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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작은詩앗 채송화 동인시집 [울음의 본적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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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집 [울음의 본적]
작은詩앗 체송화 동인 시집 / 고요아침(2012.12.070) / 값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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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명시
북쪽
이용악
북쪽은 고행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 초대시
전화
김종길
어제 아침엔,
뉴욕에서 직장에 다니는
손녀 아이와 전화 통화를 했다.
거기는 저녁 시간,
브루클린브리지를 건너 퇴근한
아이의 음성엔 피로와 집 생각이,
대서양의 밤안개와 함께
묻어 있었다.
아이와 비눗방울
박희진
솔밭공원에서 귀여운 아이가 걷고 있다
작고 투명한 비눗방울들을 연방 날리면서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아이는 의젓한 마술가 같구나 미소를 머금은
새 5
이하석
가로수 속 울리는 새소리에 꺼내보니
휴대폰이 꺼져 있다
♣ 채송화의 친구들
먼나무
강덕환
뭔 나무가 이 겨울
차마 못 다 한 말
붉은 열매로
주저리주저리 내뱉는지
더 이상 묻지 않겠네
어차피 우리네 삶도 의문투성이
뭔 나무인지는
먼나무로만 알고 있을 수밖에
손
유대준
무 썰다 살점 떨어진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손가락 굽고 비틀어지도록 쓸고 닦으며
세상을 모신 그 손에서
잎이 돋듯 톡, 톡, 톡
별
이승신
땅에 발을 붙이고
붙박이 별을 보다
깜깜해져서야
내게 보이는
저 별
그리고 친구
굿바이
김진경
부고를 알리는 문자가 왔다
상주들 눈물에 흥이 나는 저승 가이드
마지막 여정이 궁금해?
“궁금하면 500원”
─ 저승 여행 티켓은 산 자들이 지불하는 겁니다
망자의 관 위에 저승 갈 노잣돈이 쌓인다
앨범
홍사성
신기하다
이런 때가 있었다는 게
꿈만 같다
그 시절 건너 여기까지 왔다는 게
♣ 동인 신작시
울음의 본적
나혜경
시도 못쓰고
바라만 보는 보석상자 속 매미 허물
무덤 같은 땅속에서 5,6년
책상 위 관 속에서 5,6년
울지도 못하고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이지엽
生생이란 글자는
소(牛)가 외나무다리(一)위에 있는 것
앞으로 갈 수는 있지만
뒤로 물러날 수는 없다
모두가 한 번 뿐이다
一生일생이다.
*벧전 1:24
씨앗이 詩에게
정일근
씨앗 하나가 나무를 키울 때
나무가 직립해서 숲을 만들 때
나무 치고 숲 베어서 만든
피 뜨거운 종이 위에
너는 한 송이 피워보았는가
너는 열매 한 톨 맺어보았는가.
감
함순례
돈암서원 마루 밑에
홍시 반쪽이 말랑말랑 익어가고 있습니다
마당엔 발자국 하나 없이 정갈한데
누구의 촉일까
감感이 대단하였습니다
폭설
김길녀
더 이상 가릴 수 없는
무덤 천지
더 이상 버릴 것도 없는
삶의 무게
비로소 고요하다
엄마
나기철
아내가 집에 있다
아파트 문
열기 전
걸음이 빨라진다
어렸을 때
엄마가 있는 집에
올 때처럼
흉작 후기
복효근
시시하다고 버린 것들이 정작 시였다고
낙엽이 툭, 내 어깨를 쳤다
안부
오인태
떠났다, 들었다
돌아왔다, 듣지 못했다
그런 줄 알겠다
소금
윤효
뭍에 갇힌 바닷물이
몇 날이고 며칠이고 애간장을 태우고 졸이고 궁리 끝에
끝내는
기어코
바다로 돌아갔음을 알리는,
은빛 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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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는 글
여백에서 만나는 풍요로움
한 해의 끝을 향해 가는 겨울 문턱입니다. 창 넓은 찻집에 앉아, 느티나무 한 그루를 오랫동안 보고 있습니다. 무성했던 잎들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한낮의 햇살이 스며듭니다. 갖가지 형상의 구름도 스쳐 갑니다. 햇살과 구름이 지나간 자리에서, 오래전 화석이 된 별과 바람의 숨결을 읽습니다. 잎들이 무성할 때는 보이지 않던 나뭇가지 사이의 스침과 흔적들이 이제야 온전히 마음밭으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잠깐의 틈도 허락하지 않은 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마음 어느 곳에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넘치는 풍요 속에서 오히려 모자람을 느끼게 됩니다. 옛 선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 말고 그 속에 스며 있는 무無를 보라 하였습니다.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틈을 보여주는 ‘쉬어감’의 의미입니다. 무에서 유有가 나온다는 노자의 말은 동양의 산수화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산수화를 보고 있으면 사물들이 바다라는 큰 여백 위에 작게 떠 있는 섬들처럼 느껴집니다. 안개에 흠뻑 젖은 나무, 희미하게 드러난 산봉우리, 일반적인 산수화의 풍경입니다. 산수화의 형상을 완성해 줄 부분은 안개와 여백의 무로 해체되고 스며들어간다고 합니다. 완성은 여백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수화의 여백과 옛 음악의 여음이 언어에서는 생략과 함축입니다.
채송화의 모습도 산수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함축하고 생략하여 지어낸 시 속에서 무한한 여백을 보여 줍니다. 여백은 드러나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여백은 온전히 감상의 몫입니다. 짧은 시의 여백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언어가 전해주는 심해의 깊은 소리와 우주의 저 너머는, 더 넓은 상상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일찍이 노자老子가 말했습니다. “소박한 본바탕을 드러내고 껴안으며,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망을 줄여라.” 채송화의 소박함이 노자의 말씀을 닮아 예쁘게 꽃피기를 소원해 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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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詩앗 채송화 동인 시집 [울음의 본적]
[ 채송화 시론 ] -
짧은 시의 힘
황 인 원(시인, 문학평론가)
1.
거두절미하고 말한다. 난 짧은 시가 많이 필요한 사람이다. ‘문학경영’ 특히 ‘시 경영’이라는 말을 만들어 시의 창작 사고법을 콘텐츠로 하여 기업 경영에 접목하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기업인들에게 시를 많이 소개한다. 소개하는 시 100%가 짧은 시다.
지면상, 시간상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분량이 짧으면서 의미 부여가 확실한 시에 대한 집중도가 높기 때문이다.
보통 인터넷 동영상을 보면서 사람들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5분이라고 한다. 삼성경제연구소를 비롯해 각종 연구소나 기업의 교육기관에서 기업인을 대상으로 동영상을 제작할 때 보통 한 편을 5분 내외로 구성한다. 그 이상이면 집중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시는 어떨까. 사람들에게 시를 유독 많이 소개하는 나의 경험상 10행 내외가 동영상 시간 5분에 해당한다. 이 분량을 넘어가면 집중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행이 같아도 특히 산문성의 시는 집중도가 2배 이상 떨어진다. 이는 시의 창작자 입장이 아닌 수요자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시의 분량이 짧아야 좋고 길면 나쁘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적어도 수요자 입장에서 보면 수다스러운 긴 시는 집중도와 매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2.
시는 솔직히 말해 너무 안하무인이다. 아니 시인이 그렇다. 전혀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상업 제품과 다른 순수 예술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들은 시집을 묶어낸다.
대체로 그동안 쓴 시를 정리하는 의미로 말이다. 그렇다면 혼자 정리해 놓고, 혼자 보고 좋아하면 된다. 아니면 혼자 책을 만들어 가격표 붙이지 말고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도 있겠다. 그래야 순수 지향 예술이 맞다.
하지만 누구든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다. 출판사는 시집에 가격을 붙여 서점에서 내보낸다. 이는 판매 행위다. 이것을 모르는 시인은 아무도 없다. 즉, 시인이 출판사에서 시집을 묶는다는 것은 시인도 판매를 전제로 하겠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순수 예술에 상업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아무리 순수 예술이라 해도 상업성이 개입되지 않을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상업은 곧 장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가 성립되고, 생산자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팔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업 행위의 기본 요체다.
물론 예술이기에 일반 상품과 다르다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처럼, 시인처럼 고지식한 경우는 보질 못했다. 음악, 미술 등 다른 장르는 모두 상업화와 산업화에 성공하고 있다. 그래서 특히 최근 인문학 붐이 일고 있는 기업에서 CEO는 직원들과 갤러리를 찾아 미술 작품을 관람하기도 하고, 음악회를 가거나 아니면 직원들에게 악기를 단체로 배우도록 한다. 역사와 철학의 의미를 배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왜 기업에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일까. 삼성경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그 이유는 분명하다. 21세기 한국은 상상력 없이 결코 지금의 경제적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과거에는 굳이 기업에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진국에서 다 알려줬다. 말하자면 사례를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후진국 내지 개발도상국인 우리는 그 사례를 좇아가기만 하면 됐다. 따라서 인문학을 굳이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기술이 최고였고, 그것을 파는 행위가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국가로 성장했다. 누구도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사례를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례를 만들어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막막했다.
그래서 삼성을 비롯한 몇몇 기업의 연구소에서 선진국들은 어떻게 우리가 아는 사례를 만들었나를 연구했다. 그랬더니 상상력이더라는 것이다. 그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기업에서는 지금 인문학을 공부하느라 부산하다.
그런데 진짜 상상력의 보고인 시 공부는 제외돼 있다. 누구도 시를 공부하지 않는다. 상상력의 보고를 공부하지 않다니 기업인들이 바보인가. 그래서 물었다.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는 것인가?”. 그랬더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답이 왔다.
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해 불가인 것이다. 한글은 한글인데 영어보다 더 어렵다. 또 뭔 시가 그리 긴지 읽다가 그만 지친다. 집중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다. 이를 합치면 ‘어려운데 길기까지 한 게 요즘 시’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시를 찾을 이유가 없다.
누구 잘못인가. 시인 잘못이다. 그러고는 ‘소비자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시집이 팔리지 않는다’고 통탄한다. 그러면서 ‘시가 죽었다’는 말을 꼭 곁들인다. 웃기는 얘기다. 생산자인 자기들이 소비자인 독자를 외면해 놓고, 그래서 시를 죽여 놓고 독자 탓을 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어떤 몸짓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작품을 찾지 않는다는 한탄은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투정이다.
3.
시의 존재 가치 중의 하나는 ‘새로움의 드러냄’에 있다. 사물이나 인간의 새로운 관찰, 새로운 의미 부여, 새로운 상상을 통해 그동안 몰랐거나 알고 있어도 스쳐지나갔던 것에 대한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시대에 시가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법 덕분에 사람들이 한 편의 시를 읽고 감동하고 감탄하며, 가슴의 울림을 간직하고자 한다. 이 감동과 감탄이, 울림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짧아야 한다. 그리고 쉬워야 한다. 독자가 짧고 쉬운 시를 읽으며 나름의 자기 상상을 입히도록 해야 한다.
<작은 詩앗․ 채송화>제8호를 읽다가 ‘그렇지’라고 맞장구친 부분이 있다.
언덕 아래, 무심코 오줌을 누다가
이런, 매화 만발한 소리를 들었다
─ 문인수,「어느 봄날」
이 시를 정일근 시인은 이렇게 해설한다. “봄이 어떻게 만개하는가? 그것은 ‘무심코’다. 시인은 지금 노상방뇨 중이다. 그러다가 매화가 만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인의 힘찬 오줌소리에 놀라 매화가 만발했는지는 모른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단지 시인은 무심코 오줌을 누고 있었을 뿐이다. 시인은 매화를 보지 못했다. 단지 만발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자신의 오줌소리 속에서! 그 다음에 시인은 무엇을 했는지는 독자의 상상이다. 그것이 짧은 시를 읽는, 상상의 즐거움이다.”
이것이다. 시인은 오줌을 누다가 매화가 만발한 소리를 듣는다. 누가 매화 만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이 아니면 누가 듣는단 말인가. 우리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행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상상 덕분이다. 거기에 정일근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매화가 만발한 소리를 들은 뒤의 행동까지 요리조리 살필 수 있다. 어떻게? 상상으로 말이다.
그러면 상상은 어떻게 하는 것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 지금 이 시대의 독자들과 기업인에게 필요한 게 이것이다. 그러니 시를 통해 어떻게 하는 게 상상의 세계인지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시인의 역할이다.
그러면 독자는 이런 시를 읽으며 상상의 세계를 밀도 있게 공부하게 된다. 현상 속에 숨어 있는 관찰이 가능하고, 들리는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경청의 자세까지도 알게 된다. 모두가 짧은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존의 사물이나 상황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내고, 무언가 다른 의미를 접목시켜 기존에 없던 창조적인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을 자기 삶의 경영에 도입하고 기업 경영의 과정 속에 아이디어로 도입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모두가 짧은 시가 주는 상상 일깨우기 덕분이다.
물론 시가 길어도 이런 덕목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대로 독자가 읽기 불편해 한다. 더불어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짧은 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의 움직임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4.
나는 학생들에게, 기업인들에게 ‘사물과 대화하는 방법’을 알아야 21세기를 뒤처지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말하고 다닌다. 그 방법이 시를 읽는 것이라고 외친다. 그러면서 시인들이 시를 창작할 때의 사고법을 콘텐츠로 하여 기업 경영에 접목하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그런 어느 날, 유안진 선생의「오해, 풀리다」라는 시에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작은詩앗․채송화> 제3호를 뒤척이다 보니 이 시를 다시 읽을 수 있었다.
“그랬어?/그럼/그렇지//그러니까/그래서/그토록/그렇게도/그랬었구나.”
아, 이런 단어만으로도 시가, 그것도 이처럼 울림이 큰 시를 쓸 수 있다니. 시인은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 이 시를 읽은 독자는 조용히 앞말과 뒷말을 이어보리라. 그리고 아내와 싸운 남편은 아내에게 화해를 청하고, 친구와 말다툼한 아이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노라 전화하리라. 시의 힘이다. 짧은 시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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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채송화의 모습도 산수화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함축하고 생략하여 지어낸 시 속에서 무한한 여백을 보여 줍니다. 여백은 드러나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여백은 온전히 감상의 몫입니다. 짧은 시의 여백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언어가 전해주는 심해의 깊은 소리와 우주의 저 너머는, 더 넓은 상상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일찍이 노자老子가 말했습니다. “소박한 본바탕을 드러내고 껴안으며,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망을 줄여라.” 채송화의 소박함이 노자의 말씀을 닮아 예쁘게 꽃피기를 소원해 봅니다. ─ 여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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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채송화 동인지 펜이지요...
창간호 부터 가지고있는....
작고 낮은,詩의 씨앗을 뿌리는 운동이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