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 한반도를 뒤흔든 버치, 하우스만, 니콜스
"미국보다 더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 이승만이다." 이승만의 절친이었던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교수의 평가다. 이승만은 이런 평판에 의지해 국내 정세를 자기 구미에 맞게 끌고 갔다. 그 중심에 여순사건과 4.3 사건이 있다.
4.3 추모식에 참석하지 않은 윤석열 ‘덕분에’ 오히려 4.3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고 있다. 윤석열은 4.3을 ‘빨갱이’프레임으로 규정하는 극우 유투버들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명확해 보이고 그들의 역사 왜곡에 대한 진보 사학계의 반응도 거세다.
대위 제임스 하우스만
팟캐스트 매불쇼에서 배기성 역사 강사는 4.3의 배후에 3만이 있다고 밝혔다. 3만이란 이승만,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만, 그리고 미 육군대위 제임스 하우스만이라는 것이다. 겨우 육군 대위가 정말 그렇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그의 가장 최근 행적으로는 대통령 후보 시절 노태우와도 만난 기록이 있다. 이승만 이후 군부집권기에 그는 모종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사진에는 1949년 처형현장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제일 왼쪽 키가 큰 사람이 니콜스다. (사진출처-King of Spies)
하우스만은 제대후 군속 문관 정보통으로 활동하며 여순진압 군사고문단에 참여했다. 배기성은 5.18 민주화 운동의 ‘북한군 개입 프레임’에도 하우스만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국의 정권은 몇번이나 바뀌었어도(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는 계속 미국 정보기관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했다.
블레인 하든은 하우스만이 한국 군대를 설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했는데 독립군을 진압하던 친일 군인들을 한국 군대의 요직에 앉혔다는 의미다. 하우스만은 여순사건 가담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박정희를 자신이 구제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일까? 2차 대전 말기 독일의 최후 저항이 있었던 벌지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 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Blaine Harden, The King of Spies). 그 때 부상을 입고 군속 문관의 신분으로 한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여순 사건 때 미임시군사단원으로 한국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여순 사건을 일으킨 14연대내 좌익세력을 색출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그의 첫 보고서에는 여순 '반란’을 공산주의자의 조직적인 활동으로 보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다(40명 정도)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군사 고문단 내에서 그의 비중이 커지고 미군내 강경진압론자들이 힘을 얻자 그도 갈수록 강경진압을 주도한다.
한국군 내에서 진압 사령관이었던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온건론을 폈으나 이승만을 정점에 둔 백선엽 백인엽 등이 강경진압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하우스만의 보고서도 송호성에 대한 비판을 담기 시작했다. 백선엽 등과의 연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하우스만은 강경진압이 성공한 것을 인정받아 미국의 훈장을 받았다.
그는 4.3이 발생하자 제주도에서도 강경진압을 이끌었다. 심지어 4.3 당시 강경 토벌론자인 주둔군 연대장 박진경을 사살한 죄로 사형당한 문상길의 죽음에 대해 확인 사살을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개 육군대위 출신의 문관을 해방공간에서 ‘빨갱이'사냥의 정점에 있는 ‘3만’중의 하나로 보는 시각에는 무리가 있다. 하수인에 불과했지만 일처리 솜씨가 뛰어나서 발탁된 것으로 보이며 비슷한 일을 한 다른 미군군사고문단에 비해 그가 남긴 메모가 많아 그를 연구할 자료가 많은게 오히려 그에게는 악재로 작용했다.
하사 도널드 니콜스
블레인 하든은 ‘스파이의 왕, 미국 스파이 사부(師父)의 어두운 지배(King of Spies: The Dark Reign of an American Spymaster)’라는 책을 출판했다. 한국어 번역판은 없으며 원서는 이북 형태로 아마존이나 구글도서에서 구입할 수 있다. 스파이들의 왕이며, 심지어 그들의 스승, 사부이기까지 한 인물은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다.
도날드 니콜스는 가난으로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게 되자 2차 대전 중 군에 입대한다. 그는 버마 주둔 미군기지의 수송대에서 차를 정비하는 일을 하는 동시에 전염병으로 죽어 나가는 미군 병사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보잘 것 없는 보직이었지만 상관의 눈에 들어 19살의 나이에 사병에서 하사관으로 진급해 인도에서 근무하던 중 전쟁이 끝났다.
군대가 더 이상 그에게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낄 때쯤 그는 정보부대 요원으로 발탁되어 도쿄에서 3개월 훈련을 받은 뒤 방첩대(CIC) 제607단 한국분견대 요원으로 남한에 도착한다.
1948년 미군이 철수한 뒤 남은 군사 고문단 500여명에는 군속 문관들이 많았다. 민간인 신분인 그들은 군대내 진급에는 해당사항이 없고 오직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의욕만이 넘쳐났을 것이다. 하우스만도 그랬고 니콜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지나친 의욕이 한반도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니콜스의 경우 버마 전선에서 수많은 아군의 시신을 관리하면서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졌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학살극에 대해 노후에 뉘우치기는 했다.
블레인 하든의 책에는 하우스만 이름이 딱 한 번 니콜스와 함께 등장한다. 두 사람의 특별한 연관성은 보이지 않고 두 사람 모두 이승만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라는 점만 강조된다. 이 니콜스가 바로 스파이의 왕이다. 얼마나 그의 지략이 뛰어났으면 하사관 출신이 첩보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올랐겠는가? 그는 각정보수집에도 뛰어났지만 선동과 이간질, 교란과 거짓 정보로 한국전을 이끌었다. 지금도 계속되는 간첩조작 사건 등은 니콜스가 가르쳐 준 수법일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우파 진영에서는 그를 사령관으로 호칭하며 그의 생전에 미국집을 방문해 찍은 기념 사진이 한국일보와 관계없는 '주간한국'에 실려 있다.
이게 이승만의 용인술이다. 프리슨턴 박사 출신의 이승만은 학력이 낮은 백인들을 이용해 그의 정치적 욕망을 채워나갔다. 이승만은 니콜스를 양자로 삼기까지 했다. 정치인의 욕망을 탓할 일은 아니나 그 욕망의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중위 레너드 버치
이 두 사람이 한국 군대에 깊게 개입해 극단적 반공이념으로 한국군을 끌어간 반면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미군장교도 있다.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부관인 레너드 버치(Leonard Bertsch) 중위였다. 위의 두 사람과 달리 현역 중위였고 하버드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였다. 박태균 교수(서울대)는 정병준 교수(이화여대)가 버치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중위'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그에게는 학살과 탄압, 용공몰이 공작의 임무보다 정치적 개입과 동향 보고의 임무가 주어졌다.
버치중위가 읽은 여운형에 대한 조사. 한글발음을 영어로 표기해서 읽었다. '돌아가신 위대한 선생님에 대하여 나는 조선말로 한마디 하겠습니다"로 시작한다. (사진 출처-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박태균은 하버드에서 연구년을 가지면서 문서고에서 버치문서를 발견해서 ‘버치문서와 해방정국'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본래 박태균의 관심사항은 ‘하우스만'이었다. 버치문서는 하우스만 문서를 찾던 과정에서 얻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하우스만에 대한 그의 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버치는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여운형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여운형은 욕망에 가득찬 기독교인 이승만과 달리 매우 합리적인 기독교인이었다. 좌우를 망라해서 존경을 받는 여운형을 미군정은 높게 평가했다. 심지어 소련도 여운형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 여운형이 암살 당했을 때 버치는 조사를 한국말로 직접 할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 했다.
버치의 문서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많다.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를 첩(concubine)이라고 표현하거나 여운형의 암살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버치 문서를 해석한 박태균도 여운형 암살 배후 주장은 버치 문서 이외에 어떤 기록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서둘러 진화하고 있다. 다만 보수 우파 백범에게는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여운형이 미웠을 수는 있다.
니콜스와 하우스만이 서북청년단을 이용한 반면 버치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들 일부를 심문했던 버치의 기록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은 소련이나 김일성으로부터 무엇을 탈취당할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주들도 아니었고, 평양에서 성공한 중산층도 아니었고, 비판적인 지식인 계층도 아니었다. 심지어 박해받던 기독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이나 서북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의 맹목적인 반공은 그들이 경험한 상실에서 체득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이승만에게 이용당하면서 축적된 것이다.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의 만행에 대해 우려를 표한 버치에게 “내가 그들의 애국적 행위를 금지시켜야 하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버치는 학살당한 수많은 사람들은 좌익이 아니었고 그냥 이승만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4.3사건에서부터 4.19까지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후 여러 항쟁을 거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이 ‘아무나 흔들어도 되는 나라’가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보다 더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지만 그래도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기조를 유지했다. 4.19 이후 63년, 미국의 이익 뿐 아니라 일본의 이익까지 더 앞서서 챙겨주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참담하다.
이글을 작성하는데는 다음을 참고로 했습니다.
정병준,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2021년)
김득중, 빨갱이의 탄생, (선인, 2015년)
Blaine Harden, King of Spies: The Dark Reign of an American Spymaster, (Penguin,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