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서 김연아가 보여주는 경기를 사람들은 ‘연기’라고 부른다. 김연아는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을 빠르고 강렬하게, 때로는 느리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연기’한다.
그녀의 우아한 동선, 애절하고 갈망하는 표정연기는 전문배우들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김연아는 뮤지컬을 좋아해?”
김연아는 뮤지컬과 인연이 제법 있다고 봐야 한다.
일단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만 봐도 그렇다.
김연아는 쇼트프로그램에서 뮤지컬 ‘리틀 나이트뮤직’의 삽입곡인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에 맞춰 연기를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뮤지컬 음악은 역시 레미제라블. 2013년 캐나다 런던 세계선수권대회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프리 프로그램에서 김연아는 레미제라블의 OST에 맞춰 세계 피겨 팬들의 마음을 그야말로 뒤흔들어 놓았다.
국내 한 언론사가 여론조사를 한 결과 ‘김연아의 역대 최고 프로그램’에서 이 레미제라블이 압도적인 표차로 1위에 등극했다고 한다.
“김연아가 뮤지컬에 출연한다면?”
김연아는 이제 더 이상 링크에서 볼 수 없게 됐다.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이 그녀의 마지막 은퇴무대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겠지만, 뜬금없이 ‘김연아가 뮤지컬 무대에 선다면?’이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에 빼어난 몸매, 디테일한 연기력에 안무, 노래까지 가능한 김연아가 뮤지컬을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이다.
그렇다면, 정말 김연아가 뮤지컬에 캐스팅된다면 어떤 배역이 어울릴까.
카르멘.
바다와 차지연이 맡아 뇌쇄적인 마력을 폭발시키며 남심을 쥐락펴락했던 역이다.
김연아는 카르멘의 경험도 있다.
2003년 12살의 나이로 국내 시니어 무대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때의 배경음악이 바로 카르멘이었던 것.
정열적인 레드컬러의 의상도 김연아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카르멘으로 변신한 김연아의 살인적인 눈빛연기는 차를 팔아서라도 보고 싶다.
엘리자벳.
‘여왕’이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역은 역시 황후 엘리자벳이 아닐까.
오스트리아 국민이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황후 엘리자벳은 타고난 아름다움과 건강하고 발랄한 성격,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자신이 결정하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한 마디로 ‘엘리자벳=김연아’로군요.
아이다.
누비아의 공주로 이집트에 끌려갔다가 라다메스 장군과 사랑에 빠지는 비운의 여인.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아이다도 김연아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결국 라다메스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그녀의 아픔은 김연아의 애절한 스파이럴과 참 많이 닮았다.
글린다.
한 트위터 친구가 추천한 배역이다.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마녀 ‘엘파바’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글린다.
정선아, 김보경 배우가 맡아 연기하고 있는(지금까지 소개된 작품 중 유일하게 요즘 공연 중인 작품이다) ‘글린다’는 뭐니 뭐니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작살애교’가 트레이드 마크다.
비통, 애절, 뇌쇄, 섹시, 우아함이 전문이지만 김연아라면 애교연기도 기대해 보고 싶다.
피에로 왕자와 사랑에 빠진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이게… 이런 게 일반인들이 느낀다는 그 감정이니?
어이구… 어떻게 이러구들 사니… 엉엉 “
하는 대사를 김연아가 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아하하!
마지막으로 나영.
우리나라 ‘국민 소극장 뮤지컬’의 대명사인 ‘빨래’의 여주인공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서울에 올라와 혼자 서점에서(그것도 악덕사장 밑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씩씩한 나영. 피겨아이스스케이팅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태어나 세계 피겨 선진국들의 유명선수들을 제치고 세계 피겨여왕의 자리에 오른 김연아는 이 땅의 모든 ‘나영’들의 희망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냥 상상이다. 따라서 ‘배우를 아무나 하나’, ‘연기가 쉬운 줄 아냐’ 식의 진지한 지적은 사양하고 싶다.
실은 딱히 그녀가 뮤지컬 무대에 서지 않아도 좋다.
그녀가 서 있는 그 무대가 어디든, 그곳은 이미 세계 최고의 무대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