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같은 섬 보길도 고산 유적지 해설 (산까치 / 박상길)
오늘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6시에 기상을 했다.
간단한 요기를 한 다음 승용차에 몸을 실고 7시에 광주를 출발하여 내 고향 보길도까지 시간에 맞게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일찍 출발을 하는 것은 9시까지 해남 땅 끝(土末)에서 여객선을 타야 하고 보길도 세연정에 10시 까지 도착한 후에 관광객들을 맞이하여 문화관광해설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고향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서 고향을 홍보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우연이 아니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와 고등공민학교(중학교 과정)를 이곳 보길도에서 마치고 고등학교입학자격검정고시를 합격한 후 멀리 목포에서 유학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여 목포로 학교를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어 큰형님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안을 관리해 오시면서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형님께서는 우리 집안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생들만큼은 어떻게 하든지 가르쳐야 하겠다는 일념에서 지원을 해 주셨기에 나와 동생은 학업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저 멀리 낙도인 보길도 섬에서 태어난 당시의 상황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며 한 번도 도시에 나가 보지 못한 어린 나에게는 정말로 끝없이 넓은 바다 즉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았다.
집안 형편을 뻔히 알고 있는 나는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보려고 3년 내내 줄곧 자취생활을 하며 보답하는 마음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그 결과 제대로 먹지 못하여 중병에 걸려 꿈을 접고 좌절한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여 은행원이 된 후 32년 근무하고 퇴직하여 지금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전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려운 여건 하에서 배움을 해왔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직장생활 이었으며 어려운 여건 하에서 남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서 40세에 은행지점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40이라는 나이에 처음 경험하게 된 은행지점을 경영하는 지배인의 역할은 경험부족과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좋아 할 일만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은행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꼭 해보고 싶은 로망이요 영광스러운 자리였으며 그 동안 열심히 그리고 묵묵하게 일해 왔던 보답이라고 생각하며 내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에게 80이 한 생이라면 내 인생의 반이 지나갔으며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왔는가를 내 자신이 스스로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를 키워주신 부모님과 형님 내외분, 그리고 학창시절 여러 은사님들, 어려울 때 마다 격려해 주시며 울타리가 되어 주셨던 집안의 어르신들과 나를 태어나 성장하게 한 고향산천이 너무나도 그립고 고맙게 생각이 되어 이제 남은 인생은 남을 위하여 보답하고 봉사하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특히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내 고향을 위해서 봉사해야겠다는 일념은 그간에도 변함이 없음에도 실행을 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아쉬움이 커져만 간다.
이제 70을 넘긴 나이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탓하기에 앞서 무엇인가를 실행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도전장을 내고 2020년도에는‘숲 해설가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하였으며, 2021년도에는 코로나가 창궐한 상황에서도 쉬지 않고‘문화관광해설사교육’을 신청하여 자격증을 취득하여 금년도 4월부터 현지인 보길도 세연정에 배치되어 해설사로 한 달에 한 번씩 주말에 내려가서 1박2일 문화관광해설사로 봉사를 하고 있다
이른 아침 출발이지만 오늘도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은 즐겁고 가볍다 그리고 안내를 기다리는 전국 각지 멀리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오늘은 색다른 무엇인가를 소개해 주어야겠다. 라는 일념에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다.
오늘은 멀리 경기도에서 오시겠다고 연락이 온 중년의 은퇴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그 분들의 일정에 맞게 세연정 연못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와 그 바로 옆에 서있는 붉은 노송을 소재로 하여 해설을 준비하고 리허설을 해 본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박상길입니다.
완고?(도)군 소속으로 이곳 보길도 세연정에 배치되어 근무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기도 합니다.
멀리 경기도에서 오신 여러분들에게 저희 고향 보길도를 소개하게 되어서 큰 영광으로 생각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
여러분들이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이 연못의 한 중앙에 ‘세연정(洗然亭)’이라는 글씨의 현판(懸板)이 걸어져 있는 정자가 있고, 그 바로 옆에 자태가 범상치 않고 관록이 있어 보이는 커다란 붉은 소나무 한그루가 상징적으로 서 있는데 이것들은 과연 고산 선생과 어떠한 관계가 있고, 어떠한 사연들이 깃들어 있으며, 당시(약385년전) 고산 선생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내셨을까?
저는 여기에 올 때마다 궁금하여 이러한 생각들을 자주 하곤 합니다.
여러분들 또한 지금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는가요?
자 !
그러면 고산 선생님이 이 보길도 부용동에 터를 잡게 된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써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을 함께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산 선생은 조선시대의 인조 왕 때 별시인 문과초시에 장원급제하여 공조좌랑을 거쳐 공조정랑이라는 벼슬(지금의 부군수와 군수 급)과 함께 효종인 봉림대군의 사부(스승)로 지내다가 잠시 해남에 내려와 계시던 50세 되는 해인 1636년 12월 병자호란을 겪게 되어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원손 대군과 빈궁은 강도(지금의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국난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는 고산은 해남에서 가솔 100여명을 이끌고 영광 법성포를 경유하여 해로(海路)로 강화도로 가던 도중 1637년1월에 인조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를 잃은 백성이 어찌 하늘을 우러러보고 육지에서 살수가 있겠는가 라고하며 뱃머리를 돌려 탐라(耽羅)(지금의 제주도)로 가다가 풍랑에 밀려 이곳 보길도에 상육하게 되는데 이 때 산수가 수려하고 마치 만개한 연꽃잎 모양을 하고 있는 지세(地勢)에 반하여 지명(地名)을‘연꽃 부(芙)자’에‘연꽃 용(蓉)자’라고 하여 이곳을‘부용동(芙蓉洞)’이라 명하고 여기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전란(戰亂) 후이고, 송금령(松禁令)(소나무를 베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내린 상태라 지금과 같은 형태의 건물이 아닌 잡목(雜木)에 초가(草家)로 낙서제와 세연정 등을 짓게 되었으며,
이후 67세(효종4년) 되던 해에 다시 세연정을 증축하고 동천석실(洞天石室)과 회수담(淮水潭) 등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곳에 계속 계신 것이 아니라 일곱 차례나 드나들면서 약 13년 동안 기거하시다가 1671년 현종12년에 85세의 나이로 이곳 낙서재(樂書齋)에서 생을 마감하여 해남 금쇄동에 안장(安葬)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산 선생의 사후 약 77년이 지난 1748년에 5대 후손인 윤위가 이 보길도 유적을 답사하여 보길도지(甫吉島識)라는 책자에 그 내용을 상세하게 수록하여 관리해 왔으나 그 후 또 많은 세월이 흘러 훼손이 되자 다시 1989년도에 국가 차원에서 고산연구회(당시 전남대학교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구성한 학술단체)를 통하여 발굴 조사에 참석한 각 분야 전문가들의 학술 자료를 토대로 하여 1992년도(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이를 다시 복원하여 국가사적(제368호)으로 지정한 후 다시 명승지(2008년 명승 제34호)로 재 지정하여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의 이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산선생은 이곳 부용동에 계시는 동안 국문학에서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순수한 우리글의 국문시가로 춘(春), 하(夏), 추(秋), 동(冬)의 사계절로 나뉘어 각 10장씩으로 이루어져 있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효종2년인 1651년 65세)와 한문시가(漢詩) 32편(45수)을 짖고 이 정자의 중앙에 자리하여 좌우측의 東臺(동쪽무대)와 西臺(서쪽무대)에서 이들 작품에 맞게 곡을 붙여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도록 연출함으로써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을 했으며,
이와 같이 창작활동에 몰두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아온 고산선생을 바로 옆에서 벗이 되어 지켜보면서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온 한 그루의 붉은 노송(老松)이 있었으니 이 적송(赤松)이 바로 그 생생한 증인(證人)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소나무는 이곳 보길도에서는 보기 힘든, 유일한 육송(陸松)으로 수피(樹皮)가 검은 섬지방의 해송(海松)과는 달리 붉은색으로 곱고 아름다우며 특히 가지가 축축 늘어진 모습은 낙락장송(落落長松)이란 말 그대로이며, 속리산의 정이품(正二品) 송(松)과 같이 관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자태가 너무나 아름답고 고와서 일명(一名) 미인송(美人松)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위치한 이 정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생명력(生命力)이 없고 새로 복원하여 옛날 그 모습의 정자가 아니지만
이 붉은 노송(老松)은 수령이 약 400년 이상 된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 고산선생이 당시 육지인 해남에서 옮겨다 심은 아끼고 아낀 소나무로 추정이 됩니다.
특히 고산 선생님은 1642년 해남 금쇄동에 계실 때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을 소재로 하여 지은 오우가(五友歌)(산중신곡(山中新曲)에 수록)중에서 소나무의 고절(孤節)함을 나타내는 솔(松)’에 대한 시구절로‘더우면 곳픠고 치우면 닙디거날,’(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라난다,’(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구천(九泉)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하야 아노라,’(구천에 뿌리 곧은 줄은 그것으로 알겠노라)라고 예찬(禮讚)하며 자신의 곧은 심정을 이 붉은 노송에 빗대어 소통하며 벗처럼 지냈을 진데,
산천(山川)은 의구하나 인걸(人傑)은 간 곳이 없으니 벗을 잃은 이 미인송은 고산선생을 떠나보낸 후 그 누구와 소통을 할고, 오매불망(寤寐不忘) 여러분들이 오시기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 하며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나무입니다.
여러분 !
오늘 이렇게 유서(由緖) 깊은 곳에 서 있는 이 미인송에 눈길만 보내지 마시고 다가가서 한 번쯤 껴안아 보시고, 위로 겸 나무에 귀도 대고 이 소나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물어도 보시고 소통을 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한자리에서 오랜 세월 묵묵히 서서 여러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기다려온 이 고귀(高貴)한 붉은 미인송과 함께 기념 촬영도 해 보심으로써 오늘 이 보길도 세연정과의 인연(因緣)을 좋은 추억(追憶)으로 오래오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렇게 먼 길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저희 고향 보길도를 찾아주신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일정상 답사하지 못한 낙서제, 동천석실, 그리고 우암송시열선생의 글씐바위, 예송리 청환석의 새까만 깻돌 해수욕장 등 나머지 명소 또한 기회가 되시면 다시 모시기로 약속을 드리며 함께 해주신 오늘 이 시간이 저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행복했습니다.
좋은 추억으로 오래오래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금년 4월부터 시작한 활동이라 관광객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은 미흡하고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본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관광해설의 대본을 작성하고 시연을 계속해 보면서 관광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명품 관광해설사가 되는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이와 같은 노력은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굳건히 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