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순간까지 정몽주와의 우정을 굳게 믿었고, 상대방도 그러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주위에서 이 순수한 관계를 의심한다면 이성계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여겼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아들 방원한테도 엄한 꾸중을 내렸던 터다.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병의 차도를 물으며 방원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님! 조정을 분열시키고 상감의 판단을 흐리게 할 뿐더러 아버님에 대한 참소(讒訴)와 모함을
일삼는 정시중을 죽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노기가 등등해져 소리를 질렀다.
"포은을 죽인다는 말이냐? 이놈! 정시중은 이 나라 제일 가는 충절을 지녔거니와 나하고 더없이 가
까운 친구인 줄을 몰랐더란 말이냐?"
"아버님! 정시중을 두고 충절을 가졌다 하시오나 아버님의 우정을 짓밟은 변절자가 아닙니까. 그가
만일 아버님의 참다운 친구라면 어찌 감히 자객을 해주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위선자는 제 손
으로 처단함이 마땅한 줄로 아옵니다."
"닥쳐라, 이놈! 무릇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즉, 다만 마땅이 순하게 받아야 한다. 그러니 정시중의 털
끝 하나라도 다치는 날이면 부자간의 의가 끊어질 뿐더러 내 손에 결코 살아남지 못하리라!"
이성계는 눈을 부릅뜨고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친구와의 의리나 우정이 자식과의 관계보다 우선
한다는 그의 확고한 태도를 밝힌 것이었다.
마침 곁에 강씨가 있었다. 그녀는 방원을 싫어하고 경원했지만, 이성계가 정몽주를 비호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남편의 태도가 워낙 불 같았으므로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한편 방원은 못내 침울한 표정으로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 이 일을 상의하고 있었다.
이날 아버지로부터 꾸중은 꾸중대로 듣고, 속히 돌아가서 너의 큰 일이나 마치도록 하라는 분부를 받
았던 것이다. 이 말은 율촌 여막으로 돌아가 시묘를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서울동묘
이성계의 대업, 즉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나라를 이룩하려는 계획을 앞장서서 추진해 온 방원으로서
는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이었다.
'아버님께서 저렇듯 고려 왕실의 존속을 바라시니 혁신을 바라는 이 백성들의 소망은 백년하청(百年河淸)
이로구나. 그러나 나는 결코 이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마침내 방원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는 곧 장상(將相)으로 있는 형 방과(芳果)와 이제(李濟) 등을 은밀
히 불렀다. 이제는 이성계의 셋째 사위로서 후일 장인을 도와 이조 개국(開國)에 참여했다.
"형님들, 그리고 매부! 아버님께서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계시면서도 정몽주를 감싸고 있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도 마음이 답답하여 형님들을 오시라 했습니다."
"......... ."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방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원래 문약한 이들인데다가 이성계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
지 않아서였다.
"형님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방원이 좌중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한참 동안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이제가 말문을 열
었다.
"우선 자네의 결심이 어떤지를 알고 싶네."
결국 자기들은 할 말이 없으니 방원의 의견이나 들어보겠다는 태도였다. 자신보다 연령이 많으므로 경륜 또
한 해박하리라 기대했던 방원은 살망이 컸다.
'설혹 마음 속에 경륜이 있다 한들 드러내지 않으면 없느니만 못하다. 필경 아버님의 눈치를 살피는 거야. 겁
쟁이들 같으니라구!'
이때 나이 25세인 방원은 그야말로 혈기 방장하였다.
방원이 자신 있게 말했다.
"비록 아버님께서 반대하신다고 하나 저는 우리 가문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정몽주를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허물에 관해서는 제가 마땅히 책임지겠습니다."
그러고는 곧 이지란을 불러왔다.
"어저씨, 아버님이 갈수록 위태로운 입장에 몰리고 계신 줄 잘 아실 겁니다. 아저씨께서는 아버님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시니 그냥 계시지 않을 줄 압니다. 정몽주를 죽여 아버님을 도와주십시오."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만, 상공(相公)이 모르시는 일을 내가 감히 어찌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며 방원의 간청에 이지란도 거절했다.
이지란이 물러간 후 방원은 조영규, 조영무(趙英茂), 고려(高呂), 이부(李敷) 등 무장들을 불러들였다.
"제장(諸將)들! 우리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다해 온 것은 이 나라 백성들이라면 모두 환히 알고 있소.
그런데 지금 정몽주의 모함에 빠져 악명(惡名)을 덮어쓰고 있소. 그래서 정몽주를 쳐죽이려 하지만 나
서는 사람이 하나도 없소. 휘하에 사람이 많으면서도 이씨를 위해 힘을 다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오?"
"소장(小將)이 힘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방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치며 앞으로 쑥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성계의 심복인
조영규였다.
그러자 그를 따라온 다른 무장들도 일제히 따라했다.
그제서야 방원의 입가에 함박 웃음이 떠올랐다.
"여러분. 고맙소, 고맙구려!"
그는 조영규 이하 여러 장수들의 손을 잡으면서 감격에 겨워했다.
이때, 영순이 방원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알렸다.
"서방님! 내방 마님께서 급히 오시라는 전갈입니다."
"뭐야? 어제 아버님이 나를 내쫓을 때는 고소해 어쩔 줄 모르던 여자가 나를 불러? 더 듣기 싫으니, 어
서 꺼져라!"
방원이 붉으락푸르락 얼굴빛이 변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강씨가 미우니 거느리는 시비까지 밉게 보여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영순은 등판이 시릴 정도로 소름 끼치는 방원의 눈길에도 자리를 뜨
지 않았다.
영순은 그냥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다섯째 서방님을 모셔 가야
만 했다.
이렇게 생각한 영순은 문득 섬돌에 주저앉으며 그만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연출하는 일이
니, 울음소리가 넉살좋게 이어졌다. 게다가 감정까지 넣었으니 바윗돌 같은 남자의 간장을 송두리째 녹
여놓는 것만 같았다.
"얘야! 너, 왜 그러냐?"
어리둥절한 방원이 노여움을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영순은 더한층 구슬프게 울어
대면서 말문을 열었다.
"주인 마님께서 급한 일을 당하셨다 하온데, 서방님께서는 저만 가라고 하시니 이 노릇을 어떡합니까,
예?"
"뭐? 아버님께서 급한 일을 당하셨다구?"
비로소 긴장한 방원이 재우쳐 물었다.
"예. 조금도 지체치 말고 급히 오시라 하였습니다."
"예끼! 요 맹랑한 계집 같으니라구! 그러면 처음부터 아버님이 나를 찾는다 하지 않고? 만약 아버님께
불행한 일이라도 생겼을 시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버럭 화를 내곤 방원은 급히 말을 몰아 북천동 본가로 달려갔다.
조영규와 무사들도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이 사라지자, 부시시 몸을 일으킨 영순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일이 여의치 못해 불의의 변이 발생한
다손 치더라도 일단은 내방 마님의 분부를 이행했기 때문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