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어떤 집단을 탄압할 때, 그 집단이 무엇을 품었는지 역으로 알 수 있다. 수단이 거셀수록 대상이 가진 것의 무게는 그만큼 무거웠다는 뜻이다.
총을 든 사람은 총으로 제압하면 된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 집단 하나를 없애기 위해 법령을 세 번 고쳐 쌓고, 등록을 받아 기록하고, 10년 가까이 내부를 들여다본 다음 마지막에 형사 처벌로 마무리했다. 그렇게까지 공들여 없앤 것은 단군을 모신 종교 집단이었다.
1942년 11월 19일 새벽.
만주 영안현 동경성(東京城)과 조선 국내 각지에서 동시에 체포가 이루어졌다.
3대 교주 윤세복(尹世復)을 포함한 25명이 일거에 연행됐다.
이것이 임오교변(壬午敎變)이다.
25명 가운데 열 명은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한 종교 탄압으로 읽으면 절반만 보는 것이다.
1942년 11월의 체포는 하루아침에 결정된 일이 아니었다. 만주국은 1933년부터 거의 10년에 걸쳐 대종교를 법제의 그물망 안으로 조여 왔다. 등록하게 하고, 보고하게 하고, 기록을 쌓다가, 마지막에 그 기록을 무기로 삼았다.
1933년 5월, 만주국 문교부는 '종교 선포 및 사묘에 관한 규정'을 공포했다.
표면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행정 규정이었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찰 설립 시 교리·설립 동기·재정·종사자 명단·건물 도면·경내지 현황을 문교부 총장에게 제출해야 했다. 매년 1월 말까지 신도 수, 재산 현황, 의례 내용 전반을 보고해야 했다.
등록은 허가가 아니었다.
감시를 위한 기록 체계였다.
1938년에는 민생부령 '잠행사묘 및 포교자 취체 규칙'이 공포됐다. 더 직접적이었다. 포교자 개인의 신상·자격·포교 방법을 경찰 관할 기관에 신고하도록 했고, 공익에 반한다고 판단하면 설립 허가 자체를 취소할 수 있었다. 허가 없는 설립이나 이전은 형사 처벌 대상이었다.
관할 주체도 달라졌다. 1933년 규정이 문교부 총장에게 권한을 집중시켰다면, 1938년 규칙은 성 장관과 현지 경찰에게 단속 권한을 분산시켰다. 현장 경찰이 종교인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1941년 12월 27일, 만주국은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다. 일본 본토와 조선에서 이미 시행 중이던 치안유지법을 만주에 이식한 것이었다.
법 제1조는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를 지도한 자'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제2조는 그 결사의 목적을 알면서 활동한 실무 간부, 포교자, 재정 후원자, 의례 참가자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종교 조직 전체를 포괄하는 처벌 구조였다.
단군을 국조로 모시고 배달국의 역사 정신을 계승한다고 가르친 대종교는, 이 법의 잣대로 보면 처음부터 '국체변혁 결사'였다. 신앙 행위 자체가 범죄의 근거가 됐다.
대종교와 만주 당국의 긴장은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와 중국 펑텐성(奉天省) 사이에 체결된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은 항일 무장 단체뿐 아니라 대종교도 '불령선인(不逞鮮人) 단체'로 분류했다. 1926년 장쭤린 정권은 지린성과 훈춘현의 대종교 교당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1929년 흑룡강성 정부는 "경계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며 공산당 잔당과 결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등록 허가를 공식 거부했다.
약 6년간 비제도권 종교로 지하에서 존재하던 대종교는 1932년 만주국 수립 이후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건국 초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표방하며 조선인 종교단체에도 등록을 허용했다. 대종교는 1934년 '선도회' 명의로 등록을 마쳤다. 생존의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함정의 입구이기도 했다.
등록 이후 교세는 빠르게 확장됐다. 1935년 16개소였던 시교당은 1937년에 52개소로 늘었다. 같은 기간 교인 수는 1,536명에서 16,764명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하얼빈에 선도회를 설치하고, 한글 강좌를 열고, 개천절과 어천절 의례를 정례화했다. 대종교서적간행회를 통해 '삼일신고', '신단실기', '오대종지강연' 등 교리 교육 자료를 간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활동이 만주국의 시선에는 다르게 보였다.
교적 간행, 천진전(天眞殿) 건립, 대종학원 설립 등 사업이 있을 때마다 당국은 간행물 편집 방향에 대한 사전 협의를 요구했다. 개천절과 중광식 행사에는 관리들의 참석을 강요했다. 대종학원 개강식에는 현지 경찰서장이 나타났다. 교단 내부에는 밀정이 심어졌다.
임오교변의 직접적인 빌미는 편지 한 통이었다.
1942년 10월,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한글학자 이극로가 검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가 대종교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원고가 드러났다. 이극로는 대종교에서 '지교(知敎)' 지위를 받은 신도였다. 대종교 교보에 민족 정서를 담은 시를 여러 편 기고한 인물이었다.
만주국 경찰은 그 원고의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로 바꿨다.
그리고 원고 안의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문장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날조 번역했다. 번역이 아니라 조작이었다. 이 조작 문건을 근거로 "대종교는 조선 민중에게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단체로서 조선 독립이 최후 목적"이라는 죄목을 씌웠다. 그리고 11월 19일 새벽에 동시다발로 체포에 나섰다.
영안현·하얼빈·장춘·경성 등 광역권에서 기습 체포, 가택 수색, 압수 수색이 일괄 집행됐다. 압수된 것은 교적 2만여 권, 고서 3천여 권, 단군 영정인 천진(天眞), 회계장부, 교인 명부, 의례 진행표, 강연 원고였다. 교단 운영의 핵심 문서 전부였다. 이것들은 이후 수사에서 '결사의 목적', '지도 체계', '자금 조달'의 증거로 활용됐다. 10년 전부터 법정 보고 의무로 제출하게 한 자료들이 고스란히 기소의 근거가 됐다.
1944년 1월 7일 판결 기준으로, 3대 교주 윤세복은 치안유지법 제1조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서무와 출판을 총괄한 김영숙은 15년, 경의원장 윤정현과 총본사 운영 보좌 이용태는 각 8년, 천진전 건축에 참여한 최관도 8년, 회계 실무 담당 이현익은 7년, 자금 기부자 이재유는 5년이었다.
자금을 모금하고 교당 건축을 총괄했던 오근태와 나철의 아들로 '종문지남' 편찬을 맡았던 나정문은 판결 전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백산 안희제(安熙濟).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세워 상해 임시정부의 주요 자금줄이 됐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건너가 발해농장을 일구고 1931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그는 9개월 동안 고문을 견뎌냈다.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출감 후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총 25명 가운데 열 명이 그렇게 죽었다. 대종교는 이들을 순교십현(殉敎十賢)이라 부른다.
이 판결 구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처벌의 범위다.
치안유지법 제1조는 교단 지도자를 겨냥했고, 제2조는 실무 간부와 포교자, 재정 후원자, 의례 참가자까지 포함했다. 교리를 가르친 사람, 책을 편찬한 사람, 돈을 낸 사람, 제례에 참석한 사람. 신앙의 모든 행위가 '국체변혁 목적 수행'으로 간주됐다.
목단강 고등검찰청의 기소문에는 "국가로서는 용인할 수 없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었다.
이것은 개인의 범죄에 대한 처벌이 아니었다. 교리 자체, 교단 자체를 정치범죄로 규정한 것이었다.
1933년 종교법 등록, 1938년 단속규칙, 1941년 치안유지법. 이 세 단계는 단순한 법령의 시간적 나열이 아니다. '등록→감시→형사처벌'이라는 구조적 연동이었다. 등록을 통해 조직 전모를 파악하고, 보고를 통해 자료를 축적하고, 그 자료를 근거로 형사 기소했다. 행정과 형사법이 결합된 식민 통제의 완성 형태였다.
임오교변 이후 대종교총본사는 폐쇄됐다.
주요 간행물은 압수됐다.
교인들은 침묵하거나 떠났다.
기록은 불태워졌다.
교당의 문이 닫히고, 의례가 중단되고, 교리가 전해지지 않는 상태가 해방 직후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다.
임오교변은 조선어학회 사건과 거의 동시에 터졌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11월 임오교변.
한글학자들을 잡고, 한 달 뒤 단군을 모신 교단을 잡았다. 두 사건은 이극로라는 인물로 연결돼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말'을 지우려 한 것이었다면, 임오교변은 '정신'을 지우려 한 것이었다.
대종교가 단군사화를 민족의 역사 기억으로 가르치는 것, 개천절을 기념하는 것, 한글로 교리를 번역하는 것. 이 모든 것이 '국체변혁'으로 기소됐다.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단순히 무서워서였을까.
일본의 국가 종교인 신도(神道)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에서 시작되는 신화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천황이 현인신(現人神)으로 군림하는 근거도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대종교는 단군의 신교(神敎)를 일본 신도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설명했다.
홍암 나철이 일본 총리에게 보낸 서한에는 "일본 민족의 근원과 신교의 본원이 어디서 왔는가"를 정면으로 묻는 문장이 있었다. 문명의 우선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그것이 대종교를 존재 자체로 위협적인 집단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1942년 만주의 새벽, 경찰이 문을 두드렸을 때 교당 안에서 무엇이 타오르고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록은 남아 있다.
교인들은 그 시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교당의 문이 닫히고, 신도들은 침묵하거나 이탈했으며, 기록은 불태워졌다."
개천절 천제 의례를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던 노령의 교인이 자택 앞에서 포위돼 체포됐다는 기록도 있다. 그 장면을 지켜본 가족들의 충격도 증언으로 남아 있다. 행정과 형사법의 연동은 지도부를 제거한 데서 그치지 않았다. 교리 전수, 의례 재현, 신도 조직. 교단 존속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동시에 붕괴시켰다. 그 붕괴는 해방 직후까지 이어졌다.
일제가 그렇게까지 공들여 없앤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그 방식으로 짐작한다.
그 짐작이 정확하다면, 잃은 것도 그만큼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