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호(1982). 『피아제: 발생적 인식론과 교육』. 교육과학사.
pp. 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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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학습의 준비성
이른바 “좁은 의미의 학습”을 문제시하는 학습심리학자들은 모종의 환경적인 처치에 의해서 개인이 어떤 새롭고 특수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게 되면, 학습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한다(Hilgard & Bower, 1975). 학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학습심리학자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전제를 그들의 이론 속에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 그들은 한편에는 사회적으로 전수되어야 할 반응체제나 지식체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것을 내면화시켜야 할 미숙한 개인, 즉 학습자가 있다고 본다. 둘째, 그들은 어느 수준의 발달단계에 있는 학습자이든 간에 만약 그들이 적절한 환경적인 처치를 받는다면 어떤 부류의 학습도 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제를 택한다. 따라서 만약 어떤 학습자에게 학습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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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오로지 학습조건이 부적절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학습심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른바 “학습된 행동”의 종류는 다양하다. 초기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어떤 특수한 자극에 대한 특수한 반응을 문제시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비단 외현적인 반응이나 단편적인 지식의 증가뿐만 아니라 보다 복잡한 내면적 활동을 학습하는 문제에까지 그 관심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그 하나의 예가 1960년대에 미국에서 맹렬히 일어났던 교육과정 구조화운동이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각 학과목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한 지식의 집체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서로 응결력을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체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교육이론의 주된 과제는 그 학문적 구조가 학습자의 인지구조로 전환될 수 있는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미국식 처방과 피아제의 이론을 대비시켜 보기로 하자.
당시 심리학자로서 교육과정 구조화운동을 선도했던 브루너(Jerome S. Bruner)는 피아제이론을 원용하여 다음과 같은 “대담한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어느 교과목이든 간에 어느 발달단계에 있는 어느 아동에게도 모종의 지적으로 정직한 형태로(in some intellectually honest form) 효과적으로 가르쳐 질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자. 이는 대담한 가설(a bold hypothesis)이며, 또한 교육과정의 성질에 관해서 생각하는데 본질적인 가설이기도 하다. 이를 논박할 아무런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를 지지하는 상당한 정도의 증거가 누적되고 있다(Bruner, 1960, p. 33).”
브루너는 학과목의 기본개념과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탐구과정을 학습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과제라고 스스로 규정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자극에 대한 올바른 반응의 연결이라는 행동주의자들의 학습 이상의 것을 교육의 관심사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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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그는 기상천외의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각 학문분야에서 발전된 지식의 구조가 어느 연령에 속한 아동들에게도 학습될 수 있다는 낙관론이다. 그 비결은 그 지적 구조를 “모종의 지적으로 정직한 형태로” 아동에게 경험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브루너가 생각해 낸 학습의 준비성에 대한 대책이다. 그는 각 발달 단계의 아동들이 그들의 지식을 대표(representation)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아동들은 한 때 그들의 지식을 행위의 형태로 대표하다가 점차 직관적인 영상의 형태로 대표할 수 있게 되며, 마지막 단계에서 언어와 같은 상징으로 대표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일컫는 “지적으로 정직한 형태”란 바로 학문의 기본적인 구조를 그와 같은 지식의 대표형식을 존중해서 변형시켜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나선형 교육과정(spiral curriculum)”의 요지다. 브루너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학문의 기본 구조를 어렸을 적부터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동들에게 학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피아제의 이론이나 관찰 자료가 브루너의 이 가설을 논박하는 편에 속하는지 아니면 “이를 지지하는 상당한 정도의 증거”의 일부를 구성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 가설에 대해서 피아제는 이렇게 반응한다.
“탁월한 심리학자인 브루너는 당신이 학습조건을 옳게만 구성할 수 있다면 어느 연령의 아동에게도 무엇이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언명하였다. 나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첫째, 4세 된 어린이에게 간단한 상대성이론이나 명제적 혹은 가설연역적 조작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둘째, 어찌하여 유아는 9개월이 넘을 때까지, 당신이 그가 보는 자리에서 스크린 뒤에 숨긴 것이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는가? 새끼 고양이는 생후 3개월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끼 고양이는 연속적인 위치를 조정하는 데 그 이상의 발전을 할 수 없지 않은가?(Piaget, 1971b, p. 20)”
위의 어투는 분명히 브루너의 대담한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편에 기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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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제에 의하면, 이른바 좁은 의미의 학습은 넓은 의미의 학습, 즉 그가 지적한 발달법칙에 종속되어야만 의미있게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형태의 특수한 경험이라도 그 효과는 그 경험하는 개인이 성취한 지적 발달단계의 수준에 의해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 발달단계에 관한 피아제의 개념과 브루너의 개념은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브루너는 발달 수준의 차이가 단순히 지식을 대표하는 방식에 있다고 보고 그들 간의 갈등해소가 발달의 주된 촉진요소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피아제의 경우에 발달 수준은 지식의 대표방식 뿐만 아니라 지적 구조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된다. 이미 검토하였듯이 아동은 각 단계에서 각각 특색있는 인지구조를 갖고 있다. 심지어 같은 구체적 조작기에서도 부피와 무게의 보존개념은 다른 시점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인지구조는 외재하는 학과목의 구조와는 별도로 개인 내부에서 시간의 종축을 따라 변형되고 재구성되는 실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브루너의 단순한 단정과는 달리 피아제를 위시한 제네바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오랜 동안에 걸쳐 실증적으로 구명해낸 것이기도 하다.
동일한 현상도 인식자가 가진 지적 구조의 질에 따라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어떤 부류의 학습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당시 학습자가 가진 지적 구조와 수준의 제약 속에서 일어난다. [각주 34: 피아제와 마찬가지로 Kohlberg(1969)는 도덕성이 어떤 일정한 발달단계를 따라 형성된다고 보았으며, Turiel(1969)과 Rosenhan(1969)는 이 부면의 특수한 개념 학습이 그 발달 단계에 종속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는 피아제의 주장이 여러 분야에서 타당함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각 단계의 지적구조의 변화는 학습심리학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완만하게 전체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학습은 아동을 이미 누적된 학문의 구조에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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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대의 방식에 의해서 효율화되어야 한다. 즉 교육자는 가르치려는 아동들의 지적 구조에 맞게 교과내용을 선정하고 그 수준에 맞게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
각 단계에서 아동이 가지고 있는 지적 구조는 그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피아제는 위상기하학(topological geometry)의 개념이 유클리드 기하학(Euclidian geometry)의 개념 이전에 발달하고, 그 후에야 비로소 사영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의 개념이 아동 내부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그 각각의 체제는 어느 것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정을 내리기 어려운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육자는 그 지적 발달의 계열적인 특징을 살려 학과내용을 선정한다면 효과적인 학습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효과적인 학습이란 아동이 자발적으로 학습에 참여하고, 학습내용이 의미있게 학습자 내부의 지적 구조를 확장시켜 주는 기능을 하고, 또한 그 학습된 내용이 오랫동안 보존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지적 발달의 구조가 부적합한 단계에서 고차원의 학습을 강요하면 아동은 학습에 흥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기껏 암기학습의 결과를 가져오며, 그 결과도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피아제체제에서 학습의 준비성 개념은 교육자나 교육학자에게 어려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아동의 발달 수준과 계열에 맞는 학과내용은 무엇인가? 피아제의 연구 결과는 다소 이에 관한 정보를 마련하고 있지만 이는 학교에서 통상적으로 학습되는 학과목의 제한된 부면에 대한 시사에 그친다. 교육자는 스스로 아동의 발달 계열에 맞는 학과내용을 찾아야 한다. 또한 교육자는 그가 가르치려는 각각의 아동이 어떤 발달단계의 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연령의 아동이라도 그 발달 수준과 속도에는 개인차가 생긴다. 흔히 지능검사가 이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지만 그것은 아동의 지적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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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피상적인 단서에 불과하다. [각주 35: Pinard와 Laurendeau(1964)는 측정심리학과 피아제의 이론을 절충하여 피아제의 지적 발달단계를 검사에 의해서 진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로 활용될 수 있을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미지수다.] 피아제 자신은 이른바 임상적 방법을 적용하였으나 교육자가 그만한 능력을 가지려면 수년의 훈련을 쌓아야만 한다. 만약 교육자가 마치 의사처럼 전문적으로 학습자의 지적 구조를 진단할 수 있다면 그는 그때그때 학습자를 집단별로 나누어 지도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Bruner, J. S.(1960), The Process of Education, New York: Vintage Books.
Hilgard, E. R. & Bower, G. H.(1975), Theories of Learning(4th ed.), New Jersey: Prentice-Hall.
Kohlberg, L.(1969), Stage and sequence: The cognitive-developmental approach to socialization, In D. A. Goslin(ed.), Handbook of Socialization Theory and Research, Chicago: Rand McNally, pp. 347-480.
Piaget, J.(1971b), Biology and Knowledge: An Essay on the Relations between Organic Regulations and Cognitive Processe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inard, A. & Laurendeau, M.(1964), A Scale of mental development based on the theory of Piaget, Journal of Research in Science Teaching, 2, 253-260.
Rosenhan, D.(1969), Some origins of concern for others, In P. H. Mussen, J. Langer & M. Covington(eds.), Trends and Issues in Developmental Psychology, New York: Holt, pp. 134-153.
Turiel, E.(1969), Developmental processes in the child’s moral thinking, In P. H. Mussen, J. Langer, & M. Covington(eds.), Trends and Issues in Developmental Psychology, New York: Holt, pp. 9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