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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설의 두 여인,그리고...
류지미 2022. 5. 14. 14:38
백년설의 두 여인 이한옥, 그리고 심연옥한국인의 심금 울린 백년설
번지 없는 주막(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
도란도란 아기자기 하면서도 애닯은 정서를 담고 있는 “번지 없는 주막” 암울한 시기의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백년설은 경북 성주인(성주 농업보습학교 졸)으로 대구에서 목재소 운영, 미 8군 근무, 동촌 근교에서 청동원이라는 고아원 경영 등의 일을 하였으나 사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남인수와 함께 한국 가요계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이한옥과 사별 뒤에 ‘한강’을 부른 심연옥과 재혼 하였다.
나그네 설움
고향 성주.성밖숲에 있는 백년설 노래비.
경향신문 편집국장의 추천으로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차례 입원과 수술을 했으며 마침내 1978년 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공항에 나온 선후배들의 배웅을 받자 그는 “가고 싶지 않다”고 큰 소리로 외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국생활은 말 그대로 투병생활의 연속이었다. 1980년 12월6일. 그는 나그네 길을 떠나듯 이국에서 먼 길을 떠났다. '고향의 눈(故鄕雪)' 을 그리워하며.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백년설의 노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꼭 주막집 따끈한 아랫목에 앉아서 눈 오는 마당을 혼곤히 넋을 놓고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구성지며 부드러운 성음이 있을 수 있는지 감탄 할 수밖에 없다.”
김순재 언론인 sjkimforce@naver.com
연보
1915년 5월19일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출생
1931년 성주 농업보습학교 졸업
1935년 콜럼비아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작사 시작
1939년 노래 ‘유랑극단’ 출반. 예명 ‘백년설’로 가수 데뷔
1940년 ‘나그네 설움’ 출반. ‘번지 없는 주막’ 히트
1941년 이한옥과 결혼. ‘대지의 항구’ 등 히트
1942년 오케레코드사로 이적.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
1948년 대구로 이주
1950년 고아원 청동원(靑童園) 운영
1953년 부인 이한옥 사망, 서라벌레코드사 설립. 경북사회사업연합회 회장
1955년 가수 심연옥과 결혼
1958년 백민영화사 창설
1960년 가수협회 초대회장
1963년 한국연예단장협회 초대회장. 서울 시민회관서 은퇴공연
1973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백년설 독집’ 발매
197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
1980년 12월6일 타계
2002년 문화훈장 보관장 수훈
백년설의 에피소드
#1. 1950년대 중반 백년설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장소에 초청받았다. 평소 이 대통령이 그를 좋아하고 아주 신임했기 때문이었다. 소수 측근들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제의를 받았다. 측근 보좌관이 백년설을 국회의원으로 공천하도록 대통령에게 진언한 것이다. 백년설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은 국회의원으로서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노래만 부를 것이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 백년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도 생일 축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청와대의 초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그가 큰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일 없었다. 그는 성격이 대쪽 같았고 한번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권력에 눈치 보며 아부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2. 큰 형인 이판룡씨가 1956년 사망했을 때였다. 백년설은 연락을 받고 급히 고향 성주로 향했으나 상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문상객과 마을 사람들이 대문 앞을 막으며 ‘노래를 한 곡 먼저 불러주고 상가에 가라’는 것이었다. 백년설은 문상을 하고 나서 노래를 부르겠다고 설득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화까지 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백년설은 형 상가 앞에서 ‘한잔 술에 한잔 사랑’을 부르고 나서야 상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3. 화류계에서도 백년설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방공연을 마치면 그를 초청하고자하는 기생들이 보낸 인력거가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 슬쩍 빠져나가 혼자 술을 마셔야 할 정도였다. 목소리만 있으면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진수성찬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순재 언론인
년표로 보는 백년설씨 가요인생--1 남인수 조회 145 12.08.01 13:51 1---1915년, 5월19일 경북,성주군, 성주읍 예산리에서출생. 흔히들 이창민이라하나 처음 이름은 이갑룡으로 태어남 두살무렵인 1917년 3월경 어머니 김치악씨사망. 1922년 당시 그의고향 성주 공립보통학교 입학,그의나이 7살이었다 그리고 1928년 그의나이 13살경 동학교 졸업, 1929년 14살경 고향 성주농업보습학교 입학 2---1930년 15살무렵 일본교사에 대한 항명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됨 * 이부분은 각종가요사 책에 언급이 없는 그의 숨겨진 이력이다 1931년 그의나이 16살무렵 성주농업보습학교 졸업 . 그무렵 한양부기학교 입학 1933년 그의나이 18살무렵 동학교를 졸업 일시 은행원 생활을했다 19살 되던 1934년 가요가 아닌 견습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 희곡 '딱한 사람들' 을썼다 3---1935년 20살무렵 테너 안기영씨 소개로 콜롬비아 레코드사 문예부에서 작사가 생활시작 헌데 구체적으로 어떤곡을 작사했는지는 밝혀진 것이없다 . 이 부분은 좀더 상세한 확인작업이 필요하다 21세 무렵 이번엔 태평레코드사 당시 문예부장 박영호씨와 교류 1938년 23살무렵 문학공부를 하기위해 일본으로 건너감 이부분도 좀더 정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이러한 숨겨진 일화도있다 2년과정 부기학교졸업후 은행에 입사무렵 본명 이갑룡서 이창민으로 개명한 그는 어느날 작곡가 홍난파 선생을 찾았다. 음악지도를 받을수 있을까해서 였다 . 물론 다른 문학도들 처럼 처음엔 대중가요가 아닌 가곡,동요에 그도 관심이 많았다 4---허나 홍난파선생은 여러가지를 물어본후 가곡,대중가요를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대중가요를 해보라 권했다 이는 쉽게 풀이해 가곡,동요엔 재질이 모자란다는 뜻임을 이창민씨가 모를리 없어서 처음엔 매우 기분이 상하고 낙담했다 그리고 이어서 안기영씨에게로 가서 음악 레슨을 받아보았다 .그의 반응도 역시 비슷했다 노래보다는 작사에 소질이 있다며 콜롬비아 문예부에 소개를 해주었다 허나 상기 두사람도 장래 그가 백년설이란 예명으로 한국가요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가수로 태어날 줄은 미쳐 몰랐다 6---콜롬비아 문예부에서 몇편의 가사를 작사 돈과 바꿀 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무전취식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생각은 일본유학이었다. 허나 그의 힘으로는 방도를 찾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는 요사찰 대상자 명단에 올라있었고 그의 중형 이혁룡씨가 일본유학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형무소생활을 하고있는 것도 장애요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겼다 7---앞서 설명드렸듯이 21세무렵 만난 태평레코드사 박영호씨가 경영주가 바뀐 태평에서 문예부장직을 맡고있었데 마침 콜롬비아에서 적을 옮긴 채규엽, 박향림 , 민요가수로 미스코리아 예명의 김추월씨 등과 함께 레코드를 취입하려 가는데 인솔자로 박영호가 가게돼 문예부장(박영호)을 작사자로서 보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동행하였다. 8---1938년 그의나이 23살무렵 그간 수없이 소개되어 다 알고있듯이 우여곡절끝에 가수 백년설로써 처녀작 유랑극단을 취입한다. 1939년 그의나이 24살경 상기곡 유랑극단을 발매하고 이해에 두견화사랑, 고향의 지평선, 북방여로, 일자일루 등을 발매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혜산진 공연 연기문제와 관련하여 경기도 경찰국 고등과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고 밤샘 조사를 받았다. 이후로도 나그네 설움이 발매되었을 때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 9---1940년 그의 나이 25살무렵 그의 hit song, 나그네 설움이 발매된다 어머님사랑, 제3유랑극단, 한잔에 한잔사랑, 번지 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등이 이어서 나오고 후일 진방남씨가 불사조 개사로 세세 년년으로 게재하여 부르는 눈물의 백년화가 금지곡 처분을 받는다 타홍아 너만가고 나만홀로 버리기냐 너없는 이천지는 불거진 사막이다 달없는 사막이다 눈물의 사막이다 타홍아 ~~ 아 타홍아 --1절 두바다 피를모아 한사람을 만들 때는 물방아 돌아가고 세상은 봄이였다 한양은 봄이였다 우리는 봄이였다 타홍아~~ 아 타홍아--2절 식은정 식은 행복 푸른무덤 쓸어안고 타홍아 물어보자 산새가 네 넋이냐 버들이 네넋이냐 구름이 네넋이냐 타홍아~~ 아 타홍아--3절 이곡이 금지곡이된 이유는 2절부분 -- 두바다 피를모아 한사랑을 만들 때는-- 부분을 한일병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일본경찰이 문제삼은것같다 는 의견도있다 . |
년표로 보는 백년설씨 가요인생 2
남인수 조회 127 12.08.01 16:42
게시글 본문내용
1---no 1 에서 이어짐 그들이 눈물의백년화 2절--두바다 피를모아 한사람을 만들때는--부분에서 이부분이 한일합방을 표현한것이라 느꼈다면 그건 한마디로 도둑이 제발저린 격이다 자기들스스로 한일합방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니까-- 앞에서 설명드렸듯이 1940년 1월 그의 가요인생 일생일대 행운이된 나그네설움이 발매 되었다 허나 항상 우리인생은 호사다마라 했듯이 그에게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이곡이 나온 때는 일제가 1937년 중국대륙을 침략키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내선일체, 창씨개명, 지원병제도 등 노골적인 한민족 말살정책을 시행했던 시기로 우리 젊은이들은 전쟁에 끌려나가기 시작했고 나라잃은 서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1938년 한해가 다 저물어 가는 12월 어느날 곡의 작사자 조경환씨(고려성), 곡을 부른 백년설씨는 지금 정부제일청사 맞은편에 있었던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에 불려가 밤샘조사를 받았다 (이부분은 앞 no1-- 8서 언급했다). 2---경찰부 고등과 취조실에 끌려간 그들에게 같은 민족인 한국인 형사는 지난 5월 허가해준 혜산진공연을 왜 제날자에 하지않았냐 며 추궁했다 우선 여기서 잠깐 설명할 사건이 있다 나그네서름을 작사한 조경환씨는 -- 작곡가 나화랑씨(본명 조광환)--친형이고 태평양 악극단을 사실상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시절부터 반일적 행동으로 일본경찰의 불순분자 리스트에 올라 있었었다 동악극단은 그해 5월 문제의 혜산진공연을 하기로 되어 었었으나 봄비가 자주내려 길을막고 백년설씨가 인기가많아 가는곳마다 노래를 청하는 바람에 예정된 날짜에 도착할 수 없었다 이때 마침 함남 갑산을 중심으로한 동북항일연합군이란 독립군들이 보천주재소 습격사건에다 혜산진 철도개통 독려차 나와있던 일본관헌들까지 공격하는 일이 발생, 일본 경찰부 고등과는 태평양 가무단의 혜산진공연 지연이 보천주재소 습격사건과 관련이 있다, 의문을가졌는데 이건 악의에 찬 조선인 밀정의 거짓 제보였다 3---거기에다 일본경찰은 백년설의 노래가 대중들의 사랑을받자 노래가사의 눈물,사랑, 고향등이 일제에 반항 내용이 들어있을 것이라 여겨 요시찰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던차 혜산진사건을 빌미로 이들을 잡아들였다 4---두사람은 밤새도록 혹독한문초를 받다가 이튿날 새벽 6시경 파김치가 되여 풀려났다.인적이 드문 광화문거리 초겨울 새벽 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그보다는 같은 핏줄인 동족의 제보에 의한 것 이었던 것에 대한 울분, 나라를 잃은 서러움 등이 그들의 마음을 더욱 차겁게했다 이에 백년설은 ---형님 언제부터 낯익은 서울거리가 이국보다도 더 살벌해졌읍니까?--하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고려성(조경환)은 갑자기 무언가 느낀듯 걸음을 멈칫했다. 바로 이순간이 불멸의 명곡 '나그네 설움'의 탄생배경이다 두사람은 걸음을 재촉 광화문 뒷골목 목로주점에 들어섰고 찾고 있던 수첩이 없자 담배갑에다 무언가 휘갈겨 적었다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할 지평선에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5---백년설의 조금전 울분을 듣고 조경환이 갑자기 떠오른 가사구절이다 상기가사는 본래 담배갑에는 1절이었으나 총독부검열을 피하기위해 곡을 만들시 3절로 빼돌렸다 이외 더 재미있는 얘기는 다음기회에 하겠다 1941년 그의나이 26살되든해 첫번째 부인 이한옥씨와 결혼을 한다 1941년 초 1938년 태평레코드 전속가수가된후 이재호, 전기현씨와 함께 태평연주단을 구성 대구공연시 그는 그의 첫부인을 만나게 된다 공연을마친 그가 수많은 군중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그곳에도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그군중속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일단이 한쪽에 모여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유독 그의 눈을 끄는 학생이 있었다 화려한 가수생활속에서도 만나보지못한 미인이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경북고등여학교(慶北高女) 졸업반 이한옥임을 알아낸후 공연이 끝나 서울로올라 가야하는것도 취소 그 여학생의 뒤만 쫓아다녔다 허나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인기도 그녀에겐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백년설과 마주치면 그때마다 도망치듯 피해버리고 눈길조차 주지않았다 6---그러나 그도 역시 만만찮은 열정의소유자였다 그녀를 쫓으려면 기동력이 필요했다 당시 자가용이란 없던 시절이고 관용차이외엔 영업용 택시도 좀처럼 보기힘들던 시절, 그당시 대구역전에 일인들이 운영하던 택시회사에 고작 택시3대가 전부였다 이에 백년설은 엄청난 거금을 마다않고 1개월간 전세를 냈다 그택시는 30번 택시라했다 그리고 기여코 사고를쳤다 그녀의 부모를 만난것이다 . 허나 반응은 정중하게 거절이었다 --결혼시킬 나이도 아직 아니고 여러곳서 좋은 혼처가 나와 있으므로 지금 결정할 입장이 아니다 !!---라는이유였다 그러나 백년설은 계속찾아 다니면서 읍소 하다시피했다 만일 이 사실을 그의 팬들중 특히 여성팬들이 알았다면 뭐라했을까요? 7---한달의 노력끝에 그녀를 택시에 태워 동촌유원지로 데려가서 데이트를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녀의 결혼승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백년설이 뜻을 세운지 꼭 한달만이었다 두사람은 대구에서 결혼했다 그때나이가 백년설씨가 26살, 이한옥씨가 18살이었다 |
년표로 보는 가수 백년설씨 가요인생---3
남인수 조회 266 12.08.03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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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42년 경 태평레코드사서 ok-record 로 당시 오케이의 이철사장의 분수넘치는 대우로 이적하나 이철사장이나 가수본인 모두 실패한 스카웃이었다
좌여튼 김다인사 김해송곡 고향설, 더벅머리과거-김다인사, 박시춘곡- 은 오케이로 옮긴후 최초로 발표한 곡이다
상기곡 고향설은 이봉룡곡으로 표기되있으나 김해송 작곡이고, 더벅머리 과거는 작곡을 전기현씨로 표기한 곳이 많으나 박시춘작곡이다
더벅머리 과거는 또 후일 노란샤쓰의 사나이로 인기 작곡가가 되는 손석우씨의 오케이에서의 가요활동 흔적이 되는 곡으로 그는 여기서 guitar 를 담당했다
2---1943년 그의나이 28살경 알쌍급제-조명암사, 김해송곡, 정든땅-조명암사,이봉룡곡 등을 출반한다
정든땅을 이재호씨 작곡으로 표기한 곳이 보이나 이봉룡씨 작곡이 맞고 이 곡은 만주이민을 강요,격려하는 친일가요이다
3---1944년 29살경 백년설, 첫부인 이한옥씨와 사이에 1941년 장녀 가실에 이어서 차녀 명자가 태어난다
그리고 이무렵 국내 레코드사들이 전쟁으로 인해 활동이 중단된다
같은해 화청악극단, 백년설가요대, 청엽예능대 등 그간 각종가요사 책에서 언급이 없던 흥행단체를 조직 순회공연을 한다
4---1945년 가수 백년설씨 나이 30살경 비록 타인들의 힘에의한 것이지만 일본의 압박에서 자유를 찾는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마자 봉화가극단을 조직하고, 같은해 9월1일 대구 키네마극장 에서 깃발 날리는 날을 공연했는데 이것이 해방후 최초 연극공연이다
5---1946년 3녀 수경이 태어나고 연극운동이 뜻대로 안되자 이를 단념,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한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서울로 상경 김해송씨가 조직한 kpk 악단에 특별출연한다
여기에서 그의 두번째 wife 가 되는 심연옥씨를 만난다
허나 두사람 다 아직은 서로의 인연을 모른다.
6---1948년 그의 나이 33살경 대구로 이주하고, 1949년 장남 일정이 태어난다
1950년 고아원 청동원을운영, 1951년 목재사업경영, 1952년 고아원을 육이오전쟁으로 확대운영한다
그리고
1953년 그의 생애최고 슬픔을 겪는다. 그의 부인 이한옥씨가 세상을 떠난다
그해 경북 사회사업 연합회 회장 감투를 쓴다---<이상은 가요와는 관계가 적은 사항이라 간략히 소개한다>
7---1953년 일제시대 태평레코드사 3총사 진방남씨, 이재호씨,백년설씨가 뭉쳐서 서라벌 레코드사를 설립한다
여기서 백년설씨 원창 마음의고향, 해인사 나그네 등을 발매한다
어떤 기록에 백년설씨취입 삼각산 나그네가 언급되있으나 이곡은 본명 조광환씨인 나화랑씨가 처음 청춘번지, 어머님사진 등의 노래로 1942년 6월 태평에서 가수로 데뷔하나 곧 단념 -
- 폴리돌서 조경환사-고려성 , 삼각산손님 이란 제목으로 으로- 작곡가로 변신하며 내놓은곡으로 구성진이 처음 불렀다
구성진씨는 태성호씨의 또다른 예명이다
8---1954년 서라벌레코드사 설립후 전속가수 선발겸 삼남일대 공연을 한다
그러나 너무 현실을 모르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저 백년설씨의 인기를 과신한 기획이었다
아직은 전쟁 휴유증에서 헤매이던 사람들이 연을 보러오기엔 힘든 시기였던 것을 미처 생각치못한 실패가 예견된 일이었다
그저 늙은 홀애비 백년설씨와 심연옥씨의 열애만이 결실이었다
9---1955년 그의 나이 40살, 두번재 아내 심연옥씨와 결혼한다
1956년엔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감사가되고 다음해인 1957년엔 여호와의 증인 교회신앙을 시작합니다
지금의 호와의 증인 과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1958년 백민영화사 설립.
그리고 심연옥씨와의 사이에 그에게는 4녀 혜정이 출생한다
1959년 국도극장에서 영화 삼여성을 상영한다
1960년 가수협회 초대회장이 된다
*남인수씨는 1957년 대한레코드 수협회 초대회장이었는데, 이 두 조직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10---1961년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감투,남인수씨는 같은명칭 협회 부이사장이다
1963년한국 연예단장 협회 초대회장, 그리고 이해에 고복수씨 은퇴공연에 이어서 시민회관에서 은퇴공연시 군복무중이던 전화통신의 남백송씨가 참가하자 백년설씨가 직접 자기 후배요 제2 백년설로 소개함.
차남 길영 출생.
1964년 경향신문 동경지사장 역임.
1978년 먼저 가 있던 심연옥씨 따라 미국 LA 로 이주,그리고 1980년 12월6일 가수라는 무거운 지게를 벗다.
번지 없는 주막(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mf29lCIsS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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