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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 위의 푸른 사상
『살바도르 달리風의 낮달』 홍일표, 『천년의시작』刊
고봉준(문학평론가)
길 이전에 대지는 매끄러운 공간이었다. 지상(地上)에 크고 작은 길들이 생겨나면서 인간의 삶이 ‘길’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삶이 한 편의 로드무비(Road Movie)라는 비유가 등장하자, 한 사람의 인간,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길이 되었다. 기원에 대한 신화의 탄생과 종말에 관한 묵시록적 예언의 등장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 예언의 대략적인 내용은 인간과 사물의 길이 ‘죽음’의 종착점으로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가는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지상의 어떠한 생명도 죽음의 이정표를 따라 삶의 시간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문제는 죽음이라는 최후의 종착점이 아니라 그곳까지의 여정, 즉 ‘길’ 자체이다. 이 길의 중요성을 일깨운 것은 ‘길(삶)’과 ‘물음’을 하나로 간주했던 만년의 하이데거였고, ‘삶-길’이 구원 없는 사건의 연속임을 영화화한 것은 《길》의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였다. 앙드레 바쟁의 말처럼, 펠리니의 영화는 ‘삶-길’이 인과율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임을, 구원이 아니라 숱한 갈림길의 연속일 뿐임을 각인시켰다.
『길 위에서의 명상』
1.
‘길 위의 명상’은 ‘길에 관한 명상’이다. ‘길’에 의해 매개되는 두 개의 명상은 이복형제들이다. ‘길’을 벗어나지 않는 길 위의 명상가는 삶의 구체성을 얻고 길 자체에 대한 성찰의 시선을 잃는다. 반면 길에 관한 명상가는 성찰의 시선을 획득하고 삶의 상실이라는 뼈아픈 대가를 치른다. 그들의 시선은 키클롭스(Kyklops)의 외눈박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눈이다. 홍일표의 시는 두 개의 명상을 결합시켜 <삶=길>의 도식을 완성하고, ‘길’이 끊어진 곳에서 길 없음의 절망이 아닌, ‘낯선 길’의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낯선 길, 그것은 자명하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스스로 잘라버린/그 자리”(「수도승」)에 뼈로 “필생의 백서(白書)”를 새겨 넣는, 모든 글쓰기가 감당해야 할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제목은 ‘길에 관한 명상’으로 바꿔 읽어도 좋으리라.
남산 한옥마을에서 인사동까지 걷는다
지하철도 버스도 다 버리고
걷는다. 내 발바닥과 길이 직접 내통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뜨겁게 만난다
타박타박, 기웃기웃 걷다보면
충무로를 지나 명보극장, 을지로에 이른다
을지로 3가에서 잠시 멈칫거리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이 꺾일 때 잠시 생각도 꺾어진다
일방통행으로 치닫는 생각이 자주 꺾여야
길눈이 밝아진다
아직도 어둡기만 한
生의 길눈,
두리번거리며 종로 3가역, 지하도를 거쳐 1번 출구로 나온다
탑골공원 방향으로 나와
길가 노점상들을 바라보며 걷다가
깜박 길을 놓친다
길이 나를 잊은 것인지
내가 길을 잊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외줄기 생각만 따라가다가
어느새 내 생의 절반이 지났다
탑골공원 앞에서 철컥, 다시 길이 발바닥에 붙는다
흩어지는 사념의 끝머리에
소주병과 함께 쓰러져 있는 노숙자
행인들의 시선 대신
한 마리 파리가 그를 열심히 어루만지며 핥는다
- 「길 위에서의 명상」 부분
길은 삶의 축도(縮圖)이다. 삶에 관한 감동적인 영화의 대부분에서 길은 숱한 만남과 헤어짐이, 사랑과 이별이, 삶과 죽음이 플롯의 인과성이나 해피엔딩에 구애됨 없이 펼쳐지는 스크린이다. 아니다, 삶은 “아직도 가야할 먼 길을,/살아가야 할 많은 날들”(「구두 굽을 갈면서」)처럼 공간화된 시간이다. 아니다, 길 위의 삶은 “곳곳을 떠돌다/갈라지고 터져 저물어 당도한/수취인 불명의 소포 한 뭉치”(「사내의 맨발」)처럼 ‘죽음’ 이외의 도착지를 알지 못하는 우발성의 다발이다.
지금, 시인의 발걸음은 그 길 위에 머물러 있다. 길 위의 풍경과 명상은 낮은 곳을 향하고 있다. 한낮의 도심 한복판이다. 시인은 남산의 한옥마을에서 인사동까지, 도시의 중심으로 가로지르며 뜨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서 그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화려한 고층빌딩이나 쇼윈도우가 아니라, 그 이면에서, 그 아래에서 힘겹게 생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탑골공원 앞의 즐비한 노점상, 소주병을 부여잡고 거리에서 잠든 노숙자……. 이 주변적인 존재들과의 우연한 조우가 ‘生의 길눈’을 밝히고, 사유의 길을 굴절시킨다.
길 위의 명상이 길에 관한 명상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다. 숱한 갈래를 품고 있는 한낮의 길에서 바뀌는 것은 발걸음의 방향이지만, 그때마다 달라진 길의 방향은 생각을 꺾어놓음으로써 ‘길’에 대한 명상을 촉발시킨다. 매끄러운 대지에 길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길에 길들여지는 순간부터 자신이 만든 길 이외의 길을 길이 아니라고 여긴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기만이 모든 길을 일방통행로로 만들고, 인식과 사유의 일방통행은 타자에 대한 폭력적 시선을 낳는다. 그러므로 “일방통행으로 치닫는 생각”은 자주 꺾일수록 ‘生의 길눈’을 밝게 만든다. 어느새 시인은 길 위의 명상가에서 길에 관한 명상가로 존재의 전이를 완성했다. 우리는 이 길을 ‘인간의 길’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갑옷투구로 무장한 발,
발이 잠시 빌린 것은 튼튼한 심장을 감싸고 있던
한때의 질긴 가죽이다
이제 이름만 남은 쓸쓸한 기호이다
- 「구두의 역사」 부분
곳곳을 떠돌다
갈라지고 터져 저물어 당도한
수취인 불명의 소포 한 뭉치
- 「사내의 맨발」 부분
인간의 길은 ‘구두’의 길이거나 ‘맨발’의 길이다. 이 시집에는 유독 ‘구두’(「구두의 역사」「구두 굽을 갈며」)와 ‘맨발’(「사내의 맨발」)을 소재로 한 시편들이 많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낡은 구두>에서 들판 길의 고독과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을 읽었다. “구두창 아래에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저며 들어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부가 떨고 있다.”(하이데거, 「예술 작품의 근원」) 빗속에 홀로 남겨진 한 남자의 쓸쓸한 모습을 담은 유진 스미스의 사진 <역 플랫폼에서> 역시 ‘낡은 구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이데거는 ‘낡은 구두’에서 대지의 부름을, 유진 스미스는 삶을 짓이기는 쓸쓸함의 무게를 읽었다.
홍일표의 시는 ‘구두’라는 사물을 ‘낯선 길’로 이끌어간다. 그에게 구두는 한때 생명의 심장을 감쌌던, 그러나 이제는 ‘쓸쓸한 기호’가 되어버린 가죽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존재론적 연속성을 사유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찰적 태도를 견인한다. 그리하여 「구두의 역사」에서 ‘구두’라는 ‘갑옷투구’를 빠져나온 발이 “백사장의 모래알들”과 “알몸과 알몸”으로 만날 때 “사납던 길들”은 온순해진다. 시인의 시선은 문명이라는 갑옷투구를 벗고 무장 해제한 맨발에 머문다.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은 맨발을 구두로 삼은 최초의 회화가 아닐까. 한편 「사내의 맨발」에서 시인은 ‘맨발’에서 “남루한 삶의 책갈피”(「불의 양식」)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맨발’은 “수취인 불명의 소포”라는 인상적인 비유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삶으로 상투화되지 않는다. ‘구두’가 “삼키면 삼킬수록 배고픈 동굴/가리고 가려도 금방 마각을 드러내는/굽 속의 검은 무덤”(「구두 굽을 갈며」)처럼 길을 삼키는 문명의 육식성이라면, ‘맨발’은 “땅의 거친 숨결 읽으며/뜨겁게 만난 파임과 새김, 점과 획”(「사내의 맨발」)처럼 존재론의 차원에서 길과 연속성을 갖고 있는 자연적 대상이다.
2.
홍일표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투명하다. 자연에 대한 유기적 이해가 불가능한 이 시대에 시인은 세계에 대한 실정성으로서의 문명적 이해를 넘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원초적 관계회복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불 켜진 여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여자와 바이올린은 “은밀한 교감의 촉수”로 관계하고, “물 흐르듯 풀려나온 나무의 전생이/난해한 여인의 생을 해독”함으로써 소리가 태어난다. 이 시에서 ‘소리’는 여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바이올린의 몸체를 구성하고 있는 ‘나무’ 또한 소리를 내는 도구가 아니다. 이 불가해한 관계로 인해 여자는 “나무의 환한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살아 있는 지팡이」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은 ‘생성’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표출된다. “땅에 꽂은 지팡이가 고령의 나무가 되어 자란다”라는 비현실적인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 시에서 죽은 나무에 싹이 트는 것은, 나무의 부활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손에서 흘러나온 맥박이 나무의 갈라진 틈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신비로운 교감을 ‘내통’이라고 명명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구적 이해를 넘어서는 이 내통의 상서로움은 분명 ‘오독(誤讀)’이다. 홍일표의 시는 이 오독의 힘과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가지와 가물치”(「즐거운 오독」)의 혼동, 내소사의 밤길을 “깊이를 모르는 우물”(「오독의 지도」)로 사유하는 시적 인식, ‘스님’과 ‘적송’(「숲에 가면 그가 있다」)의 하나됨, ‘짐승의 뼈’와 ‘필생의 백서’(「수도승」), ‘수박씨’와 ‘파리떼’의 동일화는 ‘오독’의 이형(異形)들이다.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시선에서 이 오독은 “완벽한 허구”이겠지만, 시적 인식 안에서 “잘못 읽은 삶의 문장들”(「검부스러기를 모시다」)은 시의 출발점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눈을 “죽은 동태 눈 같은 모니터”(「오독의 지도」)에 비유하는 것, “찰칵, 셔터가 열렸다 닫히고”처럼 카메라에 비유하는 것, 냄새를 “두루마리 화장지 같은 기다란 손”(「냄새의 길」)으로 인식하는 것, 한 그루의 소나무에서 자가 발전 중인 “모터 소리”(「숲에 가면 그가 있다」)를 듣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오독이다. 오독이 유일한 진리가 될 때, 시가, 예술이 탄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인들은 이 오독을 ‘은유’라고 불렀다. 은유란 “다른 사물로부터 차용된 명칭을 수단으로 해서 원래 지시하고자 하는 사물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김상환, 「데리다와 은유」)이라는 점에서 ‘오독’에의 감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홍일표의 시는 ‘오독’에 의해 잘못 읽혀진 세계의 문장들이 “눈앞의 차가운 철문을 여는 열쇠”(「헛것은 유구하니」)임을 보여준다. 모든 시인은 이 헛것의 교도(敎徒)이다.
장위동 드림랜드 앞을 지날 때
비둘기 서너 마리 도로 위를 무단 횡단한다
빨간 불 앞에 얌전히 발 묶여 서 있을 때
눈앞에서 나 보란 듯 날아간다
똑같은 목숨인데
행려의 방식이 다르다
태양의 붉은 심장을 겨누는 나무처럼
굶주린 다리는 하늘을 더듬어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지상의 길을 버리고
허공의 창을 두드리는 눈부신 날개와
길에 박힌 다리의 경계,
불안, 불안 장위동 고개를 넘어 간다
아침저녁마다 나는 이 고개를 넘고
미아리 고개까지 꾸역꾸역 삼킨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산 같지 않다
산은 수풀 무성한 고전(古典),
고전과 벌거숭이 오늘 사이에서 나는 자주 고전(苦戰)한다
그 때마다 꽉 막힌 울화통 밖으로 날아가는 비둘기가
한 점 희망일 때
나는 신호등처럼 깜박이며
길 건너 풍경을 팽팽히 잡아당긴다
- 「배고픈 다리는 날개를 먹고 산다」 전문
꼭대기로 모아지는 눈썹 끝
방아쇠가 당겨진다 탕!
나무도, 억새풀도, 물속의 어름치도
점 하나에 제 생을 밀어 넣는다
몸 밖을 향한 사마귀의 총구는 뜨겁게 긴장한다
탕!
표적물이 벽돌처럼 와르르 무너진다
깨어진 풍경을 사마귀가 아삭아삭 씹는다
산 중턱의 꽃나무는 제 몸을 겨눈다
총구의 방향은 안쪽이다
욕망의 보법이 다르니
밖이 무너지지 않고 항상 안이 먼저 무너진다
겨울나무들의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총구를 보라
입을 굳게 다물고
몸 안의 전란을 다스리고 있는 수직 병사들
나무 속 어둡고 긴 생의 갱도 끝에서
탕!
꽃나무 정수리에서 탕!
지리한 내란은 끝이 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
- 「폭발하는 꽃」 전문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세계의 문장들에 대한 오독(誤讀)은 두 번째 길을 예고한다. 시인은 이 두 번째 길 위에 서 있지만, 그러나 이 길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새’와 ‘꽃’이다. 장위동 드림랜드 앞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비둘기들은 삶이 한 편의 로드무비라는 진술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인간의 길을 벗어난다. 빨간 신호등에 묶인 채 서 있는 인간의 발과 달리 비둘기의 날개는 ‘지상의 길’을 버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 비둘기의 비상을 시인은 굶주린 다리가 “일용할 양식”을 찾기 위해 하늘을 더듬는 행위로 인식한다. “허공의 창을 두드리는 눈부신 날개”와 “길에 박힌 다리의 경계”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 그리하여 ‘똑같은 목숨’이라는 동일성의 폭력이 ‘행려의 방식’이라는 차이에 의해 무(無)로 바뀔 때, 시인은 울화통 밖으로 날아가는 비둘기에게서 한 점 ‘희망’을 읽는다.
홍일표의 시에서 자연은 이중분절을 통해 특이성을 획득한다. 인간과 자연(새)을 가르는 ‘행려의 방식’이 첫 번째 분절이고, 동물과 식물을 가르는 ‘욕망의 보법’이 두 번째 분절이다. 「폭발하는 꽃」은 ‘욕망의 보법’이라는 관점에서 사마귀와 꽃나무를 비교한다. 사마귀의 총구는 몸 밖을 향해 발사됨으로써 표적물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그것을 사냥이라고 부른다. 반면 꽃나무의 총구는 자신의 내부를 겨냥함으로써 스스로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그것을 개화(開花)라고 부른다. 사마귀의 사냥과 꽃나무의 개화는 그 기원이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그것의 표출방식은 상이하다. 시인은 모든 생명이 욕망을 표출하는 순간을 “점 하나에 제 생을 밀어 넣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관점에서 ‘나무’와 ‘억새풀’과 ‘어름치’에게서 욕망의 기원은 동일하다. 물론, 사마귀와 꽃나무의 비교가 가치의 위계질서를 의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홍일표의 시는 자연을 인간화하고, 자연을 식물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90년대의 생태주의와 다르다. 오히려 그의 시는 세계를 자아로 동일화하는 전통서정시의 문법과 달리 인간과 자연, 동물과 식물의 특이성의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인간화된 자연의 표상을 넘어선다.
3.
‘길’은 인간주의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인간적 삶의 축도(縮圖)인 ‘길’은, 우발성의 인정할 때조차도, 방향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시인의 시집 제목(『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처럼, 한 인간의 삶의 아름다움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에 의해 평가되기 마련이다. ‘방향’의 문제를 제외하고 인간의 삶을 성찰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인간이라는 근대적 초상의 문턱을 넘어선 곳, 가령 ‘자연’에서 방향성을 찾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역사적 진보 개념처럼 인간주의적 가치를 자연 세계에 투영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것으로 자연의 법칙이 오롯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온전한 질서의 세계도, 온전한 무질서의 세계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인간적 개념을 투영하는 순간, 자연은 인간의 일부이거나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점에서 감정이입과 근대화의 개발논리 사이에는 근친성이 존재한다.
여기 ‘이동’과 ‘정지’의 시각에서 자연 세계를 시화(詩化)하는 두 편의 시가 있다. ‘바람’의 경계 없음(boardless)을 노마드(nomad)에 비유하는 「호모 노마드」, ‘나무’와 나무 아닌 것들의 존재방식의 차이를 포착한 「나무는 도망가지 않는다」가 그것들이다.
바람둥이와 바람은 인척간이다
같은 혈족, 같은 유목민이다
엉덩이가 가벼운 부족이니 잠시도 한자리에 있지를 못하고
끝없이 보따리를 싼다
동가식서가숙을 시비하랴
야반도주 줄행랑을 탓하랴
바람은 애당초 집을 짓지 않는다
평생을 땅 한 쪼가리에 목숨 걸지 않는다
머무는 곳이 모두 제 땅이요 제 집이니
그는 지상의 대지주다
걸으면서 꿈꾸고 걸으면서 사랑하고
순간, 순간 반짝이며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천지사방 도처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성벽을 넘어 그리운 초원으로, 말젖이 흐르는 테렐지로 달려간다
- 「호모 노마드」 부분
물이 바람을 피해 재재거리며 달아나듯
불도 발목 잡히지 않으려고 산봉우리로 도주한다. 필사적으로
불여우도 동물원 철창을 부수고 탈주한다
순식간에 불길은 산 하나를 통째로 삼킨다
새가 날아가고, 다람쥐가 뛰고, 청설모가 날고
덩달아 헬기까지 허공을 치며 날아간다
살아 움직이는 건 모두 뒤돌아보지 않고 망명한다
버리고 또 버리고
다 떠난 빈 자리에 달랑 등신불 남았다
온몸이 까맣게 탄 그 사람 남았다
전심전력 홀로 버티던 키가 훤칠한 사내
이글이글 불타며 하늘로 오르던
그러나 차마 세상에 등 돌리지 못한
장렬한 소신공양
허리 꼿꼿이 죽음을 지키고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한 말들을 가느다란 연기로 피워 올리며
실직 가장의
그믐밤 같은 산 하나를 지켰다
- 「나무는 도망가지 않는다」 전문
노마드(nomad)는 새로운 창조로서의 탈영토화 운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유목’이라고 번역되는 이 개념은, 그러나 공간적인 이동만이 아니라 불모지를 생성의 땅으로 바꿔내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고착되지 않고 매순간 자신을 바꿔내는 창조적 행위이다. 노마드는 도주할 때조차도 새로운 창조의 선을 그려낸다. 땅을 소유하고, 그 땅에 울타리를 침으로써 이동을 가로막는 정착민과 달리 유목민은 자유로운 이동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창안한다. 그렇다고 유목민이 곧 이주민은 아니다. ‘유목민’의 정의에서 공간적 이동은 핵심이 아니다. 척박해진 땅을 버리고 새로운 땅을 찾아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이주민과 달리 유목민은 그 땅에 달라붙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런 점에서 유목민은 움직이는 자인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 자이다.
「호모 노마드」에서 시인은 ‘바람’에서 ‘유목민’의 속성을 읽어낸다. “바람둥이와 바람은 인척간이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그들은 엉덩이가 가벼워 잠시도 한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는 점에서 같은 혈족이다. 끝없이 보따리를 싸고, 동가식서가숙을 일상화하며, 야반도주를 일삼는 바람(둥이)은 유목민을 닮았다. 그러나 시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까지라면, 바람은 유목민의 혈족이라기보다는 이주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바람둥이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떠도는 존재이다. 그는 모든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성(異性)’에 속박되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람’을 유목민의 후예라고 정의하기 위해서는 “바람은 애당초 집을 짓지 않는다”라는 추가적인 진술이 요청된다. ‘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는 영토화의 산물이다. 그렇기에 오직 정착민의 후예들만이 ‘집’의 소유에 집착한다. 시인은 ‘집’이라는 안정적인 영토를 거부하는 바람의 속성에서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 순례자의 운명을 읽는다.
유목민과 정착민의 구별이 ‘공간의 이동’에 있지 않음은 「나무는 도망가지 않는다」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산불’이 발생했다. ‘불’은 제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맹렬히 산 정상을 향해 이동한다. 불여우가, 새가, 다람쥐와 청설모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주(‘망명’)한다. 이윽고 불길이 산 전체를 집어삼키고 남겨 놓은 잿더미 가운데에서 시인은 “차마 세상에 등 돌리지 못”한 소신공양의 주검을 발견한다. ‘산불’이라는 척박한 환경을 버리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하는 생명체들과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장렬한 죽음으로 산을 지킨 ‘나무’ 가운데에서 누가 정착민이고 누가 유목민인가? 물론 새로운 삶을 창조하지 못한 나무의 죽음에 ‘노마드’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은 한낱 수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난 생명체들이 죽음의 공간을 생성의 땅으로 바꿔내려는 노력 대신 ‘이동’을 선택하는 ‘이주민’의 형상이라면, 공간의 이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터전에 뿌리내리고 불모의 대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나무’는 ‘노마드’의 형상에 가깝다. ‘나무’에서 ‘실직 가장’으로 연결되는 안타까운 삶의 연속성이 한층 시적(詩的)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노신의 말처럼, 길이나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없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유목민에게 이미 존재하는 ‘길’이란 새로운 삶의 창안인 탈영토화를 위해서만 의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목민에게 모든 길은 벗어남을 위해서만, 익숙한 길의 편안함이 아니라 ‘낯선 길’의 새로움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 이 길 없음이 새로운 길의 창조를 낳는다.
4.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다. 한 길은 인간의 발자취가 뚜렷한 길이며, 다른 한 길은 그 어떤 발자국도 찾을 수 없는 낯선 길이다.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응시하던 시인은 마침내 사람의 발길이 드문 길을 선택한다. 훗날 시인은 자신이 인적이 드문 길을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삶이 바뀌었노라고 증언할 것임을 예언한다.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익숙한 길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숱한 발자국이 가져다주는 안도감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에서 새로운 삶이 창조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하여, 익숙한 길은 두려움을 혐오하는 자들의 길이며, 낯선 길은 그 두려움을 새로운 창조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자들의 길이다.
시인은 ‘시’가 늘 ‘낯선 길’ 위에 서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프로스트의 비유를 빌리자면, ‘낯선 길’이란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찾을 수 없는 적막하고 무서운 길이다. “가장 확실한 눈앞의 푯대”를 버리고, “진저리치며 걸어온 길”을 내던지고,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가을 들녘 어느 외진 구석에서/황홀하게 피 흘리며 죽어갈/위험한 짐승”(「칸나꽃으로 걸어가는 어름산이」)의 길이다. “번듯한 큰길”과 “뻣뻣하게 굳은 대로”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신생(新生)의 길, “마음이 흐르는 곳마다 우글거리는 길/꿈틀꿈틀 요동치는 길”, “살아 퍼덕이는 길”(「낙서는 길이 없다」)이다. 대로나 번듯한 위에서 “실꾸리 같은 직선, 곡선들이/발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얽혀 있는 이 길을 볼 수 있는 자는 적다. 그러나 이 위험하고 위태로운 ‘낯선 길’은 모든 창조자들이 걸어가야 할 숙명의 길이다. “창조란 불가능한 것들 사이로 자신의 길을 그어나가는 것이다.”(G. 들뢰즈) 그러므로 모든 불가능성은 가능성의, 창조성의 원천이다.
넘치는 것들은
스스로를 벗어난다
하루를 버린 해가 서산을 넘듯
철새는 날아간다
인륜을 버리고 천정(天情)의 길을 간 허균(許筠)처럼
철새는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
제 속의 것을 억누르지 못해
아비를 버리고
둥지를 버리고
꽉 막힌 하늘과 지상
그 한가운데를 긴 칼로 내리그은
수평선, 협객의 가느다란 눈초리 속으로
철새는 몸을 던진다
볏단들이 줄줄이 묶여 쓰러지는 동안
오래된 길을 버린 날짐승들,
마침내 신성의 하늘을 난다
- 「낯선 길」 전문
조용히 눈을 감고, 낯선 길 위에서 시인이 마주쳤을 금빛 은빛 냇가의 잔물결과, 신성으로 빛나는 천정(天情)의 신성한 하늘을 조용히 떠올려 본다.
고봉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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