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 잊게한 몽촌토성 답사
푹 푹 찌는 삼복더위 ‘이 더위에 산행이라니’ 의아해 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전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8호선 몽촌토성역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10시 10분전 더운 날씨 탓인가 회원은 한명도 안 보인다. 약속시간 30분이 넘어서야 겨우 성원을 이룬 대한언론인회 산악회, 황우연 회장의 야심작 백제문화 유적 탐사의 뜻 깊은 하루가 시작됐다.
몽촌토성을 한 바퀴 돌면서 이토성이 백제 때 토성이란 것을 확인한다. 백제 하면 보통 웅진(공주), 사비(부여) 시대의 백제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遷都)한 이후인 약 200년의 세월보다는 그 이전의 한강변의 하남위례성 때가 훨씬 더 긴 약 500년의 세월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높다란 ‘평화의 문’이 눈앞을 가리고 주변엔 60개의 열주(列柱) 위에 저마다 다른 표정을 한 조각들이 일행을 반긴다. 하나같이 해학이 넘치는 표정들이다. 조각가 이승택씨가 다양한 표정의 전통 탈을 조각해놓은 것,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평화의 문, 펼쳐놓은 양 날개에는 사신도(청룡, 백호, 현무, 주작)가 그려져 있다.
올림픽 성화가 아직도 타오르는가? 먼저 맞이하는 것은 삼발이로 지탱해놓은 둥그런 주발에서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는 불길. 평화의 광장을 지나는데 너무 더워 목이 탄다. 시원한 냉수로 목을 추기고 오른쪽으로 걸으니 ‘체육인 정월타 선생 추모비’가 반긴다. 비문의 내용을 보니 1904. 2. 15. 하와이 파할라섬에서 사탕수수 이주노동자인 정운서, 이신실의 아들로 태어난 정월타(본명은 정월택) 선생은 1950년 귀국하여 전란에 시달리는 모국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적을 버리고 한국의 체육 발전에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사탕수수 이주노동자의 삶이란 것이 얼마나 고달팠을 텐데, 그 고통 속에서도 성공하여 조국을 위해 안락한 미국 생활을 버리고 왔다니 추모비를 세워줄 만한 분임이 분명했다. 공원 안에는 이 밖에도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흉상도 있었다.
조금 더 가다보니 느티나무 아래에 또 다른 기념비가 보인다. 몽촌유허비(夢村遺墟碑). 조상 대대로 이곳 꿈마을(夢村)에 살던 주민들이 88올림픽을 위하여 이곳을 개발하게 되자 정들었던 고향마을을 떠나는 아쉬움을 비석에 담은 것이다.
조금 더 걷다보니 몽촌토성, 길이 2,285m에 달하는 토성을 오르는 길이 훤히 보인다. 몽촌토성에는 경사면을 ‘L’자로 판 움집과 군사용으로 추정되는 장방형 1미터 깊이의 움집, 동남쪽에 출입문을 만든 육각형의 움집이 있다. 전시관에서는 옛 움집터를 전시한다. 너무 더워서 다 보지는 못하고 내려가니 짙푸른 잔디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푸른 잔디 바다 한가운데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덩그러니 서있다. 이름 하여 ‘나 홀로 나무’ 몽촌토성의 마스코트다. 모두들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느라 바쁘다. 부산서 상경했다는 젊은 두 여인은 사진 전문가 조명동 회우의 친절에 감동받아 감사 인사가 정답기 그지없다.
마지막 코스는 한성 백제박물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지역을 도읍으로 삼았던 고대국가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 조명하기위해 만든 공립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서는 백제문화 뿐 아니라 구석기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서울 및 한강유역의 신사~ 고대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제1 전시실(서울의 선사) 제2 전시실(왕도 한성) 제3전시실(삼국의 각축) 다 보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집념으로 몽촌토성 풍납토성의 진면목이 들어 났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며 이날의 역사유적(몽촌토성) 답사는 막을 내렸다.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본 하루였지만 새로 한 역사공부는 큰 소득이었다. 더위를 무릅쓰고 함께한 회원들의 우정어린 격려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