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산유고선 (蕙山遺稿選)
휘호1장, 서문1장 , 본문8장, 부록2장으로 검은 끈으로 4번 묶은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제본 방법인 선장본(線裝本)으로 19 세기의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에서 거주하신 유학자였던 혜산(蕙山) 백규수(白奎洙)의 남은 글을 훗날 증손자인 백창균(白彰均)이 수집하고 서문을 받아 충남 보령군 웅천면 구룡리 543번지 소재의 장옥정사(藏玉精舍)에서 단기4281년(1948년)에 간행한 책이다.
표지는 능화문이 비치며 제목 등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으며 내 표지 대신 혜산 백선생이라 쓰고 큰 전서체로 드러나지 않고 덕성을 보였던 분의 잃어버리고 남은 글들이라는 뜻의 '잠덕잉묵(潛德잉墨)'이라고 휘호한 위창 오세창의 글이 실려 있으며 다음 장으로 두 편의 <서문>이 실렸다.
담원 정인보와 강영직(姜永直)이라는 사람 모두가 혜산선생의 조카이자 제자였던 추강(秋江) 백낙관(白樂寬 :1846-1883년)의 절의를 거론하면서 그에게 사표가 되었던 스승을 위해 서문을 써주었으며 정인보는 간략한 서문에서 혜산선생이 "강설한 의리가 곧 추강의 마음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본문은 쌍곽 테두리 안에 계선 없이 18행에 행자수 35자이다. 첫머리에 혜산유고선(蕙山遺稿選. 全)이라는 제목이 있고 그 아래에 '남포(藍浦) 백규수 용여(容汝) 저'라고 저자명이 적혀 있다. 수록된 글은 모두 13편으로 서(序) 3편, 기(記) 1편, 발(跋) 1편, 책문(策問) 1편, 논(論) 3편, 해(解) 1편, 서(書) 3편이 이 순서대로 실렸다.
추강 백낙관에게 보낸 편지도 2 편이 실려 있으며 부록으로 실린 4편의 글은 백규수의 부친 묘지(墓誌), 백창균이 쓴 <혜산선생 사실기(事實記)>(1948년), 백낙관이 쓴 <혜산선생화상찬>, 백창균의 부친 묘표들이 기록되어 있다. 혜산선생 사실기에는 한글토가 달려 있고, 또한 유일하게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는 글이다. 이에 의하면 그의 부친은 효자로 고종조에 사헌부 감찰에 증직된 사람이었다.
백규수는 동향인 숙재(肅齋) 조병덕(趙秉悳:1800-1870년)에게서 강학하여 재학(才學)을 칭찬받았으며 숙재 선생은 홍직필과 오희상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임헌회 등과 병칭되던 한말의 거유로 알려진 사람이다. 백규수는 전재 임헌회나 노사 기정진과도 강학하였다고 하며 봉서(鳳棲) 유신환(兪莘煥), 석당(石塘) 정귀석(鄭龜錫)과는 십 수년간 매년 만나 담론하며 경륜을 쌓았다고 한다.
그는 "구제의 변혁과 당론의 소탕, 균전균민(均田均民)"을 주장하였으며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는 사장(射場)을 설치하고 문인에게 무사(武事)와 진법을 강습하며 "세유(世儒)가 흉중에 일책(一策)이 없고 문묵만 한갓 담론하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다"라 말하였다.
또한 몸소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지어 수백석의 조와 천여 수의 가축에 달하였는데, 세렴을 당하여 이를 모두 인근에 나누어 주어 구활(救活)하는 데 썼다고도 하였다. 그를 '유용지학(有用之學)'으로 여러 번 천거함이 있었으나 마침 모친상으로 수묘 하느라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1868년에 사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소 율곡과 남당(南塘=한원진) 양현을 '위적일준(爲的一遵)'하며 일찍이 '실용지학(實用之學)을 강구' 하였으며 저술이 아주 많았으나 갑오동란(甲午東亂)으로 전부 잃어버렸다고 하며 증손이 모은 것이 이 책이라고 한다.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은 당시 전국의 여론이 개화와 수구로 극단화되어 갈렸던 때 무능한 조정이 제대로 통합해보려는 노력도 없이 지방 유림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지나갔다. 역사에 기록되기로는 관동유소를 올린 춘천의 홍재학(洪在鶴)이 과격한 언사로 바로 처형되기까지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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