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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이다.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義兵)'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일 것이다. 그 표현대로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起義 .. 의병을 일으킴)하였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紅衣)를 입고 지휘하여 뛰어난 무공(武功)을 세웠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獄死)한 김덕령(金德齡)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戰亂)이 끝난 뒤 의병장(義兵將)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는 했지만 끝내는 은둔(隱遁)하면서 ' 익힌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고 살았다 .. 벽곡찬송.. 僻穀餐松' 세상을 떠낫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郭再祐)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륙(殺戮)이 난무한 전장(戰場)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좀 더 엄혹하였다.
곽재우(郭再祐. 1552~1617)은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으로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다. 그는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 조식 (南溟 曺植)의 외손녀 사위이다. 1585년(선조18), 34세의 나이에 별시(別試)의 정시(庭試)에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수일 만에 전방(傳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전방(傳榜)이란 조선시대 인사(人事)에 관한 일을 신속하게 당사자의 집에 통지하던 일을 말한다. 과거(科擧)에 급제한 사람, 처음으로 관원(官員)에 임명된 사람, 수령(守令)에 임명된 사람이 있을 때, 관아에서는 방군(榜軍)을 당사자의 집에 보내 그 뜻을 빨리 알렸다. 과거에 급제한 경우에는 초시(初試) 이상에 합격한 자에 한하여 그 관직 성명을 적어서 전하였다.
각 관청에 소속된 사령(使令)인 방군(榜軍)은 합격한 자의 집을 찾아가 고성(高聲)을 지르고 집안이 뜰에까지 들어가 떠들어 횡포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크게 환영하여 대접했으며, 주인이 대접하지않을 때에는 제멋대로 집에 들어가 쌀이나 물건을 가져가기도 하였다. 당사자의 집이 지방에 있을 경우에는 방군(榜軍)이 여러명 씩 내려와 술과 음식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선비는 파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후 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 위 돈지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官軍)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하여 왜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최초(最初)의 의병(義兵)이었다.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에 가면 곽재우장군의 묘(墓)가 있다. 곽재우는 경상남도 의령 출신이지만, 본관인 현풍(玄風)이 인접한 이곳에 유택을 마련하였다. 그는 임진와랜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한성부 좌윤 등 여러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혼탁한 조정과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이를 사양하였다. 만년(晩年)에는 낙동강변에 '망우정'을 지어 유유자적하다가 조용히 생을 마쳤다. 묘역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봉분이 무너져 내려 초라해 보인다.
곽재우는 1585년, 34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그가 지은 글이 선조의 마음에 안들어 합격은 취소되었다. 곽재우는 과거의 뜻을 포기하고, 남강과 낙동가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가에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곳에 은거한지 3년만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대패하고,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피난을 떠났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곽재우는 같은 달 22일 곽재우는 의병을 일으킨다.
임진왜란 발발 후 9일째 되던 날
곽재우는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9일째 되던 4월22일 고향집 느티나무 '현고수'아래 북을 매달고 북을 치면서 의병을 모았다. 하지만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은 자신의 노비 10명이었다고 한다. 4월22일은 왜장 '모리 테리모토'가 왜군 3만 명을 이끌고 김해, 창원을 점령하고 현풍으로 들어오던 날이었다.
그는 ' 현고수(懸鼓樹) '에 북을 매달고 북을 치면서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후 이불을 찢어서 깃발을 만들고 붉은 관복을 입은 다음 가산을 정리하여 곳간을 열고 사람들에게 곡식을 마음대로 퍼가게 하였다. 곽재우는 평소 눈여겨 본 지략과 담력을 가진 젊은이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설득한 결과 가까스로 수십 명을 모을 수 있었다. 다음은 선조 25년 6월1일의 실록 기록이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에 三道의 신하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병기와 군량을 독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巨族)으로 명망 있는 사림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원근에서 모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그리고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인심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명망 사족들은 백성들이 주축이 된 의병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곽재우'이었다.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당시 그 휘하에 모인 군사가 1,000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평소에 그가 닦아 놓은 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선조 25년 6월28일, 실록의 기록이다.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을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의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병장기와 군량을 취득하였다.
5월4일, 최초의 전투
1592년 5월4일, 왜군의 척후선 3척이 南江을 거슬러 올라온다는 보고를 받고, 곽재우는 선봉장 '심대승'을 비롯한 날래고 용력있는 부하 10명을 인솔하여 거름강으로 달려 갔다. 그리고는 강가 갈대밭에 궁수를 매복시키고, 강 속에는 통나무와 밧줄 등의 장애물을 설치하고 기다리다가 왜적선이 장애물에 걸려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틈을 타 공격명령을 내렸다.
곽재우 의병들의 기습 공격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왜군은 모두 죽고 군선도 침몰하였다. 왜군의 보급 루트인 거름강 어귀를 지키며 왜군들을 기습공격하여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 전법은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사용한 전법인데, 이미 곽재우가 구사하였던 것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곽재우는 자신감을 얻었고, 많은 의병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거름강'은 현재 창녕군 남지읍과 함안군 칠서면, 의령군 지정면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활동으로 의령, 창녕 등지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왜군의 호남진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왜군의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金時敏)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어 승리로 이끄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그 이름을 떨쳤다.
정암진 전투 鼎巖津 戰鬪
임진왜란 초기 왜군에게 크게 밀린 조선의 조정은 3대 곡창지대 중 경상도와 충청도를 잃고 남은 전라도는 쌀이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지역이었다. 왜군도 이를 알고 전라도 공격작전을 개시하여,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을 공격하게 된다.
1592년 6월, 함안을 점령한 왜군 2천 명은 의령을 공격하기 위하여 정암진(鼎巖津)에 도착해서 강을 건너기 위한 도하작전을 시도하였다. 당시 이순신이 바다를 가로막는 바람에 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육로를 통해 전라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에 곽재우는 의병 50명을 동원하여 남강 북안의 정암진에 매복시켰다. 왜군 병력은 정안진 대안에 도착하여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도하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푯말을 꽂아 표시해 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하였다.
이에 곽재우는 밤 사이에 의병들을 동원하여 나무푯말을 늪지대에 옮겨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와 숲에 의병들을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왜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하였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선멸되었고, 주력부대가 남강을 도하했으나 미리 대기하던 의병들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승리를 거둔 곽재우 의병부대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도움으로 의령과 산가 두 현을 곽재우의 지휘 아래 편입시켜 병력이 1000명이나 되었고, '오운'과 '박사제'의 3000명 병력까지 합세하여 총 4000명의 병력이 되었다.
감찰사 김수(김수)와의 갈등
남명 조식 ... 의병정신의 뿌리
의병장들은 대부분이 지역의 명망가로서, 이들을 따르는 농민과 천민들이 자발적으로 합세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지역을 거점으로 게릴라전과 유격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리에 어두운 왜적들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면서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의병에는 불도를 닦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진 '휴정'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병 결성을 독려하였다.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휴정'의 제자 사명당 '유정'은 휴정의 격문을 받고 다시 사방에 글을 띄워 무리를 모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거의 1,000명이나 되었다. 이들 승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 보다는 경비나 무너진 성의 보수와 같은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아 여러 곳에서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함께 '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 '는 자발적 향토방위 조직이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시로 채택된 성리학 이념의 충의(忠義) 정신 또한 한 몫하였다. 의병활동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는 이 지역이 왜적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 중기 칼을 차고 다니면서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한 남명 조식(南溟 曺植)의 사상적 영향도 큰 작용을 하였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종도, 이대기 등 조식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남명 조식의 실천중시 사상은 이 지역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국난의 시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합천의 정인홍,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등은 이 지역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남명 조식의 문하이었다.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 사위로서 조식에게 직접 병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경상우도 지역 의병의 활약은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호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왜군이 물러난 후. 곽재우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생활을 하였다.
그 후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곽재우는 광해군 시절,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그후에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그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을 거치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충익공 忠翼公
곽재우는 사후 1709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고, 충익공(忠翼公)으로 증익되었다. 事君盡節曰忠 .. 충은 임금을 섬기는 데 절의를 다한데서 붙여졌고, 思慮深遠曰翼 .. 익은 사려가 깊고 먼데서 붙여졌다.
의병장들의 쓸쓸한 최후
곽재우, 김덕령을 비롯한 의병장들의 활약은 전국 곳곳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의병장은 활약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의병들의 공이 컸다는 것은 관군의 역할이 그만큼 미미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 의병장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으로 인한 불만을 틈타 모반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에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모반 사건도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세력 규합을 위해 이름난 의병장의 이름을 파는경우가 있어 조정에서는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金德齡'은 최초의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곽재우가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후 산으로 들어간 것도 현실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전후에 전공(戰功)은 왕을 호위했던 공신들의 손에 넘어가고 의병장에 대한 대우는 매우 취약하였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도 전쟁 초기 경상감사까지 죽이려고 했던 곽재우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인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감시인을 파견하여 '곽재우'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이에 곽재우는 관직에 뜻을 잃고 현풍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 고양이를 기른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이니,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할 일이 없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 ' 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들어간 곽재우는 이곳에서 도가(道家) 사상에 심취하여 단곡(斷穀 .. 곡식을 끊는 도가의 수련법)에 몰입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전란 후에 선조는 전쟁 승리의 최고 공로를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군대의 공으로 돌렸고, 이 과정에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대신들이 전쟁의 최고 공로자로 보상을 받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실제 임진왜란 유공자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를 수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86명이나 책봉된 데 비하여, 전공(戰功)이 있는 사람에게 준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곽재우는 추천을 받았지만 생존해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공신의 책봉 과정에서도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격하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 자신의 책무를 다했던 김덕령, 곽재우 등 전쟁영웅들의 비참한 말로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이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연상시키고 있다.
현고수 懸鼓樹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있는 느티나무이다. 2008년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었다. ' 현고수(懸鼓樹) '란 '북을 매단 나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곽재우가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면서, 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쳤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크기는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7m, 높이 15m에 달하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곽재우는 이곳에서 매부인 허언심(許彦深)과 함께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키고 가재(家財)를 털어 병사의 의식주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근처에 있던 곽재우의 생가터는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 생가를 복원하였다.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에 위치한 충익사(忠翼祠)에는 곽재우의 여러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사용하였던 장검(長劍), 마구(馬具) 및 평소 사용하였던 포도연(葡萄硯), 사자철인(獅子鐵印), 화초문백자팔각대접(花草紋白磁八角大摺), 갓끈 등 모두 6점인데, ' 곽재우장군의 일괄 유물 '이라 하여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 671호
장검 長劍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이 장검은 길이 86cm, 너비 3cm, 자루 16cm의 크기로서, 칼과 칼집이 한 쌍으로 되어 있고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인데, 손잡이 부분은 나무로 되어 있고, 겉은 가죽끈을 교차하여 감았으며, 칼등은 위로 조금 휘어져 있고 칼집은 윗부분이 약간 부식되어 떨어져 있기 때문에 1973년에 마광(磨光) 처리하여 보관하고 있다.
칼집의 윗부분 일부가 부식되어 탈락되었고, 그 아래 간격을 두고 2개의 구리테(銅製環)를 돌렸는데, 그 상부에는 각각 여의두형(如意頭形)의 고리가 붙어있어 끈을 묶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집 맨 하단부에는 반원형의 구리장식이 부착되어 있고, 그 앞뒷면을 화형문으로 선각장식하였다.
마구 馬具
곽재우가 타고 다니던 말안장(鞍裝)으로서 부식상태가 심하여 1973년 8월에 완전 살균처리를 한 후 보관하고 있다.
포도연 葡萄硯
세로 31.5cm, 가로 21cm, 두께 3cm 크기의 이 벼루는 흑요암(黑瑤岩)으로 만들었으며, 벼룻물을 담는 연지는 초승달 모양으로 그 주변은 포도와 덩굴무늬를 입체감 있게 새겨 넣었다. 거북무늬가 8각으로, 그 윗부분 두 곳에 작은구명이 뚫려 있는 직사각형의 연적(硯滴) 역시 흑요암으로 만들었다. 벼루와 함께 곽재우가 그의 부친과 함께 중국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사자철인 獅子鐵印
높이 3cm, 지름 3.5cm의 사자 철인는 철제로 만들어진 작은 인장으로, 손잡이 윗부분에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갓끈
갓끈은 금파와 대나무, 호박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모두 4종류이다. 각각 길이가 75cm, 25cm, 165cm, 168cm의 길이이다.
화초문백자팔각대접 花草紋白磁八角大蝶
이 유물은 백자로 된 소형의 팔각 대접으로 높이 6.5cm, 윗지름 21.5cm, 밑지름 12.5cm 크기에 팔각의 각 면마다 풍경과 화초무늬를 그렸는데, 중국 명나라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망우정(忘憂亭)은 곽재우가 만년을 보냈던 곳이다. 곽재우는 1600년 봄에 병을 핑계 삼아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사직하였는데,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2년 동안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고, 그 후 玄風 비슬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가 1602년, 지금이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강가에 ' 망우정 '을 짓고 기거하였다.
곽재우는 망우정에 기거하면서 중간에 벼슬을 제수받아 임지로 오고 감은 있었으나, 말년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지내다 1617년 4월10일 66세의 나이로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품은 큰 뜻을 역사속에 펼쳐보지 못한 채 속세를 떠난 것이 못내 가슴에 한이 되었을까 .. 전하는 애기로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 뇌성벽력이 크게 치고 비가 많이 쏟아지고 붉은 기운이 하늘을 덮어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사헌부의 탄핵
곽재우는 48세 되던 선조 32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10월19일 울산본영에 부임하였다. 군사가 4천여 명이 있었으나, 대다수가 수군이나 순찰사에 소속되어 있었고, 자신의 지휘 하에 움직일 수 있는 군사는 겨우 4백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렇게 적은 군사로는 왜적의 재침을 막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왜군의 가등청정이 쌓아놓은 조산성(鳥山城) 수축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왜적이 침입하여도 군사 2천명 정도면 '조산성'에서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군(水軍)도 중요하지만 水軍一邊道의 군사운용에 이의를 제기하고, 육군의 확충도 필요하다는 건의도 조정에 올렸다. 그러나 곽재우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맡은바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臣이 재주도 갖추지 못하고 병사라는 중요한 자리에 올랐으니 ... 죽음을 아끼지 않고 성을 지키려 하였사오나 .. 형세가 손을 묶인것과 같아서 .. 신은 나이도 이미 늙고 병도 있어 기력이 쇠퇴하고 ... 속히 신의 직책을 갈고 무용이 뛰어난 장수를 택하여 보내시어 ... 라는 사직서를 올리고 조정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군영을 떠났다. 이 일이 시비가 되었다.
사헌부에서는 이를 문제 삼아 곽재우를 탄핵하였다. 대사헌 홍여정(洪汝諪)이 곽재우를 ' 독만 ...瀆慢 '이라는 죄명으로 탄핵하여 결국 곽재우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전라도 영암에서 2년간 귀양살이를 마치자 경북 현풍의 비슬산에 들어가 잠시 은둔하며 지내다, 이곳 영산현 남쪽의 창암진(蒼巖津 .. 지금의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에 강사(江舍)를 짓고 망우정(忘祐亭)이라는 편액을 걸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가 1602년으로 곽재우가 51세 되던 해다. 망우당(忘憂堂)이라는 자호도 이때부터 불려진 것이다.
망우정은 강가 언덕바지에 숨은 듯 앉아 있다. 활처럼 휘어진 강폭을 따라 굽이치는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뒤에는 1789년과 1991년에 세운 '유허비'가 나란히 서 있다. 원래 '망우정'은 경남 마산에서 창녕군 영산으로 통하는 낙동강의 나루터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풍광이 빼어나고 아름다웠으며 뱃놀이나 낚시하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숲이 없어지고 주변의 환경도 변하여 이전만큼의 경치는 아닌 것 같다.
잊어야 할 근심 ?
망우(忘憂)란 근심 걱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곽재우에게 잊어야 할 근심은 무엇이었을까 ?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의 내용이 선조의 미움을 사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은 이후 출사의 뜻을 접었던 곽재우는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무려 29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 받았다. 이 중에서 14번은 고사하고, 15번은 출사하였으나, 이마저도 곧 사직하고 마침내는 이곳 망우정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도 끝끝내 사정하는 광해군의 청을 못 이겨 두어 번 임지로 나갔으나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 망우정에서 곽재우는 모든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선 장군들 중에 유독 이순신과 곽재우의 공이 제일 '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한 곽재우가 고향인 의령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다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 그의 행적에 관하여 다소 신비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를 들여다 보면 정말 神仙이든 道人이든 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선조가 왕이 된지 24년이 되는 해이었다. 역대 조선의 왕들 중에 선조처럼 무능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로 좁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조, 이러한 왕 밑에서 임진왜란이라는 나라의 큰 전란을 맞아 나라를 지키려고 일어났던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등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불운이었고, 나라를 위해서는 비극이었다.
유허비 遺墟碑
유허비(遺墟碑)는 옛 선현의 자취를 살피어 후세에 전하고, 이를 계기로 그를 기리고자 세워두는 비(碑)이다. 유허(遺墟)란 유지(遺址), 유적(遺跡), 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 또는 '옛 터'의 의미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나거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 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忘憂亭 에서 與賢亭 으로
이 망우정은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그후 1972년 벽진이씨(碧珍李氏) 후손들이 중수하였고, 1979년 창녕군에서 전면적인 보수를 시행하였다. 곽재우는 죽기 전에 외손되는 벽진이씨 이도순(李道純)에게 망우정을 물려 주었는데, 그후로 정자의 이름이 여현정(與賢亭)으로 바뀌었다.
여현정(與賢亭)이라는 이름은, 곽재우와 벗하며 지내던 조선 중기의 학자 간송당 조임도(趙任道)가 '이도순'에게 제안한 이름으로 ' 곽재우가 어진 이에게 물려준 정자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사연은 망우정 내부에 걸려 있는 '여현정기(與賢亭記 ... 아래 사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