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尹斗緖)
태어난 때 | 1668(현종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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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때 | 1715(숙종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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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국가 |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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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국가 부속정보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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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문인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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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현종 9)~ 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종애(鐘崖). 겸재(謙齋) 정선(鄭歚),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고, 덕희(德熙)의 아버지이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경제·병법·천문·지리·산학·의학·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으며, 새롭게 대두되던 실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산수·인물·영모·초충(草蟲)·풍속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는데 〈자화상〉·〈노승도 老僧圖〉를 통해 인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산수화풍은 절파계 양식을 수용한 과도기적 작품과 남종화풍으로 그린 작품으로 대별된다. 그외에 〈선차도 旋車圖〉·〈채애도 採艾圖〉는 18세기 후반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해 유행한 풍속화를 예시해준 것이며 그의 실학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패하백로도 敗荷白鷺圖〉(간송미술관)는 이색적인 화조화로 풍속화와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예시해주는 선구적인 면을 보여준다. 〈팔준도 八駿圖〉·〈백마도 白馬圖〉 등의 말그림은 중국산 말들을 약간 변화시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愹)에 의해 계승되었다. 현재 해남 종가(宗家)에 전하는 유품 가운데 〈고씨역대명인화보 顧氏歷代名人畵譜〉는 남종화풍과의 접촉을 알려주며 동국여지도나 일본지도,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등은 그의 실학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채애도〉·〈선차도〉·〈백마도〉 등은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진〈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에 전하고 있으며, 〈노승도 老僧圖〉·〈심득경초상 沈得經肖像〉·〈출렵도 出獵圖〉·〈우마도권 牛馬圖卷〉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 〈기졸 記拙〉·〈화단 畵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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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尹斗緖)
그림 한 점..... .
관람인의 지나친 기대와 달리 그림을 대하는 순간이 늘 극적이지는 않다.
단지 냉냉해진 가슴에 포근히 안기는 봄바람처럼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다가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격정이 휘몰아치는 풍랑속의 바다처럼
무료한 일상에 전율을 안기며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
이 충격적인 그림이 내게도 격한 긴장감을 불러왔었다. -_-

가로 20.5 Cm X 세로 38.5 Cm.. 비교적 실물 크기에 가까운 이 위대한 자화상..... .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강렬한 눈매와 찔릴듯 날카로운 구레나룻
한올한올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콧털과 눈썹 마치 불꽃처럼 꿈틀거리는 풍성한 수염
바로.. 한국 초상화 최고의 걸작으로 손 꼽히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얼굴과 수염만 있을 뿐 귀는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목도 없고 몸체도 없다.
탕건 위쪽과 수염 아랫쪽은 모두 생략하고 얼굴과 수염만 그린듯한 파격적인 구성.... .
게다가 사대부의 상징인 관모도 없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3재'로 불리는 '공재 윤두서'
그는 왜 이런 특별한 자화상을 그렸을까?
아니.. 그의 삶과 그의 시대에 도데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이제.. 국보로 지정된 이 특별한 자화상을
윤두서.. 그의 삶과 시대와 함께 찬찬히 살펴보자. -_-
1. 보이지 않는 그림
18세기를 살았던 선비화가 윤두서....
그는 자신의 자화상에 수 많은 비밀을 담아두었다.
한 시대를 살아낸 인물.. 그 인물의 삶에 대한 표정을 담아낸 것이 초상화다.
당연히 자화상도 초상화의 일종이다.
사진이 없던 조선시대.. 사당이나 서원에 봉안할 목적으로
사대부라면 누구나 초상화를 제작했었다.
공재 역시 친구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는데
바로.. ↓이것이 조선시대 초상화를 대표하는 걸작 중 하나인
심득경(沈得經 1629-1710)의 초상화다.

단정하게 옷을 입고 앉아있는 전신상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초상화는 전신상이거나
혹은 상반신을 그린 반신상이 일반적인 그림이었다.
그런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마치 허공에 얼굴만 떠 있는듯한 파격적인 구성..... .
수염은 살아있는 것처럼 섬세하게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있어야할 귀와 몸은 없다.
그는 왜 이런 독특한 자화상을 그린 것일까?
조선시대 사대부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의 일부를 때어낸 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유교의 윤리뿐 아니라 회화에서 다루는 미의 의식에서도 완전히 벗어나는 행위였다.
더구나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가 되는
명문 사대부 출신이기에 더 더욱 그렇다.
우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공재의 자화상
그 과거의 모습에서부터 숨은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보자. -_-
우리나라 최대의 박물관이자 세계적인 고미술학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
그곳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
이 책은 일제강점시대 조선총독부의 지휘로 펴낸 조선의 유물유적에 관한 조사서다.
거기.. 윤두서의 자화상도 사진으로 찍혀 실려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37년 촬영한 윤두서의 자화상 사진속에는
비록 흑백사진이긴 해도 분명.. 단정하게 여민 옷깃과 옷의 주름선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자화상엔 보이지 않던 도포의 깃과 주름잡힌 옷선....
이렇게 분명히 존재했던 상반신의 윤곽선이 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일까?
몇 차례 공개된 적이 없던 공재의 자화상.... .
그 자화상을 고배율로 찍은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듯 엷게 귓바퀴가 그려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처럼 분명히 존재하는 상반신 옷자락과 귀의 모습들이
왜 지금에 이르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걸까?
그건.. 조선시대 초상화법 혹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의 차이 때문이었다.
우리 그림은 서양의 일반적인 회화기법과 달리
그림을 앞면에서만 그리지 않고 뒷면도 같이 사용했었다.
종이나 비단은 반투명한 재질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뒷면을 잘 활용해서 한결 부드럽고 풍성한 질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특히.. 피부감의 표현에 자주 사용되었는데 피부색을 앞에서 칠하면
자칫 거칠어지거나 마치 떡칠을 한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뒤에서 토분이나 핑크빛을 칠하면
마치 간접조명의 은은한 빛처럼 전체적으로 우아하게 비친다는 걸
선조 화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선이 굵은 외곽선을 뒷면에서 그리거나
다른 종이에 그린 뒤 그 위에 비춰 다시 그리는 방법을 취했다.
그런 이유로 뒷면에 배치한 옷깃과 도포의 선들이
정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자화상에서 옷깃선을 그린 재료는 수염을 그린 먹이 아니라 목탄....
시간이 지나며 접착력이 약한 목탄이 조금씩 떨어져나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던 것이다.
즉.. 이 그림의 제작과정을 찬찬히 되짚어 보면
앞면에서 간단한 초안을 잡은 뒤
뒤로 돌려 목탄으로 옷선을 그리고 얼굴에 채색까지 마친 후
다시 앞면으로 돌아와 미세한 먹선으로 수염을 그려넣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옷선이 수염과 충돌하자 앞면에서는 옷선을 그려넣지 않은 게 틀림없다.
좌우로 날리며 흘러내리는 이 아름다운 수염을 그려놓고
옷주름은 생략해도 된다고 결정한 것이다.
윤두서가 화가로서 대단히 높게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파격적인 생략법에 있다.
처음에는 분명 그릴려고 의도했고 뒷면에서 구체화시켜 나갔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제외했고 생략해 버렸다.
그리고 그 생략과 파격에는 한 평생 선비로 살아온 그의 고뇌와 삶이 녹아 있다.
결국.. 화폭의 앞뒷면을 모두 활용하던 초상화 기법이
유례가 없는 파격적인 명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윤두서가 결정한 최종적인 방안이자 결심이었다.
2. 구체적인 사실.. 즉 '진실'을 들여다 본다.
매우 극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초상화..... .
그런데 자세히 보면 커다란 의문점 하나가 든다.
바로 저 수염..... .

일반적인 수염과 달리 그의 구레나룻은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옆으로 삐죽 솟아있다.
양갈래로 길게 내려선 수염 또한 마찬가지다.
누가봐도 적젆이 과장되게 그려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극사실기법을 추구하던 당시
공재는 초상화의 생명이랄 수 있는 사실성을 버리면서까지
왜 이렇게 수염을 과장하고 왜곡시켜 그려냈을까?
과연 그는 수염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의문점을 풀기 위해
먼저.. 조선시대 전통 초상화속 수염의 표현 양식을 살펴보자.

<채제공 초상화>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의 초상화다.
또 다른 명작인 이 그림속 채제공의 수염은
나이에 맞는 백발의 수염이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이명기(李命基) - 김홍도필서직수초상(金弘道筆徐直修肖像)

세종대왕 어진 - 해촌 김학수(金學數)
다른 초상화들도 마찬가지다.
수염은 사대부들에겐 권위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그렇다 해서 사실적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정작 그림을 그리는 주체였던 윤두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과장하고 왜곡시켜 그려냈다.
왜 그랬을까?
아니.. 윤두서에게 수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초상화의 사실적 표현을 누구보다 중시한 윤두서였기에 의문은 더욱 커진다.
그림을 그리기 전 반드시 대상을 관찰한 뒤에야 붓을 들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는 사실성에 철저하고 또 투철한 화가였다.
윤두서의 이런 태도는 남겨진 작품에서도 쉬 확인이 가능하다.

버드나무 가지 아래 서 있는 백마의 늠름한 모습을 담은 '유하백마도'
이 작품은 봄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의 흐드러진 가지 아래
백마가 한쪽 발굽을 살짝 드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 그린 그림이다.
자신이 직접 키우던 말을 버드나무에 묶어놓고
마치 사진을 찍듯 직접 대상을 보며 그린 것이다.

말을 타고 가면서 봄풍경을 감상하는 순간을 그린 '주마상춘도'
바람에 날리는 잔가지를 늘어트려 속도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이 두 그림만으로도
공재는 이전의 화인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쉬 알 수 있다.
17세기.. 이전의 화가들이 말을 그린다는 것은
단지 선으로 말을 그리거나 추상적 혹은 관념적으로 그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리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닌 단지 그려야 하기에 그린 그림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윤두서는 달랐다.
마치.. 어느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한듯한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 초충도(여치) - 윤두서 >
당시 최고의 비평가였던 남태웅도 감탄할 정도로
윤두서는 그렇게 명확한 사실성을 추구했다.
"공재는 마구간 앞에 서서 종일토록 주목하여 보기를 몇 시간이나 계속한 다음
무릇 말의 모양과 의태를 꿰뚫어보아 털끝만큼도 비슷함에 의심이 없는 연후에야
비로서 붓을 들어 그렸다." - 남태웅의 <청죽화사> 중에서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속 수염은
분명 그가 추구한 사실성에서 벗어나 있다.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구레나룻 수염속에 숨겨둔 그의 의도.....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의 수염속에서 과연 무엇을 본 것일까?
3. 피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다.
왜곡되고 과장된 수염....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예술.. 그 중에도 회화에서 왜곡을 바라보는 싯점 말이다.
만약.. 왜곡이 작품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손상시켜는 왜곡이라면
분명 그 작품의 질은 떨어지고 실패한 그림이 된다.
그러나 작품의 질이 떨어지지 않는 범위내에서 왜곡이 이루어졌고
차라리 그 왜곡이 더 사실적인 접근성을 지니며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는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면
그 왜곡은 더 이상 왜곡이 아니게 된다.
사실성이 도저히 도달하지 못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즉.. 모든 정신을 붓 끝에 담아 표현해 내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경지와 실력에
이미 공재는 가 닿았으며 스스로 그것을 구현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만약.. 이 그림에서 수염을 자연스레 그린다면 어찌될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한결 부드럽고 자애로운 인상이 될 것이다.
반면.. 그림처럼 사자 갈기의 날카로운 수염은
마치 장수의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극적인 효과를 준다.
윤두서의 절친한 친구도 그의 자화상을 본 뒤
실제로 검객의 기상이 느껴진다고 평가했다.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신선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대개 또한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이하곤 <윤효언자사소진찬> 중에서
이처럼 윤두서는 자신의 모든 필력을 다해 수염을 그렸고
구레나룻의 왜곡을 통해 내면에 품고 있던 기상을 사실적으로 들어낸 것이다.
파격적인 왜곡을 관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사실을 보여주고 표현한
시대를 앞선 절대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

< 자화상 - 피카소 >
화가는 그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시대를 그려낸다.
특히 투철한 자의식 없이는 화가라도 그려내기 힘든 것이 바로 자화상이다.
여기에 윤두서의 자화상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이라면
마치 대결이라도 하듯 뚫어져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서양화에도 혁신적인 자화상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램브란트.




이처럼 여러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자화상마다 표정이 모두 다르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변화하는 감정과 심리상태를
각기 다른 표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램브란트 역시 윤두서처럼 권위와 신분을 드러내는 기존의 초상화 양식에서 탈피해
깊은 자의식을 담은 파격적인 자화상을 선보였던 셈인데
윤두서와는 분명 다른점이 있다.
램브란트의 모든 자화상은 몸을 약간 비튼 측면상이다.
원래 인물의 정면상은 입체감을 살리기 어렵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면상을 그리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두서는 왜.. 무엇 때문에.. 그 어려운 정면상을 선택하게 된걸까?
윤두서가 살던 해남의 고택인 녹우당.... .
그곳엔 지금도 300년 넘게 전해져 온 백동거울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은 녹이 슬고 한낱 전시품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이 백동거울이 윤두서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한 거울이다.
윤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자화상을 그렸을 것이다.
거울 속의 윤두서와 그림을 그리는 윤두서......
날카롭고 흉흉한 두 눈빛이 정면대결을 벌이는 모습...... .
그는 왜 그토록 스스로 정면대결을 벌여야만 했을까?
앞날이 창창하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림속에 그 해답이 있다.
이제.. 윤두서.. 그가 전해주는
300년 전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_-
4. 불운하고 지난한 삶.
윤두서의 자화상이 던져주는 가장 큰 충격 중 하나는
머리 윗부분을 잘라낸 과감한 구성이다.

저 잘린 부분은 관모를 쓰는 부분인데
바로 그 관모가 당대 선비문인들이 지닌 인생의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정계에 진출해 뜻을 펴고 고위관료가 되는 일.
그걸 윤두서는 포기한 것이다.
서인 정권 아래서 자신은 이제 정치적인 마당에 나가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과감히 관모를 배제하고
적장의 목을 베는 심정으로 머리 윗부분까지 잘라내 버렸다.
그런 윤두서가 인생의 갈림길에 선 것은 30대 초반..... .
극심한 당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증조부 윤선도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대립하다가 15년이나 유배지를 떠돌았다.
이후 윤두서는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당쟁의 회오리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그의 셋째형이 조정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고문을 받고 죽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젊은 나이에 이미 머리와 수염이 반백이 되었다고 고백할 만큼
정신적으로도 처세에도 힘이 들던 시기였다.
불행은 연달아 찾아왔다.
절친한 친구마져 당쟁에 희생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힘없이 지켜봐야 하는
암울한 현실이었다.

< 松下讀書圖 - 윤두서 >
그 무렵 공재가 친구 '이잠' 의 영전에 바친 것이 <12성인화상첩>이다.
유학의 12성인을 그린 모습을 담은 이 화상첩은
이잠이 살아 생전에 부탁한 그림이었다.
후에 실학의 대가 중 1인으로 성장하는 성호 '이익'은
윤두서가 보내온 이 화상첩을 형의 영전에 올리며
찬문을 지어 붙인다.
"공재가 승낙하고 그림을 다 그리기도 전에
서산공이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조금 뒤에 완성되자 공재공이 집으로 보내왔는데
실제 정요하여 이승이나 저승에 바쳐도 보물로 삼을 만하다." 성호 이익의 십이성현화상찬서 중에서
매일 어울려 지내던 친구의 죽음은 대단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충격으로 공재는 관직과 정치에 대한 모든 의지를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또 다른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천문학에서 기하학 경제 지리 등등 수 많은 책들을 설렵하며
글과 그림을 벗삼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윤두서의 손때가 묻은 <고씨역대명공화보>도 그런 책 중 하나다.

< 고씨화보 - 명나라 고병(顧炳)이 편찬한 그림책으로 원명은 <고씨역대명공화보>다.>
이 책은 공재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던 시절의 참고서이자 스승이었다.<고씨화보>와 <당씨화보>는 중국의 역대 화가들에 그림을 소개하고
그 특징과 기법까지 서술해 놓은 도록이었다.
윤두서는 홀로 이 화본에 의지해 또 다른 세상을 보며 그림을 익히고
자신의 그림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조선의 화가들이 여전히 중국의 화본에 의존한 관념적인 그림을 그리던 17세기 말.....
윤두서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햐기 시작했다.
나무 하나 바위 하나까지 조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담아내기 시작한 것.

<동국여지 지도> 역시 윤두서의 작품이다.
팔도의 지형과 지리를 연구해서 지도를 제작한 것이다.
작은 섬들도 표시하고 해당 행정구과 같은 색으로 칠해 놓았다.
이전의 지도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와 방법이었다.

<일본여도> 또한 윤두서가 필사해 제작했다.
행정구역의 특징 뿐아니라 거리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윤두서는 정치와 관직을 포기했다고 해서
단지 주저앉아 한탄만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도히려 자신의 세계를 더더욱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5.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단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안다.
빛나는 그 자각의식이 '나'부터 시작해서 결국엔 '너' 그리고 종래엔 '우리'까지 넓어지며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한 관심까지 가 닿는다는 걸 말이다.
그는 현실이 버겁다해서 결코 도망가지 않았다.
조선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에게 자화상.. 특히 정면상은 그런 자신과의 굳은 약속이자 굳건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타오르듯 강렬한 수염과 뚫어져라 정면을 응시하는 형횽한 눈빛....
그의 의지가 느껴진다.

만약 그의 자화상을 램브란트처럼 측면으로 변형 시킨다면
쏘아보는 듯한 매섭고 날카로운 모습은 적잖이 수그러들고
아마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모습이 거기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윤두서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자신의 나아갈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삶에 당당하지 못하면 결코 자화상은 그리지 못한다
윤두서는 최소한 내 삶이 고독하고 힘들지만 당당히 살아가는 것이 대장부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과 조선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학문적 이상을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산 사람으로서의 도도함.. 당당함....
거기 인간적인 따뜻함이 함께 서려 있다.
그가 정면상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깊은 밤.. 자화상 앞의 윤두서가 자화상 속의 윤두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윤두서에게 이 특별한 자화상은
힘겨운 현실에 부딫친 스스로에게 던지는 끝없는 질문이자
비장한 다짐이었다.
만약.. 그 순간.. 삶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는 정면으로 자화상을 그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암울한 현실을 딪고 일어나 이 자화상을 그리게 되기까지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쳤을 그 엄격함과 의지가
이 자화상 속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6. 선비의 길을 걷다.
극심한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형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들 마져 애환과 근심의 나날을 보내며 하나둘 그 곁을 떠났다.
청운의 꿈인 관직마져 포기해 버린다.
그러나 그는 선비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시대의 풍랑을 헤쳐나오며 그가 발견한 참 지식인의 길....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을까?
선비화가들은 절대 그림을 업으로 그리지 않는다.
당연히 원칙적으로 그림을 팔지 않는다.
윤두서 또한 그림을 팔지 않았고 함부러 반출하지도 않았다.
주변의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림을 절대로 넘겨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그의 그림은 귀했고 작은 쪽그림이라도 얻게되면
보배처럼 귀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 뜻밖의 사실이 있다.
윤두서 그림의 열렬한 애호층이 바로 중인계층이었던 것.
그는 그림을 팔지 않았으나 찾는 이들이 많다보니
그를 사칭한 가짜 그림이 수 없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처럼 양반이 아닌 서민들이 윤두서의 그림에 그토록 환호한 까닭은 무엇일까?
↓ 이 그림에 답이 있다.

< 나물캐기 - 윤두서 >
두 여인이 나물을 캐는 이 모습.....
바로 이 그림이 조선시대 회화사에 최초로 등장한 풍속화다.
이처럼 새로운 자각을 경험한 윤두서 그림의 주인공은 양반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그림이라면 나무 그늘 아래서 거문고를 켜거나
낮잠을 자는 양반이 주인공이기 마련이데 그 자리에 서민을 주인공으로 앉혔다.
이것은 한국 미술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17세기 까지의 인물화란 현실에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실제 인물이 아닌
과거의 역사나 설화에서 유래된 고사인물화가 주로 그려지고 감상되었다.
그런데 공재는 그 틀과 규범을 과감히 깨버렸다.
실제 현장에서 생업을 가지고 활동하는 살아 있는 인물들의 삶과 행동을
풍속화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땀 흘리며 일하는 서민을 주인공으로 부상시킨 윤두서의 풍속화는
서님들의 삶에 주목한 투철한 현실인식의 반영이었다.

< 밭 가는 풍경 - 윤두서 >
전에 없던 생동감 있는 서민들의 삶을 그린 그의 그림은
금세 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수집하는 매니아층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 돌 깨는 석공 - 윤두서 >

< 짚신 짜는 노인 - 윤두서 >

< 목기 깎기 - 윤두서 >
조선시대는 양반 사대부의 사회였다.
당연히 사대부 위주로 사회가 운영이 되었고
하층민들은 역사의 전면에 나올 수 없는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막힌 사회.. 닫힌 사회였다.
그러나 공재는 과감하게 하층민들의 삶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또 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근대 미술사 뿐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도 대단히 혁명적인 전환점을 만들게 된다.
거기에는 공재가 지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새로운 사회의 전망..등등
그의 비젼과 창의와 인간미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선비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은 선각자의 길이기도 했다.
서민에 대한 윤두서의 애정은 지금도 녹우당에 남아 있다.
녹우당 뒤뜰에는 쌀뒤주가 서너개 있다.
그가 살던 300년 전에도 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서민에 대한 애정은 그들이 겪는 현실의 고통까지 직시하도록 이끌었다.
배고픈 이들을 위한 그 뒤주는 늘 열려 있었으며
춘궁기엔 항시 곡식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배고프고 가난한 이들이 찾아와 그것을 서로 나눠 먹으며 연명했다고 전해진다.
해남의 백포만 일대에는 당시 윤두서가 개간한 넒은 간척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심한 기근이 든 1713년 기아에 허덕이는 농부들에게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간척지를 만들어 정착하게 만든 것이다.
그에게 민생을 돌보는 것은 선비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고
그래서 실천했고 그 길을 걸은 것이다.
노비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음을 기록은 보여준다.
"세상 사람들은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
소와 말도 상처를 내거나 얼고 굶주리게 하지 않는다.
얼고 굶주리게 하고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르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 병술년 4월 11일 공재가 쓰다.
양반들이 노비를 재물로 취급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며 걱정한 것이다.
그는 자식들에게 노비도 한사람의 인간으로 대우하도록 철저히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노비 한사람한사람의 이름을 불러가며 스스로 실천해 나간다.
당쟁의 광풍으로 전국이 어수선한 시절에는
집안이 소유하고 있던 서민들의 채권문서를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다.
빛은 잊고 생업에 집중해 달라는 격려의 뜻이었고 살길을 찾아주려는 통 큰 배려였다.
이처럼 가진자로서.. 배운자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무언지
그는 이미 확고히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가 아닌 마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각자이자 참 지식인 같은 모습이다.
그것이 윤두서가 찾은 선비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룬 성취는 후대로 이어져 김홍도의 풍속화로 완성되었고
성호 이익과 정약용이 꽃 피운 실학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윤두서.. 그의 자화상은.....
마흔 입곱.. 서둘러 생을 마친 그의 치열했던 삶의 기록이었고
끝없는 자각의 결과물이었다.
7. 길을 열다.
남도 답사 일번지로 알려진 전남 해남.....
그곳 연동리에는 지금도 윤두서가 살았던 녹우당이 건재하다.

< 윤씨 고택 전체를 '녹우당'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고택의 사랑채가 '녹우당'이다. >
그 녹우당 한곁에는 500년간 녹우당을 지켜온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지금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서 윤두서의 지난했던 삶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 녹우당 은행나무 >
유복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당쟁의 회오리를 피해
그져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며 한가로이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거울 앞에 앉아 수 없이 자신과 대화하며 현실에 쉬 굴복하지 않은 윤두서....
그렇게 엄격한 자신의 모습을 확고히 담아 낸 이 자화상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선비의 길을 가고 선비로 살아가겠다는
시대를 앞선 한 지식인의 처연한 결심과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지금도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그림속 윤두서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현실이 버거워도 외면하지 말아라.
괴롭고 힘들어도 주저앉지 말아라.
네가 지금 딪고 선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라.
그래야 네가 갈 길이 보이고 나아갈 길이 열린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 비익련리(比翼連里) - 드라마 '추노' Ost 중에서 >
해금소리는 정말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을 후벼판다.
어느날 밤..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며 한껏 가슴이 내려앉은 적이 있다.
그의 눈빛 속에서 내 삶에 일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겨냈고 나는 진행 중이다.
오늘 밤.. 또 내게 묻는다.
그래.. 나는.. 누구인가?
..................다음카페 '남아있는멋진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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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서(尹斗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