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 6명(김재일 김종국 나종만 양수랑 정재남 최문수 등)은 올 해 첫 나들이로 다산초당을 택하였다. 제2순화도로를 지나 나주 혁신도시를 관통하여 왕곡면으로 접어들었다. 신북 휴게소에서 잠시 용변을 보고 다시 강진으로 달렸다. 영암 월출산의 웅장한 기암고봉들의 모습이 박무에 가려 산뜻하지 않았다. 강진읍에서 우회전하여 도암면 쪽으로 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다산초당길로 들어갔는데 이게 웬 일인가? 도로도 좁고 상태도 너무 열악하여 강진군이 도대체 왜 이 길을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지 관계자들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진이 남도 일번지라고 대외적으로 홍보를 하지 말던지 다산초당을 강진의 대표적 문화유적으로 언급하지 말던지, 다산초당을 홍보용으로 널리 선전을 하면서 이 길을 이렇게 홀대하고 있는 것이 무슨 조화 속인지 궁금하였다. 과장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이 길은 ‘부잣집 측간에 가는 길’ 만도 못한 길이었다. 강진 사람들의 얼굴도 다시 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강진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이 길을 한 번이라도 와 보았을까? 같은 남도 사람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재청장이나 강진군수나 도암면장이나 강진 출신 국회의원이나 도의원이나 군의원들 모두 각성해야 할 일이다.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오른쪽 해안도로를 달렸다. 가우도의 출렁다리도 보였다. 오른쪽 저수지는 바다처럼 넓기도 하였다. 그 저수지에는 하얀 고니들 한 떼가 노닐고 있었다. 저수지를 감고 돌아 만덕산 아래 조성되어 있는 ‘다산유물전시관’ 앞에 차를 세웠다.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 먼저 다산유물전시관 옆길을 따라 100여 미터 올라가다가 동쪽으로 산등을 넘어가서 다산초당 입구로 갔다. 산기슭에서부터 시작하여 작은 계단 길을 차분히 올라갔다. ‘뿌리의 길’, ‘해남윤씨 산소’를 지나 편백나무 황칠나무 대숲 소나무 기타 잡목들이 우거진 길을 지나 ‘다산초당’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다산초당은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서암’에서 산해가 가져온 녹차를 나누어 마셨다. ‘정석(丁石)’,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둘러보았고, 공사 중이어서 ‘다산초당(茶山艸堂)’, ‘약천(藥泉)’, ‘다조(茶竈)’ 등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였다. 다산이 기거하였던 ‘동암(東庵)’에서 옛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저술활동을 하면서 10년 세월을 견디었던 다산을 떠올려 보았다.
동암을 지나 다산이 강진만 구강포를 바라보며 가족을 생각하였다는 ‘천일각(天一閣)'에서 우리도 강진만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백련사(白蓮寺)로 넘어가는 오르막길을 걸었다. 미끄럽지도 딱딱하지도 않는 촉촉한 흙길은 너무도 편안하였다. 마치 빨간 융단이 깔린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다산이 혜장과 차를 마시며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철학적 산책을 하려고, 오고 갔던 이 오솔길을 우리도 지금 걸어가면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三尊(세종 이순신 다산)에 대한 그리움에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해월루(海月樓)’가 있는 산등까지는 오르막이었지만 거기에서 백련사까지는 또 내리막이었다. 잡목 사이로 동백 숲에 쌓인 백련사가 보였다. 남녘의 봄볕이 쏟아져 밝게 빛나는 백련사에서는 밝고 따스한 기운이 동백 숲을 비집고 기어올라 만덕산 정상으로 피어오르고 있는 듯하였다.
절 주변과 진입로를 중장비들이 투입되어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는 점심 공양시간이 되었는지 기계를 멈추고 막 쉬려는 참이었다. 우리도 절을 대충 보고 다시 다산초당으로 넘어갔다.
이 절을 방문할 때마다 궁금하였던 대웅보전 법당 왼쪽 벽에 걸려있던 ‘萬德山 白蓮社’라는 글씨는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아 의문이 풀렸다. 고려 중기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몽고와 왜구의 침노에 대항하기 위해 민간과 결사운동(結社運動)을 벌여, 난국을 극복려고 白蓮結社를 조직하였다 하여 ‘절 사(寺)자‘가 아닌 ‘단체 사(社)자’가 절 이름에 들어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월루(海月樓)를 들렀는데 그 아래 어느 곳에 굴곡진 삶을 살았던 한 거인(巨人), 정치계를 떠나 토굴에서 강진만을 내려다 보며 수기치신(修己治身)하고 있는 孫박사와 격의 없은 짧은 대화라도 나누며 그를 격려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다산명가’에 들어갔더니 영업을 하지 않아 발길을 돌려야 하였다. 석문(石門)을 지나 맞춤한 식당을 찾으려고 강진읍을 이리저리 돌다가 결국 병영 소재지에 있는 ‘설성식당’에 까지 가게 되었다.
오후 2시에야 늦은 점심을 먹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값싼, 한 상에 30첩짜리, 백반(8,000원)에는 그 유명한 제육볶음과 홍어 삼합과 온갖 나물들이 나왔다. 건배를 외치며 피곤과 허기를 말끔히 씻어내버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병영성을 먼발치로 둘러보면서 강진을 떠나왔다.
첫댓글 가기는 같이 갔는데 본것은 천지 만큼 차이가 나니? 어찌한단 말꼬. 그나마 아석께서 올려준 사진과 글을 보고 복습할 수 있으니 고맙군, 그런데 백련사 비석과 설명 입판을 보니 社가 아니라 寺인것 같은데?
백련사의 대웅보전 법당 왼쪽 벽에 붙어 있는 '萬德山 白蓮社'라는 글씨에 대한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다가 백련사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았더니 白蓮結社를 조직하여 환난을 극복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네. 일반적으로 대개 '白蓮寺'라고 쓰고 있었네.
봄나들이를 했다니참 부럽네. 현판의 글자 하나까지도 관심있게 보는 친구들도 여전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도 다산초당구경을 잘 하였네. Q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