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한 공수부대가 조를 재편성해 시내 각 곳으로 배치된다. 이들은 모두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등에는 총을 메었으며 대검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오전의 수동적이고 산발적인 시위와 달리 학생들은 적극적인 공격의 형태로 이들과 맞서게 된다.
광주공원 부근에 모인 시위대는 도청 쪽으로 진출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한 대를 불질렀으며 파출소를 파괴하였고 농장다리 부근에서는 버스에 탑승해 있는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켜 인질로 잡기도 했다. 시위대의 가두투쟁이 적극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7공수에 이어 11공수가 광주로 투입되었고, 여단병력으로 증강된 공수부대와의 충돌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공수부대는 집안까지 쫓아 들어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끌고 갔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곤봉과 대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댔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시민들은 분노와 공포의 밤을 보냈다. 이날부터 '광대' '대학의 소리' 팀 외에도 개인별, 단체별로 시위 상황을 적은 유인물이 제작, 배포되었다. 이러한 분산적인 선전작업은 21일부터는 '투사회보'로 결집되어 언론이 통제된 항쟁기간동안 시민의 눈과 귀가 된다. 계엄사령부는 통금을 1시간 앞당겨 21:00 ∼ 04:00로 발표했으며 시내전역과 직장예비군의 무기 및 탄약을 회수하였다.
13:00 공수대의 시내 투입
- 수창초등학교에 공수부대 차량 20여 대 집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시가 조금 넘어서 수창초등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 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 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김정섭, 현사연 조사)
13:10
- 군사령부에 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말, 1988. 8)
13:20
- 학생들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1대를 불지름. (시청 상황일지)
* "학생회관 정문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학생들이 전경들 주변으로 접근해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다. 기습을 당한 전경들은 허겁지겁 도청 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버리고 간 페퍼포그차, 몽둥이, 방패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기세등등해진 학생들이 페퍼포그차를 뒤집어놓고 기름통에 불을 붙여 차를 전소시켰다." (구술 : 이광호, 현사연 조사)
14:15
- 유동 삼거리, 불로동 쪽에서 온 3백여 명 해산.
- 조흥은행 앞, 한일은행 쪽에서 해산되어 공원 쪽으로 이동중인 3백여 명을 추적 분산, 주동자 검거중(10명). (계엄사 상황일지)
14:42
- 또다시 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1천5백여 명, 충장로 일대에서 1천6백여 명의 군중이 데모를 시작했다. 데모 군중들이 경찰관들을 향해 보도블록과 콜라, 사이다 병을 투척.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했으나 갈수록 과격해지는 데모대의 진압에는 실패. (말, 1988.5)
13:10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15:00
- 계엄군 38/2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타 : 33대대(35/367)
충 장 로 : 33대대(26/172)
- 시위군중 해산(체포 337명). (말, 1988. 8)
- 학생회관 부근, 페퍼포그 차량 1대 전소. (전교사 작전일지)
- 공중에서 헬기 3대 선회.
헬리콥터의 프로펠러를 이용해 시위진압
* "처음에는 헬기가 단지 작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경들과의 투석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대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자 헬기가 직접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헬기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프로펠러의 바람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헬기가 다가오면 세찬 바람과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 골목으로 재빨리 피신했다가 재집결하여 투석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구술 : 임낙평, 현사연 조사)
- 학생회관 부근 학생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짐. 이들은 외곽지역의 학생들을 동원할 목적으로 한 팀은 광주공원-한일은행 앞으로, 다른 한 팀은 광주천을 거슬러 올라가 전남공고 방면으로 진출. (현사연 조사 종합)
- 데모대는 충장로 파출소와 중소기업은행 앞에서 연좌시위를 시작, 오후 3시경 에는 2천여 명으로 증가.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박승렬은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노상에서 시위군중 1천여 명과 합세 하여 대인동, 금남로를 거쳐 도청 앞까지 가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 가량 시위를 하고. (공소장)
- 차명석은 지원동 수정아파트 앞에서 박관현이 계엄법 위반으로 수배되어 있음을 알고 체포를 면하게 할 목적으로 빌려온 자가용 대여차에 박관현을 승차시켜 21시경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의 집까지 가게함. (공소장)
- 한정만은 16시까지 광주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약 3백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유동 삼거리를 경유하여 광주역까지 시위. (공소장)
15:30
- 충장로 광주공원 일대 3백-6백 명 단위로 운집 시위. (말, 1988. 8)
- 박철은 동명동 파출소 앞 노상에서 군중 약 2백 명과 시위를 하면서 돌과 빈 병을 파출소 유리창에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부 시위군중 7,8명은 파출소 안에 들어가 책상, 전화기 등 기물을 파손하고 일부 시위군중은 파출소 옆의 오토바이에 방화. (공소장)
- 유동 삼거리, 수창국교 근처 등에 M16소총을 비껴맨 일군의 공수부대 출현.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시위진압.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관광호텔 안의 이발관에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종업원들과 함께 나가봤다.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데모를 하다 공수들에게 밀려 도망가고 있었다. 뒤쫓아간 공수들이 30-40명의 시민, 학생을 동구청과 관광호텔 앞으로 붙잡아왔다. 공수들은 붙잡혀온 시민, 학생의 옷을 벗게 한 후 팬티만 입힌 채 구타와 기합을 주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한국은행 부근에서 공수 2명이 여학생을 끌고 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공수들은 욕을 하며 더욱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다른 사람을 잡으러 간 사이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30-40명의 시민,학생을 풀어준 사람은 도경 경비과장이라 했다. 그것을 보고 달려온 공수에 의해 그 아저씨는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동구청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 "오전까지 시위진압을 하던 전경들이 3시가 되면서부터 점차 물러가고 금남로 요소요소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M16을 메고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구술 : 조일규, 현사연 조사)
15:45
-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대학생들이 북동 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 청년과 여자를 마구 때리고 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한 후 차에 실어 연행해 감.(군인의 경상도 특유의 억양은 광주시민을 자극). (시청 상황일지)
시간미상<정호용 광주 와서 윤흥정 만나 광주 상황 점검하고 확고한 의지 보여야겠다며 돌아감.>
- 공수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은 광주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듣고, 제3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7공수, 제9공수 특전여단의 창설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 재임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특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 간 근무함. 정호용 사령관이 제7여단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 방어부대인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7여단장 신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전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 윤흥정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거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읍니까?" 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시민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말, 1988.5)
시간미상<정호용, 전두환 등 군 수뇌에게 광주사태 보고하고 3공수 7공수 20사단 증파 결의>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미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 대대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 1988.5)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16:00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로 시위양상 전환
- 전남공고 방면으로 진출한 학생들이 노동청 부근을 지나 동명파출소, 지산파출소, 산수파출소 등을 파괴.
- 광주공원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태평극장 부근에서 경찰과 대치.
- 태평극장 부근의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진출. 여기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함.
-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시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연행하기 시작. 반항하면 구타. (월간조선, 1985. 7)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라 약칭)
16:20
- 3백여 명의 시위대 동명파출소 습격, 유리창 50여 장 파손, 시장관사 투석, 지산파출소 쪽으로 이동중(연행32명). (계엄사 상황일지)
- 특전사 11여단 (여단장 준장 최웅) 여단본부 260명 광주로 이동. C-123 수송기 5대에 분승, K-16기지 출발. 도착과 동시에 2군 작전통제하에. (계엄사 상황 일지)
*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학생 50여 명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공수들은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다 피투성이를 만든 후 중앙국민학교 돌담 밑에 꿇어앉혀 놓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울컥 화가 치민 나는 죄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라고 항의했더니 곤봉으로 냅다 어깨를 후려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이근재, 현사연 조사)
16:40
- 시위대 3백여 명 지산파출소에 투석, 기물파괴 및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16:48
- 전교사에 제11여단 선발대 도착(45/213). (말, 1988. 8)
16:55
- 한국은행 앞, 학생 2백여 명 공수 1개 중대와 대치,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7:00 경찰 20-30명이 시위대의 포로로 붙잡힘
* "농장다리 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30여 명의 경찰을 인질로 삼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 등을 빼앗은 후 그들을 앞세우고 장동 로터리로 갔다. 경찰 인질을 연행학생들과 바꾸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그들은 인질과 연행학생을 교환하자는 우리의 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 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 인질을 놓치고 말았다." (구술 : 이광호, 현사 연 조사)
- 전남공고 부근으로 진출한 시위대 중의 일부가 노동청-전신전화국-전남여고-계림극장 부근으로 진출.
- 트럭에 분승한 공수부대 MBC 앞으로 진출, 무차별 진압. 청년,학생 연행 (현사연 조사 종합)
- 상점, 다방, 이발관, 음식점 등을 뒤진 공수부대, 학생들을 연행.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7:05
- 1천여 명의 시위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 및 경찰과 대치중.(계엄사 상황일지)
18:00 계림동 일대의 살륙
-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시민,학생 3백여 명이 운집, 공수부대와 충돌.
20-30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수부대가 산수동 방면으로 후퇴. 시위대가 계속 추격했으나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공포지대로 돌변. 밤새워 인근주택가를 뒤져 청년들 연행.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실천문학사. 이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로 약칭)
* "계림극장 앞을 지나다 보니 거리에 공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들이 이렇다 할말 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 (구술 : 이장의, 현사연 조사) - 김태종, 전용호, 김선출 등 문화팀은 무등영아원(이현철의 거주지)으로 가서 유인물 제작에 들어감. 프린트되는 대로 들고 나와 양림동, 사동, 구동, 월산동, 방림동, 학동 일대에 배포함. (현사연 조사종합)
19:00
- 한.미 연합군사령관, 18일 오후 7시 급거 귀임.
위컴사령관은 이날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 헬기편으로 유엔군 사령부로 돌아왔다.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위컴 사령관의 조기 귀임에 대해 '한국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위컴 사령관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 및 한국내의 사태 등에 대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귀국, 오는 27일에 귀임할 예정이었다. (조선일보,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