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
황지은
누군가를 만나면서 산다. 계획된 만남은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우연한 만남은 인연이 점지라 여기면 의미가 있다. 소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만남은 다르다. 체온이 느껴지는 훈훈하고 정감 있는 만남은 삶을 윤택하게 한다. 만나기 전의 설렘과 만났을 때의 기쁨은 다르다. 만남 뒤의 헤어짐은 해 질 녘처럼 텅 빈 가슴이 되기도 한다. 따뜻한 헤어짐은 정과 여운을 남기며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 예전에 다니던 성당에서 알던 교우를 만났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반가웠다. 교우도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우린 서로 마음을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그냥 헤어질 수 없다며 자기 집으로 가서 차 한잔하자고 했다. 딱히 바쁜 일은 없어 같이 가기로 했다. 탄방역에서 내려 대로를 건너 언덕진 길로 가니 다가구 주택이다. 첫 방문인데 빈손을 걱정할 틈도 없이 4층 주인 세대로 따라 들어갔다. 깔끔하고 평범한 실내 모습이 창밖 초겨울 정경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따끈한 유자차, 들깨 강정, 사과와 삶은 고구마도 내왔다. 스스럼 없이 정담을 나누다가 오래 머물 시간이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일어났다. 교우는 일부러 큰길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횡단보도에 푸른 신호가 들어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활주로와 같은 넓은 도로를 건너서 돌아보니 아직 그대로 서 있다. 가라는 뜻으로 손짓하고 얼마큼 걷다가 다시금 돌아보니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교우의 모습에서 오래전 돌아가신 맏동서 형님이 떠올랐다. 안동 큰댁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형님은 교우처럼 동구 밖까지 나와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아 주셨다. 정이 많은 분이었다. 남편은 칠 남매 중에 막내라 맏형님과 나이 차가 많다. 결혼하고 처음 시댁에 가니, 아버지 같은 분이 내게 ‘제수’ 씨 하며 예를 갖추어 어색했다. 맏동서는 나를 ‘새댁아’라고 불렀다. 내 나이 쉰이 넘어도 형님이 그리 부르니 항상 새댁이어서 좋았다. 방금 헤어진 교우의 정겨운 모습에서 맏동서를 떠올린 것은 그만큼 내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형님의 자리가 컸음이다.
맏동서는 정이 넘치는 것 말고도 지나치다고 할 만큼 알뜰하기까지 한 분이다. 평범한 공무원 월급으로 네 남매를 외지로 보내어 끝까지 공부시켰다. 오로지 자식의 일에 정성을 쏟았다. 절약이 몸에 배었지만, 조상님 제사는 정성을 다해 모셨다. 제물은 비싸더라도 제일 좋은 것으로 장만했다. 문어는 큼지막한 것을 통째로 삶아서 올리고, 상어 토막고기는 찜하여 그릇에 수북이 담았다. 윤이 나게 예쁘고 큼직한 과일은 제상 위에서 반짝였다.
형님이 돈을 쓰는 데가 또 있었다. 그때는 귀하고 비싼 안동 간고등어를 사놓으셨다가, 우리가 떠날 때 챙겨 주었다. 다만 얼마라도 차비에 보태라며 내 주머니에 돈을 쑥 집어넣었다. 큰 집 형편을 잘 아는 나로서는 너무 귀한 돈이어서 가슴 한쪽이 찌르르했다. 형님은 우리를 빈손으로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을뿐더러 항상 길에 나와서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며 배웅했다.
그런 형님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치료를 받으면 괜찮다고 하여 안심했다. 그런데 갑자기 큰아주버님이 먼저 돌아가셨다. 무엇보다 형님의 상심이 크실 것이 염려되었다. 혼자 지내니 자주 전화를 했다. 때마다 너무 담담하게 받았다. 그러구러 몇 달 만에 형님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천상으로 영영 떠나셨다. 자는 듯이 아침에 깨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을 두고 갈 수가 없어 그동안 버티셨는가 보다.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를 중히 여기셨던 형님은 인생길을 그렇게 떠나셨다.
부부가 둘만 남아서 서로 의지하고 지내다가 혼자가 되면 어떻게 살까. 어쩌면 형님은 남편 뒤를 따라 잘 가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부부는 일심동체’임을 나이가 들어서야 의미를 안다. 상대가 굳이 말로 표현 안 해도 느낌으로 안다. 뒷모습만 보아도 감정이 읽힌다. 평생을 함께한 부부가 가지는 느낌은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부모 정이나 자식의 정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서 혼자가 되어 허전함은 달리 채울 수 없을 것 같다. 가까운 사람이 떠나고 육신까지 고달프면 오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형님에게서 보았다.
올 한해도 저물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한 해를 보내는 내 마음이 허전하기만 하다. 이럴 때 형님이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든든할지 생각하니 맏동서가 그립다. 지금도 생존해 계셨으면 여전히 나를 ‘새댁아‘ 부르실까. 그렇게 생각하니 형님이 더욱 보고 싶다. 허전한 마음으로 형님을 그리다가 문득 얼마 전에 만났던 교우를 다시 떠올려 본다. 교우를 만난 덕에 잠시 잊고 있던 맏동서를 소환했다. 뜻밖에 만난 교우로 동기간을 만난 듯 마음이 훈훈했다. 내친김에 먼저 전화를 걸어보니 마침 집에 있었다.
첫 방문 때 빈손으로 갔었기에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그녀는 전이나 진배없이 나를 반겨준다. 우린 사이좋은 자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려는데 이번에도 변함없이 큰길까지 나와서 배웅한다.
대로를 건너서 뒤돌아보니 그때까지 지켜보다가 저만치 멀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먼저와 판박이다. 그 모습에서 맏동서가 전송해 주던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그 교우를 만난 것은 큰 선물과도 같다. 맏동서가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는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던 그분이 어머니처럼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