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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9 - 1192년에 무사들의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다!
1192년 7월 고토바(後鳥羽, 1183~1198년) 천황(일왕)은 가마쿠라에 막부를 차린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가(武家) 정치를 승인하면서 그를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른바 ‘쇼군(將軍)’ 이라고 통칭되는 무단 정치인데 쇼군은 전국 각지에 부하 무장인 ‘다이묘(大名)’
를 임명했고, 지역 다이묘들은 제 고장을 무력으로 관장하는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1336년에
두번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가 세워지니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년) 입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1338년에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되었으니 무로마치 무사정권은 200
여년이 지난 1573년에 막을 내리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를 거쳐
1603년 도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 1616년) 에도막부(江戶幕府)가 탄생합니다.
(1) 다이라(평 平)씨와 미나모토(원 源)씨
간무왕(천황)의 종손 다카모치왕이 다이라(平) 성을 하사받고 가즈사국(上總國) 장관이 되면서 부터로
손자인 마사카도는 반란을 일으켜 신황을 칭할 정도로 세력이 컸으며, 그후 다이라(平) 씨는 이즈모
에서 일어난 미나모토(源)씨의 난동과 무장 승병들의 강소(强訴)를 저지함으로써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후손 다이라(平) 다다모리는 시라카와 법황의 총애를 받아 다지마 국수(國守)가 되었으며,
세토나이카이에서 상선을 운영하고 구주에서 송(宋) 나라와 무역을 하는 등으로
재산을 모아 서국(西國) 의 실력자가 되었는데..... 11세기 중엽 동북쪽 무쓰지방의
부수장(원주민 에조의 우두머리로 귀순자) 인 아베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이 패배합니다.
이에 조정은 관동 지방의 호족 미나모토(源)씨를 무쓰의 국수로 임명하니, 아들 요리요시는 9년간
악전고투 끝에 이를 진압함으로써 위세가 높아졌으니.... 이에 하치만타로 (八幡太郞: 軍神) 라
불리워졌으며 지방의 주민과 호족들이 자진하여 재산을 의탁하는 등 동북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2) 다이라(平)씨의 집권
1) 보원의 난 : 1156년 7월 나라(평성경)에서 교토(평안경)로 서울을 옮겨온지 362년만에 서울 한복판
에서 야밤에 난리가 터졌으니 360여년! 오랜 평화의 시대가 깨진 것인데... 이 난리는 스토쿠왕
(천황)이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아버지인 도바상황이 스토쿠의 동생인 고시라카와
를 황태자에 책봉하여 그후 일왕(천황) 의 위에 올리면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불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대 귀족이자 국정을 죄지우지하는 후지와라(藤原)씨 가문에도 섭정 다다미치의 동생이자 좌대신인
요리나가가 형으로 부터 지위를 빼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도바법황이
죽자 형인 스토쿠상황과 동생인 고시라카와 일왕(천황)이 대립하는 가운데 11일 일왕(천황)군
1천 7백기가 가모강변의 시라카와궁을 급습하여 불을 지름으로써 상황(上皇)군을 전멸시켰습니다.
2) 평치의 난 : 보원의 난에서 최고의 공을 세운 요시토모(源 미나모토씨) 와 요리마사(源)는
포상이 고르지 않은데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켰으나 기요모리(平 다이라씨) 가
3천의 군대를 모아서는 2천 군사가 지키는 요시토모(源 미나모토씨) 진영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때 13세인 아들 요리토모(源 미나모토씨)도 체포되었으나 기요모리 부인의 호소로 다행히
죽음을 면하고 멀리 이즈로 유배되었으며.... 막내로 2살인 요시쓰네도 구라마산에서
강제로 승려가 되었는데, 승리한 다이라 기요모리(平 다이라씨)는 종일위 태정대신이
되어 딸을 황후로 보내어 아들을 낳아 안토쿠왕(천황) 이 되니 그 위세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송나라와 무역의 안전과 번성을 위해 히로시마 앞 섬인 미야섬에 바다로부터 도리이를 세운 신사를
짓기도 했으나 일본 3경인 미야지마 진자이며, 다이라 기요모리(平 다이라씨)는 점차 교만해져
일왕(천황)을 폐위 시키고 수도 천도를 강행하는 등...... 인심을 잃게 되고 적을 많이 만들게 됩니다.
(3)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 음독과 훈독
일본의 왕(천황)은 원래 성씨가 없는데, 미나모토 源 씨는 세이와 淸和 왕(천황) 의 손자
인 쯔네모토왕이 분가하면서 하사받은 성씨 이고 다이라 平 씨는.....
889년에 간무 桓武 왕(천황) 의 증손자 인 다다모찌가 분가하며 받은 성씨 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한자를 읽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으니 큰 "大" 자를 한국 처럼 漢(한)나라
시대의 중국 발음 그대로인 "음독" 으로 "다이" 로 읽으니 "大名" 을 "다이묘"
로 읽는 것이고.... 두번째는 한자를 일본 고유의 뜻 으로 바꾼 "訓讀 훈독"
으로..... 큰 "大" 자를 "오오" 로 읽으니 "大阪" 을 "오오사카" 로 읽는 것입니다!
平(평)씨는 음독으로는 다이라 이나 훈독으로는 헤이케 이며, 源(원) 씨는 음독으로는 미나모토
이나 훈독으로는 겐지 라고 읽는 것인데.... 한국과 일본 은 자기 고유 문자를 만들지
못하고 말로만 지내다가 중국 한자(漢子) 를 도입하는데, 음독만 있는 조선 과는 조금 다릅니다.
(4)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의 초기 전쟁
다이라씨는 귀족 정치를 타도한 유력한 무사 집안이었지만 점차 귀족화되어 다른 무사
집안을 박해하며 가혹한 독재 정치를 펴고 있었으니 수도의 권력 투쟁에 패하여
세력이 크게 기운 미나모토 씨(源氏) 가문은 지반인 간토 무사단의 지지를 얻고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를 우두머리로 하여 다이라 가문 타도의 군사를 일으킵니다.
1) 우지강의 전투 : 다이라(平)씨 횡포에 대항하여 미나모토(源)씨 이면서도 다이라씨를 도왔던
요리마사(源) 가 모치히토 왕자와 공모하여 다이라 토멸의 명령을 전국에 하달하는데......
그러나 전국에서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우지강에서 다이라(平)의 군대에 의해 전사하게 됩니다.
2) 요리토모의 궐기 : 13살에 체포되어 다이라의 명령으로 이즈의 호족 호죠 도키마사의 감시
를 받던 요리토모(源)는 이때 30세로 수완 좋게도 호죠의 딸인 마사코에게 장가들어 있었
는데.... 1180년 미시마명신 제사일에 마침내 궐기하여 3백의 군사로 야마키관을 함락
시키나 곧 다이라(平)씨측 오바의 3천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바다 건너 동북으로 물러납니다.
당시는 모치히토 왕자의 명이라 하며 지방 무사들은 궐기하여 목대(目代: 다이라씨의 지방
관리)를 치라고 하니 이권이 걸린 일이라 너도나도 일어나니 큰 군사를 모을수가
있었으니 요리토모(源)는 서전에 패배해 물러났지만 이후 무사시(오늘날의 도쿄로
당시에는 변방) 에 이르니..... 수만의 군사를 모으게 되어 가마쿠라에 둥지를 틀게 됩니다.
3) 가마쿠라 : 도쿄에서 나고야 가는 길에 3면이 산으로 둘러 쌓이고 한면이 바다로 나 있는
요새인데 가마쿠라는 일찍이 선조인 미나모토(源) 요리요시가 하치만궁(八幡宮
神社 지금도 있음)을 세워 제사를 지낸 곳이기도 하니 미나모토씨의 고향이라 할만 합니다.
4) 후지강의 싸움 : 다이라(平)씨와 미나모토(源)씨 양쪽 합하여 5만이 넘는 군세가 후지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는데 이때 2살 때 헤어진 동생 요시쓰네(源)가 달려와 형에게 가세
하게 되며 동군 일부의 새벽 진출에 물새떼가 날아 소란이 이니 야습을 받았다고
생각한 다이라(平)군은 당황하여 어이없이 패주하게 되니 요리토모는 군사를 돌려
히타치의 사타케씨를 토멸하니 이제 관동은 온전히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아성이 됩니다.
5) 요시나카의 거병 : 미나모토(源)씨의 일문이자 요리토모의 사촌인 요시나카도 시나노(나가노)
에서 거병하여 도쿄 북쪽의 고즈케를 공략하고 이어 북륙지방을 제패한후 교토 다이라(平)
진영의 고레모리가 이끄는 10만 대군을 가가의 구리카라 고개에서 황소의 뿔에 햇불을
달아 돌진시켜 골짜기에서 전멸시키니 교토로 생존하여 후퇴한 자가 2만에 불과하였다고 합니다.
패전으로 다이라(平)씨는 8살로 어린 외손 안토쿠왕(천황)을 모시고 가문의 지반인 서쪽으로 달아나는
지라 요시나카는 교토에 입성하여 고도바왕(천황)을 즉위시키니 왕(천황)이 두명이 난립하며 교토의
요시나카(源)가 정권을 전횡하여 인심을 잃자 고시라카와 법황이 요리토모(源)에게 명하니 부하인
노리요리와 동생 요시쓰네(源)로 하여금 동쪽에서 교토로 진격해 오미에서 요시나카를 패망시킵니다.
(5) 이치노다니 싸움
1) 다이라씨(平氏) 와 미나모토씨(源氏): 북륙의 미나모토 요시나카씨와 관동의 미나모토 요리토모
는 교토에서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사이 서쪽으로 달아났던 다이라군은 세토나이카이
를 보급로로 삼아 중앙 진출을 시도하니 병력은 7만이고 이에 미나모토군은 6만을 모았으나
지리와 해상권을 다 가진 다이라를 상대하기에는 미덥지 않은 진용이었지만 미나모토군
요시쓰네는 기병(騎兵) 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던...... 일본의 전사에서는 보기 드문 천재였습니다.
2) 다이라군 필승의 포진 : 교토에서 쫓겨난 다이라군은 야시마에 근거지를 두고 병력 회복
에 힘을 기울였으니 다이라 무네모리(平宗盛)는 안토쿠 천황을 후쿠하라로 모시고
점차 동쪽으로 세력을 펼치자 동생 요시쓰네의 천재성을 저어한 요리토모는 총대장
을 요시쓰네의 형 노리요리(範賴)에게 맡겨 후쿠하라로 진출한 다이라를 공격하게 합니다.
다이라군은 전진 방어 태세를 취하되, 세토나이카이 연안의 롯코 산맥들이 바다 쪽으로 다가선
탓에 지형이 좁다는 점을 살려 종심 방어 태세를 취했으니 미나모토군은 수군이 없으므로
해상으로 올 염려는 없는지라 다이라군은 강력한 수군으로 병참선을 확보하고 미나모토
군을 웃도는 병력을 빈틈없이 배치하니 좁은 통로를 끼고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후쿠하라를 본거지로 삼고 최전선이 되는 이쿠다구치(生田口)에 다이라 토모모리(平知盛)가 지휘
하는 5만 군사를 배치했고 뒤쪽 산 위에는 맹장 다이라 노리츠네(平敎經)를 포진시켰으며
후쿠하라 뒤쪽의 이치노타니에 다이라 유키모리(平行盛)를 배치했으니 물자의 집적지인 동시에
예비대 역할에다가 만에 하나 패하여 전선에서 후퇴할 경우에 농성할 배후 요새라는 의미였습니다.
정면 전투를 담당한 다이라 토모모리는 이쿠다구치를 끼고 미나모토 노리요리군과 대치하였으니 제1차
방위선인데 토모모리의 지휘능력은 노리요리를 웃돌았고 병력도 총력을 전선에 다 투입한 미나모토군
보다 여유가 있었으니 서전에 패하면 후퇴하되, 노리요리가 추격해오면 산 위에 포진한 노리츠네군
이 측면을 공격한다는 구상이었는데 토모모리의 불행은 미나모토군에 전술의 천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3) 기병(騎兵)의 미나모토 천재 요시쓰네 : 1184년 2월 7일 이치노다니 전투에서 요시쓰네는
아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으니병력에 여유가 있는 다이라를 괴멸로 몰아넣기 위해
기동력을 살린 기습전을 구상했는데각자 5만 이상의 대군을 거느린 쌍방이 대치해 있는
가운데..... 미나모토군은 요시쓰네의 지휘 아래 기병(騎兵) 을 중심으로 별동대를 조직합니다.
요시쓰네는 1만 병사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둘로 나누어 7천을 본대로 삼아 크게 우회시켜 북쪽으로
진출시키는 한편, 3천을 직접 이끌고 산속을 행군하여 다이라군의 후방 경계 부대가 포진한
히요도리고에로 향했으니, 요시쓰네는 3천 부하를 부장 구마가이 나오자네에게 맡겨
다이라군의 후방에 밀착하게 하고 몸소 70기의 정예를 이끌고 이치노타니 성의 뒤쪽으로 나갑니다.
이때 요시쓰네는 지방의 호족을 통하여 지리에 밝은 길잡이를 고용하고 있었으니 산속 지름길
을 이용한 우회 기습작전 이었는데, 미나모토군은 말 다루는데 능했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전장에서의 이야기였고..... 13세기 당시에 일본에서는 말을 대량으로 활용한 전례가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대량의 말을 집중적으로 사용한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중동지역에서 세를 떨치던 유목민 국가가 기병의 집중 운용에서는 선구적이었지만, 그것은
보병 중심의 군대 속에서 타격력으로 이용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기병만으로 구성된
기동군은 1218년에 서요(西遼)를 멸하고 서쪽으로 침공을 개시한 몽골 제국의 창시자
칭기즈 칸이 편성했다고 보지만 미나모토 요시쓰네의 전법은 그보다 더 앞선 시기 입니다.
4) 전투에 돌입하다 : 다이라군의 포진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롯코 산맥들을 통과하여 배후에서 기습을
하는 전술은 상식으로는 무모한 것이니 기병은 확 트인 평야에서만 효과적이며, 또 보병과 동시에
사용해야 타격력을 활용할수 있는 것이니 보병과 함께 움직이는 전차 역할이고 집중 운영에는 막대한
경비가 필요하며 기회를 정확하게 포착하는 전술안이 필요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활용 사례는 적습니다.
산속에서 튀어나오는 기습을 경계하지 않았던 토모모리의 포진은 타당한 것이었지만 요시쓰네의 전술
은 상식을 깨뜨린 것이었으니 70기 정예를 이끈 요시쓰네는 야간 강행군 끝에 이치노타니가
내려다 보이는 하치부세야마(鉢伏山)에 도착했는데 별동대 7천명은 다이라군 예비대의 배후로
돌아가고, 3천명을 지휘하는 구마가이 나오자네는 히요도리고에 에서 다이라군과 대치 했습니다.
요시쓰네는 이치노타니성 배후에 다이라군에게는 자연의 방벽이 된 600미터 가파른 산 능선 끝에
전투대형을 배치했으니 오전 7시, 최전선인 이쿠다구치와 히요도리고에 에서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당시 전투가 양식화되어 있었으니 전투 개시 신호로 우는살이 묘한 소리를 내며
하늘을 가르자..... 양군 병사들이 화살통을 두드려 기세를 올리는 가운데 미나모토군이 돌격합니다.
이쿠다구치의 다이라 토모모리는 이쿠다가와를 방벽으로 삼아 결사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가운데 미나모토군 본대는 화살을 비 오듯 쏘면서 앞을 다투며 강을 건넜고
제일 먼저 돌입한 기마 무사가 다이라의 방벽을 넘어 방어진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5) 배반자가 있다는 의심 때문에 궤멸하다 :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지며 방벽이 뚫린 시점에서
다이라군의 전선이 서서히 후퇴하는데.... 미나모토군은 기마 전법에 능할 뿐만 아니라
장대한 합판궁(合板弓) 을 사용한 기사전(騎射戰) 에도 능했으니 말들의 압박에 밀린
다이라군은 말 위에서 쏘는 사정거리가 긴 화살에 밀려 방위선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서전은 미나모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지만 아직 승패의 행방이 분명하지 않았으니 거의
모든 전력을 전면에 투입한 미나모토군이지만, 좁은 지형 때문에 전부가 적과 접촉한 것은
아니었고 또 다이라군은 후방에 많은 예비병력을 남겨두고 있었으니 토모모리는 미나모토군의
기세를 견제하면서 후퇴해 전선을 재구축할 생각이었는데 후쿠하라까지 후퇴하면 민가가
미나모토군 기마대의 기동력을 떨어뜨릴 것이고 다이라 노리츠네의 측면공격을 기대할수 있습니다.
요시쓰네가 기다리던 것은 다이라군이 방어선을 유지하고 못하고 후퇴하는 순간이었으니 요시쓰네 직속
70기는 말에 씌워놓았던 짚을 벗기고 등자를 내리고 올라탔는데 요시쓰네의 전면 히요도리고 절벽의
경사는 30도 정도였는데 사슴이 내려갔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그 벼랑에 가까운 비탈을 요시
쓰네의 호령 한마디에 70기가 일제히 달려 내려갔는데 이치노타니 성의 뒤쪽은 방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이라군은 앞쪽에서 전개되는 구마가이 나오자네의 별동대 3천과 이치노타니성 방비군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서 눈치를 채지 못했으니 무방비 이치노타니성에 돌입한 요시쓰네 부대는
성내에 불을 질렀으니 음력 2월 7일로 메마른 성은 연기를 내며 훨훨 타올랐으니 난데없는
화재에 안절부절못하는 다이라군의 방어선에 요시쓰네 부대의 70기가 고함을 지르며 돌격합니다.
연기에 시야가 가려 몇명이나 기습하는지 알수가 없었으며 절대로 안전하다고 믿었던 뒤쪽에서 기습을
받으니 이치노타니성의 다이라군은 혼란에 빠졌고 히요도리고에에서 나오자네 부대와 대전하던
부대는 대혼란에 빠진 이치노타니성의 전황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으며... 연기는 이쿠다구치에서도
보였으니 후방 예비대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다이라군에서는 배반을 의심하는 소리들이 터져나옵니다.
이때도 상식이 혼란에 박차를 가했으니 이치노타니성의 뒷문을 통한 공격은 있을수 없다고
믿고 있던 다이라군은 아군에서 배반자가 나왔다고 생각했고 퇴로를 차단당했다는
공포가 증폭되어 혼란은 최전선에 까지 파급되었으니 노리츠네와 협공으로
미나모토 노리요리군을 궤멸시키려고 하던 다이라 토모모리에게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믿었던 다이라 노리츠네도 미나모토 요시쓰네의 별동대 7천을 상대로 맹렬하게 분투하느라 다른 부대를
지원할 여유가 없었으니 다이라씨가 짠 필승의 전략은 아군의 동요 때문에 뿌리로 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후방 기지를 잃고 전선의 불리함을 전해들은 다이라군의 총대장 무네모리는 철수하기로
결정하니 안토쿠왕을 모시고 아군에게 알리지도 않고 후쿠하라를 물러나 대기시켜둔 군선에 올라탑니다.
패전 상황일 때야말로 총사령부가 전군을 장악하고 방비태세를 가다듬어야 하는데 제 역할을 버리고
전선을 이탈하니 병사들의 사기가 급속하게 떨어졌으니 다이라군은 끝도 없이 후퇴하며 뿔뿔이
달아나니 대군은 붕괴하는데 총 7만여명의 대군을 태울 수 있는 배는 없었으니 군선은 만선이
되기 무섭게 닻을 올렸고 뒤에 남은 장병들은 이치노타니를 제압한 별동대와 본군에게 협공을 당합니다.
이 전투로 다이라는 이름있는 무장을 여럿 잃고 세력 만회의 교두보를 빼앗겼으며 전의를 느낄수
없는 총대장의 행동은 장병들의 신뢰까지도 흔들어놓았으니 다이라군은 이 전투로 사실상
무너졌으니 그뒤 야시마 전투로 혼슈에서 쫓겨난 다이라는 마지막 근거지로 삼은
나가토, 히코시마에서 전군을 동원하여 단노우라 해전에 나섰다가 일족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6) 전술의 의의 : 대병력에다 유리한 지형까지 확보한 적군을 상대로 기병에 의한 기동 우회전을 성공시킨
사례인데 다이라군은 해상 물자보급으로 뒷받침된 지구전 능력은 미나모토를 웃돌았고, 좁은 지형을
봉쇄하는 형태 진형은 미나모토가 장기로 삼는 기마전을 봉쇄한 뛰어난 작전이었으며 최전선 토모모리
지휘 능력도 미나모토군의 총지휘관 노리요리보다 뛰어났지만 적군에는 요시쓰네라는 천재가 있었다는?
요시쓰네의 작전은 기병의 장점을 살린 것이었으니 참신한 점은 기병을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유격대로
사용했다는 점인데 요시쓰네는 별동대 1만 전부를 기병으로 짠 것은 아니니 전 병력의 15분의 1을
기병으로 나머지는 보병으로 구성했으니 산악행군에 익숙한 병사를 선발해 그중 3천을 히요도리고에
에 배치하고 더욱 엄선하여 말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산악을 행군할 정예 70명을 따로 선발한 것입니다?
7) 다이라씨의 멸망 : 요시쓰네(源)의 맹공으로 이치노다니 싸움에서 무너진 다이라(平)씨는
서쪽으로 후퇴하자 이에 미나모토(源)씨측 노리요리는 우회하여 규슈(구주)를 공격하고,
요시쓰네는 야시마섬을 함락시킨후 혼슈와 규슈가 만나는 간몬해협의 단노우라
에서 7백척의 함선으로 5백척의 다이라군을 공격하여서는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조수의 방향이 다이라(平)씨측에 유리해 서전에서 승기를 잡앗으나 전투 도중에 다시 바람이 바뀌는지라
결국 미나모토(源)씨측의 승리로 기울자 태후이자 외할머니 니이노아마는 8세의 어린 안토쿠왕
(천황)을 안고 바다에 뛰어드니 천황 3대신기(三種神器) 인 거울, 목걸이 및 검도 바다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때 8살 어린 안토쿠왕(천황)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외할머니 다이라노(平)도키코 는 “ 고통
스러운 이승을 하직 하고 극락세계 로 갑니다. 이 깊은 바다 속에도 용궁, 아미타불 극락 이
있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는데, 후일 영화화 되었을 때 관객들 중에 울지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8) 미나모토씨의 골육상쟁 : 다이라(平)씨를 멸망시킨 요시쓰네(源)가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교토로 개선하니, 요리토모(源)의 위세에 눌려 있던 고시라카와 법황이 검비위사
에 임명하고 관위를 내리면서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와의 사이에 불화가 생기니....
요시쓰네는 형에게 용서를 빌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에는 일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는 이미 요리토모의 군대가 스루가 까지 진출했으므로 그 위세가 높아 요시쓰네에게
군사가 모여지지 않아 패하고 도망쳐서 31살로 동북지방 오슈의 히라이즈미에서
31살로 자결하는데.....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역사 인물 순서를 보면 1위 사카모토 료마,
2위 오다 노부나가 3위 사이고 다카모리에 이어 4위인데 5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니다.
(6) 가마쿠라막부(幕府)의 성립
1) 교토 입성 : 이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가 동쪽 가마쿠라에서 교토에 입성하여
요시쓰네를 응원했던 고시라카와 법황을 압박하니 일왕(천황)은 마침내 가마쿠라
막부에서 전국에 수호(守護)와 지두(地頭)를 임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2) 수호(守護)와 지두(地頭) : 수호(守護 슈고) 는 막부측의 지방장관이자 군사령관과 경찰서장을
합한 직책이며 지두(地頭)는 전답 1단보당 5승(五升)씩의 군량미를 거두는 직책으로
공령이나 장원의 영주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외에 치안유지 책임과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왕도 기존의 국사(國司 고쿠시) 임명권을 행사하여 지방 정치를 유지하고 신사와 장원을 지배하니 2원
집정부적 형태가 되는데... 전국에 두기로 한 지두도 일왕(천황)가 아래 귀족들의 반발로 구 다이라(平)
씨의 영지에 한정하니 두 개의 정권이 공존하는 셈이 되었으니 토지세를 반반씩 거두는 지방도 생깁니다.
3) 쇼군(장군 將軍) 직과 막부(幕府) : 원래 장군(將軍 쇼군)이란 동쪽의 원주민인 조몬인
에조를 정벌하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약어로 일왕(천황)이 임명하는 전쟁기간
중의 한시직이었으며 그리고 막부란 장군(쇼군)의 진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가마쿠라에 막부가 설치되면서 무사정치를 수행하는 정청(政廳)을 가르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1184년 교토에서 오에를 가마쿠라로 불러 별당(장관, 政所)으로 삼아 재정과 일반 정무을
맡기고, 역시 미요시를 집사로 임명하여 재판사무를 관장하는 문주소를 설치하였는데
전부터 무사(武士, 군대)를 관리하던 시소(侍所)를 합쳐 막부의 3대 기관이 탄생한 것입니다.
(7) 호죠씨의 집권
1) 요리토모 사망과 호죠씨의 득세 : 1199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죽자 교토 조정의
쓰치미카도는 조정에서 친가마쿠라파를 축출하게 되고 가마쿠라에서는 장남
요리이에가 18세로 장군직을 계승했으나 어머니 호죠 마사코가 재판권을 박탈
하려 하고 그간 요리토모의 위세에 눌려있던 호족인 부하들도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이에 쇼군(장군)의 권한이 외조부 호죠 도키마사의 조정에 의해 13인 합의체로 넘어가자 혈기
방장한 젊은 요리이에가 분을 참지 못하면서 분열, 대립하게 되는데 정권을 좌지우지하는
외조부를 토벌하려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오히려 이즈에 유폐되어 살해되고, 동생인
사네토모가 장군으로 추대되었지만.... 불과 12살의 어린 나이라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습니다.
호죠씨의 전횡이 심해져서 외손자인 장군을 폐하고 자기 후처 소생의 아들을 앉히려
다가 실패하여 이즈에 유폐된후, 아들인 호죠 요시토키는 미나모토 사네토모를
겉으로는 극진히 받들면서도 호죠씨의 반대파를 용의주도하게 숙청하기 시작합니다.
하여 호죠 요시토키는 싯켄(執権 집권)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니 쇼군(장군)은 가수로
노래하는데 소일하는 정도가 되었으며 조정(천황)에서 이름뿐인 벼슬인 우대신
을 내려주어 하치만궁에서 취임식을 하던 날 밤에 조카인 2대 장군의 아들
구교에게 피살되고, 구교도 체포되어 처형되니 요리토모의 대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2) 승구의 난(상황과 가마쿠라의 대립) : 고도바 상황은 미나모토 가계가 끊어진 점을이용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할 결심을 하고 전국에 호죠 요시토키의 토벌을 명하였으니 이에
가마쿠라의 무사들 마저 동요하니 아들이 죽은후 비구니로 출가했던 호죠 마사코가
환속하여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절규하니 마침내 무사들이 집결하였습니다.
호죠 요시토키의 아들 호죠 야스토키가 10만 대군을 몰아 교토로 진격하니 기소강에서 숫자가 적은
상황의 군대를 대패시키는데 이에 상황(上皇)은 태도를 일변하여 전에 내린 가마쿠라 막부군
토벌령을 철회하고, 상황군(上皇軍)의 무장들의 토벌을 명하는 어처구니 없는 배신을 하게 됩니다.
3) 승구의 난 이후 :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 요시토키는 교토 상황군에 가담한 귀족과 무사를
참수하는 외에 고도바 상황등도 동해의 오키섬에 유배시켰으며 또한 쥬코왕
(천황)을 폐위시키고 고호리카와를 일왕(천황)에 즉위시키니 불과 10세의 어린애 였습니다.
교토에 설치된 가마쿠라 막부 출장소인 슈고(守護 수호)를 강화하여 “로쿠하라 탐제” 라
부르고는 귀족과 무사의 영지 3천개소(주로 서국에 있음)를 몰수하고 서국(히로시마,
규슈등 일대)에 신보지두를 파견하였으니 막부의 세력이 멀리 서쪽에까지 미치게 된 것입니다.
4) 호죠씨의 집권 : 요시토키가 죽고 마사코마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교토 로쿠하라
탐제의 호죠 야스토키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싯켄(執権 집권)이 되지만
그러나 미우라씨등 간토(관동) 호족들의 세력을 어찌할 수 없어 13인 합의
기구를 만드니 평정중(評定衆)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다수결로 정치를 하게 됩니다.
51개조로 된 무사의 법전을 만들고 호죠씨 후손들이 싯켄(執権 집권) 직을 이어가니 비로소
정치가 안정이 되었는데 쇼군(장군)직은 미나모토(源)씨의 먼 친척인 어린 미토라를
교토에서 초대하여 앉히니 결국 3개의 권위(천황+ 장군+ 집권)가 공존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8) 가마쿠라 시대의 생활
1) 가마쿠라 무사의 생활 :
가마쿠라 무사들은 단결을 제일의 강령으로 삼았으니... 비상시에는 본가와
분가의 혈족들이 모두 단결하는데, 일족의 장(반드시 장남일 필요는
없다)을 총령(總領)이라 불렀으며 나머지 일족은 모두 서자라고 칭했습니다.
이 때 우지가미(氏神) 앞에 모여 맹세를 하게 되는데 이는 거주지의 토지신
을 의미하니..... 예를 들어 미나모토씨의 우지가미는 하치만신
(八幡神:가마쿠라) 으로 무(武)의 신으로 여러 무사들에게 숭상 되었습니다.
2)무사의 임무
무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일이었으므로 늘 무예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장남에게는 학문이나 취미, 기예 등은
인간 정신을 나약하게 하므로 오직 무예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막부의 부하 무사나 지두는 농촌의 높은 지대에다가 큰 집을 짓고 인공 도랑인
해자와 담을 쌓고는 하인들로 하여금 문전옥답을 경작하게 하여 부유하게
살았으나...... 검약과 자기 절제를 잘 지켰으므로 사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잇쇼겐메이(일생현명 一生懸命: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한다) 란 말은 일본의 바둑 기사인 조치훈이 말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원래 일소현명(一所懸命) 이란 말에서 유래했는데 무사들이 영지를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뜻이었으며..... 정국이 안정되자 비로소 독서와 학문에 눈을 돌리는 무사도 나타나게 됩니다
(9) 도시와 농촌
1) 교토 : 12세기 교토는 대화재와 전쟁으로 거의 폐허화되어 버렸으니 이에 막부의 감시 통치기관
인 “로쿠하라탐제”가 설치되고 무사들의 일용인 무구를 위해 장인의 거리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수공업자가 모여들어 상가를 형성하는등 예전의 번화했던 모습을 되찾아 갔습니다.
2) 가마쿠라 : 산으로 둘러쌓여 7개의 관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요새
도시로 막부가 설치되었으며 해변에 있던 하치만궁을 현재의 위치인
산록으로 옮기고 대저택인 오쿠라를 건축하며 도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에 무사들이 집이 들어서는 외에 와가강에서 하치만궁 까지 상업지구가 형성되었으며 방파제
와 항구 시설이 정비되어 바다로 물자를 운반했으며 교토 까지 파발은 7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3) 농촌의 생활 : 기근과 한발 및 전쟁으로 부녀자나 어린이 인신매매가 성행하였으며 지주
중에서도 많이 가진자는 쌀 석고로 1만석 이상을 다이묘(대명)라고 했으며 그보다 작게
가진자는 고묘(소명)인데, 비상시에는 갑주를 갖추고 전쟁터로 달려가는 무사이기도 했습니다.
지주로 부터 소작을 짓는 사람을 백성이라고 불렀으며 지주나 부유한 백성은 많은
하인과 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주(대명과 소명)도 영주에게
쌀 수확량의 3할~5할을 연공으로 바쳐야하는 등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과일이나 석탄, 피륙등 특산물을 추가로 바쳐야 하였으며 따라서 지주들은 소작료를 거두는
외에도 자신의 부담을 소작인인 백성에게 전가하니 자연 이들의 생활은 고달프기 그지 없었습니다.
(10) 몽고와 고려 연합군의 침략
※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으로 부터 수없이 침략을 당하기만 했지 우리가 침략한 일은 없으니 우리
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몽고군과 길잡이로 두차례나 일본을 침략하여 그들의 원한
을 사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우리는 옛날에 다 잊어버렸지만 일본인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사가 아니고 몽고에 강요되었다고 말할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예로 부터 “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도 있던가요?”
몽고는 일본의 사정(군사적 정보)을 고려로부터 들었으며 고려가 만든 함선과 수로를 잘 아는 고려인
선원에다가 고려 병사를 길잡이로 세워 일본 침략에 나섰으니, 일본의 입장에서는 고려가 몽고의
앞잡이로 더 괘씸했던 것입니다. 몽고군 혼자서는 먼 섬나라 일본을 침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1) 일본 침공 전쟁 전야
1266년 부터 보낸 공물을 바치라는 국서에 화답이 없자 1270년에 원나라의 쿠빌라이 황제는
일본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는, 고려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고려인들을 채찍질해서 900척의
선박을 건조하고 무기를 제조하며 말과 식량등을 모으게 하는등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미나모토씨 장군 가계가 단절되고 호죠씨의 집권이 실력자였는데, 이무렵
18세의 대담무쌍한 도키무네가 새 집권으로 취임하였으니...... 가마쿠라 막부도 원나라
몽고와의 일전을 각오하고는 혼슈의 세토나이카이의 사누키와 규슈의 방비에 착수하게 됩니다.
2) 몽고와 고려군의 침략 (문영의 전쟁)
드디어 1274년 10월 3일에 홀돈의 원나라군 25,000명에다가 김방경의 고려군 8,000명
등 3만 3천명의 군인에 사공 7,000명을 포함해 도합 4만 대군은 고려가 건조한 900척
의 대선단을 이루어서는 고려땅의 최 남단인 마산의 합포에서 기세 좋게 출진을 합니다.
고려인 선원들이 배를 조종해 험한 바다를 건넌 900척의 대함대는 5일에는
대마도를 그리고 14일에는 이키섬을 점령하는데... 수비하던 대마도 수호
소스케 일족은 모두 전사하고 이키 수호 다이라도 패전 후 자살하게 됩니다.
이어 20일에는 규슈 하카다(지금의 후쿠오카) 에 상륙하기 시작하였으니 규슈 무사들은 쇼니씨
를 대장으로 분전했으나 패배해 마침내 다자이후(대재부)로 후퇴하게 되는데 이는 몽고와
고려 연합군 군대의 숫자도 엄청 차이가 컸지만 무기와 전략전술이 워낙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당시 명예를 존중하던 일본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말을 탄 양측 무사 대표가 앞으로 나와서
서로 통성명을 하고는 일대일 대결을 먼저 하였던데 비해, 몽고는 그런 요란한 의식 없이
집단으로 싸우며.... 또 몽고군은 철포라고 하는 화약으로 추진되는 신무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자 야습을 두려워 한 몽고군이 바다에 떠 있는 배로 철수하였는데.... 하필이면
이날 밤 태풍이 불어 집채만한 파도가 일어나니 풍랑에 배들이 난파됨으로써
절반이 넘는 2만에 가까운 시체로 바다가 덮이게 되고 몽고(고려)군은 철수하게 됩니다.
3) 원나라 재침 전쟁 준비 :
막부는 1275년과 1279년에 몽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의 목을 베고 일전의
각오를 다졌으니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리고 하카다만의 여러곳에 석축을 쌓았으며
규슈뿐만 아니라 혼슈 서부에도 호죠씨 일족을 배치하여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쿠빌라이는 정수일본행중서성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전쟁물자는 물론 정복후 사용할 농기구와 곡식
의 종자까지 준비시켰으며, 정복한 남송(중국)군 10만에 군선 3천 5백척으로 강남군을 편성하고
몽고와 한인(중국북부) 3만명에 고려군 1만등 합계 4만에 군선 1천척으로 동로군을 편성하였습니다.
고려는 1차 침략은 원나라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2차 침략시 충열왕은 개성에서 마산까지 내려가서
배를 건조하는 작업을 독려하는등 적극적으로 침략 준비에 협력했는데, 이는 고려에 파견되어 있던
홍다구등 부원세력을 축출하고, 측권세력들을 육성해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 홍안의 전쟁 :
1281년 5월 3일 1천척 몽고~고려 연합군 4만명 대함대는 1차 침략시와 마찬가지로 같은 고려
의 남단인 합포(마산) 를 출발하여 대마도, 이키섬을 함락한 후에 시가섬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해안을 수축하고 완강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쉽게 육지에 상륙할 수가 없었으며
밤이 되자 일본군이 작은 배를 타고는 몽고 군선에 접근하여 햇불로 공격을 하였으니 고전을
면하기 어려워진 몽고군은 히젠의 다카시마섬으로 철수하여 강남군의 도착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키섬에서 합류하기로 한 강남군은 항로를 변경하여 히라도로 향하니 상호간에
연락이 끊겨 7월 하순에야 다카시마섬에서 합류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날자가 엄청 지체되어 또다시 태풍의 계절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합세한 연합군은 하카다만에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7월 1일 밤중 부터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하여 대선단은 전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간신히 다카시마섬에 상륙한 생존자도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모두 살해되니 살아서 귀환한 자는 15만 중에 3만에 불과했습니다.
5) 신의 나라 사상 :
두차례의 전쟁에서 천황(일왕) 은 일본 동쪽 태평양 바닷가에 자리한 이세 신궁에서
“내 목숨을 국난과 바꾸고 싶다” 고 기원하였으며.... 가마쿠라의 집권은 혈서로
불경을 베끼는 등 두려움에 떨었으나 결국은 승리하자 자신감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이번 전쟁의 일등공신은 때마침 불어준 태풍 가미카제(神風) 때문이니 이는 하늘이 우리
일본을 도운 것이라 선전하여 전국에서 신과 부처에 대한 외경심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귀족 정권을 밀어내고 가마쿠라 막부의 힘이 규슈에까지 떨친 것은 좋았으나 승리
했어도 영토를 얻은게 아니기 때문에 참전한 무사들에게 나무어 줄 땅(논)이 없어 무사들의
불만을 사게되었으니 자비로 참전한 무장들은 막부에서 전공 보상을 받지 못하자 빚더미에
짓눌려서 파산하게 되고..... 이러한 불만이 쌓여서 결국 가마쿠라 막부는 붕괴되기에 이릅니다.
(11) 가마쿠라의 문화
1) 가마쿠라 무사 문화의 특징 :
교토를 중심으로 한 고전 문화는 형식적인 면에 흐르고 있었으나 전통이 강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비해 무사의 사회에서는 전통은 없으나 소박
하고 강인한 무사의 기질로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무사도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2) 신흥불교 : 조정의 몰락과 전쟁, 무사 세력의 대두로 급변하는 사회의 혼란속에서 사람들은 위기를
느끼게 되었으니 승려 호넨은 “사람은 누구든지 일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구원을 받을수
있다” 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 1175년 43세 때인데 곧 “일본정토종(日本淨土宗)” 의 시조가 됩니다.
이후 귀족의 전유물이던 불교가 백성들에게 까지 급속하게 전파되어 신도수가 폭발적으로 증가
하고 불교 대중화에 이바지하게 된 것이니 이에 구 불교측에서는 조정의 힘을 빌려 염불을
금하는등 탄압하니 호넨과 제자들에 대한 유배와 처형이 뒤따랐는데 그 제자 신란은
단 한번의 염불로도 구원받을수 있다고 설파하여 하급무사와 농민들속으로 급속하게 퍼집니다.
日蓮宗(일련종)은 12살에 입산수도한 니치렌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법화경만이 진실된 가름침이다라는
생각으로 “난묘호랑가께 (南無妙法蓮華經)” 의 제목을 외면서 범화경을 널리 펴면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그외에 도겐의 선종(禪宗) 과 지신에 의한 시종(時宗)이 일어납니다.
3) 구 불교의 부흥 : 사이다이사의 에이손, 고쿠라쿠사의 료칸은 율종의 부흥에 힘쓰는 외에 나병환자와
걸인, 고아를 규휼하는 일에 뛰어들었으며 죠케이는 어슬픈 수법 보다는 차라리 염불에 열중하는게
낫다고 할 정도였으니 해서 불교는 백성의 생활속으로 깊이 침투하여 들어가게 되어 융성을 구가합니다.
4) 미술과 공예 : 가마쿠라시대의 예술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융성하였으니 나라의 도다이사
(동대사)는 쵸겐에 의해 송나라에서 새로운 건축양식이 도입되어 부흥되었습니다.
한편 선종이 조정과 무사의 보호를 받게 되면서 선종사원의 건축이 활발하게 되었고 불상의
조각도 활발하여 부드러운 양식에서 무사의 영향을 받은듯 강한 인상을 풍기게 되었으나
후반으로 가면서 불상을 중요시 생각하지 않는 풍조의 대두로 조각 예술이 쇠퇴하게 됩니다.
5) 신 문예 : 섭관정치와 원정시대(上皇 통치)의 문화는 국풍(국풍) 이라고 불리우는 독특한 문화
를 형성하였으나 귀족의 문화였으며 전란의 시대를 거치면서 귀족의 문화가 백성들에게
전파되는데 귀족들의 화가(일본노래, 和歌) 가 무사와 백성들에게 전파된것 등이 그 예 입니다.
시골에 비파를 둘러멘 소경 스님이 나타나 비파가락에 맞추어 수도에서의 전쟁이야기를
입담 좋게 엮으면 마을 사람드의 넋을 빼 놓게 되니 후일 이것을 소재로한 군담소설
(軍譚小說)이 등장하는데 특히 유명한 것이 헤이케이야기(平家物語 평가물어) 이니
다이라씨와 미나모토씨의 전쟁을 통해서 다이라씨가 멸망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