 7만여 원의 엄청난 돈으로 공동작업으로 농사짓기 위해서 1,870평의 논을 샀으며, 7월말 퇴비증산을 실시하여 열심히 거름을 주고 가꾼 결과 가을에는 60여 가마의 벼 수확을 했다. 또 이 수익으로 물품구입을 하여 가사개선을 시작했으며, 그토록 손가락질하던 노인들도 자기 며느리도 회원으로 가입시켜 달라고 하게까지 되었다. 몹시도 반가운 말씀들에 힘입어 젊은 회원 60명을 다시 조직하여 활동범위도 넓혀 갔으며, 또한 사업도 점차로 확대시켜 나갔다. 그러나 너무나 회원 수가 많은지라 운영해 나가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이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때 부녀회 연탄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약간의 이익만이 남는 반 봉사적인 사업이었다. 그 후 구판사업 이익으로 적립된 20만 원을 간이 상수도 설치에 보태게 되었고 1974년 4월 7일에는 수원 연수원에 입교하여 짧은 시간이었으나 1주일의 맹훈련을 통하여 많은 새마을 교육을 받게 되었다. 교육을 마치고 다시 내 마을로 돌아온 뒤, 3년 만기로 찾아온 적금 50만 원을 동 회관 내부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데 투자했으며, 가정의례 준칙을 실천하기 위한 간이 예식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젊은 청춘 남녀가 호감을 가질 만큼 장식을 하려니 금전도 문제였으나 시설방법도 문제가 되었다. 대구 시내에 있는 일류 예식장으로부터 하류 예식장까지 다니면서 이름도 모르는 신혼부부들을 축하해가면서 또한 구조, 설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간이 예식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드디어 11월 11일, 군수님의 주례로 한 쌍의 부부가 첫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이 있을 시에는 항상 모든 회원들이 자기 집보다도 더 깨끗이 청소를 실시하며 모두가 혼주 노릇을 하기도 한다. 도처에서 오신 손님들이 가끔 “일류 예식장에 못지않다.”고 칭찬해 주실 때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부녀단체를 조직한 지도 꽤나 연륜이 지난 1974년 12월, 총회 시에는 색다른 사업들을 연구하게 되었다. 당시 마을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유휴지 복구 작업이 바로 그 일환이 되었다. 속칭 “자갈 무더기”라고 부르던, 너무나도 엄청나게 많은 자갈 때문에 완전히 버려져 있던 674평의 황폐지를 목표로 삼았던 것이었다. 모든 주민들은 복구하려고 엄두도 못 내었고 심지어 우리들의 계획을 만류하였기 때문에 우리 회원들의 의견은 더욱더 굳은 진심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일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져 버린 회원들이었기에, “자손만대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설득시키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가 않았다. 회원들 중에는 도저히 여자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너무나도 열성적인 몇몇 회원들의 노력으로 완전히 이해를 시킬 수가 있었다. 그동안 늘어난 (새로 조직된 신 부녀회) 회원들과 함께 117명을 동원시켜, 들 한복판에다 가마솥을 걸어놓고 국수를 삶아 먹으며 작업하기를 8일, 하루 30대나 동원된 리어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리어카로 실어낸 자갈 무더기, 이 모든 우리들의 노력은 불가능이란 말을 가능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고야 말았다. 아기들 젖 먹이러 오시던 할머니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신발이 닳는 걸 두려워하지 않던 우리 회원들이 휴식시간이면 한가로이 아기들에게 젖을 먹이던 평화롭던 정경들은 영원히 내 가슴 속에 간직되어질 것이다. 사실 인근 부락 사람들은 불평 없이 열심히 일하던 우리 회원들을 상당히 부러워했다고 들 한다. 협동이란 무서운 것, 산더미처럼 많은 자갈을 화엄면 부터 옥포면 까지의 수침지구 농로에다 져다 날라, 비가 오면 부글부글 발이 빠지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차라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좋아졌으며 통행인들에게 우리들의 땀 냄새를 풍겨주고 있다. 여자가 8일이나 계속해서 바깥에서 작업을 할 때는 가정에서 꾸중을 하시는 어른들도 많다고들 했는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논바닥을 정리할 때는 남자들이 모를 심을 수 있도록 모든 매듭을 지어 주시던 것은 정말 기쁜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고된 노동을 누가 시켜서 했더라면 8일이 아니라, 20일이 걸려도 못해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피나는 노력으로 이룩된 농토를 기름진 옥토가 될 때까지 우리 회원들은 협심해서 언제까지라도 작업을 할 것이다.
<흙은 거짓말 안 해>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비록 자갈땅이었으나 좋은 흙을 한 리어카라도 더 넣은 곳은 벼 이삭이 크고 열매가 충실하며, 역시 퇴비가 많이 깔린 곳도 마찬가지였다. 모내기를 하고 가뭄에는 여가를 내어 회원들을 동원시켜 물을 퍼다 넣고 자기 집 일보다 더 열성적인 성의를 다하니 남보다 더욱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었으며, 풍성하던 수확 곡식들은 또한 삶의 재미를 느낄 수 있던 나의 심정을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내 가정의 농사에도 최대한의 충실을 기하며 틈틈이 시간을 내어 1km나 떨어진 우리 부녀회 농지까지, 혹시 물이나 마르지 않나 해서 가보면 때로는 물이 말라 있어, 몇 시간이나 물대기를 해야만 할 때도 있었다. 넓은 벌판에서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홀로 서 있노라면 지나간 나의 어린 시절과 결혼 직후의 비참하던 시절, 또 지금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 준 초창기의 부녀회 활동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나의 머릿속을 스쳐간다. 생각해보면 우습고도 눈물이 나올 만큼 나에겐 어려운 삶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1977년과 같은 가뭄 시에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원래가 자갈논인데다 날씨는 가물어서 벼 잎사귀가 말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회원들이 낮에 물푸기 작업을 하니 어른들의 비난을 사야만 했기에 각자의 일을 하고 난 후인, 밤중이 돼야만 공동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부근에 물이라도 많았다면야 말할 여지도 없겠으나 몇 백 미터의 떨어진 곳에서 물동이를 이고 밤길을 다녀야 했기에 그 어려움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아마도 밥알 하나하나에 담긴 농민들의 정성을 도시인들은 모를 것이다. 그렇게도 심하던 가뭄 속에서도 회원들의 정성으로 어느 정도의 풍작을 거둘 수 있었다. 얼마 되진 않았으나 회원들의 피와 땀으로 모았던 농협적금 50만원, 기타 수입 30만원을 가지고 우리는 동네 구판장을 건립키로 결정을 보았다. 그 첫 단계로서 동네 중앙에 있는 양어장을 헐값으로 사서 집터로 만들기로 했다. 엄청난 흙을 실어다 넣어야 하니 갈수록 걱정만 늘어가고, 해보려고 하는 회원들은 점차 줄어갔다. 할 수 없이 간부 되는 사람들만 모여서, “단결만 된다면 사라호 태풍 후의 복구 작업보다 더 쉽게 일을 끝낼 수 있으니 같이 힘을 뭉쳐서 한 번 더 오기를 내어 보자”고 설득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사정을 다해 부탁도 하곤 했다. 그래서 처음엔 간부들과 몇몇이서 작업을 시작하니 하루 이틀이 지나자 회원들이 점차로 많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힘을 입어 동네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연탄재와 돌들을 실어다 날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선 억척스런 여자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가 여자이었지만 뭉치면 그 어떤 일도 다 해내는 단체로 성장했다. 점심시간이면 역시 변함없는 메뉴인 국수를 삶아 먹으면서, 한마당에서 빙 둘러 앉아 마치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가졌으며 일이 시작되면 잠시도 쉬지 않고 비지 같은 땀을 흘리며 일에 열중했다. 협동·단결이란 말은 정말 무서운 말이다. 3일 반 만에 수심 2m에서 지상 1m 높이로 40평이나 되는 부지를 완전히 집터로 변모시켜 놨으니 말이다. 그것도 여자들의 힘으로…….
그러나 부지를 완전히 이뤄놓았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집을 세워야 한다는 더욱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적은 예산으로 하기 위해 한 차에 2만 8천 원 하는 자갈을 우리 힘으로 실어다 날라야 했으며 10리 나 떨어진 곳에서 모래를 싣고 와야만 했다. 또한 건축 기초 벽돌 3천장과 브록크 2천 장을, 빌려온 기계로써 매일 교대로 찍어내야만 했다. 타 부락에서 오신 분들은 묻기를 “이 마을 남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기에 여자들이 저렇게 일을 하고 있는가요?”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들이 대답하길 “남자들은 더 큰 일들을 하시고 우리는 우리 여자들만이 살 집을 짓고 만들고 있답니다.” 해 버린다. 물론 서로 한바탕 웃고서 지나쳐 버리지만, 동네 중심에 사시는 남자 분들은 수시로 와서 일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에 쾌청하던 날씨가 갑자기 돌변하여 오후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막 무너지려는 벽돌담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즉시 마이크로 동민들(회원들)께 알려야만 했다. 조금 있으니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회원들이 모두 가마니 몇 장씩을 들고 장날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에 찍어 놓은 브로크와 벽돌들을 가마니로 덮고 쌓아 놓은 벽에다가는 모두가 가마니 한 장씩을 벽에 붙이고 받혔다. 악몽 같은 40분을 빗속에서 보낸 후의 백짓장처럼 창백하던 회원들의 얼굴과 물에 빠진 생쥐처럼 처량하던 회원들 모습들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비가 그치자마자 동네 노인들께서 손수 보리차를 따뜻하게 끓여서 “어서 몸이라도 녹이도록 마시라”고 하시며 부어 주시던 일은 우리 회원들의 마음을 한결 훈훈하게 해 주었다.
<꿈이 이루어지던 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6월 10일에는 22평의 건평을 차지하는 말끔한 구판장의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간판을 “설화동 부녀회 공동 구판장”이라고 달아 붙일 때 우리 회원들의 눈에는 희미한 눈물들이 비치었었다. 자갈더미를 옥토로 바꾸었듯이 우리는 또 늪지대를 건축지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순수한 우리 회원들만이 노력과 땀으로…….
개점 후 동네 주민들이 5백 원, 4백 원씩 찬조해 주신 액수만 해도 36만 원에 달했으며, 낙성식에 참석한 사람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월 4만 원씩을 주고 판매원을 고용하여 보기 좋고, 값싸고, 질 좋은 물건들을 동네에 판매했다. 모든 사람들이 애용을 했으나 물건 구입에 있어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100가지가 넘는 품목들을 싼 값으로 공급하려 하니 그리 쉬운 일만은 못 되었다. 약 900m나 되는 오르막길을 자전거에다 짐을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다 보면 자전거를 밀어 주면서 동민들이 묻기를 “도대체 이만큼 싣고 가면 얼마는 남는 게 있소?”한다. 물론 나오는 건 웃음뿐이다. 남들이 무어라고 해도, 한 푼의 이익이 없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초지를 굽히지는 않겠다는 마음이다. 남들은 비가 오면 쉴 날이 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쉴 시간이란 가져볼 여가가 없다. (아니 생기질 않는다.)
그럭저럭 구판장을 8개월이나 운영해 오면서도 가계 앞 도랑을 건너는 데 나무다리를 설치해서 사용하였으나, 제2차 공사로서 콘크리트 다리를 놓기로 했다. 역시 자갈, 초분, 모래 등은 우리 손으로 운반해 와야만 했다. 감사하게도 군청에서 시멘트 150부대와 철근 약간을 보조해 주셔서 일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빨리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리 기초 공사와 100m 하천 쌓아 올리기를 할 때는 사실 엄두도 못 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회원들 남편 중에는 돌 쌓는 기술자, 기초 놓는 기술자가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1년 만에 2차 공사까지 끝내어 작년 여름에는 나이 많으신 노인들께서 부녀회 다리 위에다 자리를 깔고 노시면서, 오 회장 덕분에 시원한 이 다리 위에서 잘 놀 수가 있다고 하시며 즐거워하시는 모습들을 보노라면 끝까지 힘닿는 대로 노력해서 경로당을 반드시 지어 드리려고 각오를 다시 해 본다. 물론 나의 어린 시절부터 내 생활의 신조가 된 “제일 아까운 건 시간이다. 한 순간이라도 아끼자”라는 습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어려움도 타국 땅 일본에서 겪은 수모와 어려움에 비한다면야 고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조선 이름 석 자를 쓴다면 묵살되어 버리던 나의 학창시절들, 하고 싶은 일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보내버린 나의 젊은 시절들, 생각하면 사는 게 원망스러운 것이었으나, 내 마음껏 일을 해 볼 수 있는 현재를 만났기에 나는 그래도 행복한 인간이라고 느낀다. 뼈가 부서지게 일을 해도, 내 민족과 내 조국을 위해서 나름대로 봉사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우리 마을 부녀회가 우리 군 뿐만 아니라 온 겨레들에게 귀감이 될 때까지 나는 전진을 중단하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부녀회 활동을 아무 보수도 받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니, 동민들은 가끔 나에게 “군 부녀회장은 월급이 도대체 얼마나 되나요?” 하면서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너무나도 의심받을 만큼 일을 했는가, 혹은 농민들이 아직도 날 못 믿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78년 8월 15일 동네 대 총회 때 동민 일동이 주시는 감사장을 받았을 때 그러한 생각들은 없어지게 되었다.
비록 종이 위에 먹으로 몇 자의 글을 적어 놓은 것이었으나, 그렇게도 그것이 고마울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순간순간이 고생으로 점철된 나의 인생이었지만, 지금은 시동생, 시누이, 그리고 건장하게 자라난 내 아들들이 모두 다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갈 충분한 역량을 갖고 하루하루 성실히 삶에 임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기쁘기 한량없다. 다만 오늘이 있기까지 나를 이해해 주신 내 남편과 내 가족들,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속으로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우리 마을 부녀회의 힘으로 경로당을 짓고,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고, 주민들에게 참신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삶을 알려 주자는 게 나의 자그마한 꿈이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바늘처럼 일해서, 내 조국과 내 민족을 위해서 좀 더 오랫동안 나의 정열을 쏟을 수 있기를 가슴 위에 손을 얹고 바라면서, 졸필이나마 나의 글을 마쳐 보련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