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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암아동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유병길
제2회 혜암아동문학상 당선작과 당선소감, 심사평
< 동시 당선작>
오빠 입 속엔 따개비가 산다.
김민경<본명 김미경>
교통사고로 아랫니 네 개가 빠진 곳
침방울이 찰방거리는 바닷속 동굴에 붙어 살아
오빠가 웃으면 딸각딸각 따라 웃고
웃다가 배꼽이 빠진 따개비가
뭍으로 나올 때도 있어
- 어이쿠
오빠는 얼른 따개비를 잡아 바위에 올려 놓지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날
혼자 숨어 울 때면
달가닥 달가닥,
따개비들도 소리 내어 울곤 해
따개비야
웃지 않아도 좋아
울지 않아도 좋아
떨어지지 말고 꼬옥 ~ 꼭
오빠 옆에 붙어 있어줘
<동시 당선 소감>
퇴근 길, 실개천가 벚나무 길을 에돌아 집으로 향합니다. 나뭇가지에 걸린 별과 달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별이, 달이 왜 이지러져 보였는지... 나무에 걸린 별을 올려다보기만 했는데 오늘 그 별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올봄 처음 동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동시 교실 수강도 듣지 못하고 오직 독서와 습작, 순간순간 찾아오는 감응, 동시 혼을 밑천으로 제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당선 통보 연락을 받기 전날, 꿈을 꿨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인자한 모습으로 흐뭇하게 웃으시며 편지를 주셨습니다. 큰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고 싶었나 봅니다.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수필 때문에 속앓이를 할 때 무기력해진 나를 이끌어준 친구가 있습니다. 늦어도 좋으니 함께 걸어가자고 믿어주고 지켜봐준 친구. 부족한 동시를 읽고 감평해 준 나의 첫 독자인 현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동시를 써서 읽어주면, 귀 기울여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던 남편과 민주, 민석이, 올해 태어난 선물 같은 사랑스러운 손녀 태인이도 큰 힘이 돼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정희, 소정이, 유현이. 숙경이 초등친구들과 친정 오빠, 여동생, 방송대 국문과 동문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운영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키워주신 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제 가슴에 항상 자연을 들여놓고 아이들과 함께 뛰놀면서 동시를 읽고 쓰면서 살겠습니다. 하늘이 저를 안아주었듯이 아이들을 동시로 안아주겠습니다.
<동시 심사평>
모두 11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습니다. 그 가운데 다섯 분의 작품을 두고 고심한 끝에 <오빠 입 속에는 따개비가 산다>를 당선작으로 정했습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대부분 원관념이 구상인 것에 반해 당선된 작품의 원관념은 추상에 가깝습니다. 원관념이 추상일 때는 원관념이 구상일 때와 달리 시가 난해해지거나 관념이 과도하게 드러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습작 단계에서 난이도가 높은 작품을 회피한다면 등단 이후에도 시의 본령인 사색을 외면하고 기발한 소재나 시대적 유행에 기대어 동시를 쓰는 소재주의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선작 <오빠 입 속에는 따개비가 산다>는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는 무거운 주제임에도 절제된 어조로 행간에 많은 이야기를 숨겨 놓고 있습니다.
교통사고로 아랫니 네 개를 잃은 오빠는 가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천진난만하게 웃곤 하는데 웃는 도중에 갑자기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끼어들어 정색을 하게 만듭니다. 오빠에게 아랫니 네 개가 없는 것은 부차적인 슬픔이며 본질적인 슬픔은 아버지의 부재입니다. 그런 오빠의 심중을 헤아린 화자는 아버지의 부재라는 쓸쓸함에서 벗어나려 하기 보다는 그 쓸쓸함을 자신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소중한 자산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바위에 붙어 미동도 않는 조그만 따개비처럼 아버지는 원망스럽게도 어린 화자에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화자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호칭합니다. 이미 물리력을 상실한 아버지는 어리광이나 재롱을 떨며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화자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어린 화자는 미물에 가까운 따개비에게 오빠 옆에 꼭 붙어 있어달라고 주문을 합니다. 그것은 화자가 갈구하는 부성을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한 오빠에게서 찾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인3각> 외 6편을 보내주신 분의,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와 달력을 동일시한 <할아버지 달력>과 구조조정을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아버지와 달력을 동일시한 작품 <구조조정>은 무난한 작품이었으나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과 완성도에서 차이가 컸습니다. 주제를 제목에 지나지게 노출한 것도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입니다.
<발레하는 꽃> 외 4편을 보내주신 분의 작품 가운데 <낚시밥>은, “무거운 지하철도 지금 어느 낚싯줄에 끌려가고 있다”는 좋은 발견이지만 본문에 충분한 사유가 녹아 있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다른 손가락은 우리가 부러웠지> 외 4편을 보내주신 분의 작품 <다른 손가락은 우리가 부러웠지>는 소재는 신선했으나 퇴고를 서두른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제목과 시어들이 느슨하게 풀려 있고 여러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평면적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물고기 말>외 4편을 보내주신 분의 <지구 알>은 재미있는 발견인데 화자가 방관자적인 위치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선되신 분께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심사위원/ 곽해룡 동시작가
<동화 당선작>
발자국을 남긴 아이
김나른 <본명 김혜영>
그날 나는 은행나무 길을 걷고 있었어. 얼마 전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꿈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 모두 손을 번쩍 들고 발표를 했어. 나만 빼고.
내 앞으로 노란 은행잎이 흔들리며 떨어졌지. 익숙한 가로수 길, 에덴 한우 전문점, 모두랑 분식, 정다운 미용실, 발자국연구소……. 발자국연구소? 처음 보는 간판이었어. 나는 빼꼼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어. 회색 콘크리트 바닥에 신문지 몇 장이 뒹굴고 있었지.
“에이, 아무 것도 없잖아.”
문을 닫으려 할 때였어. 잡고 있던 손잡이가 물처럼 스윽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어. 쾅!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나고 눈앞이 깜깜해졌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
“뭐야! 무슨 일이야?”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지만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어.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어. 벽 같은 것이 만져져서 겨우 더듬더듬 걸을 수 있었어.
삑! 삑! 갑자기 발밑에서 버튼 소리가 나고, 내 발 주변으로 파란 불이 동그랗게 켜졌어. 여기저기 불이 들어오고 주변이 점점 환해졌지.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미어캣처럼 여기저기 쳐다봤어. 그곳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거든. 신기한 기계들로 꽉 차 있고 진짜 연구소처럼 보였어. 그리고 전광판처럼 생긴 큰 모니터에 글자들이 마구 찍히기 시작했어.
고민구: 12세. 남자.
학교: 삼백삼만 걸음.
피씨방: 오백칠십만 구십 걸음.
도서관: 칠천삼십일 걸음.
은행나무길: 천칠만 걸음.
축구장: 육백구십구만 천일 걸음.
…….
내 입은 저절로 떡 벌어졌어.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우주인? 파란 눈에 회색 머리를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어.
“이건 말도 안 돼. 거의 100년 만이잖아.”
남자가 말하는 소리는 꼭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어. 남자는 회색 머리를 흔들며 어지럽게 왔다 갔다 했어. 나는 덜덜 떨면서 말했어.
“여긴 어디죠? 저건 뭐죠? 이건 꿈인가요?”
“은행나무 길을 천만 번이나 넘게 걸었다고? 천만 번이라……. 왜? 왜 그랬을까?”
남자는 계속 자기 얘기만 할 뿐이었어. 엄마랑 똑같잖아. 나는 한숨이 나왔지.
“그거야 우리 동네 길이니까 그렇죠. 당신은 누구죠?”
남자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약간 바보 같은 소리를 했어.
“그렇지! 이 동네 아이지! 아, 나? 나는 꾸준한 박사야. 발자국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
“꾸준한 박사?”
풋, 웃음이 나왔어. 그러고 보니 박사는 안경도 쓰지 않았고, 흰 가운도 입고 있지 않았어. 전혀 박사처럼 보이지 않았지. 가만히 보니 어딘가 정신없고 모자라 보이기도 했거든.
“여긴 뭐하는 곳이죠? 분명 텅 비어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죠? 그리고 내 발자국을 왜 조사한 거죠? 내 발자국 수를 알아서 뭐 하려는 거죠? 나를 빨리 내보내주세요!”
“뭐 그렇게까지 겁먹을 거 없어.”
나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어.
“누, 누가 겁을 먹어요?”
“안심해. 여기는 발자국을 연구하는 곳이야. 발자국을 보면 미래를 알 수 있거든.”
“왜요? 왜 그런 걸 연구해요?”
“너 같은 어린이가 있기 때문이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어.
“뭐, 내 발자국으로 내 미래라도 연구한다는 거예요?”
‘꾸준한’이라는 박사가 수세미 같은 머리를 끄덕거렸어.
“아, 네. 우리 엄마도 내 미래를 연구하고 있거든요. 엄청 열, 심, 히. 나는 관심도 없는데 말이죠.”
“정말 관심이 없어? 이상하군.”
“내가 미래에 뭘 하고 있겠어요? 나는 잘 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한숨이 저절로 나왔어. 이런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박사, 아니 꾸준한 박사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하지만 나는 자존심도 없는 것처럼 자꾸 말을 하고 있었어.
“게임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꿈이 프로게이머냐고 물어봐요. 그건 아니거든요.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죠.”
박사는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어.
“흠, 정말 고민이겠군. 이리 오렴. 내가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박사는 뚜벅뚜벅 걸어서 아까 내 발자국 숫자가 찍히던 모니터 앞에 섰어.
“이건 발자국 저장소야. 발자국 정보가 여기 다 모였지.”
박사는 모니터 아래에 있는 버튼 중 하나를 눌렀어. 세계지도가 뜨자 박사가 우리나라 지도를 눌렀어. 그리고 화면 오른 쪽에서 오늘 날짜를 찾아서 손가락으로 눌렀어. 수많은 이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어. 그 중에 하나를 누르자 아까처럼 발자국 정보가 나왔어. 겨우 몇 걸음뿐이었어.
“오늘 생긴 발자국 이름이야.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이곳으로 발자국 정보가 전송돼. 그러면 나는 그 발자국을 보관하고 관찰하는 거지. 네가 걷고 있다는 걸 잊고 있어도 발자국은 계속 인식되고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야. 그리고 의미 없는 발자국은 없어.”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어.
“사람들의 발자국 정보가 정말 다 여기 있다고요? 그럼 우리 엄마, 아빠랑 우리 반 친구들 발자국 정보도 있겠네요.”
꾸준한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어. 나는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움직여 보았어. 갑자기 내 발에 엄청 예민한 감각센서라도 달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 저벅저벅,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어.
“그런데 발자국을 왜 관찰하는 거예요?”
“발자국들이 건강하게 잘 걷고 있는지 지켜보는 거야. 또 이 발자국들을 관찰하면 미래에 네가 어디 서 있을지 짐작할 수 있어.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가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어.”
띵. 기계에 빨간 불이 켜지고 메시지 창이 떴어.
“새로운 발자국 정보가 떴군! 고민구, 발자국연구소 150걸음…….”
151, 152, 153……. 숫자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어. 내가 걸음을 멈추자 숫자도 멈췄지. 박사가 한 손으로 턱을 쓸면서 나를 쳐다봤어.
“이제 이곳에도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군.”
“발자국을 연구한다더니 정말이었군요!”
나는 제 자리에서 막 뛰어보았어. 내 걸음에 맞춰 숫자도 올라가고 있었지.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뭔가 특별한 느낌이었어. 오늘 처음 걷게 된 것처럼 나는 너무나 들떠버렸어. 나는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막 돌아다녔어.
그러다 새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문을 발견했어. 그 문을 열자 눈앞에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졌어.
“와! 여기는 어디죠?”
열대식물 같은 큰 잎사귀를 단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그 너머에 색색의 모래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어. 꼭 오로라가 땅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지. 나는 모래를 밟아보려고 얼른 뛰어갔어.
“거기는 들어가면 안 돼! 위험해!”
박사가 뒤따라오며 소리쳤지만, 나는 이미 한 쪽 발을 모래에 디뎠어. 찰랑, 경쾌한 물소리가 났어. 아까는 안 보이던 강물이 내 발목에 닿아 출렁였어.
갑자기 우우웅 소리를 내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어. 순식간에 강물이 사나운 파도로 변해버리고 내 몸이 마구 흔들렸어. 발은 점점 모래 속으로 빠지고 물보라가 사납게 쳐댔어. 강물이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버릴 것 같았어. 그 때 꾸준한 박사가 내 어깨를 세게 잡아 당겼어. 나는 벌떡 뒤로 넘어지면서 겨우 발을 빼냈어. 갑자기 물보라도 흔들리던 땅도 잠잠해졌어. 나는 컥컥거리며 막혔던 숨을 토해냈어.
“진작 말했어야죠. 죽을 뻔 했잖아요.”
나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어. 박사가 정말 원망스러웠어.
모래 위에는 투명한 강물이 일렁이고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잔잔하기만 했어. 내 머리카락과 옷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여기저기 알록달록한 모래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
꾸준한 박사가 나를 보며 혀를 찼어.
“쯧쯧, 함부로 시간의 강에 발을 내딛다니…….”
“시간의 강이요? 분명 모래만 있었다고요.”
“시간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아. 시간의 강을 건너면 사람들의 미래를 볼 수 있지. 물론 너의 미래도 말이야. 하지만 이 강은 절대 건널 수 없어. 너도 방금 봤잖아. 시간을 함부로 건너뛸 수는 없어.”
그때 강 건너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어. 나는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봤어. 강기슭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였어.
“설마 내가 신기루를 보는 거예요?”
“아니야. 네가 시간의 강을 건드리는 바람에 잠시 나타난 것뿐이야.”
“그러니까 정말로 저기에…….”
나는 강 건너를 바라봤어. 우주만큼 멀리 있던 미래가 지금 내 가까이에 있어. 깜깜하던 하늘에 별이 빛나기 시작한 거야. 나는 갑자기 내 미래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어떻게 하면 강 건너에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어요?”
“갑자기 네 미래라도 궁금해진 거야? 미래에 관심도 없다면서.”
“아니에요. 그건 다들 먼 미래 얘기만 하니까 그런 거라고요.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고, 해야 될 것만 많아요. 그냥 지금이 재미있으면 안 되나요? 나는 그것뿐이라고요.”
사실 이건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이었어. 그런데 박사가 박수를 치며 나에게 말했지.
“훌륭하군! 미래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이 중요한 거지! 지금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는지. 즉 지금 발자국 말이야. 미래의 너를 만나는 방법은 간단해. 지금 열심히 걷는 거야. 좋은 곳으로 걸어가서 재미있게 지내는 거지.”
“그건 너무 쉽잖아요. 그런 거라면 자신 있어요.”
내가 제일 잘 하는 걸 하면 된다니 미래는 골치 아픈 게 아니었어.
“그런데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예요? 미래의 나는 꿈을 이뤘을까요? 아니, 그전에 꿈을 찾았을까요?”
“그건 네가 직접 알아 봐. 시간은 계속 흐르고 너는 발자국들을 여기저기 남기겠지. 나는 그 발자국들을 볼 수 있고 말이야.”
꾸준한 박사가 비밀을 간직한 고양이처럼 웃으며 말했어.
“앞으로 자네가 어떤 발자국을 남길지 궁금하군. 오늘처럼 운이 좋다면 나를 또 만나겠지. 이제 잘 가게, 친구!”
“벌써 가라고요? 내일 또 와도 되죠?”
내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꾸준한 박사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어. 박사의 파란 눈이 섬광처럼 빛났어. 순간 한 줄기 어둠이 지나갔어. 머리가 어지러웠어. 깊고 푸른 터널을 아주 빠르게 지나는 느낌이었지.
나는 은행나무 길에 서 있었어. 손에는 은행잎을 들고 말이지. 나는 퍼뜩 놀라 은행잎을 내던지고 이리저리 둘러봤어. 발자국연구소라는 간판은 없었어. 내 옷은 물기는커녕 뽀송뽀송하기만 했어. 아이스크림을 엄청 빨리 먹었을 때처럼 머리가 띵 했지.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몸이 부르르 떨렸어.
“엄마아!”
나는 집으로 달리기 시작했어. 가로수에서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보도블록 위에는 은행잎들이 소복소복 쌓여 있었지. 나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내 발을 내려다보았어. 지금도 내 발자국이 기록되고 있을까?
꾸준한 박사님께
박사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쉽지만 우리 반 친구들은 상상력이 부족하더라고요.
아무도 발자국 연구소와 박사님 이야기를 믿지 않아서 저는 그냥 엉뚱한 아이가 되었어요.
저는 여전히 게임을 좋아하고 공부는 하기 싫어요. 하지만 저는 저의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보기로 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사님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때까지 제 발자국을 잘 지켜봐주세요.
- 고민구 올림
<동화 당선소감>
안녕하세요! 눈이 작은 김나른입니다. 눈이 작아서 어릴 때 ‘눈 떠.’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른’이란 별명을 지었습니다. 눈이 작아서 나른한 아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실어 나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면서요. 이제 정말로 ‘나른’이란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발자국을 남긴 아이’는 동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쓴 글입니다. 글 앞에서 의기소침한 제가 꼭 꿈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고민구 같았습니다. ‘의미 없는 발자국은 없어.’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지만 저한테 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기다리던 당선 소식은 오지 않았고, 문득 새벽녘에 잠이 깬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 한동안 돌보지 않던 내 동화 속 주인공들을 소환했습니다. 좀 더 단단하고 가벼운 옷을 입혀주겠다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다짐했었지요. 진짜 주인공답게 말입니다. 다시 퇴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새벽은 별사탕처럼 눈물 나게 달콤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 주인공 하나가 빛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요.
길을 열어주신 혜암아동문학회와 김태호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별사탕 같은 새벽이 자주 찾아오겠지만, 저도 고민구처럼 뚜벅뚜벅 걸어가 보겠습니다.
작고 어리고 예쁜 것들을 사랑했던 엄마,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5년 전 엄마를 보내고,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약속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도서관 평생교육강좌에서 만나 어느새 길벗이 된 동화공작소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동화 심사평>
시작도 쉽지 않은 길.
동화를 쓰고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동화작가라서 그런진 몰라도, 주위에 모든 사람이 다 동화를 쓰는 것 같다. 암튼 정말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출판사와 공모전에 투고 작품들이 쏟아진다. 편집자가 검토하기에도 버거운 양이 매일 투도 된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 작품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삐딱해지자!’
남들과 같은 시선으로는 절대 차이를 만들 수 없다. 남과 다르게 뒤편을 보거나, 밑에서 올려보거나,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보거나, 뒤집고, 깨고, 비틀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 선배들이 절대 하지 말라는 걸 일부러 찾아 써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야기도 새로운 시선을 담았다면 좋다. 그렇게 몇십 편 이야기를 만들고 나면, 내 작품이 그리 삐딱해 보이지 않는다. 남과 다른 시선이지만 적절한 선을 가진 작품으로 다듬어진 것이다. 이제 작품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게 고생했지만, 이제 겨우 경쟁 무대에 올라선 것뿐이다.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다.
시작을 위해 무대에 선 작품은 모두 7편이었다.
<슈 아저씨 빵집의 기적> <서로 한걸음> <발자국을 남긴 아이> <저어새는 얼마인가?> <최연소 매니저> <파란 의자> <레고로 만든 선물>
<레고로 만든 선물> 문장이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힘이 느껴졌다. 쉽고 편하게 읽히는 본문은 작가가 가진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소재와 이야기가 이미 나온 단편 애니메이션과 너무 겹친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떠나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 남들과 겹치지 않는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 능력을 발휘하길 기대해본다.
<슈 아저씨의 빵집의 기적> 등장인물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다. 꿈속에 나온 독특한 모양을 빵으로 만들어내는 슈 아저씨, 뻐꾸기시계 속 초록요정과 함께 사는 꽃집 데이지 양,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 가루를 가진 초록요정. 흥미로운 소재로 이야기는 펼쳐지지만, 정작 등장인물들이 하는 일은 없다. 초록요정의 마법 가루를 통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동화에서 마법은 흥미를 끄는 소재로 남아야 한다. 마법으로만 해결된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결과도 없다. 마법에 의지는 하지만 중요한 순간만큼은 인간의 열정과 노력이 빛을 내야 동화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어새는 얼마예요?> 어릴 적 아픈 기억으로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게 된 아이가 나온다. 설정이 재밌다. 결국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엄마의 가치를 저어새를 통해 깨닫는 결과도 좋았다. 아쉬운 것은 주인공 심리변화가 너무 갑작스럽다는 것이다. 이야기 중간을 들어낸 것처럼 느껴졌다. 독자들이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버겁다. 사건을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에 감정 이입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면 마무리가 더욱 빛날 것 같다.
<서로 한 걸음> 주인공과 눈을 마주치면 누구든 눈물을 흘린다는 독특한 설정이 돋보였다.
마지막 문제 해결도 하늘과 눈을 마주쳐 비가 오게 하는 기발한 착상이 시원통쾌했다. 하지만 이야기 흐림이 자연스럽지 않다. 일상에 판타지가 억지스럽게 끼워진 느낌이다. 색다른 소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들어야 한다. 주인공 능력은 훨씬 더 재미난 사건들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의 고민도 담고, 스스로 긍정적인 결과로 만들 수 있는 성장의 과정이 촘촘하게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파란 의자> 장애인 관련 입수용 휠체어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점이 좋았다. 좋은 소재에 비교해 이야기 내용은 필요 없는 것들의 나열이었다. 길게 묘사된 수영장 풍경보다는 주인공의 모습과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도대체 뭐에 관한 얘기지? 의문을 가지면 이야기 속에 빠질 수 없다.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 ‘별님’이 등장하는 것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별님이 없어도 이야기는 자연스럽다. 차라리 ‘바다’라는 아이를 전면에 등장시켜 사건을 만들고,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나오면 좋겠다. 이야기는 처음에 쓰고 싶은 만큼 열심히 담아내고, 다시 필요 없는 내용은 과감하게 빼는 과정의 반복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작품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작업이다.
<최연소 매니저> 할아버지가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아이는 어떤 성장을 이뤘을까?
지훈이 할아버지는 가수다. 사실 할아버지는 화려한 무대가 아닌 지하철 버스킹을 하는 거리의 가수였다. 지훈이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할아버지가 부끄럽고 실망스럽다. 작가는 아이를 어떻게 다시 할아버지와 화해시킬까? 소통을 어떤 식으로 끌어낼까? 기대는 조금 아쉽게 허물어졌다. 슈퍼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할아버지의 하소연만으로 지훈이는 눈물을 보인다. 작가는 말로 풀어주는 가장 쉬운 방법을 썼다. 대화가 아니라 사건을 만들고, 행동으로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들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
<발자국을 남긴 아이> 전체 이야기 배경이 불분명하다. 마치 안개 속에 갇힌 답답함도 느껴졌다. 발자국 연구소에 들어가는 일 말고 다른 사건도 없다. 대화는 길고 너무 설명적이다. 말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남기려 했다. 결점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작가는 중심을 잃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몇몇 문장들은 아이들의 현실을 잘 반영했고, 위안을 준다. 발자국, 꿈, 미래……,일관적인 이야기는 상상 속 발자국 연구소와 잘 맞물려 일체감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아이들에게 재밌는 것을 찾아 많은 발자국을 남기라고 응원한다. 동화작가를 꿈꾸는 예비작가들에게도, 꿈을 가진 모두에게 필요한 응원이다. 작가는 자기 생각을 발자국처럼 꾹! 선명하게 찍어내었다. 여러 결점이 뚜렷하지만, 이 정도 뚝심으로 계속 나아가면 밝은 미래가 있겠다는 믿음이 갔다. 믿음에 당선이라는 한 표를 던진다.
공모전 당선은 출발점에 섰다는 의미다. 만만치 않은 첫 단계를 무사히 넘어선 것이다. 안도하긴 이르다. 출발선에서 보면 앞서 뛰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뒤처진 거리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갈지? 나만의 길을 만들고, 쉬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게 이제 필요하다. 긴 발자국을 남기다 보면 어느새 하나씩 목표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것이다.
당선되신 분께 축하와 어려운 길에 대한 응원을 함께 보냅니다.
심사위원/ 김태호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