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이보다 더 구체적인 기록은 1978년 불회사 큰법당 번와 불사 때 발견한 [호좌남평덕룡산불호사대법당중건상량문]입니다. 그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불회사는 동진 태화 원년(서기 366년) 마라난타스님이 창건하고, 신라의 이인(異人) 희연조사(熙演祖師)가 당나라 현경 초에(서기 656년) 재창하였으며, 삼창(三創)은 원말 지원(至元)초(서기 1264년경) 원진국사(元
國師)가 했답니다. 그리고 조선 정조 22년(서기 1798년) 2월 큰 불이 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지명(知明)스님이 기미년(서기 1799년) 5월 15일 상량하였다고 적었습니다.
위 상량문의 내용이 정확한지는 지금 단정할 수 없지만 그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마라난타 존자가 내륙을 통하지 않고 물길을 따라 당시 삼한 중 마한의 근거지라고 추정되는 나주 지방으로 들어왔을 경우 영산강 포구를 통하여 불회사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되는 경로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회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사찰이 됨과 동시에 한국 불교 전래를 6년이나 더 앞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지리서를 보면 불호사(佛護寺)로 기록되어 있어, 처음 창건 때는 불호사였다가 대체로 1808년(순조 8)무렵부터 지금과 같은 불회사로 절 이름이 바뀐 듯합니다. 결국 절은 삼한시대에 불호사로 창건되었다가 고려말~조선 초기 원진국사에 의해 크세 중창되어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대웅전 앞마당에 3종류의 괘불대가 있는데 이것은 불회사의 오랜 역사와 이 지역에서 사찰로써의 역할이 어떠하였는가를 짐작케 하는 유물이라 하겠습니다. 맨 오른 쪽 풍상의 마모가 가장 많이 된 것은 언젠지는 모르나 처음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다음에 있는 가장 웅장하고 잘 조성된 것은 아마도 3창주 원진국사 시절에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네 짝으로 완전한 형태를 지닌 맨 왼 쪽의 것은 아마도 제 4창 당시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재 대웅전 뒤편 벽면에는 괘불을 보관하였던 함이 있는데 그 규모로 보아 불회사에 웅장한 괘불이 그 당시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산내 암자로는 지난날 그 유명한 일봉암을 비롯해 반야대 무량암 천진암 남암 동암 등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할 많은 암자들이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복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 입구에 들어서면 장엄하면서 조화로운 일주문이 모든 이를 반기고 그 옆에 도암선사의 부도가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참 지나쳐 들어오면 좌우에 퉁방울눈의 석장승이 참배자를 맞아듭니다. 대웅전 건너편의 산중턱에는 고려 말에 세운 원진국사의 부도가 있고, 그 밑에는 이름모를 스님들의 부도가 놓여져 있습니다.
현재의 가람의 배치는 석축을 계단식으로 쌓고 대웅전·나한전·명부전·삼성각·응향각 등을 상단에 배치하고 1990년대 후반부터 그 밑에 심검당 사운당 등의 요사채를 양 옆으로 두었으며 그 가운데 대양루를 건립하여 하나의 구역을 만들고 그 아래 사천왕문을 남향으로 배치하여 하나의 도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량의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나 백호등 아래 선원을 지어 격외의 공간으로 두었으며, 계곡을 건너는 곳에는 홍예(虹猊)를 만들고 그 위에 진여문을 지었으며, 또한 2004년도에는 일주문과 진여문 중간에 불국원을 건립했습니다. 이 후로는 암자를 하나하나 건립하여 옛 스님들의 자취를 찾아갈까 합니다. 현재 불회사는 지난 날의 웅장했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단순히 모양만 예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옛 선배스님들의 영광을 오늘에 구현하기 위하여 안으로는 선원을 개설하여 스님들의 수행처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밖으로는 대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관음대참회수련회와 산사문화체험(템플스테이)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명가님들의 글씨가 모여 있군요!
나머지 빼어난 편액과 주련작품은 [전,서각방]에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