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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나물왕(奈勿王) 김제상(金堤上) >제상의 처는 치술신모가 되다
제상의 처는 치술신모가 되다
처음 제상이 출발하여 떠날 때에 제상의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註 533533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었던 사찰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조에 의하면, 당나라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 맞은편에 새로 절을 세워 거짓으로 그것을 사천왕사라 하니 당의 사신이 “望德遙山之寺”라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와 쌍탑지 등이 남아 있다.닫기 문 남쪽의 모래 언덕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부짖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래 언덕을 장사(長沙)라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부인이 두 다리를 뻗쳐 일어서지 않으려 했다. [이에]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註 534534 다리를 뻗친다는 뜻으로 곧 ‘뻗치다’를 우리의 고유음으로 표현한 말이 지명으로 되었다. 벌지지는 ‘망덕사 남쪽 모래 위’라고 하며 그 사장을 ‘장사’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망덕사지 남쪽의 개천과 백사장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한편 벌지지의 어원은 벌지→불지(佛地)→디·벌치, 지→·마→마을로 변한 것으로 보며, 벌치가 서각(서벌치)의 뜻으로 해석된 것은 그 음이 와전된 결과이다(양주동, ≪증정판 고가연구≫, 일조각, 1969).닫기라 불렀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註 535535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산천조에는 치술령이 부의 남쪽 36리에 위치해 있다고 하였다. 현재 치술령이라고 전해지는 고개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는 경주의 동남쪽인 외동면에 위치해 있다.닫기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註 536536 치술을 제상의 부인 이름으로 보고, 이를 토대로 제상의 혼인관계를 분석하여 그를 실성왕의 부마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선석열, 「박제상의 출자와 관등 나마」, ≪경남사론≫ 10, 1998).닫기라고 하는데 지금도 사당(祠堂)이 있다.
註 533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었던 사찰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조에 의하면, 당나라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사천왕사를 당나라 사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 맞은편에 새로 절을 세워 거짓으로 그것을 사천왕사라 하니 당의 사신이 “望德遙山之寺”라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망덕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와 쌍탑지 등이 남아 있다.
註 534
다리를 뻗친다는 뜻으로 곧 ‘뻗치다’를 우리의 고유음으로 표현한 말이 지명으로 되었다. 벌지지는 ‘망덕사 남쪽 모래 위’라고 하며 그 사장을 ‘장사’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망덕사지 남쪽의 개천과 백사장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한편 벌지지의 어원은 벌지→불지(佛地)→디·벌치, 지→·마→마을로 변한 것으로 보며, 벌치가 서각(서벌치)의 뜻으로 해석된 것은 그 음이 와전된 결과이다(양주동, ≪증정판 고가연구≫, 일조각, 1969).
註 535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산천조에는 치술령이 부의 남쪽 36리에 위치해 있다고 하였다. 현재 치술령이라고 전해지는 고개는 경상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고 있는 경주의 동남쪽인 외동면에 위치해 있다.
註 536
치술을 제상의 부인 이름으로 보고, 이를 토대로 제상의 혼인관계를 분석하여 그를 실성왕의 부마로 이해한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선석열, 「박제상의 출자와 관등 나마」, ≪경남사론≫ 10, 1998).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국명 : 왜국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제십팔대 실성왕(第十八代 實聖王) >평양주에 큰 다리가 완성되다(413년 (음))
평양주에 큰 다리가 완성되다 ( 413년 (음) )
제십팔대 실성왕(第十八代 實聖王)
의희(義熙)註 537537 동진(東晋) 안제(安帝)의 연호로 405~418년에 사용하였다.닫기 9년 계축(癸丑 ; )에 평양주(平壤州)註 538538 신라에 평양주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지만, 413년 당시의 신라는 아직 소백산맥 이북으로 영토를 확장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잘못 기입된 기록으로 보인다.닫기의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 아마도 남평양(南平壤)으로 여겨지며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註 537
동진(東晋) 안제(安帝)의 연호로 405~418년에 사용하였다.
註 538
신라에 평양주가 존재한 것은 분명하지만, 413년 당시의 신라는 아직 소백산맥 이북으로 영토를 확장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잘못 기입된 기록으로 보인다.
경제>상업>유통>도로·다리
이름 : 실성왕
지명 : 평양주
제1 기이(紀異第一) >제십팔대 실성왕(第十八代 實聖王) >고구려군사가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왕을 세우다
고구려군사가 실성왕을 죽이고 눌지왕을 세우다
왕은 전왕의 태자 눌지(訥祗)註 539539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458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으로 보인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부터 왕위가 부자세습제로 확립되었다(이기동,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74쪽).닫기가 덕망이 있으므로 이를 두려워하고 또 미워하여 장차 그를 죽이려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를 청하여 거짓으로 눌지를 맞이하여 [죽이도록] 하였는데, 고구려인이 눌지에게 어짊이 있는 것을 보고 이에 창끝을 거꾸로 하여 [실성]왕註 540540 신라의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02∼417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실성마립간이라 하고 실주왕(實主王) 또는 보금(寶金)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사부지왕(斯夫智王)이라 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조에 따르면 나물왕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나물왕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실성왕이 즉위한 데에는 석씨 세력의 도움과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82, 162쪽|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1982, 150쪽).닫기을 죽이고 눌지를 세워 왕이 되게 하고 가버렸다.
註 539
신라의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458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내지왕(內只王)이라 하였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으로 보인다. 실성왕을 시해하고 즉위하였으며,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배제하기 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부터 왕위가 부자세습제로 확립되었다(이기동, 「신라 내물왕계의 혈연의식」,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1984, 74쪽).
註 540
신라의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02∼417년이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실성마립간이라 하고 실주왕(實主王) 또는 보금(寶金)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영일냉수리신라비에는 사부지왕(斯夫智王)이라 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조에 따르면 나물왕이 죽고 그 아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실성을 세워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나물왕의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실성왕이 즉위한 데에는 석씨 세력의 도움과 고구려의 힘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이종욱, ≪신라국가형성사연구≫, 일조각, 1982, 1982, 162쪽| 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1982, 150쪽).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사금갑(射琴匣) >비처왕이 금갑에서 사통하던 궁주와 분수승을 죽이다(488년 (음))
비처왕이 금갑에서 사통하던 궁주와 분수승을 죽이다 ( 488년 (음) )
사금갑(射琴匣)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왕(炤智王)이라고도 한다註 541541 신라의 제2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79∼500년이다. 이 왕대에 神宮과 郵驛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백제와 혼인을 맺어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 즉위 10년 무진(戊辰)에 천천정(天泉亭)註 542542 현재 천정정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정천에 행차하였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기사보다 자세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닫기에 거둥하였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우는데, 쥐가 사람말로 이르기를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신덕왕(神德王)註 543543 신라 제5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912~916년이다.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원손이다. 왕은 헌강왕의 사위였는데, 효공왕이 자식 없이 죽자 국인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이 흥륜사(興輪寺)註 544544 신라의 불교 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닫기에 행향(行香)하고자 하여 [가는데] 길에 꼬리를 [서로] 물고 가는 한 무리의 쥐들을 보고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돌아와 그것을 점치게 하니 ‘내일 먼저 우는 까마귀를 찾아가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이다. 왕이 기사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하여 남쪽의 피촌(避村) 지금의 양피사촌(壤避寺村)으로 남산(南山)註 545545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의 금오봉(金鰲峰)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6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계곡 곳곳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노천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불교 유적들은 물론이고, 나정(蘿井), 남산신성(南山新城), 그리고 포석정(鮑石亭)과 같은 유적들이 유명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2002).닫기의 동쪽 산록에 있다註 546546 서출지 부근에 있었으며 이곳에 양피사가 세워진 듯하다. ≪삼국유사≫ 권5 피은 염불사조에는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촌내에 피리사 혹은 염불사가 있다고 하였다. 피리사 옆에 양피사가 있는데, 그 절 이름은 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90쪽).닫기에 이르렀는데,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어 이를 한참 살피다가 홀연히 까마귀가 간 곳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길 주변을 배회하는데 이때 한 늙은이가 연못 가운데서 나와 글을 바쳤다. 겉봉의 제목에 이르기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니, 왕이 말하기를 “두 사람이 죽느니 오히려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다.” 하였다. 일관(日官)註 547547 고대사회에서 왕의 측근으로 역수·간지를 관장하며 일월성신의 운수를 알려주는 관직이다. 일관은 국가의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신라 하대까지 존재하였다(신종원, 「고대의 일관과 무」,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1992, 27~42쪽).닫기이 나서서 말하기를 “두 사람은 서민이요,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러하다고 여겨 열어 보니 편지 가운데 “거문고 갑을 쏘라[射琴匣].”고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서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곳에서는 내전에서 분향 수도하던 승려註 548548 焚修僧은 향을 피우면서 불교의식을 주관하는 승려이다. 소지마립간대에는 내전에 분수승을 두었는데, 그 폐단이나 비리가 나타났다. 이 점은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가 왕실을 중심으로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신종원, 「신라 불교전래의 제양상」,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1992, 156~158쪽).닫기가 궁주(宮主)註 549549 왕비보다 격이 낮은 왕의 첩이다. 신라의 후비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사≫ 권88 후비전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닫기와 은밀하게 간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註 541
신라의 제2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79∼500년이다. 이 왕대에 神宮과 郵驛을 처음으로 설치하였고, 백제와 혼인을 맺어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42
현재 천정정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신라 소지왕 10년 정월 15일에 왕이 천정천에 행차하였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기사보다 자세한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반면 ≪삼국사기≫에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註 543
신라 제5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912~916년이다.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경휘이고, 아달라왕의 원손이다. 왕은 헌강왕의 사위였는데, 효공왕이 자식 없이 죽자 국인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44
신라의 불교 전래 및 공인과정과 연관되어 가장 일찍 국가적 사찰로 창건되었고 신라 왕경 내 칠처가람(七處伽藍)터 중의 하나인 천경림(天鏡林)에 건립되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최초의 승려 阿道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하며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와 함께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어 544년(眞興王 5)에 완공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주관하는 도량으로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영험의 가람으로 존중되기도 하였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66쪽).
註 545
경상북도 경주시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북쪽의 금오봉(金鰲峰)과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60여 개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계곡 곳곳에는 신라시대의 유적이 산재해 노천 박물관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불교 유적들은 물론이고, 나정(蘿井), 남산신성(南山新城), 그리고 포석정(鮑石亭)과 같은 유적들이 유명하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남산≫, 2002).
註 546
서출지 부근에 있었으며 이곳에 양피사가 세워진 듯하다. ≪삼국유사≫ 권5 피은 염불사조에는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 있고 촌내에 피리사 혹은 염불사가 있다고 하였다. 피리사 옆에 양피사가 있는데, 그 절 이름은 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90쪽).
註 547
고대사회에서 왕의 측근으로 역수·간지를 관장하며 일월성신의 운수를 알려주는 관직이다. 일관은 국가의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신라 하대까지 존재하였다(신종원, 「고대의 일관과 무」,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1992, 27~42쪽).
註 548
焚修僧은 향을 피우면서 불교의식을 주관하는 승려이다. 소지마립간대에는 내전에 분수승을 두었는데, 그 폐단이나 비리가 나타났다. 이 점은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가 왕실을 중심으로 전래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신종원, 「신라 불교전래의 제양상」,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1992, 156~158쪽).
註 549
왕비보다 격이 낮은 왕의 첩이다. 신라의 후비제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사≫ 권88 후비전의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정치>신이>생물>동물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이름 : 비처왕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사금갑(射琴匣) >이로 인해 오기일을 기념하다
이로 인해 오기일을 기념하다
이로부터 나라의 풍습에 해마다 정월 상해일(上亥日)·상자일(上子日)·상오일(上午日)註 550550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일(上午日)은 그 달의 첫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을 일컫는다.닫기에는 모든 일을 조심히 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15일을 오기일(烏忌日)註 551551 정월대보름을 가리킨다.닫기로 삼아 찰밥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까지 이를 행한다. 향언(鄕言)으로 이것을 달도(怛忉)註 552552 슬프고 근심하여 금기한다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제영조에 달도가(怛忉歌)가 실려 있다.닫기라고 하니 슬퍼하고 조심하며 모든 일을 금하고 꺼려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연못을 서출지(書出池)註 553553 경주시 남산동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사금갑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닫기라고 부른다.
註 550
상해(上亥), 상자(上子), 상오일(上午日)은 그 달의 첫 해일(亥日), 자일(子日), 오일(午日)을 일컫는다.
註 551
정월대보름을 가리킨다.
註 552
슬프고 근심하여 금기한다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제영조에 달도가(怛忉歌)가 실려 있다.
註 553
경주시 남산동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삼국유사≫ 권1 기이1 사금갑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사회>의례>신앙>민간신앙
지명 : 서출지
지철로왕(智哲老王) >거대한 음경을 가진 지철로왕이 7척 5촌 신장을 가진 모량부의 여성을 황후로 맞이하다(500년 (음))
거대한 음경을 가진 지철로왕이 7척 5촌 신장을 가진 모량부의 여성을 황후로 맞이하다 ( 500년 (음) )
지철로왕(智哲老王)
제22대 지철로왕註 554554 신라의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조에 따르면 나물왕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재종 동생이었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왕인 소지마립간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왕위를 이어 받았다. 왕에 즉위할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고 한다.닫기의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라 하였다. 시호는 지증(智證)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시호를 사용하였다.註 555555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5년 춘정월조에도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닫기 또한 우리말로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하였는데, 이 왕 때부터 사용하였다.註 556556 ≪삼국사기≫에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신라 제17대 나물왕 때부터 사용하고 있어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 왕은 영원(永元)註 557557 남조(南朝) 제(齊)의 폐제(廢帝)인 동혼후(東昏侯)의 연호로 499~501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 경진(庚辰)에 즉위하였다 혹은 신사(辛巳)라 하니 곧 [영원] 3년이 된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1척 5촌이나 되어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 사신을 삼도(三道)에 보내 배필을 구하였다. 사신이 모량부(牟梁部)註 558558 점량부(漸梁部)라고 하기도 한다. 신라 수도에 있었던 6부 가운데 하나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닫기에 이르렀는데, 동로수(冬老樹) 아래에서 개 두 마리가 크기가 북만한 커다란 똥 한 덩어리를 양쪽에서 물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떤 소녀가 고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모량부 상공(相公)註 559559 이찬 등흔(登欣)으로 성은 박씨였다(이희관, 「신라상대 지증왕계의 왕위계승과 박씨왕비족」, ≪동아연구≫ 20, 1990, 76쪽).닫기의 딸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다가 은밀히 숲속에 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집을 찾아 그녀를 보니 신장이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왕께 갖추어 아뢰자 왕은 수레를 보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 들여 황후로 삼았고, 군신들은 모두 경하했다.
註 554
신라의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조에 따르면 나물왕의 증손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고 소지왕(炤知王)의 재종 동생이었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전왕인 소지마립간이 아들 없이 죽자 그의 왕위를 이어 받았다. 왕에 즉위할 당시 그의 나이는 64세였다고 한다.
註 555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5년 춘정월조에도 같은 기록이 확인된다.
註 556
≪삼국사기≫에는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신라 제17대 나물왕 때부터 사용하고 있어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557
남조(南朝) 제(齊)의 폐제(廢帝)인 동혼후(東昏侯)의 연호로 499~501년에 사용하였다.
註 558
점량부(漸梁部)라고 하기도 한다. 신라 수도에 있었던 6부 가운데 하나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 혁거세왕).
註 559
이찬 등흔(登欣)으로 성은 박씨였다(이희관, 「신라상대 지증왕계의 왕위계승과 박씨왕비족」, ≪동아연구≫ 20, 1990, 76쪽).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정치>법률>행정>시호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지철로왕(智哲老王) >박이종이 나무 사자를 만들어 울릉도를 복속시키다
박이종이 나무 사자를 만들어 울릉도를 복속시키다
또 아슬라주(阿瑟羅州)註 560560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 일대의 신라시대 지명이다.닫기지금의 명주(溟州)註 561561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 일대를 가리킨다.닫기의 동쪽 바다 가운데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울릉도(亐陵島) 지금은 우릉(羽陵)이라 한다註 562562 현재의 경상북도에 속해 있는 울릉도이다. 무릉 혹은 우릉이라고도 하였는데, 지증왕 13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일시 공도정책을 써서 이곳 주민을 육지로 옮겨 울릉도가 빈 섬이 되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가 있었다. 둘레가 2만 6천 7백 30보였는데 섬사람[島夷]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신하되기를 거부하였다. 왕은 이찬(伊飡)註 563563 신라시대의 17관등 중 두 번째 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일척간(一尺干)·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조영제, 「신라 상고 이벌찬·이찬에 대한 일고찰」, ≪부산사학≫ 7, 1983).닫기박이종(朴伊宗)註 564564 이사부(이사부(異斯夫))를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이사부조에는 그의 성이 박씨가 아니라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 나물왕의 4대손으로 태종(苔宗) 표기되기도 하였다. 단양적성비에는 ‘伊史夫’, ≪일본서기≫에는 ‘伊叱夫’로 표기되어 있다. 지증왕 5년(505)에 실직주가 설치되자 그 주의 군주로 임명되었고, 동왕 13년(512) 아슬라주 군주가 되었을 적에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진흥왕 2년(541)에 병부령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동왕 6년(545)에는 이찬으로서 국사의 편찬을 건의하였고, 동왕 11년(550)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지친 틈을 타서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아 두 성을 증축하였으며 동왕 23년(562)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과 함께 5만의 기병을 인솔하여 이를 진압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일렬로 세워 놓고 그들을 위협하며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풀어 놓겠다.” 하자 섬사람들은 두려워 항복하였다.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백(州伯:주의 장관)註 565565 군주(軍主)를 가리킨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96쪽).닫기으로 삼았다.
註 560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 일대의 신라시대 지명이다.
註 561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 일대를 가리킨다.
註 562
현재의 경상북도에 속해 있는 울릉도이다. 무릉 혹은 우릉이라고도 하였는데, 지증왕 13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13년)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일시 공도정책을 써서 이곳 주민을 육지로 옮겨 울릉도가 빈 섬이 되기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63
신라시대의 17관등 중 두 번째 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일척간(一尺干)·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조영제, 「신라 상고 이벌찬·이찬에 대한 일고찰」, ≪부산사학≫ 7, 1983).
註 564
이사부(이사부(異斯夫))를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44 열전4 이사부조에는 그의 성이 박씨가 아니라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 나물왕의 4대손으로 태종(苔宗) 표기되기도 하였다. 단양적성비에는 ‘伊史夫’, ≪일본서기≫에는 ‘伊叱夫’로 표기되어 있다. 지증왕 5년(505)에 실직주가 설치되자 그 주의 군주로 임명되었고, 동왕 13년(512) 아슬라주 군주가 되었을 적에 우산국을 정복하였으며, 진흥왕 2년(541)에 병부령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동왕 6년(545)에는 이찬으로서 국사의 편찬을 건의하였고, 동왕 11년(550)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지친 틈을 타서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빼앗아 두 성을 증축하였으며 동왕 23년(562)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과 함께 5만의 기병을 인솔하여 이를 진압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65
군주(軍主)를 가리킨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96쪽).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진흥왕(眞興王) >진흥왕은 즉위 초기 어렸으므로 법흥왕의 딸인 태후가 섭정하다
진흥왕은 즉위 초기 어렸으므로 법흥왕의 딸인 태후가 섭정하다
진흥왕(眞興王)
제24대 진흥왕註 566566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7세 혹은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진흥왕은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진흥이라는 칭호는 ≪삼국사기≫에서 시호라 하였으나, 진흥왕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생존시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 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5세註 567567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조에는 7살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닫기였으므로 태후註 568568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진흥왕의 어머니를 지소부인(只召夫人), 혹은 식도부인(息道夫人) 박씨로 영실 각간의 딸이라 하였다. 그러나 박씨 식도부인은 진흥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진흥왕의 비이다. 한편 지소부인은 울주 천전리서석 명문에 보이는 ‘지수시혜비(只須尸兮妃)’와 동일인이다(김용선, 「울주 천전리서석 명문의 연구」, ≪역사학보≫ 81, 1979, 15∼17쪽).닫기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註 569569 법흥왕의 동생이다.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입종을 ‘사부지(徙夫智)’라 하였고, 울주 천전리서석에는 ‘사부지(徙夫知)’로 표기하였다. 그는 왕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므로 갈문왕에 봉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이기백, 「신라갈문왕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9쪽).닫기의 부인이었다. 왕은 임종할 때에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운명했다.
註 566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7세 혹은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진흥왕은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진흥이라는 칭호는 ≪삼국사기≫에서 시호라 하였으나, 진흥왕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생존시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 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567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조에는 7살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이 기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註 568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진흥왕의 어머니를 지소부인(只召夫人), 혹은 식도부인(息道夫人) 박씨로 영실 각간의 딸이라 하였다. 그러나 박씨 식도부인은 진흥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진흥왕의 비이다. 한편 지소부인은 울주 천전리서석 명문에 보이는 ‘지수시혜비(只須尸兮妃)’와 동일인이다(김용선, 「울주 천전리서석 명문의 연구」, ≪역사학보≫ 81, 1979, 15∼17쪽).
註 569
법흥왕의 동생이다.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입종을 ‘사부지(徙夫智)’라 하였고, 울주 천전리서석에는 ‘사부지(徙夫知)’로 표기하였다. 그는 왕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므로 갈문왕에 봉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이기백, 「신라갈문왕고」,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9쪽).
정치>왕실>왕족>왕모후·왕태후·왕대비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진흥왕(眞興王) >진흥왕이 고구려와 화친하니 백제가 침범해 오다(553년 9월 (음))
진흥왕이 고구려와 화친하니 백제가 침범해 오다 ( 553년 09월(음) )
승성(承聖)註 570570 남조(南朝) 양(梁) 원제(元帝)의 연호로 552~555년에 사용하였다.닫기 3년 9월 백제 병사가 진성(珎城)註 571571 전라북도 북부인 무주 지역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의 진산군(珍山郡)으로 본래는 백제의 진동현(珍同縣)이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99쪽).닫기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는데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바라겠느냐.”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백제가 이것을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註 570
남조(南朝) 양(梁) 원제(元帝)의 연호로 552~555년에 사용하였다.
註 571
전라북도 북부인 무주 지역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의 진산군(珍山郡)으로 본래는 백제의 진동현(珍同縣)이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99쪽).
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이름 : 진흥왕
지명 : 진성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 >사륜왕이 재위 4년 만에 폐위당하다(576년 (음))
사륜왕이 재위 4년 만에 폐위당하다 ( 576년 (음) )
도화녀비형랑(桃花女 鼻荊郞)
제25대 사륜왕(舍輪王)註 572572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이름이다.닫기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註 573573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6∼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비형랑조의 내용에 따르면, 나라가 어지럽고 음란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한다.닫기으로 성은 김씨이며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註 574574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지왕 즉위년조에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라고 하였다.닫기이다. 대건(大建)註 575575 중국 남조 진(陳) 선제(宣帝)의 연호로 대건 연간은 569~582년이다.닫기 8년 병신(丙申)에 왕위에 올라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579)라고 하였으나 오류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註 572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이름이다.
註 573
신라의 제2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6∼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진흥왕의 태자였던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도화녀비형랑조의 내용에 따르면, 나라가 어지럽고 음란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한다.
註 574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지왕 즉위년조에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라고 하였다.
註 575
중국 남조 진(陳) 선제(宣帝)의 연호로 대건 연간은 569~582년이다.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법률>행정>시호
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이름 : 도화녀,비형랑,사륜왕,진지대왕,기오공,지도부인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도화녀 비형랑(桃花女 鼻荊郞) >폐위된 사륜왕이 도화녀와 관계하여 비형랑을 낳다
폐위된 사륜왕이 도화녀와 관계하여 비형랑을 낳다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註 576576 신라시대 6부 중의 하나이다. 급량부와 더불어 6부 중 가장 우세한 존재로, 남천(南川) 이북, 서천(西川) 이동, 북천(北川) 이남 일대를 포함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김씨출신이 중심이 된 조직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이종욱, 「신라 상고시대의 육촌과 육부」, ≪진단학보≫ 49, 1980).닫기 어느 민가 여인의 얼굴과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사람들이 도화랑(桃花娘)註 577577 신라 진지왕 및 진평왕 때 사량부에 살던 서민의 딸이다. 진지왕의 혼백 사이에서 아들 비형랑(鼻荊郞)을 낳았다. ≪삼국유사≫ 외의 다른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닫기이라고 불렀다. 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그녀를 범하려 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만승(萬乘)의 위엄으로도 마침내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하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하더라도 어찌 다른 마음 가지기를 원하겠습니까?” 왕이 희롱으로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하자, [여인이 말하기를] “되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를 놓아 보내주었다. 이 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었는데 2년 후에 도화랑의 남편도 역시 죽었다. 십 여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홀연히 왕이 평시와 같이 나타나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하길 “네가 옛날에 허락한 것처럼, 지금 너의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라고 하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부모가 말하기를 “임금의 교시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하고 딸을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후에 홀연히 종적이 사라졌다. 여인은 이로 인하여 임신하여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할 때 천지가 진동하며,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註 578578 죽은 진지왕과 사량부(沙梁部) 민간 출신의 도화랑(桃花娘)과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출생이 신이(神異)하였기에 진평왕이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에 집사(執事)가 되었는데, 밤마다 궁성 밖으로 나가 놀았다. 이에 왕이 병사를 보내어 살펴보니,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의 황천(荒川) 언덕 위에서 귀신들과 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이 사실대로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그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귀신들을 부리어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게 하였다. 또한 귀신 가운데 정사를 도울 만한 자를 추천하라는 왕의 요구에 따라 길달(吉達)을 천거하였다. 이에 길달은 각간(角干) 임종(林宗)의 아들이 되어 집사의 직무를 충직하게 수행하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여우로 변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나므로,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다 비형의 집이라고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닫기이라 하였다.
註 576
신라시대 6부 중의 하나이다. 급량부와 더불어 6부 중 가장 우세한 존재로, 남천(南川) 이북, 서천(西川) 이동, 북천(北川) 이남 일대를 포함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김씨출신이 중심이 된 조직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이종욱, 「신라 상고시대의 육촌과 육부」, ≪진단학보≫ 49, 1980).
註 577
신라 진지왕 및 진평왕 때 사량부에 살던 서민의 딸이다. 진지왕의 혼백 사이에서 아들 비형랑(鼻荊郞)을 낳았다. ≪삼국유사≫ 외의 다른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註 578
죽은 진지왕과 사량부(沙梁部) 민간 출신의 도화랑(桃花娘)과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출생이 신이(神異)하였기에 진평왕이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에 집사(執事)가 되었는데, 밤마다 궁성 밖으로 나가 놀았다. 이에 왕이 병사를 보내어 살펴보니, 매번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 서쪽의 황천(荒川) 언덕 위에서 귀신들과 놀고 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병사들이 사실대로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그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 그에게 귀신들을 부리어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게 하였다. 또한 귀신 가운데 정사를 도울 만한 자를 추천하라는 왕의 요구에 따라 길달(吉達)을 천거하였다. 이에 길달은 각간(角干) 임종(林宗)의 아들이 되어 집사의 직무를 충직하게 수행하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여우로 변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비형랑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귀신들이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 달아나므로,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다 비형의 집이라고 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사회>의례>관혼상제>혼인
문화>사상>유교사상>윤리
지명 : 사량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