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익은 문절공 김담(金淡)의 현손인 김윤의의 2남으로 자가 택지(擇之), 호가 두암(斗巖)이다. 1612년(광해 4)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영원 군수·한성부 서윤·해미 현감 등을 역임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으면서 “우리 선조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으로부터 나의 대에 이르기까지 세 갑(180년)을 지났음에도 묘에 비석이 없으니 어찌 후손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고 스승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을 찾아 가 두세 번 간청하였다. 그 뒤 여러 해 만에 스승에게서 김담의 신도비문을 받아서 비석에 새겨 세우니 주위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
또한 김담 이하 4대의 분묘에도 묘표가 없었는데, 그는 자신의 재물로 세계(世系) 손록을 서술하여 모든 비석을 세우고, “평소에 소원하던 일이 이제야 이뤄졌으니 나의 뜻이 거의 성취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했다.
김우익은 1639년 병환으로 누워 가족들이 약을 권했다. 그러나 “우리 선대의 향수가 모두 60을 넘기지 못했는데, 나의 나이 이미 70에 임박했으니 이 역시 만족한 일이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거늘 무엇 하려고 약을 먹으리요.”하면서 약을 먹지 않고 같은 해 10월 15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버렸다.
김우익의 손자 김종호(金宗灝)는 자가 심원(深源), 호가 함집당(咸集堂)으로 외조부 학사 김응조에게 수학하여 1660년(현종 1)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남의 딱한 사정을 알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노봉 김정과 권상일의 제문에 그의 인품이 잘 나타나 있다.
김우익의 증손자 김만주는 자가 중능(仲能)으로 1681년(숙종 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90년(숙종 16)에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정랑·승문원 교리·사헌부 지평·강원 도사 등을 역임했다.
김방은 자가 거경(巨卿), 호가 쌍암(雙岩)으로 1729년(명조 5)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1738년(영조 14)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성균 전적·예조 좌랑·병조 좌랑·선전관·성균 사예·강원 도사를 지냈다. 1754년(영조 30) 함경 도사, 1577년 사간원 정언, 1579년 자인 현감을 지냈다.
김방의 아들 김한련은 자는 유탁(幼擢), 호는 창랑자(滄浪子)이다. 그는 통덕랑에 올랐으며 문행이 있어 지역사림으로부터 추증을 받았다.
김석규(金碩奎, 1826~1883)는 자가 덕문(德文), 호가 치암으로 영남만인소의 소수였다. 그는 1880년 11월 1일 영주향교에서 만인소 관련 통문을 발송하고, 11월 26일 안동에서 영남유림 800명이 모여 영남만인소를 행할 때 이만손(李晩孫)과 그의 이름을 가장 앞에 적어 올렸다. 1881년 2월 3일 경기도 시흥 사자암에서 척사소를 작성했다. 3월 6일 영남만인소 3차 소수로 추대된 후 같은 달 16일 형조에 연행되었다. 3월 17일 덕천에 유배된 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영남만인소를 이끈 실질적인 소수였으며, 당시 대표적 학자이자 선비였다. 저서로 『서천록(西遷錄)』, 『도설잡기(圖設雜記)』, 『호전찬요(胡傳簒要)』, 『치암집(恥庵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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