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닥아, 나도 촌에 꼭 델꼬 가그래이 니, 날 델꼬 가야 한다. 어~이!”
오 부자는 칠닥에게 이미 여러 번 약속을 받았지만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다짐을 하라는 듯이 확언을 재촉하는 일을 또 되풀이하는 것이다.
아버지 오부자의 측은한 눈빛과 마주쳤을 때 칠닥이는 섬뜩한 소름이 끼쳤다. 이미 아버지의 눈 주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로는 검은 그림자가 눈덩이를 한 바퀴 다 돌면 사람이 곧 죽게 된다는 것이다. 칠닥이는 요 며칠 전에 자신에게 행패를 부린 형, 개동이의 괘씸한 처사가 불끈 치솟아 서러움을 더한 다짐을 토해낸다.
“걱정하지 마소. 아부지요! 같이 가서 함 살아 보시더!”
목이 다 메는 것이다.
칠닥이가 변산으로 귀농하겠다고 하니 그의 형수는 덜렁 남을 양부모를 모실 일이 겁이 났던 모양이다.
형수는 남편 개동이에게 일련의 작업을 시켰다.
" 칠닥이 니가 안산으로 내려오면서 어머니가 필요해서 모시게 되었으니 시골 가더라도 모두 모시고 내려가야 한다."
선을 긋던 개동이는 급기야 조카들이 보는 앞에서 칠닥이 멱살을 잡고는 부모부양을 떠넘기고자 해악을 해 댄 것이다.
"알았니더! 엄마, 아버지 다 아 모시고 갈테이 걱정이랑 마소!"
"됐다! 가자."
몰아붙여서, 칠닥이의 약속을 받아 낸 개동이는 전장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으쓱거리며 제 딸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따지고 보면 칠닥이가 귀농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개동이에게 있었다.
개동이는 이혼한 동생이 아이들을 끌고 내려오자, 딴에는 그 자식들은 결손 가정의 아이들로 아예 생각해 버렸는지 매사를 간섭하려 들었다. 공부 좀 해라, 아빠 말씀 잘 들어라, 일찍 다녀라! 아이들 행동은 모든 일이 못마땅하고 불안해하기까지 했다. 어머니 봉순이도 그 점은 마찬가지여서 칠닥이가 애들을 너무 용하게 키운다고 질타를 하였다. 칠닥이나 아이들은 개동이의 일일이 지나치게 간섭하려 드는 처사에 생활에 있어 큰 정신적인 부담이 되었다. 아이들은 제 큰아빠가 번뜩하면 화장실로 숨기도 한다.
"저 인간 때문에 아이들을 맘 편하게 키울 수 없구나."
그 후 얼마 안 되어 칠닥이는 변산으로 가는 이삿짐을 쌓고 말았다.
장사하던 화물 탑차의 지붕까지 살림살이를 싣고 변산을 향해 안산을 떠났다. 가는 길에 역시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칠닥이는 동요를 목청껏 불렀다.
"뜸북뜸북 뜸북새 노오온에서 울고 ~ 뻐꾹 뻐꾹 뻐어꾹 새에 수우페서 울제~"
제 어미에게 강압 받던 아이들과 그 아비는 울면서 안산으로 날아갔고 큰아빠에게 괄시받던 아이들과 그 아비는 다시 변산으로 날았다.
<촌놈이 되다.>
한여름에 이곳 변산반도로 귀농한 칠닥이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가 농사의 꿈이야 오래전부터 꾸고 있었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살 집도 마련해야 하고, 논밭도 구하고, 농기구도 사야 하는 준비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음이다.
그동안 연속되고 있는 도시의 저급노동자 생활로는 그것이 한낱 꿈으로만 멀어지는가 싶었는데 맨몸으로 귀농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그래서 칠닥이는 두 아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소리 질렀다.
"야, 우리가 이제 촌놈이 되었다!"
한데, 아빠의 선언에 딸애 하정이가 눈을 깜박거리며,
"아빠, 촌놈이 뭐야?" 하지 않는가.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자란 아이는 촌놈 소리가 생경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촌놈이라는 말을 잘하지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촌사람들도 텔레비전 따라 하고, 유행에도 민감하니 어디 구분이 되겠는가. 촌집도 대부분 도시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있고, 수세식 화장실을 쓰며 세상 물정 어두운 구석이 없어졌으니, 촌놈 서울 놈 구별할 것이 없어져 버렸다.
칠닥이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어릴 때 촌놈 소리 참 많이 듣고 자랐는데….”
하정이의 촌에 관한 질문이 계속되었다. 읍내에 나갔을 때 또 물어본다.
"아빠, 여기는 촌이야 도시야?"
여기는 전라북도 부안의 읍내 장터이다.
"으응, 여기는 그저 중소도시라 할 수 있지. 건물이 삐죽삐죽 서 있고 불빛이 찬란하면 도시고, 논이 있고 밭이 있고 개울 있고 나무가 많으면 촌이야."
딸애는 그 후에도 도시와 촌의 구분에 골몰했던 모양인데 한번은 차를 타고 국도를 지나가는데 당혹스러운 질문을 했다.
"아빠, 그럼, 저기는 도시야, 촌이야?"
아이가 가리키는 곳은 야산 밑 논밭 사이에 개울이 있고 나무 많은 곳에 흉물스럽게 삐죽 솟은 신흥 아파트단지였다.
“제기럴! 요번에는 나도 헷갈린다. 도시인지…. 촌인지…."
그리고 얼마 후, 칠닥이는 딸아이 아들아이 손을 잡고 읍내에 장 보러 나갔을 때다. 하정이는 기어이 화들짝 놀랄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마침 경찰관이 바로 그들 코앞을 막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도시와 똑같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 아저씨를 가리키며,
"아빠, 그럼 이 아저씨도 촌놈이야? '하지 않는가.
경찰관은 의아해했고, 칠닥이 얼굴은 화끈거렸다. 아들은 그러는 동생더러
"바보, 바보"하고만 있었다.
그렇게 칠닥이의 변산반도의 시골 생활이 시작된다.
농촌의 봄은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밋밋한 계절의 희미한 구분이 아니라 농촌의 겨울과 봄은 두부를 자른 듯 불과 얼마 전과는 뚜렷이 다른 그림을 매일 매일 연출해 내는 것이다.
농부의 마음은 계절의 변화에 동화되어 몸도 마음도 활기차고 바빠지기 시작한다.
작년 가을에 얻은 700평 비탈밭에 첫 농사의 두려움과 설렘에 철 이르게 오른다. 앞선 마음에서 미처 정리되지 않는 수수 대를 자르고 밭두렁을 정리하곤 한다.
아직은 냉기가 가시지 않은 바람이 이는 이른 봄 날씨에 땀을 식히려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겨우내 조용하던 골짜기는 어느덧 술렁이기 시작하고 군데군데 사람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일 륜차에 개밥을 나르는 희야 활매, 잰걸음으로 큰 동네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순창 댁은, 아마도 이장네 젊은 힘과 기계 품앗이하기 위한 사전 교섭에 나섬이라.
맞은편 비탈밭에 경운기로 작년 가을 버려둔 지푸라기 나르는 종진이, 이곳저곳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는 논두렁을 태워 동면하는 벌레를 태우는 불장난이다.
말 못 하는 용후네 부부, 바쁜 수화로 소통을 하면서 부지런히 하우스 수리를 하고 있다. 동네에서는 농사 일손이 제일 빠른 큰 일꾼이다. 논이고 밭이고 어디를 가든지 그들 부부를 종일 목격하게 된다.
오토바이 굉음 소리를 내며 냅다 달리는 이는 영철이다.
농사 준비하다가는 입이 궁금한가. 삼거리의 성진네 가게에 깡소주 마시러 가는 길이다. 큰 엉덩이를 좁은 툇마루에 붙이고 한 두어 시간 술 수다를 떨다가는 돌아올 것이다.
나방이 되기 위해 고치를 뚫는 번데기의 모습처럼 겨우 내내 적막하던 동네는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골의 봄이다.
이른 아침에 요란한 새소리에 잠이 깨면, 바깥공기는 한층 부드럽고 정겹다.
봄기운은 굳어있던 몸과 마음을 밖으로 밀어낸다.
긴 장화를 신고는 산기슭에 손바닥만 한 따랭이 논을 점검하다가 심쿵한 마음이 돋아서 논두렁의 이슬 먹은 풀잎을 차면서 걷노라면 발등으로 스치는 사각거림의 감촉이 가슴을 널뛰게 한다.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는 산야와 같이 올 농사의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오르는 봄이다.
<농부 오 건>
귀농한 칠닥이가 오 건을 본 적은 없다.
그는 칠닥이가 변산으로 내려간 9년 전에 이미 세상을 등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직도 변산의 둥지를 뜨지 않고 있는 그의 부인, 이준희 여사의 온화한 모습을 보거나 오 건의 제자라고 해야 할 후배 이 백연이를 비롯한 그 주변 사람들, 그리고 그의 동지, 박 배진 농협 조합장을 알게 되고 농장을 이어받은 정경식 정농회장 등과 생활하면서 강하게 오 건의 흔적과 재취를 느끼고는 하였다.
변산으로 와서 보니 오 건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인물이 오래전 1974년에 그의 부인과 함께 홀홀히 이곳으로 내려와서는 지역에 뿌리를 사방으로 뻗어 놓았다는데 정작 그의 실존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칠닥이는 주로 백연이에게 오 건의 이야기를 듣기는 하였지만, 이 지역 사람 중에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흔적이 얼마나 짙은가 먼저 귀농한 털보, 관호조차도 마치 예전에 그와 같이 생활이라도 한 냥 지긋한 표정으로 정감 어린 회상을 하고는 하였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이 진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건 농장, 그 집 뒷동산에 오 건의 묘소가 있다.
하늘 높은 가을, 어느 한 날에 그곳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다.
부인 준희 여사를 비롯하여 박 조합장과 백연이, 찬준이, 복원이등 오 건의 후배들이 부고 10주기 행사를 마치고 후식을 하는 중에 마침 농로를 지나던 칠닥이가 들렸다. 제사장을 물리고 술과 떡, 과일을 받아먹으며 그들의 과거를 묵묵히 듣고 있었는데, 세상이 모르는 한 인간을 이들이 이토록 애틋해서 하는 심정을 얼른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그의 묘소에는
"농민 오건 여기서 잠들다."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었다.
오 건은 죽었다.
지금은 백연이가 관리하는 오건 농장에서 일을 할 때나, 그가 손수 지은 흙벽돌집을 둘러볼 때나, 농장 앞 저수지를 지날 때 그가 쓰던 손수레를 목격할 때, 오 건은 늘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환상 어림에 빠져드는 것이 칠닥이가 본 오 건이었다.
언젠가 귀농본부 팀이 오 건의 전기를 낸다며 변산을 찾았는데, 그의 행적을 캐기 위하여 박 조합장이나 백연이를 인터뷰하는 장소가 홀아비 귀농인 칠닥이의 집이었다.
백연이는 알이 밴 변산 주꾸미를 한 꾸러미 들고 와서는 장만하는 방법을 일러 준다.
"여그서 살라믄, 이란 거 장만하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겨~"
하면서 그의 수고는 당연하다는 듯 덥석 자리에 앉아 막걸릿잔을 잡는다. 늦게 도착하여 배고프다는 조합장에게 칠닥이는 라면까지 끓여 바쳐야 했는데, 녹음하랴 서술을 받아 적으랴 바쁜 홍 문국과는 달리 안 철환은 하얗게 알이 슨 주꾸미를 이마를 번쩍거리며 게걸스럽고도 빠르게 섭취하면서 연신 백연에게 감격 어린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끝내 칠닥이의 열렬한 수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꾹 참았다.
한국문학의 대표작 <갯마을>의 저자 오 영수의 막내아들이 오 건이며 오 건의 형은 민중 판화가 오 윤이다.
소설가 오 영수는 아들 건이와 며느리가 된 이 준희가 변산으로 내려가 고군분투 농장을 일구어 가는 모습에 감탄하였다. 아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여 <어린 상록수>라는 단편집을 출간한다. 소식을 들은 오 건은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왜, 저의 사생활을 소설화해서 미화시키고 그러십니까?”
“이놈아, 그것은 나의 예술의 영역인데 작가의 행위를 니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지.”
오 건은 동국대학교 농학과를 수학하면서 동기인 이준희를 비롯하여 몇몇이 농촌부흥 동아리를 만들었다. 나중에 실제로 농촌에 투신한 이는 오 건과 이 준희이였는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진다.
오건의 변산 생활은 농사일보다도 사람 관계를 더 중요시했다.
“이거이 돼지 쓸개여 몸에 조은 게 ~”
짖꿋은 토박이가 서울내기, 기를 죽이고자 막 잡은 돼지 사체에서 쓸개를 뽑아 올렸다. 오건은 동네 사람과 동화되기 위하여 스스럼없이 행동하려 했다.
(어디, 서울 놈이 생 쓸개를 먹을 수나 있나 보자.)
그것을 냉큼 삼키고 소주를 들이킨 오 건은 집에 와서는 심하게 토악질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동네 속으로 스스럼없이 들어가려 하던 오 건은 자신을 도시인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열등감까지 느끼고는 했다.
“그런 말 말아요, 저 이가 서울 놈, 서울 놈 하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데요.”
아내 이준희 말에 그런 심정을 가장 잘 알아주는 이가, 농협 조합장이 된 박 배진이고 그는 오건이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동지이자 갑장의 친구이기도 하였다.
외진 오건의 농장에서 격포 쪽으로는 한 줄기의 동네가 형성되어 있는데 그 동네를 가로지르는 작은 도로 곁에는 백연이가 지키고 있는 점방店房이 있었다.
당시에는 백연이는 중학생 또래의 린 소년이었다.
난봉꾼인 그의 아버지는 먼길을 떠난지가 오래 되었고 생활이 팍팍한 어머니는 길가로 난 방을 헐어서 점방을 열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백연이에게 그것을 맡기고는 얼마 되지 않는 농사와 동네 밭일에 몰두하였다.
그 점방을 오 건이 단골이었다. 그렇게 드나들다가 귀때기가 새파란 것이 수줍음이 많은 백연이를 집으로 불러 역사며, 수학이나, 영어든 중학 정을 가르쳤다. 오 건은 소년 백연의 선생이 된 셈이다.
오 건의 인생에서 박 배진과 더불어 이 백연은 그렇게 그의 길지 않는 생전의 삶을 소상히 일러 줄 인물이 되었다. 살아생전이라면 그의 이야기가 미화되어 책으로 소개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세상의 조연으로 그것도 참 농부로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오건은 변산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다. 그 뿌리의 힘은 변산 땅에 농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를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만한 사람을 누구도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 칠닥이의 생각이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 오 건과 박 배진은 농협의 비료 격의 부정을 문제 삼아 임명직인 조합장을 사퇴케 했는데, 이는 전국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에 소 꼬랑지에 불을 붙여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던 사례는 이후에도 농민들 시위에 종종 쓰였다.
오 건이 개간한 농장을 정 경식에 맡기고, 전주의 가톨릭 농민회를 이끌면서 그가 보여준 활동상에 힘입어 박 배진은 차기 조합장이 되었다.
오 건은 순수한 농부로서나 의기 넘치는 농민활동가로서나 역사를 남겼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오 건은 대에 올라 박수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부인 이준희는 오 건이 세상을 등지자, 농사를 백연이에게 맡기고는 그 농장 오두막 옆에 성전을 짓고 기독교 전도에 삶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다.
어쨌든,
오 건의 전기를 만들기 위한 인터뷰가 칠닥이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바람에 비로소 오 건의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들을 수 있는 계기가 됨으로써 어째서 변산의 그들이 오 건을 그토록, 진심으로, 숙연하게 추앙하고 있는가를 다는 아니더라도 생생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칠닥이가 서울서 귀농 교육을 받으면서도 오 건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다. 변산에 와서야 그를 알게 된 것이다.
“선생님, 그렇게 모두가 유기농을 한다면 결국은 식량이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있지요.”
“참, 걱정스러운 일이잖습니까?”
“왜, 그 걱정을 우리 농부가 해야 하지요? 유기농을 확산해서 국가 식량의 부족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국가경영을 책임지는 위정자가 걱정할 일이지요.”
칠닥이가 정경식을 처음 만난 것은 귀농본부에서 수강하고 나서 뒤풀이 자리에서다.
그가 정 경식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안 철환이도 자리를 같이했는데, 정 경식은 안 철환과도 이미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러고는 이후에 칠닥이가 변산으로 귀농하게 되는 과정에서 정경식은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정경식은 경남 남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줄곧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딱, 한 번 가구공장에 취직한 적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손가락 하나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고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풀무원 농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한국의 유기농 아버지라 불리는 오 재길, 원 경선 생을 비롯한 여러 선각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아내가 된 전 명순을 만나게 된다.
전명순은 전북 임실에서, 무교회 無敎會 선교를 하던 김종복 선생에게 수학하다가는 선생을 따라 풀무원 농장으로 들어가 전경식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변산에서 반듯한 농장을 일구어낸 오 건은 전주의 카톨릭농민회 일을 보기 위해서 농장을 비우게 되고 그 농장을 소개를 받아 이어 간 이가 정경식 부부이었다. 그들 부부는 경기도 부천을 떠나 눈 많은 변산반도에 함박눈이 발목을 묻을 때, 갓난아이 태영이를 부둥켜안고 먼 길을 걸어서 늦은 밤에야 농장에 도착하고 그 길로 변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 백연이는 변산반도의 토박이다.
난봉끼 있는 아버지는 밖으로만 나돌았다. 농사며 살림을 어머니가 도맡을 수밖에 없게 되자 길섶으로 난 농가의 방 한 칸을 헐어서 점방을 차렸고 본디 심성이 고운 백연이는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그가 가게를 지키게 되었다. 도청리의 주민들이 손님의 전부인 점방에서 백연이와 특별한 인연을 맺는 이가 오 건이다. 오 건의 눈에는 홍안의 소년 백연이가 안쓰럽고 대견스럽기도 해서 틈나는 대로 그를 농장으로 불렀다.
진학을 하지 못한 소년에게 중등과정을 가르치고는 하였다. 그에게 받은 영향은 공부보다도 더한 것이 오 건의 인품까지 이어받은 것이다.
“건이 형, 건이 형!”하며
오 건의 생전을 전하는 백연이를 칠닥이가 보면서 백연이 인품이 오 건의 인품의 그대로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부안에서 변산면 소재지를 지나 격포해수욕장 가는 길에, 마포삼거리를 지나 유동마을쯤에, 금구원 천문대 길을 알리는 돌 비석이 있는 샛길은 소격포 가는 길이다.
소격마을과 도청리 중간에 칠닥이네 세 식구는 거처를 잡았다. 인구 유입이 거의 없는 시골 석에 이웃들이 신기하다는 듯 관심을 보였고 양식하라며, 기슭에 별로 햇볕이 잘 안 들 것 같은 따랭이논도 손바닥만 한 거 얻어 주었다.
<쌀재농법 실패기.>
머리에 털 나고….
아랫도리에도 털 나고, 난생 첨으로 칠닥이에게는 농사가 생겼다!
따랭이 논 500평.
토박이 전문 농사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마을에 진상 논이 그에게 걸렸다.
임대료도 거저다. 싶어 가을에 수확해서, 한 가마 반만 갚으면 된다.
농사 싸부, 백연이도 대견한 듯 관심 어린 조언을 한다.
“에~ 오형, 이자 논도 생겼응께…. 쌀재농법으로 지어 보는 게 어쩌?”
“쌀겨 농법요? 그 게 우에 하는 거껴?”
“음, 긍께 내가 홍성서 교육받은 것인디, 쌀재를 물 논에 뿌리면, 피복이 되어 잡초 발육을 막고이~ 나중엔 거름도 된다는 그 말임시…….”
“쌀겨가 없는데….”
“암시, 쩌그~ 퇴비장에 내 쌀재 갔다 쓰시요이~”
57년 닭띠, 동갑인 농사의 사부인 백연이는 항상 넉넉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할 사람이다. 그들은 진작부터 말 놓고 친구 하기로 하였지만, 늘 백 년인 칠닥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그런 경우라 여직, 칠닥이는 “예”하는 존대를 쉽게 벗지 못한다.
“그라믄, 울메나 갔다 뿌려야 하니껴?”
“긍께, 첫 따랑에 여덟 포…. 둘째에 일곱 포……. 아녀, 아녀~ 첫 따랑에 열 포! 둘째에 여덟….”
마음씨 넉넉한 백연이는 거름 뿌리는 것도 항상 넉넉하다 못해 지나치다. 밭에 맨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퇴비 하는 습성이 있어서는 작물이 영양 다로 병충해 피해가 크다는 지적을 매번 받고는 하지만, 백년이 버릇은 늘 그랬다.
“그면, 열, 여덟, 일곱…. 마구 스물다섯 개 뿌리니껴?”
“그라제…….”
홍대가 오리농법 한다고 소비자 가족과 함께 손모 심는 날이다. 그날 칠닥이도 논에 물을 넉넉히 대고 쌀겨 살포 작업을 하였다. 땡볕이 살을 벗겨내는 날씨에 일 차에 쌀겨를 옮겨와서 삼태기에 담아 종아리까지 빠지는 논을 헤매면서 밀가루같이 고운 쌀겨를 이리저리 골고루 뿌렸다. 보통이 아니다. 땀과 쌀겨가 범벅이 되어 맨살에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숨이 턱까지 차면서 연상이 된 것은 칠월 한여름에 신병 훈련소에서 받던 각개전투였다.
“형~ 막걸리 한잔하게~”
홍대네 논에 샛거리 시간이었다.
“어메~ 혼자서 어째, 한다요~”
논두렁에 둘러앉은 전주 비자들이 그 몰골이 안쓰러워 한마디씩 한다. 칠닥이는 먹을거리 새참은 마다하고 막걸리만 여러 잔 연거푸 마시고는 힘겨운 한숨을 토해냈다.
쌀큰한 막걸리는 허리의 통증을 잠시 잊게 하였지만 이내 술기운이 옅어지자 또 작업이 고통스러워진다. 아예, 됫병 소주를 풀에 두고는 힘겨울 때마다 깡소주를 한 잔씩 마셨다. 술은 통증을 못 느끼게 하는 마약의 힘이 있었다. 소주 반 됫병의 힘은 500평의 논에 쌀겨 톤을 샛노랗게 물들여 놓았고 집으로 돌아간 칠닥이는 혼절하듯이 쓰러졌다. 끼니 챙기는 것도 잊고 죽은 듯이 잤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전날 그가 전날 한 작업을 점검하면서 흐뭇해하고 있다.
“흐, 흐…. 역시 술 힘은 대단해! 나 혼자 어떻게 다 해 냈을까?…?”
이때부터 그는 힘들 때는 술 힘을 비는 취농법 醉農法을 터득하게 된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던 용만이 어르신이 길을 멈춘다.
“칠닥이~ 거, 논에 뭣을 뿌렸는가?”
“예, 어르신 쌀겨를 뿌렸니더!”
“쌀재를…? 왜…? 백연이가 그려?…?”
용만이 어르신이야 관행농을 하시니 환경 농을 아실 턱이 없으리라.
“쌀재? 그것이 엄청 독한 것이여~거름으로 쓰자면 가을에 뿌려서는 흙을 뒤집고 봄까지 삭혀야 혀~ 백연이가 어째서 그렇게 시켰스까이~…….“
칠닥이 생각으로도 일리 있는 말씀만 같아서 약간은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한 이양기를 경운기에 싣고 온 수원이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메~ 논이 어쩌 이려…? 뭐여~ 백년이 성이? 아~ 그 성은…. 어쩐디야~……. 요것이, 묘를 꽂아야 다 꼬실라지게 생겼네이~ 생겨 부렀어!“
이미, 논 표면에 두껍게 깔린 쌀겨는 물과 땡볕의 높은 온도를 받아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며 일부는 쌀겨가 삭아서 녹물처럼 시뻘겋게 변해가며 기름이 둥둥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째노……?”
“환장, 하네이~…….”
“형님, 내 하라는 대로 하소이~일단, 물을 다, 빼소! 빼고는 새 물을 대! 그런 다음에야 심읍십시다."
그렇게 하룻낮과 밤을 물을 빼고 대면서 쌀겨를 흘려보냈다.
논물은 몰라보게 맑아졌다.
그러나 다시 와서 이양기로 모를 심던 수원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논바닥을 이양기가 헤매고 다니자 이번에는 이미 바닥에 가라앉은 쌀겨가 떠오르고 있다.
“내, 모는 심어 줍소만, 이놈이 살아 날라는 가는 모르겠소. 논물, 가두지 말고 계속 새 물을 대소 이~"
어쨌든, 500평 논에는 푸른 융단이 깔린 듯이 심어진 묘가 잔디밭 같아서 보기 좋았다. 물론 물빼기와 새 물 대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칠닥이가 수원이를 보내고 피곤함에 지쳐, 술에 취해서 얼마쯤을 잤을까?
“이보게! 오 형, 큰일 났네이~”
역시 57년 닭띠 친구, 영철이었다.
“자네 쌀잿물이 말임시, 말 못 하는 우리 형님네 논으로 들어가서는 모가 꼬시라 지기 시작하는데, 영문을 모르는 그 양반이 병 걸렸다고 약을 치고는 난리가 났네!“
“아이고 우야노, 내 당장 가서 사과해야 될따.”
“아서게, 자네 지금 가면 살인 나네!”
영후 형님은 벙어리지만, 동네 최고의 일꾼이며 호인이지만 일단 자기가 손해다 싶으면, 그 화가 천둥 같아서 누구도 그를 말려 볼 자가 없을 정도로 무서운 형님이다.
“내! 이, 백연이 놈을……. 가만히 둬서는…. 자기도 해 보지 않은 농법을 초짜에게 시켜?”
영철이는 말릴 틈도 없이 휑하니 오토바이를 몰아 백년이 동네 도청으로 내 달려 버린다.
(아이고, 우리 싸부……. 죽게 생겼네…….)
그날, 영철이가 동갑이면서도 선배인 백연이에게 어떤 행패를 부렸는가는 칠닥이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은 백연이를 본 적도 없었다.
그냥 매일 수시로 논으로 나가 모가 자라는 상황을 살폈다. 그는 아무 일 하지 않아도 논두렁에 그저 앉아 있는 것만 하여도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촌에 살게 되면서부터 행복과 평화라는 단어를 이렇게 절감해 본적이 이 전에는 없었다.
그러나 논에는 행복과 평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모 끝이 노랗게 타면서 말려들어서 갔고 볼펜 대궁만 했던 모는 날이 갈수록 철사처럼 가늘어져 흐늘흐늘 힘을 잃어 갔다. 융단을 깐 것처럼 빽빽하던 논에 듬성듬성 공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아~ 실패구나……. 매정한 운명의 여신이여….”
“아~ 이 사람아 뭐혀~ 백연이 한테, 어여 가 봐아~ 무신 구체를 내야 할 거 아녀~”
냅다 소리친 이는 영철이다.
하여간, 칠닥이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 형요~ 이형, 집에 있니껴!~”
현관문을 빼꼼이 열고 나오는 백년이 안색은 거의 사색이 되어있었다.
“아이고~ 오 형, 심려가 크지요? 가을에 오 형 양식은 내가 줄께…….”
손을 덥석 잡는 백연이에게 처음으로 그도 비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아이시더~ 그까짓 거 농사 울메나 된다꼬요…. 뭐로, 로터리치고 다시 심으라카데요?”
“내가, 그놈의 논 땜시…. 그라야제, 모는 내 봐 논 데가 있어이~ 가 봅시다.”
백연이와 차를 몰고 들판으로 내 달렸다. 100평당 모판이 열일곱 개나 열여덟 개 들어가니 거의 백여 판을 언포고, 두포고 성천으로 돌면서 심다 남은 것을 주워 모았다. 백년이 동생 성연이가 와서 로터리를 치고 수원이는 이앙기를 또다시 싣고 왔다.
“형님은, 이모작이여~ 이모작~” 놀려대는 수원이에게,
“퍼뜩, 심 그라이~ 백년이가 맘고생 마이 해따 아이가.”
논에는 잔디밭 같은 융단이 다시 깔리고 어린 묘포기는 하늘하늘 바람에 춤추며 일제히 손을 흔들어 미리 풍년을 약속하는 듯하였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본 바로는 쌀겨 농법은 100평당 쌀겨를 20킬로에서 40킬로까지 논물을 대면서 물꼬에 그저 슬슬 뿌려 주면 자연스럽게 논 전체에 퍼지는 방법이다.
그런 것을, 기준보다도 다섯 배나 많게, 이미 물을 댄 논에다 헤매며 뿌렸으니 고생을 죽도록 하면서도 낭패를 당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친환경농법이라는 것이 아직은 그 사례가 짧아서 체계화되지 않았고 경험 부족에다 주로 구전으로 실험적 시행이 많아서 여차하면 실패로 이어질 경우가 흔하다.
쌀겨를 흠뻑 먹은 논에는 웃거름 주 필요도 없이 묘가 잘 자라서 동네에서는 칠닥이 농사가 잘되고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이다.
지나가던 백연이도 차를 멈추고는,
“아~ 오형, 묘만 꽂으면 농사가 되여~ 저, 뭣여 논풀도 좀 깎고, 이랑에 풀도 메고….”
그는 어느새, 의연한 싸부로 되돌아와 있었다.
묘는 노랗게 익으며 알찬 놈부터 고개를 숙이기를 하여 행복과 평화가 손으로 만져지는 듯하였다.
귀농한 칠닥이는 한동안 정경식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소격마을에 재가한 과부, 순창 댁의 빈농가에서 살림을 꾸릴 준비를 해 나갔다.
칠닥이가 둥지를 튼 이웃에는 동갑내기인 봉한이와 영철이, 두 살 위의 성희와 종진이가 살았다.
재가한 과부 순창 댁은 자신이 살던 농가를 칠닥이에게 맡기고 산내의 새신랑댁으로 들어갔다. 신혼의 단맛을 막 느낄 즈음에, 새신랑 춘배가 농협에 빛 걱정에 고민하다가 목메어서 자살하였다. 졸지에 그녀는 도로 과부가 되어 돌아왔다.
되돌아온 순창 댁은 자신의 묵은 농가를 차지하고 있는 칠닥이에게 압력을 가해서 나가도록 만들었고, 결국 칠닥이네 세 식구는 옆 동네인 도청리의 빈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도청리에는 청년들이 많았다. 동갑인 백연이를 비롯하여 그의 동생 성연이 또래나 더 젊은이도 여럿이 되었다. 칠닥이는 그 동네에서 시골 생활을 끝낼 때까지 버티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 정착한 칠닥이네는 아이나 어른이나 새로운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아이들은 전학한 학교에서, 칠닥이는 주로 논밭에서 농사일하는 중에 마을 사람들을 사귀게 되었다.
<성기.>
배꼽 아래를 연상했다면, 육신이 건강한 어른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박성기 이야기다.
봄 농사의 큰 행사는 고추 심는 것이다.
일손도 많이 필요하지만, 고추는 환금작물로서 가을에 목돈을 쥘 수 있는 시골에서는 그나마 몇 안 되는 작물이다. 칠닥이는 수일 전부터 부탁받은 병주네 고추심기라, 삽 하나 메고는 일찍이 밭으로 갔다. 동네 사람들 이미 여럿이 와 있었고 일이 시작되자 꾸역꾸역 밀려오는 일꾼이 족히 십 수 명이다.
"형님~ 이리 오쇼 잉~ 같이 삽 질 하시게요."
도청리로 이사 온 후 인사를 나눈 적 있는 사십 대 총각 박성기다.
부드럽게 로터리를 친 밭은 마치 융단을 깐 것처럼 부드럽게 끝 안 보일 정도로 넓고 넓었다. 칠닥이를 불러 세운 성기는 군대 고참이 졸병을 맞이하듯 근엄한 표정과 함께 알 수 없는 미소를 슬쩍 흘렀다.
그는 간단히 작업의 요령을 설명하는데, 여자 둘이서 멀칭비닐을 깔고 나가면 노인네 두 분이 바람에 날리지 않게 군데군데 한 삽씩 흙으로 눌러 놓는다. 그러면 성기와 칠닥이는 비닐을 두고 마주 서서 재빠르게 그리고 야무지게 비닐의 가장자리를 고랑에서 판 흙으로 덮으며 나가게 된다. 성큼한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가는 여자들을 삽질하며 뒤좇기란 여간 바쁘질 않다. 반면에 성기는 삽질이 거의 신기에 가까워 오히려 여자의 발걸음을 재촉할 지경이다. 성기와는 속도의 균형이 맞지 않으니 비닐이 자연 칠닥이 쪽으로 찌그러지고 팽팽해지지 않는다. 답답해하는 성기는 삽질하는 요령을 다시 가르쳐 주곤 하였지만 되려 칠닥이로서는 그 방법을 익히랴 따라 쫓으랴 이중으로 힘들기만 하였다. 저만치에서 따라서 오기를 기다리는 성기를 잡을 만하면 그는 또다시 허리를 굽혀 삽질을 시작하니 이 건 일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숨은 턱까지 차고 땀은 범벅이 되어 안경을 부옇게 만들어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눈까지 땀에 절어서 따갑다. 헛걸음, 헛삽질이 심해질 즈음에 반가운 소리가 밭두렁 저쪽에서 들려온다.
"샛 거리 드시고 하시게요~ 얼릉 오시랑 께~"
3분, 10회전 권투선수가 1분의 휴식을 위한 코너로 돌아가는 심정으로 밭두렁에 주저앉은 칠닥이는 주는 막걸리를 숨이 넘어갈 때까지 마셔댔다.
(휴~ 정말, 농사 힘들다. 어쩐다…….)
잠시동안 참 시간이 끝나고 부들거리는 발걸음으로 숲 저쪽에서 오줌을 누고 있자니 성기는 벌써 일을 시작했고 누구와 짝을 맞추고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느린 걸음으로 일자리로 돌아오니 새로운 칠닥이의 짝은 노인네 용만이 양반이었다.
" 애고~ 이 사람아, 쉬었다 하세! 당최, 젊은 사람들 따라갈 수가 있어야지라…."
노인네는 댓 발자국이나 띄고는 허리 한 번 펴고 댓 걸음 나가면, 우두커니 서서 쉬는가 하면 또, 얼마 안 가서 담배를 피워 물고는 하였다.
헤, 헤~ 할 만하였다.
이럭저럭 그 넓던 고추밭은 까만 비닐 천지로 파도치듯 흐뭇한 광경이다. 저 끝 쪽에서는 한팀이 터널용 활대를 꼽아 올라오는 것이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형님이 이리 오쇼 잉! 나하고 같이하시게요~"
어느새 짝을 잃고 혼자가 된 성기라는 악마 같은 놈이 칠닥이를 부르지를 않는가.
"으~응……."
구체 없는 일이다.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링 위를 다시 오르는 권투선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승산 없는 시합이 계속되고, 종이 울리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성기야~ 이놈아! 좀 살살 혀~ 사람 고만 죽이고…."
밭 주인 병주 아빠가 점심거리를 나르며 이쪽을 향해 냅다 소리 질렀고, 성기는 아까 아침에 잠깐 스쳐봤던 그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옳지, 이놈이 원래 일머리가 험한 놈이구나. 오늘 나를, 먹이로 삼은 게 틀림없어! 배꼽 밑의 아랫도리처럼 음흉한 놈 같아서는…….)
점심은 배고픔을 해결하기도 하지만, 다소간의 휴식 시간과 무엇보다도 성기 저놈에게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자~ 고만 쉬고 시작해 보시게요~ 어 허~"
금쪽같은 점심시간을 다 보내고, 누군가의 제의로 군데군데 그늘에 쉬던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재빠른 상황 판단과 정세 파악이 필요할 때다. 일부러라도 오줌을 다시 누고, 물 주전자 찾아 수분 보충하고, 이럭저럭 밭으로 향하는 행 열 뒤로, 뒤로 처져서 걸을 때쯤에 앞서던 성기 놈, 홱 하니 칠닥이를 향해 뒤를 돌아본다.
"형님! 오후에도 같이 짝 맞추게요~ 여기, 젊은 사람은 형님과 나밖에 없어라~ 전부 노인네들이라……."
녀석의 벼락같은 퇴로 차단에 칠닥이의 작전은 완전히 수포가 되었다.
오칠닥, 그는 그날….
뜨겁던 태양이 서해 바다로 빠져들면서 붉은 노을로 하늘과 구름을 채색할 때까지 완전히 죽었더랬다.
(쥑이는 이야기다.)
도청리에서 백연이는 농사가 규모가 큰 집이다.
백연이는 유기농을 하는 농가라 칠닥이는 일거리가 많은 그네 집으로 일 가는 날이 자연 많게 되었다.
백연이는 주변에서 부처님의 가운데 토막이라는 소리를 듣는 호인이다.
칠닥이 생각으로는 백연이가 그만한 인품을 갖춘 것은 오 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울에서 가방공장에 다니는 뒷집 아가씨 소개로, 그 공장의 색시를 만나 결혼했다. 시집온 그녀 역시 백연이 못지않게 마음씨가 넉넉한 여자이었다. 참, 잘 만난 짝이다.
그 댁의 한 가지 걱정은 백연이 동생 성연이다. 성연이는 겨우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외부활동에 발이 넓던 정경식이가 대학을 나온 학교 여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여선생은 전교조 활동을 하던 진보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진지라 학력 격차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좋은 성연이에게는 결정적인 나쁜 버릇이 있었다. 노름을 끊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성연이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돈 문제가 시끄러워지자 그들의 결혼생활은 채 몇 년이 못 가서 위기를 맞게 된다. 서로 별거로 들어갔다. 그 댁에 노모가 늘 둘째 성연이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쩌다 보니 노모의 한풀이 겸의 말 상대를 칠닥이가 맡게 된다.
늙은 어머니의 심정은 번듯하고 잘 난 자식보다는 부족하고 못 난 자식에게 측은지심이 들기 마련이다. 맏이가 인심을 얻고 주위에 칭송이 있을 때마다 그렇지 못한 자식이 어머니의 눈에 밟히고는 한다. 별거를 선언하고 뼈마디 여린 손주를 이끌고 읍내로 이사를 해 버린 며느리를 한 번 찾아갈 요량이다. 노름꾼에 섞여 집 나간 둘째는 어쩌다 가끔, 칠닥이를 통해서 소식을 전해 왔다. 매번 똑같이 잘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읍 가는 길.>
폭설이 그치고,
도로가 어느 정도 훤해지자 정현이 할머니를 모시고 정읍 가는 국도를 달린다.
평생을 난봉꾼 남편에 시달렸던 할머니는 백연이의 노모이다.
그 아버지를, 그 둘째 아들 성연이가 꼭, 닮아 버렸다.
전교조 운동으로 시골로 잠입한 여선생은 뚜렷한 신분의 격차도 마다하고 시골 농부, 둘째의 순수성에 인생을 허락하였다. 그리고는 해양 수양원에서 식을 치른 지가 불과 수년에 지나지 않았건만.
노모는 소식이 끊긴 둘째를 안타까워하며 정읍으로 떠나버린 며느리댁에 손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렇게 이사 간 며느리를 향해 달리는 눈길을 어설퍼 하면서 생각하면 할수록 둘째가 원망스럽다. 둘째는 젊어서부터 노름을 끊지 못하더니 급기야 경마에 손대고는 정도가 더 심해져 언감생심 대학 나온 선생님을 아내로 맞는 호강을 누리지 못하고 결국 빛에 졸려 소식 없는지가 한참이다.
노모는 여름 내내 추수 끝나면, 정록이 집에 태워 달라며 칠닥이에게 다짐을 받았고 오늘에야 그 약속을 그가 지켜야 할 날이 된 것이다. 마당에 차를 대라던 할머니는 백미며 찹쌀이며 된장, 고추장 메주고 청국장 뭉친 것, 완두콩이며 쥐눈이콩이나 달걀이며 고구마랑 늙은 호박 등 싣지 않는 농산물이 없이 바리바리 내오고 있었다. 이 전에는 정읍 갈 일을 백연이에게는 쉬쉬 비밀로 하더니, 오늘에야 막상 닥쳐서는 숫제, 맏이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이 정도야 내가 가져가도 괜찮아 야,~ 암……."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전화번호만 달랑 지닌 채로 초행의 정읍에서는 입구에서부터 묻고 물어 차부에서 다시 전화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착오를 거쳐 겨우 다 달은 아파트단지의 후문에서는 다시, 정문을 찾아 일러주는 동 주차장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정록이 엄마는 나타났다. 무심한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는데, 그 댁4 층에 숱한 농산물이 다 옮겨질 때까지 시큰둥하니 팔짱만 끼고 있다.
"이딴 거 무어 가져오세요. 여기서 다 싸게 살 수 있는데…."
전화로 시켜주는 우동 두 그릇을 마주 앉아 먹으며 칠닥이는 차라리 이 집을 빨리 떠났으면 싶었다. 젓가락만 들었다 놓았다 하는 할머니는 어쩌든 손자를 한 번 안아 볼 요량이지만 분위기가 그런지라 정록이는 가까이 오지 않고 장난감만 만지작거리며 당신을 처음 대하듯 한다. 백연이 동생 성연이의 노모인, 할머니는 아들의 부덕함을 읍소 하지만 며느리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했음을 속사포 쏘듯이 쏘아대곤 하여 말문을 막곤 한다.
어색한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서야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깃꼬깃 용돈을 손자에게 쥐여 준다.
돌아오는 길이 두 사람은 한없이 언짢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할머니가 신음처럼 중얼중얼하신다.
"이자는 안가야…. 그 집에는 안 갈 참이여……."
변산으로 돌아오는 국도에 무거운 어둠이 내려앉는다.
차에 불을 밝혔다.
라이트 불빛이 희뿌옇다.
시골 정서는 다양하다. 인심 좋은 것이 그렇기도 하지만 고지식하고 배타적임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마다 쉬, 쉬하는 음습한 비밀도 하나쯤 있을 만도 하다.
<안개 마을. >
도청리에서 소격마을로 넘어가는 중간에 산자락에 붙어 있는 오 건의 농장이 있고 그 농장의 옆에는 조각공원이 넓게 자리를 잡고 있다.
오건 농장과 조각공원 앞쪽으로 저수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저수지를 돌아가는 도로 건너편에 대농가 大農家가 복연네다. 그 집에 서뿌리라 하기도 하고 코뿌리라 하기도 하는 부르는 사람에 따라 아무렇게 불려지는 막 늙어 가는 그런, 일편 보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내가 붙어살았다.
칠닥이가 그 초로의 사나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재가한 과부의 새신랑이 목을 매는 바람에 그 과부의 집을 내주고 도청마을로 이사 와서는 명색이 도청마을 주민이 되면서, 부터다.
코뿌리는 한 이십 년 전에 비바람치고 날이 어둑해 질 무렵 동네 어귀의 처마 밑에 쪼그리고 있는 것을 복연이 아버지, 용진 양반이 그 집 아래채로 들인 후로 그 집 상머슴이 되었다. 처음에는 떠돌이 거지부랭이를 거두는 것을 마뜩잖게 여기는 동네 사람들이 이제는 복연네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마을에서도 대농인 그 집 농사를 코뿌리 없이는 안 될 만큼이나 큰 일꾼이 되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을 도맡은 장남 복연이도 그랬다.
"재빠른 일은 못 해도 더디고 꼼꼼한 일은 코뿌리가 동네에서 최고여~ 하루, 종일 쪼그리고 있어도 지겨워하는 법이 없지."
코뿌리라 하면 늘 일하는 모습이 연상 될 정도로 굼벵이처럼 느리게 이 논둑, 저 밭둑을 헤매기를 이른 새벽부터 해지기까지 계속된다.
“종암 댁은 좋겠어, 용진이 양반 댈고 살지, 코뿌리 댈고 살지. 이쪽서 못 채우면 저쪽서 채우고 월매나 좋디야아~”
“말도 마아. 얼마나 처먹을라 하는지 먹고 나면 또 설사 해 대지 더러워서 못살아.”
할머니들이 품앗이 밭일을 하느라 옹기종기 바쁜 호미질을 하면서 수다를 한다.
“코뿌리 고추는 어째 생겼디야?”
“어찌 생갔간디, 뻔데기 같지 뭐~”
대답은 엉뚱하게 종암 댁이 아닌 서울 할머니 창근이 어메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메~ 창근이 어메가 봤는가비여?”
서울 할머니는 아들 창근이를 따라 서울로 올라갔으나 몇 년을 못 배기고 도로 내려와서는 묵혀 둔 옛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할머니다.
“그제도, 코뿌라 오늘 저녁에는 내 집에 와서 자그라 했더이 대답은 안코 히죽히죽 웃기만 하두만.”
하하 하 호 호 호.
칠닥이로서는 코뿌리를 보면서 아득한 영화 한 편을 잔잔하게 회상을 하게 된다. 코뿌리에게도 영화처럼 대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영화, 안개 마을. (감독 임권택 원작 이문열)
시골 오지로 부임한 여선생 수옥은 동네 사람
들에게 뭇매를 맞는 부랑아 깨철이를 목격하게 된다.
성불구자로 알려진 깨철이는 동네 아낙들과는 스스럼이 없었고 아낙들 역시 그를
남성이 아닌, 그저 불쌍한 짐승쯤으로 여기고 먹을 걸 주곤 하였다.
그런데,
온 동네 사람들에 둘러싸인 속에서 깨철이를 복날 개 패듯이 하는 젊은 남정네는 그가 자기 아내와 통정을 했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이다. 그날 이후 동네에선 깨철이가 과연, 성불구인가 아닌가 논란이 일기 시작하는데, 급기야 읍내 술집 색시를 사서는 깨칠이를 실험하게 이른다. 깨철이는 남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었다. 통정했다는 아낙은 의심에서 벗어났으며 깨철이 또 한 전과 같이 자유롭게 동네를 배회 할 수 있었고 동네 아낙들도 깨칠이 대하기가 더욱더 편해졌다. 내놓고 내외 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수옥은 막연하나마 그녀는 그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다.
약혼자를 기다리다 못 만나고 돌아오는 신작로에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고 빈집
을 찾아 든 그 집에는 깨철이가 수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칠이가 멀쩡한 사내라는 것을 알게 된 수옥은 그제야 그가 동네 아낙들의 성 불만을 해소해 주는 매개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낙들과 체면 높은 집성촌의 성性 약弱한 남정네를 포함하여 그들 모두는 기묘한 공생관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래전에 영화 속의 깨철이가 변산반도 도청리의 복연이네 머슴, 코뿌리로 되돌아온 것이다. 코뿌리를 상대했을 만한 할머니들을 가늠해 보는 재미가 칠닥이에게 생긴 것이다.
막내는 잔뜩 부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강남에서 경기도 안산까지의 먼 길을 돌아 퇴근해서는 내뱉는 첫마디는,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우린, 다 죽어!”
다소 긴장감을 느낀 칠닥이에게는 뜬금없는 소리였다.
“머라카노? 김 대주이가 대통령 되는데, 우리가 왜 죽노?”
“우리 경상도 사람은 다 죽게 생겼어! 면장, 동장도 다 바뀔 거야.”
“하이고, 야 야 니 몇 살이고? 니보다 십수 년 더 먹은 나도 그래는 생각지 않는데 어예, 젊은 아가 순다지 꼰대같이 구노? 어이.”
칠닥이는 막내보다 열여섯이나 더 먹었고 막내는 그만큼 젊은이였다. 어릴 때부터 체화된 가난에 대한 철저한 한을 지니고 있었다. 서른 평의 아파트와 중형차를 가지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먼 퇴근길 중간에서 식당 밥을 사 먹는 법이 없이 주린 배를 안고 반드시 집에 도착해서야 허겁지겁 저녁을 먹는 사람이다. 그런 막내가 밥 먹을 생각도 않고 흥분하고 있다.
1919년 2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 총독부에 체포된 장덕수가 유배된다. 그곳에서 장덕수는 항일성향이 짙은 이장, 김운식과 친분을 쌓게 되는데, 김운식이 15대 대통령, 김대중의 아버지다. 장수금은 김운식의 두 번째 부인이면서 김대중의 어머니이다. 하의도는 일정시대에 대표적인 소작쟁의가 일던 곳인데 이런 현상은 장덕수의 영향이라 봐야 할 것이며 김운식이 앞장을 섰다. 그러나 정작 장덕수는 결과적으로 친일파로 변심하였고, 결국은 좌파 단체인 한국독립당 요원에게 암살당한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수금은 어린 대중이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고, 본처와 이혼한 김운식에게 목포로 이사 가서 공부시킬 것을 종용하여 김대중의 집안은 목포에다 숙박업, 영신 여관을 차리게 된다. 김대중은 목포 상고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학생회장까지 지낸다. 일정시대 당시에 상고를 졸업한 김대중은 선박회사인 <전남기선주식회사>에 입사를 하였지만, 일제의 전쟁 말기에 신검을 받고 징집 대기 중에 광복을 맞는다. 김대중은 해방이 되자, 경험을 바탕으로 다니던 日人의 선박회사를 인수하여 사업가로 승승장구한다. 그 무렵에 김대중 정치에 관심을 가져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이십 대에 사업가로 성장한 김대중을 목포의 유달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눈에 띄는 여인을 발견하는데, 그 여인의 이름은 차용애이다. 차용애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 여성으로 목포지방에서 큰 인쇄소를 운영하던 유지, 차보륜의 집안의 딸이었다. 차영애의 오빠, 차원식이 김대중과는 목포 상고의 동기 동창인 관계이며 5 공화국 시절에 “장영자 사건”의 장영자가 외사촌 동생이다. 김대중와 결혼한 차영애는 김홍일, 김홍업 두 아들을 낳고 약물 부작용으로 그녀의 나이 32세에 요절을 한다. 1951년, 육이오 피난 시절에 부산에서 이희호를 독서클럽에서 처음으로 만난 김대중은 그로부터 십여 년 후에 명동에서 우연히 이희호를 다시 만난 김대중은 강한 동지 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때는 이희호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YWCA 총무로서 여성계 지도자로 자리를 잡고 있던 시기였다. 이희호 역시 김대중에게 동지애를 가지고 1962년 5월에 김대중 나이 39세, 이희호 41세에 재혼과 초혼의 상태로 부부가 되어 이듬해 김홍걸을 낳는다. 김대중은 노모를 모시며 두 아들의 아버지인 홀아비로, 겨우 웅변학원 강사인 가진 게 없는 상태이고 이희호는 의사 집안의 딸이며 재야, 여성계, 학계, 기독교계 인맥이 화려한 지도자 위치에 있었다. 이희호는 이십 대에 독립운동가며 민주 운동가인 계훈제와 사귀면서 결혼까지 마음을 먹었으나 계훈제는 심하게 폐결핵을 앓았고 이희호도 유학길에 오르면서 둘 사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50년대에 들어서는 소설가며 정치인인 김한길의 아버지, 통일 사회당의 김철과 친분을 쌓고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을 알게 되고 1955년에 민주당에 입당한다. 입당한 김대중은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등록 무효가 되고 1959년 재보궐 선거에서도 잇따라 낙선한다. 1960년, 인제지구에서 5대 총선에 도전을 하나 자유당의 전형산에 패한다. 이듬해, 김대중은 지략가 엄창록을 비서로 삼고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에서 민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드디어 당선된다. 하지만, 이틀 뒤에 5·16쿠데타가 발발하고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정치 활동은 할 수 없었다. 1967년 6월 8일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목포에서 당선되어 민주당의 재선 국회의원이 되는데, 이때부터 벌써 대통령 박정희는 강력한 경쟁의식을 가지고 여러 방법으로 선거 방해를 꾀한다.
김대중의 정치적인 역량을 알아본 박정희는 공화당 의원 스무 명이 떨어지더라도 김대중은 반드시 낙선시키라고 정보부와 내무부에 지시하면서 스스로 대통령 신분으로 목포에서 공화당 후보의 지원 연설도 하고 현지에서 국무회의를 열기도 하였다. 미국 의회에서 증언대에 섰던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박정희는 김대중에 대하여 증오에 가까운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선거에 승리한 김대중은 앞으로 대통령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때부터 김대중을 국내외 기자와 정치인들이 주목하였고 미 대사관에서도 관심을 둔다. 동시에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죽이기’가 시작되고 빨갱이, 선동꾼, 모사꾼으로 포장되면서 한편으로는 경상도, 전라도의 지방색을 가르는 영호남 지역 갈등의 시초가 된다.
1971년에는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해이다. 민주공화당에는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에는 김대중 후보가 나섰다. 박정희는 5대, 6대 대통령 중임을 거쳐서 1969년 3선 개헌으로 세 번째 나선 것이다. 김대중은 김영삼, 이철승과 당내 경선에서 극적인 반전으로 대통령 후보로 선택되었다.
“과연 박 정권이 반공하느냐? 오늘날, 이 썩은 정치, 이것은 공산당을 키워주는 온상이에요. 이 몇 사람을 잘살게 하는 특권 경제, 공산주의는 이런 특권 경제 속에서 자라났어요. 따라서 박 정권은 말로는 반공하지만, 그 하는 정치는 오히려 공산당을 키워주고 기르는 양공을 하고 있어요. 내가 정권을 잡으면 지방자치를 실시해서 민주주의 기초를 확립하고 대중 경제체제를 실시해 생산 면에서 자유경제, 분배에 있어서 사회정의를 실천할 겁니다. 이번에 박정희씨를 뽑으면 반드시 독재의 길로 갈 겁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장기집권을 허용치 않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총통이 될 겁니다!”
대통령선거 9일 전에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김대중의 유세 연설에는 100만의 인파가 몰려서 엄청난 열기 속에서 열렸다. 김대중의 웅변력을 아는 박정희는 갖은 방법으로 방해를 한다.
선거에서는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의 투표지조차도 무효표가 될 정도로 갖가지 부정선거가 진행되면서 박정희가 150만 표 차이로 승리한다. 사실상 박정희의 패배고 그는 심하게 김대중에 대하여 두려워했다는 김형욱의 증언이다.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계획이 진행되는 중에, 1973년 8월, 일본에 체류 중인 김대중을 납치하는 사건이 발발한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용금호 배 밑으로 끌려간 김대중은 손발이 묶이고 눈에는 테이프가 붙은 상태에서 그 위로 붕대로 칭칭 감겼다.
“하느님 예수님 저는 아직 죽을 수 없습니다. 제발 저를 살려주십시오”
18쪽, 260매.
(현대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