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비에 보태기 위해 탄피 줍고 고물 캐
故 이용삼 국회의원 프로필
△1957년 화천 출생 △와수초 · 김화중 ·김화공업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행정학과 1회) △강원대학교대학원 졸업(법학박사) △농업·축산업·삼양식품 공원 △수산청 근무 △제27회 사법고시 합격 △서울중앙지검, 목포지청 검사 △제14대, 15대, 16대, 18대 국회의원 △국회 교육위, 정보통신위, 건설교통위, 국방위, 보건복지위, 예결산특위, 남북화해특위 위원, 제16대 국회 행정자치위원장, 제18대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장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비에 보태기 위해 탄피 줍고 고물 캐
하루12시간 근무하는 고된 노동속에서도 꿈위해 공부에 매진
최연소 국회행정자취위원장 접경지지원법 등 지역현안에 앞장
용 세 마리가 태몽, 너무나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고인은 황해도에서 월남한 아버지와 화천 출신 어머니 사이에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에서 6남매 중 3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용 3마리를 품에 안는 태몽을 꾸어 용삼(龍三)이라 이름 지었다고 이의원은 술회했다. 화전민 이주 정책으로 철원으로 옮긴 이의원의 가정은 매우 곤궁했다.
당시 집은 군부대 사격장 옆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나무를, 어머니는 찐빵과 시루떡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었다. 당시 어린 이의원은 학비를 벌기 위해 사격장에서 탄피를 줍고 고물을 캐내 교복과 학용품을 샀다. 중학교 2학년때는 장남인 형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병이 들어 몸져 눕고, 어린 이의원은 가계를 돕기 위해 결국 학업을 포기했다. 이의원은 인터뷰에서 “태어나 기억하는 처음의 큰 시련이었다. 꿈은 컸으나 가진 것이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입술이 마르고, 몸이 떨린다”고 회상했다.
삼양라면 노동자로 주경야독
우여곡절 끝에 김화공고 식품공업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으로 2년만 마친 채 삼양라면(주)에 취직했다. 하루 12시간씩 근무하는 고된 노동자의 생활 속에서도 그는 꿈을 잃지 않고 틈틈이 짬을 내 공부에 매진했다. 이같은 주경야독 끝에 21세 되던 1977년 총무처 시행 4급 을류 행정직 시험에서 수석 합격했다. 수산청 기획실에 배치된 그는 1978년 국회와 청와대 관련업무를 담당하면서 국회를 출입하게 됐다.
이 의원은 이 시기에 대해 “국회를 출입하면서 우리나라 법을 만들고 고치고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았다. 그래서 방송통신대학에 입학했고, `국회의원이 되어서 지역을 위해 큰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공무원 생활접고 소키우며 사법시험 합격
하지만 보다 더 큰 이상을 위해 이의원은 5년간 정든 수산청에 사표를 내고 낙향한다. 동생과 함께 소를 키우며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1985년 낙향 2년 만에 27회 사법시험에 6등으로 당당히 합격했다. 그해 방송통신대학 학사과정을 1회로 졸업했다. 하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한 기쁨도 잠시 연수원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의원은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치면서 울고 또 울었다” 고 울먹였다. 이후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서울중앙지검 검사로 발령을 받는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강력부 검사로 일한 뒤 광주지검 목포지청으로 전출됐다.
접경지역지원법 제정 주역
1992년 14대 국회의원 총선거 출마, 고배를 마신 그는 다음해인 1993년 7선인 김재순 국회의장이 재산축재 파동으로 `토사구팽'이란 유명한 사자성어를 남기고 의원직을 사직하게 되면서 당시 여당인 민자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도전, 14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이후 15대, 16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돼 3선 중진의 반열에 오른다. 만 42세 나이로 3선 고지에 오른 이의원은 16대 국회에서 최연소 국회행정자치위원장으로 선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접경지역지원법 제정도 학구파 의원이었던 그의 작품이었다.
2002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치러진 17대 총선거에서 이의원은 열린우리당 입당 제의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는다. 17대 총선에서 최연소 4선 의원을 노리던 이의원은 `탄핵 역풍'에 좌절한다. 이후 이의원은 18대 총선에서 철원-화천-양구-인제지역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4선의원의 꿈을 이뤄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2008년 위암을 선고받은 이의원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병마와 싸워왔으며 투병 와중에도 각종 지역현안사업 해결과 강원도평화산업단지 특별법 제정, 소방안전기금법 제정 등에 전력을 다해왔다. -강원일보-
첫댓글가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래전 그 분을 강원도 철원에서의 한 행사 때 만나 나눴던 얘기가 기억납니다. 혼자 사는 것이 신경쓸 일이 적어 편하다고 했던 말씀이---
짧은생을 치열하게 살아오신 고인께서 이젠편히쉬시길빕니다 어머님보내고 가슴치셨다는대목이 맘아픕니다 삼가 고인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