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의 힘] 미국 (3) 그 어떤 위협도 없던 시대, 괌과 카리브 해까지 진출하다
일단 1848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제 유럽인들은 떠났고, 미시시피 유역은 지상 공격으로부터 안전했고, 태평양에도 도달했다. 게다가 남아 있는 북미 원주민들을 제압하는 일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미합중국에는 어떤 위협도 없었다. 바야흐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이 미래의 초강대국은 3대양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들에 안정적으로 접근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과감히 큰 바다를 건넜다.
1848년부터 이듬해까지 몰아쳤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일조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서부로 향하는 이주의 물결은 꾸역꾸역 이어졌다. 건설해야 할 대륙 제국이 있는데다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으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이민의 물결도 점점 더 늘어났다. 1862년에 제정된 자영농지법(공유지 불하법)은 연방 소유 토지 160에이커(약 60만 평)를 5년 동안 경작하는 이주민들에게 아주 적은 금액만 받고 불하하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 또는 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라면 굳이 라틴 아메리카로 가서 농노로 살 일이 있겠는가? 미국으로 오면 자유로운 토지 소유주가 될 수 있는데 말이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인다. 이 일은 당시 이 거래를 성사시킨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의 이름을 붙여 ‘슈어드의 미친 짓’이라고까지 조롱을 받았다. 그는 총 720만 달러를 주고 알래스카를 샀는데 1에이커당 2센트를 쳐준 셈이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눈만 한 보따리 산 꼴이라고 비아냥댔지만 1896년 이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그 얘기는 쏙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더 흐른 뒤 이번에는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됐다. 전 같았으면 미 국토를 횡단하는 일은 몇 개원이라 걸리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지만 이제는 일주일이면 가능했다.
나라의 몸집이 불어나자 부 또한 불어났다. 이제 미국은 대양 해군을 육성하는 데 눈을 돌렸다. 19세기 대부분 기간에 미국의 대외정책은 교역을 늘리고 인접국들과의 분규를 피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제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다른 나라의 해안에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도모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보았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위협이라면 스페인이었다. 미 본토에서 내보내는 것은 설득했지만 쿠바,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현재 도미니카공화국 일부는 여전히 스페인의 지배 밑에 있었다.
특히 1962년의 미사일 위기처럼 쿠바는 미 대통령들 여럿을 잠 못 이루게 하는 지역이었다. 플로리다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위치한 쿠바 섬을 지배하면 플로리다 해협과 멕시코 만의 유카탄 해협으로의 접근은 물론 향후 지배까지도 가능해진다. 이곳이야말로 뉴올리언스 항의 출구이자 입구이기도 했다.
19세기가 지나면서 스페인의 힘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건 사실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은 물론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지역이 유용했지만 특히 괌이야말로 필수적인 전략적 자산이었다. 쿠바 또한 강대국이 지배한다면 전략적 위협이 될 소지가 있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그 위협은 제거됐다. 그리고 1962년, 소련과의 분쟁에서는 소련이 마지못해 굴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위협은 제거됐다. 현재 특별히 쿠바를 지원하는 강대국은 없는 상황이고, 쿠바 또한 문화적으로나 어쩌면 정치적으로도 점차 미국의 영향권 아래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014년 말,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가 선언됐다).
미국은 신속히 움직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을 확보함으로써 카리브 해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와이의 퍼시픽 아일랜드를 합병해서 자국의 서부 해안으로의 안전한 접근을 도모했다. 또한 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배타적인 권한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무역 붐이 일어났다.
이 시기야말로 미국에게는 세계무대로 나선 것 이상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전 세계를 향해 무력시위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막강한 해군력을 내세운 미국의 패권시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어투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웠지만 핵심은 그가 전 세계를 당당하게 ‘항해했다(sailed)’는 거였다. 1907년 12월에 대서양 부대의 전함 16척이 미국에서 출발했다. 해군의 평상시 제복 색깔인 흰색으로 선체 전부를 칠해서 ‘위대한 백색 함대’라고도 불렸던 이들의 항해는 하나의 강렬한 외교적 시그널이었다. 백색 함대는 수개월에 걸쳐 브라질, 칠레, 멕시코,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일본, 중국, 이탈리아, 그리고 이집트까지 망라한 전 세계 20여 항구를 방문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일본에 입항한 것이었다. 이는 곧 미국의 대서양 함대가 궁극적으로 태평양까지 나설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가 혼재된 이 항해는 군사 용어로 일종의 세력 투사 전단계라 할 만한 것이었지만 전 세계 모든 강대국으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니 결국은 세력 투사인 셈이었다.
미국의 후임 대통령들이 늘 새기고 있는 말이 잇다. 바로 1796년 조지 워싱턴의 퇴임 연설 가운데 “뿌리 깊은 반감 때문에 특정 국가들과 반목하지 말며, 또한 어떤 국가들의 열정적인 접근에도 연루되지 말 것이며, 바깥 세계에서는 항구적인 동맹들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라.”는 말이었다.
물론 결정적이긴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뒤늦은 개입을 제외하면 미국은 적어도 1941년까지는 워싱터느이 조언대로 되도록 바깥세계와의 분규나 동맹을 피하고자 신경을 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국면을 확 바꿨다. 미국은 일본에 경제 제재를 가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대신 확대일로에 있던 군국주의 일본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 미국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광범위한 힘을 행사하던 미국은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순순히 돌아서지 않았다. 전후 세계의 최강 경제 대국, 최강 군사 대국으로서 미국은 세계의 해상 항로를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평화를 지키는 것과 아울러 상품을 시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미국인들은 ‘최후까지 버티는 자’가 되기로 했다. 유럽인들은 이미 탈진해 버렸고 그들의 경제 또한 도시나 마을들처럼 폐허 속에 남겨졌다. 일본은 패망했고 중국 또한 황폐화된 대지에서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자본주의 게임에 나서지도 못했다.
1세기 전에 영국은 해군력을 행사하고 수호하기 위한 전진 기지와 석탄 공급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하지만 이제는 저물어가는 대영제국과 함께하는 그들의 자산을 음흉스레 바라보면서 미국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기지들이군. 이제 우리가 가져야겠어.”
가격은 적절했다. 1940년 가을에 영국은 더 많은 군함들이 절실했다. 반면 미국에게는 50척 정도의 여분이 있었다. 결국 기지 협상을 위한 구축함들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을 능력을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도움과 맞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반구의 영국 해군 기지 대부분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
그때든 지금이든 어떤 나라들에게나 콘크리트(건설)가 문제다. 예컨대 항구, 활주로, 튼튼한 격납고, 연료 저장고, 건선거(드라이 독), 그리고 특수 부대 훈련장 등을 건설하는 콘크리트 말이다. 동쪽에서 일분을 무릎 꿇린 미국은 위의 시설들을 그들이 어느 정도 소유한 태평양과 괌 전역에 건설할 기회를 잡았다. 이제 미국은 동중국해에서 일본의 오키나와 섬까지 직접 기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육지에도 눈을 돌렸다. 미국은 1948년부터 1951년에 이르는 동안 마셜 플랜으로 유럽 재건 비용을 대는 대신 소련이 그 지역을 파괴하지 않고 대서양 연안에도 나서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둬야 했다. 미군들은 귀향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독일에서 재건 사업을 시작했고 소련군이 북유럽평원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위압적으로 노려봤다.
1949년 워싱턴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NATO)의 창설을 주도했다. 이로써 미국은 독일에 잔류하는 서방 군사력의 지휘권을 효과적으로 넘겨받았다. 나토의 민간인 수장은 일년은 벨기에가, 다음해엔 영국이 맡게 되지만 군 사령관은 늘 미국인이 맡는다. 지금까지도 나토의 가장 큰 화력 부대는 미국이다.
조약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나토의 최고 사량관은 궁극적으로 워싱턴의 입장과 일치해야 ㅎ나다.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수에즈 운하 위기 때 운하 지역 점령을 풀라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고 말았던 경험을 통해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결국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한 나토 가입 국가들은 우선 워싱턴에 묻지 않고서는 해군 전략을 수립,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토 창립 멤버인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영국, 이탈리아도 자국의 기지에 대한 미국의 권한과 접근을 보장해 줌으로써 미국은 태평양뿐 아니라 북대서양과 지중해의 패권까지 쥐게 되었다. 1951년,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와 동맹을 맺고 남반구에도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 후에는 북쪽으로까지 영향력을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